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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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보이 2005-05-30 03:03:12
+0 740
요즘에야 미시 역사에 관한 다양한 책들이 나오고 있어 관심 가는 분야의 소소한 궤적들을 만족할 만큼 추적할 수 있지만, 내가 막 책을 읽기 시작할 무렵에는 거대 담론만 창궐할 뿐 사적이고 은밀한 부위를 긁어주는 책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 중에 당시 윌 듀란트의 책들은 그나마 그런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보고와도 같았달까. '철학 이야기', '문학 이야기' 등.

철학자들의 사적 삶을 조명하고 있는 그 '철학 이야기'에 나오는 한 대목. 칸트와 단추에 관한 이야기는 아직도 내 머릿속에 또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우산을 들고 산책해서 농부들에게 시계 노릇을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말해주듯 칸트는 지독한 편집증을 가지고 있었다. 단추 구멍 일화 역시 일련의 편집증에 얽힌 칸트의 삶을 조명해준다. 칸트는 대학에서 강의를 했는데, 그는 강의 시간에 늘 어딘가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칸트는 이상하게 안절부절하지 못한 채 땀을 흘리며 말을 더듬거린다. 도저히 강의를 진행하지 못할 만큼.

이유인즉슨, 앞줄 세 번째 앉아 있는 학생의 웃옷 단추가 떨어졌던 것. 늘 그 단추를 바라보며 강의를 해오던 칸트에게 그 단추의 부재는 방향 감각이 원천적으로 상실되었음을 의미했을 터, 종내 칸트는 그 날 강의를 하지 못했다.

정신분석학의 도식에 따르자면 칸트의 단추로 예시되는 '편집증'은 이드id의 과도한 요구에 맞서기 위한 자아의 생존 전략이다. 늘 걸레로 방바닥을 민들민들 닦아야 직성이 풀리는 주부는 무질서와 더러움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의식적으로 제어하기 위한 강박을 만들어놓는 것이며, 보도 블럭의 금을 밟지 않으려 애쓴다거나 집 근처 두 번째 전봇대를 꼭 손으로 짚고 지나야 하루의 안전을 보증받는다고 믿는 소시민 샐러리맨의 징크스 역시 자유에 대한 무의식적 갈망을 조직적으로 제어하고자 자신의 자아에 성격 갑옷을 덧씌우는 것이다. 징크스에 시달리거나 편집증이 있는 사람은 지독한 고집, 즉 자아의 방어기제가 발달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대로 이런 부류의 인간들은 깨지기도 쉬워 금방 상처를 입기도 한다.

헌데 정말 그런 걸까? 정-반-합의 변증법 도식을 갖고 있는 정신분석학은 행위와 사물의 질서 바로 그 이면의 그늘을 훔쳐보는데 장점을 보유하고 있지만, 일상생활과 맺고 있는 자아의 탄력도를 측정하는데 여전히 애매한 구석이 많다.

나 역시 칸트의 단추 구멍과 같은 편집증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예를 들면 똥도령 현진 군이 촬영 때 늘 입고 다니는 국방색 바지(여름용, 겨울용)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촬영장에서 금새 안절부절하지 못한다든지, 타인과 대화 도중 특정 단어가 튀어나올 경우에는 참을성을 곧바로 상실하든지 하는 독특한 버릇이 있다. 이 버릇들은 '말, 사냥개, 여자' 이야기를 하지 않는 영국 남자들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영국 문화를 극도로 혐오했던 쇼펜하우어처럼 어떤 이데올로기 도식에 따른다기보다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가 알싸하니 반응하는 알레르기 같은 현상들이다.

대체로 이런 성격 특징을 보유한 자들은 일상 생활의 풍경 위에 자신의 성격을 새겨놓는 바, 존재론적 안위감에 극도로 민감한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들이다.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소심한 사람은 외부로 통하는 자아의 통로가 좁다. 그리고 이 좁은 자아의 통로를 지닌 자들은 갑자기 엉클어진 일상 생활을 견뎌내는데, 예상 외로 빠른 신축성을 지닌다. 상황에서 도피하든가 아니면 빠르게 응축되어 또다른 자신만의 공간을 재설정하는 것. 그만큼 난데없이 엉클어진 일상의 단면을 견뎌내지 못한다. 난 예상되거나 약속되지 않는 일상의 헝클어짐을 참아내지 못한다.

이를테면 세 번째 학생의 단추로부터 배신을 당한 칸트는 분명 강의실 공간의 또다른 점유물로 자신의 편집증 대상을 곧바로 옮겨갔을 것이다. 또다시 배신당하지 않기 위하여.

이 세상에 일상의 징크스를 보유하지 않는 자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깨지거나 흩어진 징크스에 대한 반응의 차이만 존재할 뿐.

2004-09-22



미상불, 연애조차 이 단추와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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