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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트리 2004-11-28 21: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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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을 막 시작했던 95년 봄,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사진)이라는 영화를 보러 입사동기 넷이서 코아아트홀에 갔다. 네명의 반응이 그야말로 제각각이었다. 한 친구는 빠져들듯 스크린에 몰입했고(그는 감동이 넘쳐 흘러 다음날 아무도 시키지 않은 감상문까지 써와서 읽어주기를 강권했다), 나는 졸음과 싸우느라 두시간 내내 엉덩이를 들썩거렸으며 한 친구는 그야말로 푹 잤다. 나머지 한 친구는 자신의 영화적 식견은 염두에 두지 않고 냉방이 안돼서 영화에 집중할 수 없다며 ‘극장 관계자’를 찾아 들락날락하면서 두시간을 보냈다. 지금도 <희생>하면 영화의 장면이 떠오르는 게 아니라 4인4색의 반응이 코믹 드라마처럼 전개됐던 공간, 코아아트홀만 떠오른다.

25일 코아아트홀이 개관 15년 만에 문을 닫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4년 동안 쌓인 적자를 감당하지 못해서다. 멀티플렉스의 득세로 오래된 극장들이 문을 닫는 게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코아아트홀의 폐관은 섭섭함 이상의 감정으로 다가온다. 코아아트홀은 단순한 극장이라기보다 90년대 젊은 관객들에게 영화의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 이정표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코아아트홀이 모은 <희생>의 관객 2만 명은 전 세계에서 가장 좋은 흥행 성적이었고 이후 예술영화 붐에 기폭제가 됐다. 이 극장에서 10만 명을 동원한 <중경삼림>으로 왕자웨이는 한국에서 스타 감독으로 떠올랐다. 일부 영화광들에게만 비디오테이프로 돌던 작가주의 감독들을 스크린에 소개하면서 코아아트홀은 영화란 단순한 볼거리라고 생각하던 관객의 뒤통수를 후려치기도 했고, 평범한 감식안의 관객들을 영화광으로 계발시키기도 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잡담하며 코아아트홀에 들어갔다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보고 친구와 아무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한참을 멍하게 앉아있었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90년대 중반 코아아트홀을 들락거렸던 관객이라면 누구나 한두 번쯤은 이런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홈페이지에 올려진 극장 측의 간단한 작별인사 뒤에는 “화질도 별로고 좌석도 불편하고 스크린도 작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젊은 날의 감성을 끊임없이 자극해주었던 곳(ask1025)”에 대한 추억과 아쉬움의 댓글들이 줄줄이 올라와 있다. 종로영화제 마지막 날이기도 했던 극장의 마지막 날, 코아아트홀은 다른 극장에서 괄시받았다가(90년 <아비정전> 개봉 당시 액션영화를 기대하고 왔다가 실망한 관객들은 극장 문을 부숴 뉴스에 등장하기도 했다) 자신이 복권시킨 왕자웨이 감독의 <아비정전> 무삭제판을 상영했다. 코아아트홀이 관객들에게 선물했던 소중한 영화적 체험은 <아비정전>에서 아비(장궈룽)가 마음 속에 정지시켰던 1분의 시간처럼 이제 기억 속에 정지돼 있는 순간으로만 남게 됐다.


한겨레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플라스틱 트리 2004-11-28 오후 21:30

이 극장 안 간지 꽤 된 것 같은데 그래도 이 소식을 듣고 나니 참 기분 뭣합니다.
혼자 영화보기 시작했을 때 다소 쭈뼛거렸던 내가 유일하게 혼자서도 편하게 갈 수 있는
극장이었죠.
불편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도 그 곳에서 본 몇 편의 영화들(특히 '중경삼림')은
아직도 심하게 각인이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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