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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팡 테리블> 장 콕토 지음.오은하 옮김. 뿔 펴냄. 95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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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들)이란 오늘날 특정 분야에서 어른 뺨치게 놀라운 능력을 보이는 젊은이를 가리키는 숙어로 흔히 쓰인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의 기원은 프랑스의 시인 겸 소설가 장 콕토(1889~1963)의 동명 소설(1929년작)로 거슬러올라간다. “내 귀는 소라 껍질/ 바다 소리를 사랑한다”(<귀칸 5> 전문)의 그 콕토 말이다.
콕토는 시와 소설뿐만 아니라 평론, 연극, 영화, 그림 등 예술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영화에 대한 그의 기여는 그가 디자인한 칸영화제의 종려나무잎 로고로 남아 있다. 그가 자신의 문하생이자 동성 연인이기도 했던 레이몽 라디게(1903~1923)가 요절한 뒤 자기 학대와 아편으로 고통을 달래다 요양원 신세를 지게 되고, 아편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3주 만에 쓴 소설이 바로 <앙팡 테리블>이다.
<앙팡 테리블>의 중심 인물은 사춘기의 두 남매 엘리자베트와 폴. 열네 살짜리 중학 자퇴생 폴과 그보다 두 살 위인 누나 엘리자베트는 부모님이 차례로 돌아가신 뒤 둘만 남는다. 가정부 할머니의 너그러운 보살핌 아래 일종의 ‘독립’을 구가하는 그들의 집에 역시 고아인 폴의 친구 제라르가 들어온다. 어른들의 간섭에서 자유로운 이 무중력의 공간에서 세 아이들은 자기들만의 놀이에 빠져든다.
“별난 사람들과 그들의 반사회적인 행동은 그들을 추방한 다원적인 세계에는 하나의 매력이다. 하지만 점점 사람들은 이 비극적이면서도 유쾌한 영혼들이 호흡하는 태풍의 무서운 기세와 속도에 놀라 괴로워하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처음에는 어린애 같은 행동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장난으로밖에 보지 않는다.”(83~84쪽)
장 콕토의 문장은 뜻밖에도 논리적이고 분석적이다. 아편 중독과 자기 학대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나저나 아이들의 놀이 혹은 장난이란 무엇? 설명을 위해서는 소설의 첫 장면으로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아직 학교에 다니던 시절, 허약한 폴은 동무들 사이의 눈싸움에 휘말렸다가 입과 가슴을 연달아 눈뭉치에 맞고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그를 쓰러뜨린 것은 그가 우상처럼 숭배하는 학교의 우두머리 다르즐로이고, 쓰러진 그를 부축한 것은 남 몰래 그를 흠모하는 동급생 제라르다. 달려온 학생주임에게 제라르는 다르즐로가 눈뭉치 안에 돌멩이를 넣었노라 고발하고, 그런 제라르를 향해 폴은 “너 미쳤어?”라고 항의한다.
애정을 욕설로 위장하는 남매
“왜냐하면 폴이 다르즐로를 좋아하는 것처럼 제라르가 폴을 좋아하도록 만든 폴만의 특별한 매력은 그의 허약함이었기 때문이다. 폴의 시선이 불꽃 같은 다르즐로 녀석에게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심성이 곧고 강한 제라르는 폴을 지켜보고, 감시하고, 보호하며 그 불꽃에 타지 않도록 막아줄 작정이었다.”(21쪽)
다르즐로-폴-제라르로 이루어진 애정의 삼각형은 제라르가 폴 남매의 집으로 들어오면서 변형을 겪는다. 학교 시절 폴을 사랑했던 제라르는 이제 사랑의 대상을 엘리자베트로 옮긴다. 그런데 폴과 엘리자베트는 단순한 남매 사이를 넘어 거의 쌍둥이 또는 그림자 같은 애증의 관계를 맺고 있다. 제라르는 일종의 침입자였던 셈.
“이 방은 그들(=폴과 엘리자베트)이 한 몸을 가진 두 사람처럼 생활하고, 씻고, 옷을 입고 하는 거북이 등껍질 같은 곳이었다.”(39~40쪽)
미성숙하고 불안정한 남매는 서로에 대한 애정을 거친 욕설과 몸싸움으로 위장한다. 그들은 일과를 치르듯 다투고 토라지며 서로를 저주한다. 관찰자이자 조연인 제라르까지 더해서 기묘한 애정의 공동체를 이룬 세 아이는 휴양지에서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자신들보다 어린 아이들을 놀려 주는 등의 장난을 즐긴다. 그렇게 무위의 세월은 흘러간다. 폴과 엘리자베트는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겉으로는 증오하는 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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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들)이란 관용어를 낳은 장 콕토의 소설 <앙팡 테리블>은 소년에서 성년으로 넘어가는 불안정한 시기를 다루었다. 사진은 에드바르트 뭉크의 그림 <사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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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배수아 작품 떠올리게 해
“미래를 위한 계획, 공부, 직책, 정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 등은 호강하는 개가 양 지키는 일을 신경 쓰지 않듯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신문에서 그들은 범죄 기사를 읽었다. 그들은 틀을 흐트러뜨리는 종족, 뉴욕과 같은 병영에서는 퇴역당하고 파리에나 가서 살아야 할 그런 종족에 속했다.”(86쪽)
이 영원한 어린아이들의 무리에 또 하나의 ‘아이’가 합류한다. 그새 모델 일을 하게 된 엘리자베트의 직장 동료 아가트가 그다. 중요한 것은 아가트가 폴의 첫사랑이었던 다르즐로를 닮았다는 것. 이제 사랑의 삼각형은 사각형으로 진화(?)한다. 제라르는 여전히 엘리자베트를 사랑하지만, 폴은 새로 등장한 아가트를 사랑하고 아가트 역시 폴을 사랑한다. 폴과 엘리자베트의 사랑/증오는 여전하다.
이런 상황이 끔찍한 파국으로 치닫기 전, 모순이 부드럽게 해소될 여지가 없지는 않았다. 엘리자베트가 미카엘이라는 부유한 유대인 청년과 결혼한 것. 그러나 새신랑이 첫날밤을 치르기도 전에 자동차 사고로 숨지면서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동안 잊고 있던 다르즐로가 제라르를 통해 폴에게 독약 한 덩이를 건넨다. 이번의 ‘선물’은 지난날 그를 쓰러뜨린 눈뭉치 이상으로 치명적이다. 폴과 아가트의 사랑을 질투한 엘리자베트는 거짓과 모략으로 둘 사이를 떼어 놓고 아예 아가트를 제라르와 결혼시키며, 뒤늦게서야 진실을 알게 된 폴이 다르즐로의 독약을 삼키자 엘리자베트 역시 권총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쏜다.
파국으로 마무리되는 소설의 결말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상시킨다면, 폴과 엘리자베트의 치명적인 사랑은 <폭풍의 언덕>을 떠오르게도 한다. 한국문학으로 시선을 돌리면, 미성숙한 ‘어른 아이’를 즐겨 다루었던 배수아씨의 초기 소설들이 생각나기도 한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로 시작되는 이상의 시 <오감도제1호>는 어떨까. 시의 중후반부쯤에는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라는 표현도 보이거니와, ‘무서운 아이’가 곧 ‘무서워하는 아이’라는 통찰은 정확히 <앙팡 테리블>의 핵심을 짚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 가엾은 아이들은 무엇보다 삶과 세계가 무서웠던 것. 그 무서움이 거꾸로 남들을 무섭게 만드는 식으로 나타났던 것. 1910년에 태어나 1937년에 요절한 이상은 장 콕토의 소설을 읽었거나 적어도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오감도제1호>를 <앙팡 테리블>과 관련해서 읽어 보는 독법은 어떠할까. 엉뚱한 상상일까.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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