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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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잘 증오하기
“억척스러워도 결국은 좋은 사람이 되기”, 나는 한국 드라마가 서민의 삶을 주로 그렇게 재현한다고 생각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는 “고통스러워도 괴물이 되지 말 것”이라는 주제를 많이 다룬다. 한국 드라마에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주된 요소는 탐욕인 것 같고,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괴물이 되는 가장 주된 요소는 증오인 것 같다. 둘 다 어쨌든 선한 삶에 대한 지향점이 있다. 그 과정을 얼마나 복합적으로 잘 다루는가가 명작의 요건일 것이다.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중요한 일이다. 우리 서로 피해주지 않고, 서로의 존재가 편안하고 나아가 기분 좋을 수 있다면 세상은 좀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하지만 요새 나는 내 안의 탐욕과 증오가 밉지 않다. 몇 번을 생각해도 나는 탐할 만한 것을 탐하고 있고, 증오할 만한 것을 증오하고 있다. 남자 엉덩이가 너무 좋다. 어떤 쪽이든 자신이 정의롭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증오스럽다. 내가 관심 없는 말을 아무 때나 내게 와서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이 고통스럽다. 앙심을 품고 이간질하는 비겁한 사람들이 역겹다. 하지만 역시 남자 엉덩이는 너무 좋다. 이렇듯 나를 더 강하게 움직이는 건 사실 탐욕과 증오에 더 가깝다. 이 둘을 오가며 진동하는 마음이 나의 근본 같기도 하다.
명분 없이 피해를 주고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며 폭주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반대로 우리가 왜 좋은 사람이라는 긍정형 표현 안에서 욕구와 증오를 음지화해야 하는가 의문이 든다. 그리고 정당한 명분이 없더라도 내 안에 실제로 들끓고 있는 욕구와 증오는 있을 수 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하늘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괴물이 되지 말자고 제안하더라도, 이미 우리가 괴물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즐거운 괴물이 되고 싶다. 내 욕망은 없던 제도를 상상하게 만드는 새로움의 원천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나쁜 탐욕이라고 비난했지만, 폴리아모리나 다자연애를 지향하는 내 성향이 아니었다면 모든 제도가 독점적인 반려관계를 전제할 때 새로운 제도를 요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증오는 나를 보호하는 가장 소중한 방패막이 되어주기도 한다. 앞서 말한 내가 증오하는 것들로부터 멀어질 때 사실 나는 조금 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기도 하다. 탐욕이라고 불릴 만한 욕구와 악해보이는 증오는 모두 우리 삶의 자양분이 된다. 좋은 사람이 되기보다 좋은 삶을 원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 잘 욕구하기. 잘 증오하기. 나는 그런 것을 배우고 싶다.
다만 잘 욕구하고 증오한다는 것은 사실 그것에만 머물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하나의 욕구, 하나의 증오가 아니라, 그 욕구와 증오가 얽힌 여러 맥락과 관계를 충분히 사유할 때 욕구와 증오는 자양분이 된다. 간혹 선한 동기로 회원 단체의 대표나 간사가 된 사람들이 인간혐오에 빠져 금방 그만두는 일들을 종종 목격하곤 한다. 회원 간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은 분명 혐오스러울 때가 있다. 인권운동을 시작한 사람들도 인간혐오를 느끼면 “저런 사람들의 인권까지 지켜줘야 하냐?”는 의구심에 빠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송곳>이라는 만화의 대사처럼, 누군가의 권리는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혐오, 혹은 증오 자체에만 머물면 나쁜 사람들에겐 인권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증오스러운 양태를 지양하기 위한 조건을 반영한 것이 인권의 시작일 수도 있는 것이고, 그렇게 구성된 인권이 보편적인 것으로 상정되었기에 사회 구조를 바꿀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누군가는 증오에 머물수도 있지만, 증오는 한걸음 나아갈 힘을 내재하고 있다. 회원 간 일어나는 혐오스러운 일들도 잘 증오하다보면 자양분이 될 수 있다. 회원들이 내비치는 욕구들이 처음엔 욕심이나 탐욕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단체의 발전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나는 그렇기에 무엇이 좋고 나쁜 것인지 먼저 재단하지 않고, 우선 열심히 탐하고, 증오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간혹 소수자 집단이 사회 주류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착한 시민’이 되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앞에서 계속 말했지만, 전형적인 ‘좋은 사람’은 오히려 덜 역동적이고 힘이 부족하다. 혐오에 더 잘 대응할 수 있는 건 가끔은 사랑보다는 탐욕과 증오이기도 하다. 잘 탐하기. 잘 증오하기. 그리고 탐하고, 증오하는 것 뿐 아니라 우리에겐 더 복합적인 정서의 움직임이 필요하고, 그 복합적인 역동을 잘 담아내고 표출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친구사이가 그럴 수 있는 공간, 공동체가 되길 바란다. 중독성 약물을 하는 사람들도, 정신병에 앓고 있는 사람도, 두려움이 많은 사람도, 색을 심하게 밝히는 사람도,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도, HIV 감염인도, 문란한 사람도 실컷 오갈 수 있는 친구사이가 되길 바란다. 여러 정서와 경험이 오가고 과감하게 욕구하고, 말하고, 표출하고. 그 모든 과정을 ‘잘’ 해내보기. 올해가 그런 해가 되길 바란다.
친구사이 상근활동가 / 기용
킹
글이 잘읽혀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