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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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금이 2003-10-31 23:48:24
+0 2177
10월의 마지막 밤은 항상 남자들의 옷깃을 파르라니 떨게 만든다.

작년 10월의 마지막 밤, 옷깃을 세워 종로를 돌아다니다 그를 만났다. 우리는 교감했고, 난 그의 손가락 끝에서 미묘한 전율을 느껴야 했다.

그는 안드로메다 은하에서 지구로 찾아온 '발랑까'였다.

작년 10월의 마지막 밤에 내가 만난 건 외계인이었다. 나는 오늘이 며칠인지를 물었다. 그가 잘못 맞춰진 라디오 주파수 소리로 대답했다.

"30억 7천 4백 2십 5일째."

나는 입 닥쳐 하고 외쳤고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기다란 엿가락 같은 손가락을 내게 내밀었다. 그가 E.T 흉내를 내려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니가 E.T면 나도 E.T겠다 하는 시니컬한 마음으로 예의 그 내 뭉뚝한 가운데 손가락(퍽큐!)을 그에게 내밀었다.

스파크였을까? 그가 자신의 이름 '발랑까'를 발음하며 내 가운데 손가락 끝에 자신의 손가락 끝을 댔을 때, 내 눈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번쩍, 하고 섬광이 일며 찌릿하니 내 몸 속을 뭔가 전자기적인 충격이 휩쓸고 지나갔다.

과연 내가 본 것은 무엇일까? 내 입에서 알 수 없는 주문이 눈물처럼 끈적거리며 흘러나왔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주지만
이룰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주문을 읊조리는 사이 안드로메다에서 온 발랑까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오늘이 딱 그와 만난 지 일년 째 되는 날이다. 발랑까 날짜로 치면,

"30억 7천 7백 8십 1일째."

오늘 다시 옷깃을 세워 나가야겠다. 나의 옷깃은 우주로 신호를 쏘아 보내는 안테나이며, 나의 온몸은 감지 기능만 있는 기다란 촉수.

더듬더듬, 종로를 거닐며 발랑까를 찾아야 한다. 1년 전 내 손끝에 전율의 심지를 박아넣었던 그 외계인을.

만일, 오늘 밤 옷깃을 파르라니 세워 슬픈 눈으로 꿈적거리며 거리를 헤매도는 날 보거든, 그냥 지나쳐 주세요. 빙글빙글, 돌며 춤을 빙글 추며 다리 짤린 유령처럼 돌고 돌거든, 침이나 뱉지 말아주세요. 아프다고, 말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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