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에 갇힌 현대인의 `자아찾기`
[헤럴드경제 2005-04-06 12:08]
동성애 매개 독신남의 정체성 혼란 묘사
모호한 문체ㆍ3인칭 시점 외로움 극대화
사랑스러운 아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과의 매일 아침운동 데이트. 아내는 바람결에 흐트러지는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남편의 동작을 따라한다. 딸은 아빠의 동작을 힘겹게 따라하다 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리고 이들의 웃음소리가 강변공원을 채운다.
행복한 가족을 떠올리는 당신의 머리 속에 담긴 `가족의 진리`가 이러할까. 최대환의 중편소설 `새드마우스의 1920년대`는 우리가 그토록 믿고 싶어하는 이런 `사랑의 진리`에 변화를 겪는 한 남성의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다.
주인공은 모습을 달리한 `진리`의 형상에 1920년대 과학자들이나 겪었을 혼란과 당혹감을 느낀다. 뉴턴 이래 고전물리학이 추구하던 절대 진리의 세계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1927)의 등장으로 맥없이 무너지던 그때처럼.
주인공의 방에서 방향을 잃고 미로 속을 헤매는 마이크로 마우스(로봇 쥐)는 그의 투영체와 다름없다. 출구 없는 미로 탓일 수도 있고, 익숙해진 미로를 벗어나는 데 대한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는 쥐의 `헤맴`에서 주인공은 과거의 상처를 떠올리고 괴로워한다.
"널 만났을 때, 난… 나 스스로를 1920년대를 겪는 과학자 같다고 느꼈어." 소설 끝자락에서나 설명되는 그의 `미로`는 키가 큰 한 남자를 사랑한 성 정체성의 혼란이었다. 주인공은 결국 또 다른 동성애 여성 커플을 만나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며 가족에 대한 그만의 진리를 정립해나간다. 작품에선 동성애가 주요 소재로 작용하지만, 이는 단지 삶의 곳곳에서 혼란을 야기할 진리의 다양한 형태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른바 `1 더하기 1`이 돌연 3으로 느껴질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을 `고독의 방`으로 안내할 진리는 주변 어디에도 있을 수 있다.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어색하게 느껴진다면, 깊이 자리잡은 진리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당신도 미로 속을 헤매는 새드마우스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진리의 가변성 때문인지, 소설 곳곳에선 독특한 문체가 발견된다. `이렇거나 혹은 저러하다.` 작가는 장면 장면을 묘사하면서 단정적 기술을 최대한 지양한다. `키 큰 남자`, `하얀 얼굴의 여자`처럼 외부 묘사도 3인칭의 관찰자 시점을 유지한다.
서울대 불문학과에서 석사과정을 밟던 중 현대 프랑스 소설의 한 유파인 `누보 로망`의 영향을 받은 작가는, 이 같은 기법을 통해 독자들에게 스스로의 `진리 구성`을 맡기는 게 아닐까. 이제 소설 속 주인공과 쥐의 `미로 탈출기`를 엿볼 차례다. 변화된 환경에 적응키 위해 작가가 내세운 `낯선 도시에 스며들어 사는 법`을….
정순식 기자(sun@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