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나카시마 테츠야
출연 : 나카타니 미키(카와지리 마츠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과 동성애 우울증
마츠코(나카타미 미키 분)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결국 마츠코의 집에 다다르는 엔딩신은 인상적이다. 마츠코의 일생들, 남자들, 규범들을 지나 집으로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만나고 결국 처음으로 돌아가 만나는 사람은 여동생이다. 마츠코는 결국 동생에게 돌아갔다.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마츠코는 그 불행하고(아니 행복했나?) 혐오스런 일생의 시작인 그 상실에서 회복하면서 일생을 마친다. 이런 반전이! 영화 내내 마츠코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다고, 그래서 그렇게 외롭다고 생각하게끔 해놓고 마지막은 아버지도 아니고 동생에게 돌아가다니.
마츠코의 주체성 형성의 가장 근저에는 동성애에 대한 상실, 즉 동생과의 사랑을 금지한 이성애 규범에의 복종이 있다. 주디스 버틀러는 사람은 태어나는 동시에 규범에 의해 호명되면서 주체가 된다고 한다. 탄생과 함께 몸조차도 규범담론에 의해 호명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는 비체인 것이다. 남성-여성으로 태어난 몸인 것이 아니라 남성-여성으로 호명된 몸인 것이다. 젠더 정체성의 형성은 이성애 규범 담론의 호명에 복종하면서 성립된다. 버틀러는 이 과정을 이성애 규범을 불완전하게 합체하는 ‘우울증적 동일시’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우울증은 상실한 대상을 애도하지 못하고 자아 안에 또다른 자아로 동일시하면서 발생한다. 애도하기 위해서는 상실한 대상이 분명해야 하는데 이성애 규범의 사회에서 동성에 대한 상실은 허락되지 않았기에 명명할 수도 없는 상실이다. 그렇기에 동성은 애도될 수 없고 거부의 형태로 자아 안에 남아있게 된다. 여성을 사랑한 사람은 여성을 향한 사랑을 거부함으로써 여성과 동일시해 이성애자 여성이 된다. 복종은 이중적이라 복종은 피지배인 동시에 주체화이다. 권력에 지배받지 못하면 주체가 되지 못한다. (이성애) 사랑을 하지 않으면 비체가 된다. (무섭지!) 그렇기에 이성애는 권력이고, 우리는 이성애를, 이성애 규범에 대한 복종을 열망케 된다.
마츠코와 여동생 쿠미(이치카와 미카코 분)와 아버지를 둘러싼 삼각관계는 아버지의 사랑을 서로 받기 위한 오이디푸스의 관계이다. 하지만 아버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동생과의 사랑을 거부해야 한다. 마츠코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츠코와 아버지의 사랑은 불완전하다. 동생이 완전하게 거부되지 못하게 때문이다. 이성애 규범에 의해서 ‘여성’이 된 ‘주체’들은 이제 각기 남성을 찾아서 떠나며 이성애 규범에 복종해야 하는데 마츠코의 상실의 대상은 동생 쿠미는 몸이 약해서 떠나지도 않고 다른 사람을 만날 수도 없다. 쿠미는 규범에 따라 주체가 되지 못하고 마츠코와 관계에 머물러 있다. 마츠코가 떠날 때마다 쿠미가 죽으라고 붙잡는 모습과 쿠미가 죽을 때까지도 마츠코를 기다려온 것은 쿠미가 여전히 마츠코와의 동성애 관계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준다.
대상인 마츠코가 계속 머물러 있기 때문에 마츠코의 동성애 거부는 더욱 힘들고 그녀는 더욱 심한 거부와 더욱 강력한 상실의지(!)를 가져야 하고 그녀는 점점 더 심한 우울증 환자가 된다. ‘너 따위 하나도 불쌍하지 않아’는 것은 ‘너 따위 하나도 사랑하지 않아’라는 말인가. 그렇게 울부짖으며 쿠미를 거부하고 주체가 되려는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비체로 만드려는 쿠미를 죽이려고도 한다. 주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남자를 사랑해야 한다. 마츠코의 이성애가 실패하고 자신이 비체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처하자 마츠코는 결국 쿠미의 곁을 떠나 사랑을 하기 위한, 주체가 되기 위한, 이성애 규범에 복종하기 위한 일생의 길을 떠나게 된다.
버틀러는 가장 이성애를 갈망하는 이성애자 여성이 가장 심한 레즈비언 우울증 환자라고 말한다. 아아, 남자만이 나의 행복이고(Happy Wednesday~!) 사랑만이 삶이라는(Love is life) 마츠코만한 이성애자 여성이 어딨을까. 누구든 쉽게 사랑에 빠지고 언제나 사랑을 믿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주는 사랑에 합당한 사랑을 받아서 ‘이성애자’가 되고 싶어하는 마츠코는 여동생을 죽여서라도 그 사랑을 끝내고 싶어하는 레즈비언 우울증 환자 마츠코다!
마츠코는 권력에 완전 복종해서 우울증을 넘어서고 싶지만, 이성애를 반복수행한다고 해서 우울증은 치료되지 않는다. 어긋날수록 더 이성애하고 싶지만 우리는 완전해질 수 없다. 이성애를 해서는 이성애를 강제하기 때문에 생기는 우울증을 극복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하고 싶다. 비체화되는 건 두렵기 때문에. 아니 내가 내 주체성을 갉아먹을 수 없기 때문에. 버려도, 맞아도, 몸을 팔게 해도, 죽여도, 대답하지 않아도, 차이고 차이고 또 차여도 혼자인 것보단 괜찮아, 비체가 되는 것보단 괜찮아.
이런 마츠코의 ‘주체화 복종’을 방해하는 존재가 또 나타나니 친구인 메구미다. 그녀와 함께라면 정말 즐겁고 행복하지만 그녀는 이미 ‘사랑’하고 있지 않는가. 마츠코는 그 규범의 세계에 메구미와 행복하게 공존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녀의 남편이 있는 그녀의 집, ‘규범의 집’에 들어가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메구미를 떠나고 류와 사랑한다. 비체가 될 뻔 했던 그 공포를 떠올리면서 자신을 자책하면서 다시는 비체가 되지 않겠노라며, ‘이 남자와 함께라면 지옥이라도 가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메구미에게 또 다시 나타나 나의 주체의 불안정함을 드러내게 하지 말라고 한다.
류(이세야 유스케 분)와의 사랑도 끝난 후 마츠코는 주체되기를 포기한다. 사람과 이야기하지도 않고 그렇게 열심이던 근력 운동도 하지 않고 그저 먹고 자고 목숨만을 이어간다. 그녀는 비체가 되어간다. 그녀는 더럽고 냄새나고 혐오스러운 비-주체가 된다. 마츠코의 혐오스러움은 이성애 규범의 결과이다. 혐오스런 (이성애 규범에 복종하는 주체) 마츠코의 일생이다!
마츠코는 류나 여하 그가 사랑했던 다른 남자들이 아니라 동생을 떠올리면서 다시 살아갈 희망을 얻는다. 내가 보듬고 애도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동생을 애도하게 됨으로써 다시 밑도 끝도 없는 우울증을 극복하고 새로 살아갈 의지를 갖게 되는 것이다. 명명할 수 없는 상실을 명명함으로써 치유가 된다. 다시 명함을 찾으러 나간 마츠코의 갑작스럽고 어이없는 죽음은 규범을 따르지 않는 비체를 추방하려는 사회 규범을 보여준다. 전복적 주체가 만들어지는 그 순간 마츠코는 추방된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다층적인 이야기 구조를 갖고 많은 해석의 여지를 만든다. 그러면서도 이야기의 흐름을 잃지 않는 것은 훌륭한 연출 덕분이리라. 마츠코의 일생을 류처럼 성모와 같은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한 결핍한 여성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또다른 많은 해석이 있으리라. 극단적이면서도 전형적인 한 여성의 일생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혹은 ‘혐오스럽다’는 수식을 어디에 붙일 것인가 자체가 이미 이데올로기적인 다툼이다. 그녀를 그저 남자를 위해 모든 것을 퍼준 여성으로 보고 싶어하는 ‘이성애 규범’의 ‘주체화 복종’에서 우리도 이미 자유롭지 않다. 아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