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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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죽음' #2]
이제 다시, 죽음의 질을 생각하다
- 죽음에 대한 단상
친구사이 회원분들은 죽음하면 어떤 것들이 떠오르시나요?
4명의 친구사이 회원님들이 죽음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살아있음의 마지막이니만큼 주제와 형식에 아무런 제약을 두지 않았습니다.
1. 결국 돈얘기, 우리 부모님이 그랬듯이 /아론
누나, 죽으면 생명보험금 누가 받는 걸로 해놓을 거야?
나란 인간은 도대체가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인지. 죽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고작 유산과 생명보험금을 어떻게 처리할지라는 게,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레즈비언인 내 누이와 나의 단골 대화주제는 집 장만과 유산에 관련된 내용이다. 가족구성권은 커녕 차별금지법도 없는 헬조선에서 내 몸뚱이를 보듬어줄 집과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내 반쪽을 나 대신 위로해 줄 돈. 이 두 개가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이자 유일한 탈출구이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마침표 아래 완성되는 가족.
과거, 나에게 가족이란, 이성애자의 그것을 닮아있었다. 마치 엄마, 아빠가 한 쌍인 것처럼, 나와 내 파트너가 있고 슬하에 자녀가 있는, 내가 나고 자란 가족을 닮아 있었다. 하지만 돈을 벌고, 남겨 줄 재산이라는 것이 생긴 지금은 다르다. 나에게 가족은 유산을 포함한 “현재”의 “내 돈”을 공유하는 시시각각 변하는 경제공동체이다. 누이와 내가 각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유언장이 공개되기 전까지 아무도 모르는, 어쩌면 어떠한 형태로도 구성될 수 있는 열린 존재이다. 마치 한평생 집을 부수고 다시 짓는 비버처럼, 나는 가족이란 존재를 계속해서 부수고 다시 만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죽음이 찾아와 멈춰줄 때까지.
“너가 판단해, (걔한테) 줄지 말지.”
지금 누이가 만나고 있는 사람에게는 미안한 얘기이지만, 누이의 유산과 생명보험금은 내 것이다. 가족으로 받아 줄지 말지도 내 손안에 달려있다. 현재로선 말이다. 혹자는 죽음 앞에서 슬픔이 아닌 돈 얘기가 나와서 냉정하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내 가족이 나를 잃어 슬퍼할지언정, 찬 바닥에서 굶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자, 내가 없으면 돈이 나 대신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또 다른 사랑의 형태라고 생각해 줬으면 한다. 다 쓰고 보니, 우리 부모님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2. 죽음의 풍경 / 이욜
나에게 유의미했던 첫 죽음은, 엄마의 죽음이었다. 엄마는 내가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쓰러지셨고, 줄곧 편찮으시다가, 4학년 어느 여름밤, 아버지와 내 곁을 떠나셨다. 그날 새벽, 아버지와 나는 병원 장례식장의 제일 작은 빈소에 덩그러니 놓여졌다. 꽃으로 가득 차 있던 맞은편 으리으리한 빈소는, 마음껏 치료 받지 못한 채 엄마를 떠나게 한 우리 부자를 향해, 마치 정말 그러했다고 쐐기를 박는 것 같았다.
동 틀 무렵, 친척들이 속속 도착하고, 나는 잠시 집으로 돌아왔다. 어떤 위로의 메시지라도 듣고 싶었을까. 주섬주섬 무언가를 챙기고 있는 그 때, 성경 책이 눈에 띄었다. 아담과 이브의 어떤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이야기가 엄마의 죽음과 무슨 상관인가 싶지만, 적어도 그땐, 엄마의 삶이 어려운 형편 속에서 나를 낳고, 키웠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가치 있고 고마운 삶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오전이 되고, 반은 넋이 나간 채로 장례식장으로 들어가는데, 복도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친구들, 지인들, 내 친구들, 대학 선후배들로 그 복도가 가득 차 있다는 걸, 정신을 좀 차리고 나서야 알았다. 그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위로였고 고마움이었다. 그 틈을 비집고 빈소로 들어서는데, 그 맞은편 꽃으로 가득 찬 빈소에는, 사람이 없다는 걸, 그때 알았다.
“아... 사람이... 무엇보다, 사람이 소중한 거구나.”
그것이 엄마가 나를 떠나며 마지막으로 전해주었던 당부였다.
엄마는 천국에 갔을까? 지옥에 갔을까? 나는 죽으면 천국을 갈까? 우리 가족의 종교적 믿음으로 비춰볼 때, 엄마나 나나 그리고 아버지나, 천국에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죽어서 천국 가는 게 정말, 지금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인가? 죽기 직전에는 중요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지금 내가 사는 삶이 천국이 되길 바란다.
곁에 있는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며 사는 것. 사랑.. 하는 것.
텅 비었지만, 가득 찼던 우리 엄마의 예뻤던 마지막처럼.
3. 내가 꿈꾸는 죽음 / 크리스
“우린 아마도 결혼식보다 장례식에서 더 많이 보게 되는 것 같아요.”
최근 친구사이 몇몇 회원들의 가족 부고를 접하고는 조문 갈 일이 몇 번 있었는데, 그 중 어떤 장례식장에서 만난 한 언니에게 문득 꺼낸 얘기다.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는 회원에게 진심을 담아 위로한 다음 다른 회원들과 삼삼오오 모여 그래도 사는 얘기를 나누는 광경이 이제는 조금 익숙해지고 있다.
어찌 보면 씁쓸한 풍경이다. 저 멀리 남의 나라 이야기인 동성결혼 법제화나 이제 막 논의를 시작한 생활동반자법 등은 뭔가 아직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요원하기만 하고,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들을 뽑은 이번 20대 총선 선거운동에서도 성소수자는 대놓고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찍혔다. 당연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이 시대 성소수자들의 모습이, 장례식장에서 또 한번 재현된다는 건 분명 서글픈 일이다.
▲영화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중 한 장면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나에게 죽음은 아직 낯선 개념이다. 몇 번 소식지나 다른 곳에서 우려먹어 이제는 사골이 될 법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내가 한때 죽음을 떠올렸던 순간들도 지금 생각하면 아주 먼 옛날 다른 사람의 추억 같다. 그때는 더도 덜도 말고 딱 66살까지만 살았으면 했는데, 하고 싶은 거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는 지금은 되도록이면 오래 살아서 멋지게 생을 마무리하고 싶은 생각이다. 물론 그게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도 모르고, 오늘 멀쩡했다가 내일 갑자기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이번 기회에 내가 꿈꾸는 죽음을 그려보려고 한다.
우선은 후회없이 죽는 게 꿈이다. 나는 기독교인이지만, 내세를 믿고 싶지 않다. 내세는 오직 신(예수)만이 가능한 것이지, 우리는 신이 아니지 않은가.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 자연으로 순환하리라 믿는다.) ‘죽어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라는 말처럼, 살아 생전에 할 수 있는 한 많은 것들을 해보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과 백년가약도 맺고 싶고, ‘성소수자’라는 말이 더 이상 필요없는, 모두가 다수이자 소수인 세상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
그 다음은 다른 사람들이 내 죽음에 슬퍼하기보다는 맑은 마음으로 안녕을 고했으면 좋겠다. 옛날에는 ‘내가 죽으면 날 위해 슬퍼할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하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인원수보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중요하다는 걸 안다.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더 이상 내가 곁에 없음을 슬퍼하면서 힘들어한다면 그 또한 못할 짓이다. 슬픔과 상실이라는 게 인간의 삶에서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러한 감정이 오래도록 아픔으로 남지 않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이 두 가지가 가능하려면, 내가 죽고 싶을 때 죽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생에 더 이상 여한이 없을 때, 이 세상 살아서 아름다웠노라고, 감사하고 행복했노라고 말하며 눈을 감고 싶다. 마침 올해 초에 연명치료를 스스로 중단할 수 있는 법안이 통과돼 2018년부터 시행할 예정이란다. ‘웰다잉(Well-dying)’ 문화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하는데, 말 그대로 정신이 기력을 다하기 전에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면 무작정 당하는 게 아니라 기꺼이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예전엔 그야말로 ‘시간을 달려서 어른이 될 수만 있다면’ 어릴 적 고민 다 내려놓고 맘껏 살다 갔으면 했는데, 요즘은 하루하루 쏜살 같은 시간이 아쉬울 따름이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대전제가 아직은 진리인 만큼, 동시대에 태어나 함께 살아 숨쉬는 이 시간 동안은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아낌없이 표현하는 날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덧+ 그러고보니 일상에 치여 잊고 있던, 4.16 세월호 참사가 벌써 2주기다. 아직 9명의 생명이 바다에 잠겨 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번 총선에서 모 정당은 공약으로 동성애•이슬람과 함께 세월호 척결을 올려놓았다지. 죽어서도 차별 당하는 이들을 위한 애도는 누구의 몫인가.
글 청탁이 들어왔을 때, 주위에서 겪은 성소수자 친구들의 죽음을 짐짓 눈물나는 필치로 써볼까 했다. 그러나 글이란 건 종종 사람의 머리보다 앞서나가는 일이 잦아서, 붓끝으로 영매처럼 그려지는 어떤 슬픔이 종종 나와 뭇사람을 잡아먹기도 한다. 무엇보다 성소수자들의 슬픔이란 전염성이 강해서, 공연히 글로 써놓은 그것이 남몰래 몰리고 있을 누구의 마음을 어떤 식으로 건드릴지는 사실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성소수자 자살예방활동을 벌이는 몇몇 마음연결 팀원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만큼 성소수자에게 죽음이란 이미 익숙한 풍경이다. 여느 사람들과 다르게 처우되는 성소수자의 죽음을 침묵으로 견뎌본 경험이라든가,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더라도 눈에 띄지 말 것, 드러나게 말하지 말 것 등으로 사회적으로 죽어있길 요구받는 상황도 적잖이 마주한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것 같은 기분을 그렇게들 한번쯤은 느끼면서 산다. 내 삶이 그렇게 숨죽인 채였으므로 내 죽음 또한 그다지 존엄스럽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 차라리 아무도 날 기억하지 못했으면 좋겠다, 온갖 타나토스thanatos적 욕망이 섶벌처럼 달겨들기도 한다. 사회는 내 스스로 내가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고, 그 권력의 공포를 예감한 소수자는 아직 구현되지 않은 사회의 억압을 이미 자신의 내면 안에서 예행연습하며 자신의 생명을 죽여나간다. 살아도 되는 생명, 죽어도 되는 생명을 준별하는 네크로폴리틱스necropolitics는 이렇게 근대국가 레벨을 벗어나 그 속에서 억압을 경험하는 개인의 마음 안에서도 실현된다.
그러나 그런 경험을 듣고 또 대다수의 성소수자들은 당차게 자신의 삶을 이어나가기도 한다. 죽음과 연루된 성소수자들의 삶의 조건을 잠시 잊을 수 있었기에 가능한 걸까. 그런 국면도 있지만, 내가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더는 숨기지 않고 그것을 기반으로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영위해나가려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이른바 '커밍아웃'이라는 과업이 보다 심화된 형태로 이미 도처에서 실천되고 있는 것을 마주한다. 사회의 시선이 좋아져서? 물론 당장은 맞는 답이지만 그 사회라는 것은 거의 반드시 각성된 개인들의 변화를 바탕으로 제 얼굴을 바꾼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어떤 개인들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성소수자로서 삶의 조건, 죽음이 켜켜이 재워져 있는 삶의 조건을 직시한 채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불타듯 살 수 있는 동력을 새로 얻은 사람들이 등장한 탓일 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 자기 성정체성을 보다 합당하게 대접하는 정체화의 과정이 자연스레 따라붙었을 것이다. 내가 아직도 신기하게 여기는 것은, 친구사이나 다른 게이 공동체에서 이른바 첫 '데뷔'를 하는 사람들이 겪는 변화들이다. 아, 이게 그렇게 숨기고 부끄러워할 만한 게 아니었구나, 내가 게이이면서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이렇게 풍부하구나, 그런 걸 알아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변화해가는 과정은 진실로 진실로 신비에 가깝다. 그렇게 우리는 성정체성을 내 삶 속에서 공식적으로 추인해가는 과정에서 사실상 '새로 태어난다'. 그리고 이렇게 한 사람이 겪는 '죽음과 부활'의 체험은, 다름아닌 기독교 교리에서 핵심적으로 사용하는 모티브다.
"우리가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려면, 죽음을 백신처럼 미리 맛보아야 합니다. 사순 시기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몸소 가르치시는 바가 그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또 주님 안에서 몇 번이고 죽고, 또 몇 번이고 되살아나야 합니다."
- 천주교 서울대교구 모 성당 주임신부, 2012년 3월 18일 사순 제4주일 강론 중.
유명 가수가 부른 게이 앤썸의 노래 가사처럼, 우리는 이렇게 태어난 셈이지만born this way, 우리가 그렇게 자신을 말할 수 있기 위해 우리는 한번 새로 태어났던reborn 경험이 있다. 한 고개를 넘어선 성소수자들의 내면이 유독 빛나는 이유는 이것 때문일 것이다. 기독교가 주는 환기 중 반절은, 인간은 놀랍게도 언젠가 죽는 존재라는 것이고, 그 죽음을 예비한 삶을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성소수자에게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생물학적·사회적 죽음의 누구보다 충실한 관찰자요, 구전자들이다. 그런 경험들이 우리 안에서 무르고 녹아 우리의 삶을 더 튼실한 것으로 만든다. 삶이란 '본래' 죽음과 그렇게 배를 맞닿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소수자들은 삶 속에서 그렇게 한발 먼저 체득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나저나 저 강론을 했던 신부, 내가 고해소에서 동성애자임을 고백할 때마다 몹시 호모포빅한 사죄경과 보속을 주었던 기억이 있다. 그 분도 그 사이에 주님 품 안에서 몇 번이고 죽어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새로 태어나셨기를 간절히 기도해본다.
/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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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가 원고청탁했을 때 어렵다고 해서 미안했는데
이렇게 팀원들의 이야기가 내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보다
더 아름답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