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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ernews 2004-12-29 23:2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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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목모임과 인권운동의 연결고리 찾길 - 하나꼬 기자

12월 초 토요일, 내가 함께 하는 30대 중반 이상의 레즈비언들이 모이는 커뮤니티의 정기모임이 있었다. 석 달만의 오프 모임이었고 그 동안 신입회원들도 많이 늘어서 분위기 걱정을 했었는데, 참석자들은 대체로 만족하는 듯 했다. 명색이 운영자여서 커뮤니티의 분위기나 정모의 프로그램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30대 중반에서 40대까지 모임이다 보니 나름대로의 특색이 있다. 우선 제주도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 회원을 포함해 많은 참석자들이 지방에서 온 여성들이었으며, 그녀들이 모두 밤샘 대화에 참여했을 정도로 경제적 시간적 여유를 낼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딱히 연고도 필연도 없이, 초면의 낯섦도 너머 단지 이해 받을 것 같은 막연함과 절심함만으로 서로의 속내를 터놓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있는 것이다.

대체로 그들은 최근에 커뮤니티 활동을 시작했거나 자신과 같은 레즈비언들을 지방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소위 “애인”을 만날 욕심(?)보다는 신뢰할 만한 사람 하나를 끈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레즈비언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 모인다.

30, 40대 레즈비언들의 삶의 이력

우리 커뮤니티의 경우 30대 중반 이상이라는 기준 말고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기혼과 비혼과 이혼(한바탕 논쟁거리였던 기혼과 비혼 레즈비언 사이의 괴리는 나이 탓인지 별로 없다), 직장인과 사업가와 자영업자와 공무원과 교육자와 전업주부와 인권활동가와 정당인에 자칭 백수까지(구태여 언급을 하자면 같은 연령대의 일반 여성들에 비해 훨씬 독립적이다), 성적 지향을 주요 이유로 외국의 섬들을 떠돌다 마흔이 되어 역시 인연 없는 섬 제주도에 정착해보기로 한 사람부터 서울 토박이 깍쟁이까지, 이제 막 성정체성을 고민하기 시작한 사람부터 이미 중학교시절부터 30년 가까이를 떠돌며 혹은 기를 쓰고 뿌리내리며 성소수자로 버텨온 사람들까지, 자칭 “왕부치”에서 “전천후”까지. 다양하고 발전적인 공동체성을 위해 특성별 모임도 생각해야 하겠지만 우선 “중장년의 여성성소수자”란 이유만으로도 모일 이유는 충분하다.

정모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모텔 방에서의 밤샘 대화다. 먹고 노는 시간을 통해 처음 만난 사람들 사이의 서먹함을 지우고 나면, 크지 않은 방 하나를 얻어 십여 명의 회원들이 아무렇게나 둘러앉는다. 혹 두 세 개의 무리로 나누어지기도 하고 때론 한 사람의 이야기에 모두가 집중하기도 한다. 그 중 누군가가 졸리면 옆자리를 조금씩 비껴 몸 누일 자리만 비워주면 된다. 자다가 깨서 뜬금없이 대화 줄거리를 자르고 끼어들어도 별 핀잔 없이 복습까지 해주며 이야기에 끼워준다.

30대 중반 이상의 모임이어서일까? 여성성소수자란 공통점 하나만으로, 세상 어디서도 털어놓지 못한 채 들어 줄 친구를 찾아 묻어두었던 자신들만의 허스토리를 어렵지 않게 풀어놓는다. 나더러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선수라며 핑계를 대지만, 그건 말 그대로 핑계다. 이미 그녀들은 자기 속 이야기를 끄집어 낼 준비를 하고 왔다. 함께 둘러앉고 싶은 사람들과 자리만 깔고 앉으면 되는 것이다. 내 이야기가 간절한 만큼 남의 이야기에도 피붙이마냥 아프고 진지하다. 더 캐묻지 않고 이야기하는 그만큼만, 때론 조심스레 질문하고 하나 더 속에 것을 꺼내며.

마흔 살 전후를 사느라 그럭저럭 이력도 나서 풍파를 피할 요령들도 나름대로 있고 혹 어떤 벽과는 부딪쳐버릴 용기도 내자면 못 낼 것도 없다. 환경과 성격이 생판 다른 사람들과도 섞일 줄 알고, 동성애자 인권 운동하느라 고생하는 후배들에게도 미우나 고우나 마음도 물질도 내어줄 줄 안다. 흩어진 채 소통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외로워 봤기에 자신들을 대변하고 모아주고 정보를 나누어 줄 단체와 활동가들의 필요성과 수고를 그들은 알고 있다.

인권운동의 소중함을 안다

일반들의 세상에서 한두 달에 한번 이반끼리 모여 밥 먹고 술 먹고 노는 일이 절실한 만큼, 여전히 익명으로 존재하는 여성성소수자들의 자긍심과 인권을 위한 실명의 저 간판들이 절실하다는 것도 그들은 경험적으로 안다. 익명으로 살아온 만큼 다음 세대의 실명을 위해 자신들을 조금씩 내어 줄 준비가 되어 있다.

이성애자? 그들에게조차 이젠 상처 받을 일도 피 튕길 일도 별로 없다. 생긴 대로 살아왔듯 마저 살면 되는 것이다. 사랑? 그래! 사랑이라면. 사랑이라면 제대로 한번씩 하고 싶어한다. “사랑 때문에” 스스로를 분류하고 세상에서 분류된 사람들이니.

여성에 동성애자에 인권운동까지 세 개의 사나운 팔자를 뒤집어쓴 채 팔팔한 시절을 소수자로 존재한다는 것은 날을 시퍼렇게 세워 상대와 주변과 나 모두를 찔러대는 것일 수 있다. 막강한 상대는 끄덕 없고 칼 쥔 사람과 주변 사람만, 우리들만 피를 줄줄 흘릴 수 있다. 더없이 안타까운 것은 그 아픔으로 혹은 개인 존재의 절박함으로 선후배간의 인맥이 끊어지고 활동의 성과도 축적되지 못한 채, 또 다른 새로운 소수만이 진이 빠지도록 맨 땅에 헤딩을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쉰을 바라보며 소수자로 산다는 것은 싸움을 피하기도 하겠지만 필요한 싸움을 골라 힘을 모을 의지와 여유가 있다는 것이며, 적어도 주변의 상처를 보듬을 줄 안다는 것이다. 게다가 나이 값을 한다는 것은 사회의 다른 소수자들도 눈에 들일 줄 알고, 여성성소수자 내의 다양한 소수자들(장애인, 기혼, 이혼 가장, 트랜스젠더, 실업자, 고령자, 청소년)에 대해서도 옹호할 줄 안다는 것이다. 아직 인식이 부족할 뿐 그들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다.

다만 그들의 다양한 생활현장에서 여성성소수자 인권운동과 편하게 접속할 수 있는 다양한 연결고리들이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수고하고 있는 활동가들에게는 책임을 더 주는 것이 죄송하지만, 그 연결고리를 만드는 일 또한 여성성소수자 인권운동단체들의 몫이다. 자신들의 존재와 지속의 기반을 든든히 하고 운동의 지평을 넓혀내기 위해서, 서로가 소외되지 않고 함께 희망이 보이는 싸움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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