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이 올려주신 강풀의 만화를 보고서야 오늘이 광주항쟁 25주년이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뉴스와 인터넷에는 온통 노무현대통령의 '임의 위한 행진곡' 기사가 도배되고 텔레비젼 특집방송에는 이제는 화려한 국립묘지/공원으로 탈바꿈한 광주묘역도 잠시 비쳐지더군요.
스무살 무렵, 망월동 묘역을 처음 찾았던 날의 기억이 새삼스레 떠오릅니다.
그때는 성지 순례라도 가듯이 광주 망월동 묘지에 참배를 가는 일이 드물지 않은 일이었지요.
선배들의 손에 이끌려 마치 죄인이 된 심정으로 찾아간 망월동은 그때만 해도 초라하기 짝이 없었더랬습니다.
(좀 웃기는 이야기지만 그때 영남지방 젊은이들이 광주에 대해 갖고 있는 죄의식은 참으로 대단했었지요. 누군가 광주 금남로에, 망월동 묘역에 갔다온 여행기를 듣는 일은 꼭 첫 가투에 나선 새내기의 무용담처럼 흥미진진하기 마련이었구요.)
꼬불꼬불한 시골길을 걸어올라 찾아간 조그마한 묘역. 뜨거운 햇살에 내팽개쳐진 빛바랜 사진들과 편지들, 하얗게 타들어가는 국화꽃들... 서럽기도 하고 강렬했던 그날의 묘역은 이상하리 만치 눈이 부셨습니다. 지금도 그 날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눈이 시릴 정도로...
그렇게 80년 오월과 90년의 망월동 묘지는 그 후 한동안 저를 가르친 가이드북이 되어주었더랬지요. 8,90년대초반에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흔한 일이긴 했겠지만요...
하지만 그 때의 경험이 없었다면 그 이후에 숙제처럼 떠안은 자신에 대한 고민, 사회에 대한 고민, 나와 사회와의 관계맺기에 대한 고민들이 없었더라면 훗날 감히 친구사이 같은 단체에 발을 들일 생각조차 못했을지도 모르지요.
십수년이 또 훌쩍 지났습니다.
우리는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풀지못한 과제가 무엇인지 기억하고 누가 학살자인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문득, 동성애자인권운동, 혹은 친구사이가 걸어온 길이 겹쳐집니다.
지나친 상념의 비약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정당에 성소수자위원회가 만들어지고, 국가로부터 사업지원금을 받아내고, 언론이 동성애자를 다루는 태도가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해야 할 일들이 더 많습니다. 가끔 활동의 방향을 잡지 못해 갈팡질팡하기도 합니다.
그럴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 있겠지요.
에이즈감염인으로써 세상의 편견에 맞서 싸우다 지쳐 혼자 쓸쓸히 세상을 떠난 오준수님, 또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세상의 편견에 저항한 동인련 친구들, 이름없이 혼자만 고민하다 세상을 져버렸을 지도 모르는 어린 친구들... 또한, 일반의 제도와 도덕에 묶여 죽은자처럼 숨막혀하며 살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한번 더 신발끈 질끈, 묶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오늘 기념식 보도를 보다가 '순국 선열을 위한 묵념'은 어찌어찌 넘겼지만, 그 앞에서 점잖은 사람들이 '애국가'를 부르는 모습을 참을 수가 없어서 꺼버렸어요. 그 5월 광주에 휘날리던 태극기가 기념식장의 저 '연단 좌측의 태극기'로 바뀐 것은 아무래도 불편.
아아 저 끔찍한 사진의 이미지로 '타인의 고통'을 그저 타인의 고통으로 보고 있는 것도 무척이나 불편. 정말 '기억'뿐만이 아니라 '성찰' 역시 필요한 것이죠. 그 때야 비로소 광주 5월 그것은 비약하여 '나' 또는 '우리'로 넘어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