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가족의 재발견
[부산일보 2006-02-06 12:12]
"한 달에 1천만원만 벌어오면 아이를 낳겠다"라는 아내가 있다.
아내는 직장에 나가며 초등학생 두 아들을 두고 있다.
천둥벌거숭이 두 아들에 기겁한 남편은 호사스럽게도 "딸 아이를 갖고 싶다"고 말했던 터였다.
어차피 생활비만 가져다주면 가장의 책무를 다한다고 믿고,가르침을 받아온 남편이니 딸 아이 하나 더 가진들 달라질 게 없다는 생각이다.
남편의 호기에 아내는 어이가 없다.
두 아이의 한달 학원비만 100만원을 훌쩍 넘기고,빌린 집값 갚기에도 숨이 막히는 지경이니 남편의 제의는 제정신이 아닌 셈이다.
아내와 아이들을 외국에 보내고 몇년째 혼자 지내는 남편도 있다.
매달 300만원이 넘는 돈을 캐나다로 보낸다.
세끼 식사를 식당에서 해결한다.
아이 생각에 외롭고,기러기 아빠라는 놀림이 거북하지만 마음은 평온하다.
또래의 친구들처럼 학원비에 등이 휘고,명문대에 넣기 위해 아이들을 짓누르는 파렴치한 아빠는 아니기 때문이다.
"입시 지옥으로부터 해방된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그는 아이가 직장을 얻게 되면 캐나다로 들어갈 계획이다.
가장이기에,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신념에도 변함이 없다.
지난주 설을 맞아 모처럼 가족들이 모였다.
어른들은 해마다 머릿수가 줄어든다며 난리다.
몇년 전만 해도 집안에 모여든 친척들 얼굴을 익히느라 얼마나 진땀을 흘렸던가. 명절 연휴 외국으로 떠나고,스키장으로 가고,놀이공원으로 가는 젊은 부부들이 늘고 있는 것을 보면 비단 돈 때문이 아님은 틀림없다.
사정이 이러니 고향으로 가는 횟수도 뜸해지고,지척에 있는 친지들 찾아뵙기도 어려울 수밖에. 사돈의 8촌까지도 같은 가족이라고 배웠던 어린 시절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다.
가족이란 과연 무엇일까. 반드시 피를 나눈 사람들이 모여살아야 할까. 또 남편과 아내 자녀가 있어야 하는가. 하지만 현실은 이혼이 다반사며(OECD 국가 중 두번째라든가),젊은 부부들은 아이를 갖지 않고(출산율 1.16명으로 세계 최저 수준),여자끼리 서로 동거를 하기도 하는 요즈음이다.
피붙이가 곧 가족이라는 통념을 가진 할아버지 세대는 까무러치겠지만,가족의 해체(변화)는 이미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늘고 있는 독신가족이나 무자녀,입양,위탁,공동체가족은 혈연 중심이 아니다.
동성가족이나 한부모,재혼,동거가족처럼 사랑이나 친밀감,혹은 사회적 기능에 따라 모이고 헤쳐를 거듭한다.
부산 반여동에서 소년원생 20명을 키워낸 최이관(50) 이순선(51)씨처럼 핏줄보다 사랑과 정이 가족의 모체다.
가족 해체나 변화의 저변에는 경제력의 상실이 자리잡고 있다.
가장이 노동력을 상실하면서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젊은 층은 결혼을 기피한다.
설령 결혼한 부부들에게도 자녀 양육은 지나친 부담으로 작용해 자발적 무자녀가족을 양산시킨다.
수억대 집값은 차치하고라도,영어 26만원,수학 20만원,논술 20만원…. 학원 이름만 걸면 수강료가 20만원을 훌쩍 넘어 아이 키우는 것이 어디 예사로운가. 중·고등학교로 올라가면 학원비는 상상을 초월한다.
아이에게 모든 것이 집중되는 부조리한 사회구조에서 가족의 가치는 경제력의 많고 적음에 따라 달라진다.
삶의 질을 추구하는 젊은 층,특히 여성들의 의식구조도 중요한 단서다.
(좋은 의미의) 개인주의로 통칭되는 이들에게 피붙이 가족이란 굴레일 수도 있고,특히 결혼해 아이 양육에 매달리는 것은 사회적 기회를 박탈당한다는 인식이 도사리고 있다.
대신 일자리를 갖고,전문지식을 습득하고,해외여행을 다니고,요가와 레저활동에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희생을 강요하는 가족은 거추장스럽기까지 하다.
독신 여성과 동성애가족이 상대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현실을 깊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어느 사회이건 가치란 절대적이지 않다.
생명처럼 진화하기도 하고,때로는 퇴보하기도 한다.
가족의 가치도 혈연에서 벗어나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게 마련이다.
다만,출산 장려를 위해 보육시설 확충에 20조원을 쓰겠다는 정부의 발표처럼 아직도 혈연적 사고에 얽매인 현실인식이 아쉽다.
가족의 생계유지가 안정적이고,입시지옥이 없고,청년실업이 줄어들고,남편과 아내 나아가 사회가 공동으로 아이를 양육하는 시스템 구축이 가족의 변화에 상응하는 정책이다.
sun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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