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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의 빛 (Splendor In The Grass, 엘리아 카잔, 1961)
나탈리 우드, 웨렌 비티


60년대를 위한 온화한 선동.

엘리안 카잔은 시대의 욕망을 읽어내는 능력을 가진 감독입니다. 헐리우드 주류 시스템에 성공적으로 적응하면서도 사회 문제를 끊임없이 상기시켜내는 작품들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겠죠. 그만큼 그가 자기 시대의 집단적 무의식을 들여다볼 줄 아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던 거겠고요.

엘리아 카잔 영화들은 너무나 유명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혁명아 자파타', '워터프론트', 에덴의 동쪽' 등밖에는 보지 못했어요. 이번 기회에 그의 작품들 중에 보지 못했던 것들, 그리고 너무 어려서 본, 그래서 몇 장면만 기억하고 있는 위 작품들을 틈틈이 다시 볼 생각입니다.

'초원의 빛', 걸작이네요. 막 성 혁명이 점화된 60년대 미국의 젊은이들의 초상을 군더더기 없이 매력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세대간의 갈등 문제도 놓치지 않고 있어요. 부모 세대가 부여한 성 억압 때문에, 어긋나고 뒤틀려버린 젊은 연인의 이야기를 꼼꼼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키스만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안 되겠는 버드(웨렌 비티)는 '쉬운 여자'를 통해 성을 해결하라는 아버지 귀뜸 대로 바람을 피우고, 너무나 버드를 좋아해서 한 번 '하고 싶은' 디니(나탈리 우드)는 결혼 전까지는 순결을 지켜야 된다는 부모의 압력과 바람을 피우는 버드 때문에 자살을 감행하고, 결국엔 그 여파로 정신병원에까지 가게 됩니다.

'초원의 빛'은 워즈워드의 詩에서 따온 제목입니다. 낭만파 시인 워즈워드를 영화에 인용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의미심장하지요. 아름답기 그지 없는 젊은 날, 생의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할 젊은 날이 보수적인 성 모럴에 의해 그렇게 찢겨나가는 것에 대한 고요한 한탄이 이 영화의 테마인 셈. 몇 년 만에 해후한 연인이 한참을 머쓱해하다가 서로의 갈 길을 가는 장면이 이 영화의 엔딩인데, 나탈리 우드는 '초원의 빛이여!' 하고 혼자 시를 읊조리지요. 충분히 감동적인 장면.

이 영화가 걸작인 것은 엘리아 카잔이 세대간의 문제로만 이 시대의 갈등을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버드의 아버지는 주식 폭락 때문에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고, 디니의 아버지 또한 병원에서 나온 딸의 얼굴을 쓸쓸하게 바라보지요. 60년대 미국의 성과 결혼 문화를 비교적 통찰력있게 그려냄으로써 관객들에게 충분히 생각할 여지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엘리아 카잔은 형식미가 별로 없는 투박한 스타일을 고수하지만,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정말 압도적입니다. 그 세세한 에피소드들, 그리고 컷과 컷 사이에 어떤 표정, 어떤 대사, 어떤 리듬으로 가야할지를 웰 메이드한 상업영화로서의 모범을 제시하고 있어요. 70년대 이전의 헐리우드 영화들 중 상당수 작품이 예술 영화로 읽혀지는 건 단순히 시간 경과와 셀룰로이드의 스트레치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헐리우드 저 변방에서 알드리치와 사무엘 풀러 등이 새로운 영어 언어와 폭력의 담론으로 돌파구를 찾고 있는 사이, 그는 시대를 가로질러도 여전히 울림이 있는 가장 웰 메이드한 상업영화를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만 영화를 잘 만들면, 웰 메이든, 상업영화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만드는 영화마다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제작사가 거의 '노 터치' 상태로 백기를 들었다고 하네요.

웨렌 비티의 데뷔작이에요.     2005-01-25



*



축구 시간에 알람 시간을 맞춰놓았어요. 예상대로 알람 시간 이전에 일어났지요. 괴팍한 제 생체 주기입니다. 공복에 담배 한 대 피워 물고 있자니 갑자기 위 영화가 생각나더군요. mini를 비롯해 요즘 이래저래 힘든 동생들 생각이 나서 그랬던 걸까요?

'젊음'은 젊은이는 도저히 느끼지 못하는, 백스텝으로 뒤로 물러서고 있는 그 이후 세대만이 열렬히 환호할 수 있는 감정의 응결체라는 말이 있지요. 어느덧 젊기도 하고 안 젊기도 한 것 같은 아리송한 나이대가 되니 꽤 아햏햏한 느낌으로 감정이 번역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만일 이 젊음을 '이태원 게이바를 가득 메운 수많은 피터팬들의 아우성'으로 협애화한다면, 전 단호히 no와 yes를 동시에 외칠 겁니다. 나는 젊은가? 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해볼 때 말입니다.  

결국엔 자기 무덤 속에서 나무 뿌리와 뒤섞여 백토로 변해가는 게 오롯이 자기 자신 홀로이듯, 한 번밖에 없는 소중한 젊음의 생을 찬란히 불태웠으면 하는 바램은 이심전심, 그대와 나 동시에 공유하고 있는 열망일 겁니다. '생의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할 젊은 날이 보수적인 성 모럴에 의해 그렇게 찢겨나가는 것에 대한 고요한 한탄', 이것만으로 그 열망을 채우기엔 여실히 부족한 듯합니다.

힘들 내세요. 저도 힘 낼께요.
섹시한 게이로 생의 하루를 후회없이 불태워요.
희망이 없으면 절망도 없지요.




초원의 빛

- 윌리엄 워즈워드


한때는 그리도 찬란한 빛이었건만
이제는 속절없이 사라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
오히려 강한 힘으로 남으리
존재의 영원함을
티없는 가슴으로 믿으리:
삶의 고통을 사색으로 어루만지고
죽음마저 꿰뚫는
명철한 믿음이라는 세월의 선물로





David Byrne | Speechless

모던보이 2005-06-16 오후 14:13

썼다가 지운 글인데... 친구사이 여우 가람군이 어떻게 고걸 이 깊은 새벽에 잽싸게 읽고 협박 쪽지를 보내는 바람에 재업합니다.

무더미~ 2005-06-16 오후 18:55

잘 쓴 글을 왜 지우시나요~ 흠흠~

흑여시 2005-06-17 오전 02:18

저는 여우가 아닙니다. 흑여시 내지는 흡혈켠입니다. ㅎㅎ

휘파람은 날 좋아해 2005-06-17 오전 05:28

가람 군, 그대는 힘 빠진 황여우. 그리고 켠은 나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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