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엔 맥주를 땄다. 부엌 벽에 늘어서 있던 빈병 사이로 아직 개봉 전인 1.5리터짜리 맥주 피트병. 먼지를 털어내고, 청테이프를 뜯어내고, 냉동실 안에 넣어놨다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내가 읽은 최초의 게이 신파
친구사이 옛 소식지였다. 95년 소식지였던가. 낡은 팜플릿에서 읽은 한 장 짜리 수기 겸 일기. 인공의 눈물 없인 읽을 수 없던 그 찬란한 신파의 한 장면. 난 게리 무어의 음악만 들으면 지금도 여전히 그 장면이 빚을 적어놓은 수첩의 표지처럼 선명하게 기억난다.
게리 무어의 Still got the blues가 나즈막이 흘러나오는 카페. 남자 둘이 테이블을 놓고 마주 앉아 있다. 두 사람은 고개를 떨군 채 침묵을 지키고 있다. 한 사람은 결혼을 앞두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화환과 축폭이 춤을 추는 예식장으로 곧 걸어갈 남자의 애인이다. 수기를 쓴 사람은 바로 그 남자의 애인이다. 더 이상 만나지 않으리라 결심하면서도 남자를 떠나보내야 하는 수기 속 작자는 마지막 연정 때문인지 그 침묵 속에서 유리잔을 만지작거리며 눈물을 떨구었노라, 게리 무어의 '스틸 갓 더 블루스'의 애잔한 선율이 자신의 황폐화된 영혼 위를 아스라히 날아다녔노라 고백하고 있다. 아, 얼마나 찬란하고 유치한가.
몸둘 바를 모르겠는 게이 특유의 자기 연민은 그렇다쳐도, 동양의 조그만 나라 한국의 성 문화를 절묘하게 저며낸 저 '내재적 서술'이란 가히 길이 보존되어야 할 우리네 삶의 흐느낌의 절창이 아니겠는가.
사실 난 눈물 없이 떠올릴 수 없는 이 유치뽕짝 같은 글을 당시 읽을 땐 피식 웃고 말았지만, 왠 걸, 내 혼탕한 기억의 헛간에서 소리 소문 없이 이지러질 줄 알았던 그 '한 장면'은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어떤 계시의 휘광처럼 보다 선명하게 헛간 바깥까지 빛줄기를 격렬하게 뿜어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난 마음을 독하게 다잡고, 이번 영화를 끝으로 이 짖궂은 빛의 산란 속에서 벗어날 생각이다.
게이다gaydar
'게이다'는 '게이'와 '레이다'의 합성어이자, 얼굴을 맞대고 성적 거래를 하는 대면 커뮤니티가 한정적일 수 밖에 없는 게이들의 삶이 빚어낸 독특한 은어다. 시쳇말로 '게이다'는 저기 저 익명의 인간이 게이일지도 모른다는 어떤 내기이자, 시신경이 조합해낸 육감의 또다른 이름인 셈. 이성애주의 사회에서 이성애자들은 굳이 저 사람이 '이성애자'일 거라는 추측을 필요로 하지 않는 반면, 동성애자들은 그 폭군으로 군림하는 보편화된 이성애 사회에서, 마치 어둡고 깊은 갱도 속에서 반짝이는 수정을 발견하듯, 시신경을 동원해 저 사람은 혹시 게이일지도 몰라, 하고 스스로 질문과 답을 확정하고 만다. 그건 생존을 위해 자가 진화한 새로운 육감의 촉수, 새로운 문법인 것이다.
보이지 않는 더듬이, 그것이 비교적 게이다를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은유다. 광막한 사막에서, 이성애자 일색의 어둠 속에서, 아니면 드렉한 동성애자 속에서, 게이다라는 더듬이로 길게 내리뻗어 더듬더듬 더듬다가 어느 순간 천우의 기회로 두 명의 게이가 서로의 얼굴을 마침내 마주보는 것. 오, 내기에서의 황홀한 승리. 남한 최대의 게이 포털 사이트인 이반시티의 '사람찾기'는 바로 이 게이다의 성능을 확인하려는 온갖 요란한 몸부림인 것. 신호등 앞에서, 지하철 안에서, 쇼핑몰 안에서 게이다 더듬이를 흔들어대며 열렬히 상대방의 주파수를 확인하려는 저 맹렬한 삶의 의지들. 조잡한 판타지와 한탄의 연쇄.
오늘 쓴 세 씬은 바로 이 게이다의 승리에 관한 거였다. 만족스럽지 않다. 내가 그런 기회를 갖질 못해서인가? 난 게이다가 둔한 편이다. 어떤 사람들은 곧잘 전혀 뜻하지 않는 공간에서 그런 천우의 기회를 갖기도 한다던데, 귀차니즘 때문인지, 너 게이지?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맹랑한 직설화법을 즐겨하기 때문인지 성공한 사례가 전무하다.
게이다, 예감과 적중이 시소질을 하다 어느 순간 씹질을 하고 마는 그 쾌감을 왜 난 진즉에 갖질 못했을까? 그게 조금 억울한 밤이다.
2005-07-10
'야만의 밤' 시나리오를 쓰며.
그리고 촬영 중인 '야만의 밤' 스틸 중 하나.
게리 무어 | One 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