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서 레즈비언이 되었나봐요"
[일다 2005-09-13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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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나루님은 한국레즈비언상담소 상담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레즈비언 상담을 하다 보면, 성폭력이나 가정폭력의 피해경험 혹은 자신의 주변환경을 들면서 “이래서 같은 여자를 좋아하게 됐나 봐요”라고 말하는 내담자를 자주 만나게 됩니다. 어떤 레즈비언은 ‘선천적’이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레즈비언은 오빠나 남동생이 많은 집에서 자라왔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하죠. 일부는 성폭력이나 가정폭력을 겪었기 때문에 레즈비언이 된 것 같다는 이유로 들기도 해요. 그렇게 각자 판단해 본 다양한 이유들은,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는 진실일 것입니다.
이제까지 세계적으로 동성애의 ‘원인’을 알아보려고 하는 연구들은 끊임없이 있어 왔습니다. 이러한 연구들은 동성애자의 다양한 경험들을 일반화 시켜, 원인을 하나로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원인을 제거하면 동성애자도 이성애자로 바뀔 수 있다고 보았죠. 기본적으로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는 관점을 바탕으로 한 연구들이었습니다.
이런 연구들과는 달리, 레즈비언들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발견하고 받아들이면서 그 이유에 대해 탐색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에서 동성애를 혐오적이고 부정적인 것으로 교육 받아왔던 레즈비언 정체성을 바로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고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그 정체성에 관한 특정한 이유를 대고 나면, 그것을 조금 더 편하고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지요. 그리고 나름대로의 원인을 탐색해보는 과정 속에서, 이성애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환경 속에서 계속 무시해오고 삭제해버린 기억들을 다시 떠올리고 정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는, 동성애 ‘원인’에 대한 나름의 확고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 도움이 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성 정체성을 긍정하면서 살아가는 데에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지요. 특히 성폭력이나 가정폭력 등의 피해를 동성애의 원인으로 생각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이 겪은 폭력에 대한 비난의 화살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 여성에게 향해지잖아요. 그래서 피해자들은 자신을 자책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식의 폭력에 노출되었던 적이 있는 레즈비언은, 그 경험과 레즈비언 정체성을 연관 지어 생각합니다. 본인이 레즈비언이라 할지라도 사회에 깔린 동성애 혐오증을 스스로도 내면화해서, 레즈비언 정체성이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정체성에는 (이성애자와 달리)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자신을 자책하게 만들었던 폭력피해 경험으로 설명하게 되는 거예요.
이 경우, 내담자들에게, “당신은 레즈비언 정체성을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군요, 그래서 당신 삶에서 부정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여진 경험을 자꾸만 원인으로 드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담자의 치유를 돕는 데 있어 바람직한 방식은, ‘여성으로서 무방비상태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폭력경험들은 결코 당신의 탓이 아니다’라는 점이죠. 레즈비언 정체성은 여성으로서, 동성애자로서의 경험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형성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는 레즈비언 정체성을 인식하거나 확립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일입니다.
고백하자면, 상담원인 필자 역시 유아성폭력 경험과 알코올 중독의 아버지로부터 당해야 했던 가정폭력 경험이 존재합니다. 한때는 내가 그러한 경험들로 인해 '삐뚤어져서' 레즈비언이 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나와는 달리 ‘행복한 가정’에서 자라난 친구들을 부러워했습니다. 지금도 레즈비언 혐오증에서 벗어나는 과정과 어린 시절 겪은 폭력경험들에 대한 치유가 계속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겪었던 여러 가지 경험들이 레즈비언 정체성 형성에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경험들이 나를 ‘잘못’ 성장하게 해서, 결정적으로 레즈비언이 되게 했다는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이 폭력에 노출되기란 얼마나 흔하고 쉬운 일인지요. 피해에 대해서 가해자를 욕해도 모자랄 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스스로를 자책하고 미워하게 될 수 밖에 없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너무나 속상하고 무겁게 다가옵니다. 레즈비언들이 여성으로서 겪었던 폭력을 자신의 성 정체성과 연관 짓고, 자꾸만 스스로에게 부정적인 낙인을 찍게 되는 일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폭력을 경험했던 것도, 레즈비언 정체성을 발견하고 받아들이게 된 것도, 결코 당신이 이상해서였다거나 잘못을 저질렀던 것이 아닙니다. 레즈비언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세상이 어서 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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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나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