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Buenos Aires Zero Degree는 우리가 익히 아는 영화 '해피 투게더'의 메이킹 필름입니다.
우리나라처럼 단순히 홍보 목적으로 메이킹을 만든게 아니라,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왕가위 감독은 즉흥 연출을 좋아하는 감독 중에 한 사람이라는 건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배우 자신조차 자신이 맡은 배역이 무엇인지 촬영 당일날에 알수 있다고 하는만큼
왕가위 감독은 철저하게 즉흥 연출을 즐기죠.
Buenos Aires Zero Degree를 보면,
왕가위의 그런 연출 스타일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흥연출은 훈련되어 버린 배우들의 인공적인 연기가 아니라
자연스러움을 표출해낸다는 장점과 헌팅을 하지 못한 장소에서 효과적으로 쓰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변수도 많이 작용하여 당황스럽게 하는 경우도 적지 않지요.
왕가위 감독도 이같은 난관에 당황스러워합니다.
아르헨티나라는 낯선 땅에서 예기치 못한 헌팅의 어려움,
배우들의 빠듯한 스케쥴과 갑작스레 콘서트 일정으로 떠나버린 장국영.
그리고 풀리지 않는 네러티브.
Buenos Aires Zero Degree 보면 왕가위 감독이 계속적으로
영화의 내용을 바꾸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2.
저도 동백꽃 프로젝트를 찍으면서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장면들을 즉흥 연출에 의존했었습니다.
다행히도 배우들은 저의 연출에 잘 따라왔고, 헌팅의 어려움도
별로 없었지만
결정적으로 영화의 중요 장면이었던 '두 남자의 정사씬'은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저의 생각을 꺾어 두어야 했죠.
배우들은 노출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저는 그 장면을 찍어야 하고
실랑이 속에 저는 배우들을 설득하지 못했고,
단순히 상황속의 느낌만을 전달하고자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3.
Buenos Aires Zero Degree를 보면 '해피 투게더'가
얼마나 방대한 양의 영화였을까 자못 궁금해집니다.
많은 촬영분이 잘려져 나가고 그와 더불어 많은 배역들이 증발해 버렸죠.
장진과 양조위의 사이를 오가며 그들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관숙이의
캐릭터가 바로 그것인데요.
우리들은 애석하게도 '해피 투게더' 에서 그녀의 모습 뿐 아니라
그림자조차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Buenos Aires Zero Degree에서는 그녀의 모습을 잠시나마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장면들은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4.
저의 동백꽃도 첫 편집시 90분이라는 경이로운 러닝타임이 나왔었습니다.
하지만, 자르고 자르고 또 잘라 30분에 육박하는 기적적인 러닝타임을 완성했죠.
그러면서 많은 배역들과 재미있는 장면들이 날아가버렸습니다.
제일 아끼던 폐교 장면이 사라졌고, 제작부장님께서
혼신을 다해 연기했던(재촬영까지한) 미친 남자도 사라졌죠.
구수한 사투리의 현지 아줌마의 여우주연상에 버금가는 연기도
더불어 사라진 건 너무도 가슴이 아픕니다.
5.
Buenos Aires Zero Degree는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처음 영화를 연출한 저로서는 많은 부분이 공감이 갑니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감독만의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죠.
'해피 투게더'를 보고 매혹되었던 분들은, 꼭 보시길 바랍니다.
영화가 찍고 싶네요. 또다시 말이죠.
인디 스토리 옴니버스 영화제 개막작인데요,
못보신 분들은 꼭 보러 오시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