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는 '상식'도 '비상식'도 없다
[오마이뉴스 2006-02-26 17:14]
[오마이뉴스 지용진 기자]
▲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포스터
ⓒ2006 FOCUS FEATURES
자크 데리다를 기억한다면, 그래서 그가 강조한 '차이'를 인정한다면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은 그리 불쾌한 영화는 아니다. 비록 소재의 특성이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그것 때문에 비틀어서 보는 것은 옳은 관점이 못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사람들은 지독히도 편협하다. 자신들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틀리다'로 간주해 버리는 몹쓸 논리로 타자(他者)를 몰아세우기 일쑤다. '다름'을 그 자체로 인정하지 못하는 몰이해. 감독으로서의 이안은 영화를 통해 그 모든 것을 포괄하려 한다.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을 지배하는 내재율은 '잔잔함'이다. 넘쳐흐르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평정 그 자체. 영화가 선사하는 대자연의 풍광은 관객의 감정을 한결같이 유지시키는 균형감과 맞물리면서 더욱 빛을 발한다.
마치 그릇에 담겨있는 물의 고요함과 같은 이치다. 넘칠 듯하면서 넘치지 않는 그릇(영화) 속의 물(스토리)은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며 조용히 관객의 가슴에 스며든다. 관객의 동의를 얻을 때쯤, 자신도 그 '인정'에 의아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미 몰입의 차원을 넘어선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브로크백, 세상 그 위의 공간
▲ 융화와 포용의 이미지로 그려진 '브로크백'은 세상 그 위에 있다.
ⓒ2006 FOCUS FEATURES
하얀 눈으로 뒤덮인 '브로크백'은 영화를 간접적으로 웅변한다. 별다른 의미부여 없이 관람만으로도 가슴 벅찬 풍경이기에 한없이 즐겁지만 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공간의 상징성을 알아채는 순간,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가 숙여지게 된다.
자기 확신에 가득 찬 사람들로 우글거리는 속세, 아무리 변형을 가해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경지가 바로 '브로크백'이다. 어쩌면 '동성애'라는 소재를 그곳에 쏟아내서 융화시키려는 감독의 의지마저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대자연의 포용력을 다시 한번 확인한 셈이다.
특히, 세월이 가한 변화만큼 주인공 얼굴에 주름이 기웃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사의 가변성을 체감하지만 자연은, 산은, 나무는 물에 비친 대칭마저도 여전히 그대로다. 한결같은 모습으로 묵묵히 인간들의 삶을 관조해 온 자연에게 우리 인간의 모습은 얼마나 얕아 보였을까? 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으로 스크린을 가득 채운 브로크백은 곧 자연과 이음동의어다.
거침없이 몰아친 사랑, 그리고 이별
처음엔, 그들도 서로를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부정하면 할수록 더 거세게 불어오는 폭풍 같은 감정은 둘을 한꺼번에 삼켜버렸다. 비좁은 텐트 안에서 몸을 비벼가며 추위를 이겨내려는 그들에게 느닷없이 들이닥친 감정은 우정이 아니라 '사랑'이었던 것이다.
개념적으로 우정과 사랑을 분류한다면 어떤 기준이 적당할까? 그 대답은 '육체'가 알아서 채워준다. 입술을 포개고 서로 부둥켜안고 한 이불을 덮는다는 것은 사랑을 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라는 점에서 기꺼이 대답의 근거가 되어준다.
자신에 대한 상대방의 감정을 확인한 그들에게도 시련은 이내 모진 현실을 통해 빠르게 다가왔다. 이루어질 수 없는, 아니 어쩌면 이루어져서는 안 될 위험한 사랑을 한다는 것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들이었기에.
애니스 델마는 어렸을 적 경험을 떠올리며 자신들의 사랑에 들이닥칠 무서운 징후를 예감한다. 일반적으로 굳어진 통념 속을 파고들어가기에는 그 껍데기가 너무 견고했다. 그리고 그 딱딱한 외부만큼이나 그 내부는 애초부터 일말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통념 밖의 가치는 곧 현실에서 점점 멀어져 갈 수밖에 없었다. 둘은 브로크백에서 공유했던 열병 같은 감정을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맡긴 채 현실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들을 갈라놓았던 공백은 4년. 그 공백만큼이나 깊었던 상처는 곧 서로에 대한 상실감으로 번져가면서 가슴 속에 커다란 공허함을 새겨놓는다. 현실에 침잠해 들어가는 자신의 내적 고통을 감당하면서 그들의 사랑을 품어주었던 '브로크백'에서의 소중했던 추억을 조금씩 꺼내게 된다. 그러나 이성에 대한 사랑으로 동성애를 극복하려 했던 의지도 결국 공허함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 둘만의 공간에서 '사랑'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2006 FOCUS FEATURES
영화의 밑바닥에 흐르는 물결은 바로 동성간의 사랑에도 열정, 슬픔, 상실 등의 정념이 똑같이 적용된다는 어쩌면 당연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도 물결을 의식해서 영화를 거북하게 평가하는 건 아무래도 일반성에 함몰된 시각적 편협함의 산물이 아닐까? 물론 그럴 경우는 드물겠지만 말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이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영화 전반을 아우르는 감독의 연출력, 탄탄한 이야기 구조와 배우들의 호연 등 다분히 복합적이지만 이 요소만큼은 꼭 언급하고 싶다. 배우들의 감정을 충실히 반영하며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감미로운 선율의 배경음악. 관객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는 애절한 리듬은 정조(情調) 형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그 감정의 폭을 조절해준다.
아마도 <브로크백 마운틴>의 목적은 동성애의 페이소스가 아니라 그동안 '비상식'이라고 여겨져 온 통념이 왜 그런 식으로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를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그래서 뚜렷한 입장을 표명하기보다는 모호하지만 묵직한 메시지를 담아 스크린을 통해 전달한다. 그 모호성을 판단하고 해석하는 것은 바로 관객의 몫이다.
자크 데리다는 "비폭력은 어떤 의미에서 최악의 폭력"이라고 말했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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