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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동정(同情)’에서 비롯된 사랑, 여학생 동성애
남성으로부터 배신당한 상처 위로하다 연애로 발전
흔했었지만 현실의 벽… 명문가 여성 情死 큰 파문


[조선일보]

1931년 4월 8일, 세련된 양장을 차려 입은 신여성 두 명이 영등포역에서 하차했다. 두 손을 꼭 잡은 그들은 마치 소풍 나온 소녀들처럼 행복해 보였다. 오후 4시 45분, 인천발 서울행 428호 열차가 오류동역을 떠나 경부선 분기점에 이르렀을 때, 두 여인은 서로를 껴안은 채 질주하는 열차를 향해 몸을 던졌다.


정사(情死)였다. 세브란스의전 교수 홍석후의 외동딸 홍옥희(21세)와 비행사 심종익의 아내 김용주(19세). 홍옥희는 작곡가 홍난파의 조카딸이었고, 김용주는 부유한 서점 주인 김동진의 딸이자, 동막(東幕, 마포구 대흥동) 부호 심정택의 맏며느리였다. 이런 명문가 여성의 동성애 정사(情死)는 엄청난 사회적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두 사람은 동덕여고보 3학년까지 함께 다닌 친한 친구였다. 3학년이 되던 해, 김용주의 부모는 17살밖에 안 된 어린 딸을 억지로 시집보냈다. 당시 여학교는 교칙으로 재학생의 결혼을 금했다. 김용주는 시집가기 싫다고 부모에게 애원하고, 더 공부하게 해달라고 선생님 앞에서 울며 호소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김용주의 결혼생활은 불행했다. 휘문고보를 다니던 심종익은 결혼 직후 아내를 남겨둔 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귀국 후에도 아내를 돌보지 않고 유흥가를 전전했다. 그 사이 홍옥희도 오빠의 소개로 만난 연희전문 학생과 연애를 시작했다가 실연의 아픔을 맛보았다. 애인은 소문난 바람둥이였다.


남편과

애인에게 배신당한 두 여인은 서로를 깊이 동정하며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홍옥희는 수시로 김용주의 집을 찾았다. “정말 너하고 떨어져서는 하루가 안타깝구나! 네가 이 집 첩으로 들어와서 같이 살자꾸나! 그러면 날마다 떨어지지 않고 서로 같이 지내지 않겠니?” “어찌 첩으로야 올 수 있니. 세상 창피해서. 그 대신 너의 집 부엌 어멈으로 들어오면 날마다 한 집에서 지내고 그게 좋지 않냐?” 상처받은 두 여인의 우정은 어느 순간 사랑으로 바뀌었다.


두 여인은 사랑하지만 함께 살 수 없는 현실을 비관해 정사를 결심했다. 홍옥희는 부친에게 “세상은 허무합니다. 불초여식은 먼저 갑니다. 아버지 언제나 정의의 길을 걸어주세요”라는 유서를 남긴 채 애인 김용주와 함께 짧은 생을 마감했다.


1930년대 여학생들 사이에 동성애는 이성애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동성애와 관련된 이야기도 금기시 되지 않았다. 소파 방정환이 주관하던 잡지 ‘별건곤’은 중외일보 기자 황신덕, 이광수의 아내이자 산부인과 의사 허영숙, 기독교 여성운동가 이덕요 등 쟁쟁한 여류명사의 동성연애 경험담을 취재한 기획기사를 싣기도 했다.



‘여류명사의 동성연애기’(‘별건곤’ 1930년 11월)에서 황신덕은 “여학생시대에 동성연애를 안 해 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나도 여러 차례 경험이 있습니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허영숙은 김경희, 배영순 등 실명을 거론하며 그들과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배영순은 기숙사에 있고 나는 통학을 하였는데, 그 언니 곁을 떠나기가 싫어서 기숙사에 넣어달라고 부모님께 떼를 쓰기도 했습니다. 언니가 다른 사람과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는 너무나 성이 나서 하루는 그 언니를 붙잡고 마음껏 울고는 그 사람을 거절하지 않으면 죽겠다고 한 일도 있었지요.” 그러나 졸업 후 허영숙과 배영순은 각자 사랑하는 남성과 결혼해 행복하게 살았다.


당시 여학생 사이에 만연된 동성연애는 요즘 생각하는 동성애의 성적 취향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 시절의 동성 연애는 상대에 대한 깊은 동정(同情)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이성과의 자연스러운 교제를 가로막는 사회적 분위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기성세대는 가급적 남학생과 여학생을 갈라놓으려고 노력했다. 여성들끼리 모여 있으니 여성들끼리 사랑하게 되는 게 너무나 당연했다. 같은 맥락에서 남학생들 사이의 동성연애도 드물지 않았다.


동성연애 유행의 근본 원인은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있었다. 자유연애가 도입된 지 한참이 지났어도, 남성은 여전히 여성이 ‘순결’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동정(童貞)이니 순결이니 하는 말은 남성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남성은 ‘가볍게’ 연애를 걸었지만, 여성은 ‘심각하게’ 연애를 생각해야 했다.


온갖 감언이설로 사랑을 구걸하다가도 일단 구애에 성공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여성을 함부로 대하는 게 한국 남성이었다. 그 때문에 생리적으로는 남성에 끌리더라도, 남성을 믿지 못해 동성을 사랑하게 되는 여성도 적지 않았다. 결국 여학생이 동성에게 끌렸던 것은 남성이 제구실을 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전봉관·KAIST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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