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게이들의 하나의 문화로 잡아온 술번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다. 국내 최대 규모의 이반커뮤니티인 '이반시티' 오프라인 게시판 또는 서울게시판을 보면 '술번개 방장'들의 광고성 게시물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술번개들중에는 '영업형' 술번개부터 '조촐' 술번개, 그리고 '야한'술번개 등 그 색깔도 다양하고, 가끔씩 다른 게시판에 참가자들의 후기 등이 올라오며 모임에 참가하는 연령층에서부터 외모수준까지, 그리고 안주가 부족하네, 회비를 비싸게 걷네 등등의 푸념들...그리고 술번개방장들이 빌딩을 차렸다는 루머수준의 글들까지 가득하다.
어떤이들은 '술번개'에 대해 굉장히 안좋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비하하는 언어도 나오고, 어떤 이들은 술번개 방장들에 대해 옹호하는 글도 있다. 이 글은 어느 술번개가 좋고, 어느 술번개를 평가하고, 어느 술번개가 나은지를 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술번개방장에 대한 '삶''에 대해서 고찰해보고자 쓴다. 게이의 직업과 연령은 다양하지만 '술번개 방장'으로 살아가는 삶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연이 있고, 나중을 위해 이를 기록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엘라스틴 번개 #
그 전에 먼저 내 소개를 해야겠다. 엘라스틴. 지금은 쓰지 않는 닉네임이지만 과거 술번개 방장을 했었고, 평균인원 40~50명에 200명~300명이 오는 대규모 이벤트도 몇차례 했었다. 내가 술번개 매니아가 되었던것은 2005년 6월 퀴어퍼레이드를 준비하는 모임에 참석한뒤 해당 모임 참석자가 '술번개 같이갈래?'라고 제안하여 첫 술번개 모임을 참석하게됐다.
아무튼 그분에 이끌려 종로 '올빼미' 호프(현 아이리스)'에 있는 TH 아무개 번개를 참석했고, 가벼운 게임이었지만 모임에 참석한날 '학종이'를 입에서 입으로 넘겨주는 게임중간에 호감가는 분의 '입술'의 느낌때문에 '술번개'의 참석 매니아가 됐다. 당시 회비는 만원이었다. 그리고 그날 내 '첫 애인'이 생겼다. 그 애인과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술번개에 대한 내 첫 기억이다.
이후 애인과 깨진뒤 술번개 참가자가 됐다. TH번개를 나갔고, J번개도 참석했다. 이후 YH번개, KT번개, SH번개 등 다른 모임도 나가기 시작했다. 죽돌이라고 해야할까? 어느새 나는 술번개 죽돌이가 되어 있었고, 부모님으로부터 용돈을 받으면 술번개에 쓰면서 매일같이 술번개에 나갔다. 하지만 20살이 딱히 버는 곳없이 돈만 쓰기에는 부담이됐고, 이후 방장은 회비를 내지 않는다는 말에 '첫 술번개'를 그해 추석에 첫 술번개를 주최하게 됐다.
'자바채팅'이라는 공간에 방을 만들고 처음으로 술번개 접수를 받았는데 그렇게 모인 인원이 33명이었고, 당시 올빼미 호프 2층을 가득채웠다. 게임진행이라는 걸 할줄도 모르고 언변도 모르지만 '오셨으니 맛있게 드세요'라고 하고 진행을 했고 2시간 30여분정도 놀다가 모임을 끝냈다. 그때 참가자들이 "방장이 어리니까 착하네" "앞으로 계속해봐" "처음인데 응원할게"라는 말을 해줬고, 용기를 얻었다. 그렇게 재미있게 놀았고 모임이 끝냈을때 '회비계산'을 했는데 1인당 6천 700원정도 내면 적정선이고, 그래서 6천 700원씩 내라고 했다. 그런데 걷고보니까 문제가 발생한것이 '회비를 인원대로 계산' 했는데도 불구하고 2만원정도가 비었다. 누군가가 내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더 내 라고' 할수는 없어서 그 2만원은 내가 채워넣었다.
한번 해보니까 재밌었다. 앞에서 사회를 보고 누군가로부터 주목받는 것,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사람들이 움직여주는 것에 대한 재미도 있었고, 게이 커뮤니티에서 '내 돈'을 아끼면서 놀수 있다는 것에 흥미가 생겼다. 그리고 내 첫모임의 '에이스급 훈남'분들이 많이 와서인지 이반시티 등 커뮤니티에 후기도 좋게 올라왔다. 그래서 처음에 한번 심심해서 해본 것에 대해 '계속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엘라스틴 술번개를 본격적으로 띄웄다. 회비는 7000원. 6700원으로 걷다보니 회비가 비었던 것을 감안하여 회비를 7천원으로 올렸고, 이후에 다시 8천원으로 조정했다.
'텃세'라는 것이 있었다. 회비를 저렴하게 하고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자 다른 술번개 방장들로부터 압력이 들어왔다. 어떤 분께서는 '상도덕'이라는게 있다며 나무랬고, 어떤분은 '평생 공짜로 해줄게 번개 그만둬'라는 이야기를 한 사람도 있었다. 원래 누군가가 '이래라' 하면 '저래' 버리는 반골기질이 있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적대감이 생겼다. 그래서인지 다른 방장들과 싸움도 벌이기도 했다. 싸웠다가 또 친해지고, 친해졌다고 또 싸우기도 하고...그런와중에 '오대방장'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모임 참석자중에 한명 강 아무개씨(나중에 번개방장으로 전직하신) 형이 신촌의 M, 강남의 S, 종로의 30대번개, 제황호프의 YH,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두고 '오대방장'이라고 지칭했고, 이반시티 내에서 오대방장이 어느순간 '메이저 벙개'라고 자리를 잡았다. 상술이라면 상술일수도 있겠지만 '메이저'와 '마이너' 그룹이 생겼고, 경쟁이 생겼다. 초중고등학교때 매년 같이 반장선거에 나갔지만 당선되지 못했고(중학교 3학년때 반장에 당선됐는데 선생님이 '선거 다시해'라면서 무산시킨 일을 제외) 하고, 아주 사소한 것이고 타인에게 의미없는 것이지만 어떤 일에 1등을 해본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를 리드한다는 것이 좋았는지 1등 욕심을 부렸다. 언제부터인가 내 삶은 '술번개'를 위한 삶이 되어버렸다.
아침7시에 일어나서 '술번개 방'을 만들고, 밤10시전까지 채팅을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이면 '진행'을 하고, 새벽5시까지 2차,3차를 가고, 다시 아침7시에 일어나서 채팅방을 만드는 일상. 잠도 제대로 못자면서 '모임'을 위해 투자했다. 내게는 모임이 전부였고, 그 모임에서 만나는 사람이 전부였다. 나는 모임에서 친구도, 애인도 사귈수 있을거라고 믿었다. 실제로 모임중간에 나에게 고백하는 친구도 있었고 그래서 애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20살에 처음 시작한 '모임'의 장이라는 타이틀, 아무도 알아주진 않지만 스스로 1등(인원수, 최저가, 최저연령대)라고 자부심을 가지며 어떻게든 그것을 유지하려는 '집착'이 생겼다. 어린시절 왕따의 경험때문이었는지 매일 같이 나와 놀아주는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에 잠시간 행복했던 것도 사실이다. 술번개를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가 내 고백을 받아주지 않으면, 내 주변에 '친구'에게 '소개'를 시켜줘 '연결'을 시켜서 내 고백을 받아주지 않는 사람을 곁에 두고 함께 놀려는 욕심도 있었다.지금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은 이해못할 집착이고, 나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고 우습기만한 집착이었지만 그때는 그랬다.
군대에 갔을때도 휴가를 나오면 항상 가던 곳은 '술번개' 였다. 그때에는 술번개 세태가 바뀌어 기존에 있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새로운 이들이 나와 있었다. 내 모임에 참석자였던 B 아무개씨가 번개를 하던때였는데, 휴가나올때 가끔 '연합번개' 형식으로 '엘라스틴'이라는 닉네임을 빌려주고, B씨가 사람을 모으면 내가 진행하는 식으로 했었다. 대신 회비는 공짜로...이런말 하기는 아깝지만 남의 술번개 놀러갈때 제값 다주고 가기가 왜이렇게 아까운지...ㅡㅜ...좋았다. 진행하는 것이, 내가 진행하는 대로 사람들이 움직이고, 게임하고, 왁자지껄 떠드는 분위기가 좋았고, 그렇게 분위기가 좋을수록 뭔가 '만족감'이 들었다.
군 전역후 나는 은행에 입사했다.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일까? 노후에 대한 걱정때문에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은행일을 시작했다. 그때는 더 이상 '술번개 참가'에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돈만 비싸고 재미도 없는 술번개 왜가나라는 느낌? 그리고 일단 '내 사람'이 없다는 점 때문에 술번개를 기피하게 됐다. 그래도 심심했다. 그래서 시작한게 먹자번개였다. 논현동 돼지국밥 번개, 논현동 벌교꼬막 번개, 논현동 문어숙회 번개, 노량진 수산시장 번개 등 '먹자' 모임. 그리고 통이 스탠을 좋아하고 스탠이 통을 좋아하는 '알럽통탠' '코베 모임'등에 참석을 하기 시작했다. 영화번개도 참석하고, 대화하고 놀수 있는 모든 공간에 참석하는데 재미를 붙였엇던것 같다.
#다시 시작한 엘라스틴 번개
2009년 11월 20일. 생일을 앞두고 무언가 색다른 이벤트를 하고 싶었다. 많은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욕심은 오히려 한명의 제대로된 친구조차 만들지 못했다. 어쩌면 한명의 진정한 친구가 있었지만 그 친구보다 다른 친구에 대한 욕심을 냈었던것 같기도 하다. 2009년 11월 20일 '생일'을 앞두고 무언가 남들이 못해본 것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당시 모임을 하던 '은비형'한테 부탁해 '생일파티 겸 술번개'를 열었다. 오랜만에 엘라스틴을 만나서 반가웠다는 친구들, 그런 친구들이 인사를 해주고 하는데 다시 무언가 내가 '이 자리에 리더'가 된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회생활을 하는데 '안좋은 사건'이 있어 인생을 사실상 포기하려 할때 '술번개'가 나를 지탱해줄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엘라스틴 번개 물좋대' '엘라스틴 번개가 1등이래'라고 말하면 기분이 좋았고, 반면에 모임을 비난하는 글이 올라오면 나를 욕하는거 같아 일일히 댓글을 달면서 싸웠다.
그렇게 다시 시작한 엘라스틴 술번개도 '최저가, 최저연령, 1등번개,최고인원'이라는 타이틀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했다. 그렇게 모임을 다시 시작했고 이반시티에 '광고'도 사비로 띄웠다. 술번개 최초의 '유료광고' 였다. 그리고 술번개에서 '리더가 될수 있는 만족감'을 사회생활로 확대하고 싶었던것 같기도 하다. 신촌에서 100명이 참석하는 술번개가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보다 더 많은 인원을 모아야겠다는 욕심이 생겨서 100명이 참가하는 크리스마스 파티를 준비했다.
스포티형과 내가 둘이서 '아이리스 1층'을 빌리고 원래는 '개그맨' 등 연예인을 섭외할 계획으로 백방으로 알아보다가 400만원을 달라는 말에 70만원을 주고 '마술사'를 섭외했고, 무언가 선물도 나눠주는 그런 크리스마스 파티를 기획했다. 마술공연은 성공적이었지만 이 많은 인원이 통솔이 안됐다. 안주랑 술 비치하기도 어려웠고.ㅠㅠ 상대적으로 인원은 많았지만 볼거리가 별로 없는 그런 자리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실패했지만 주눅들지 않고 2차 이벤트를 기획했다. 가평에 있는 친척이 운영하는 팬션에, 생맥주 기계를 주문했고, 그리고 '한우+와규'로 마장동에 있는 아는 지인에게 부탁해 고기를 주문해 MT기획을 했다. 어린시절 카페 운영자, 번개방장들을 총 규합해 88명정도가 참가한채 출동! 갈때는 분위기가 좋았는데 밤중에 취기가 오른 한 참가자가 싸움이 났고, 그 과정에서 옆에 있던 텐트에 계신 분들과 마찰이 벌어졌다. 결국 팬션에서 쫒겨났고 인근에 펜션을 급하게 잡고, 밤중에 급하게 이동해야만 했다. 대규모 MT를 혼자서 준비했고, 도우미 없이 혼자서 이끌겠다는 생각때문에 돈도 돈대로 깨졌지만, 일단은 불안했던게 '엘라스틴'이라는 이름이 최악의 모임으로 기록되지 않기를 바랬다.
통장에 있던 돈을 뽑아서 급하게 방을 잡아주고, 아침에 버스를 다시 대절해서 서울로 오자마자 '아이리스 호프'에 이모에게 부탁해 '무료 번개'를 진행했다. 다행이도 그날 그 고생을 한데 대해 박수를 치는 분들이 있었고, 위로해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결과적으로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방대한 인원을 통솔할 능력도 없으면서 일단 인원부터 받아보고자 한 운영자의 책임이었고, 술먹고 벌어질 '주사' 및 난동을 방지하지 못한 책임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렇게 엘라스틴 모임은 재기에 성공했다.
# 180명이 모인 대형 술번개
2010년 4월 종로에서 '술번개 박람회'를 기획했다. 방장 다섯명이 각 방으로 나누고 '종이 번호표'를 뽑아 방을 통째로 옮겨다니며 자리를 바꾸는 방식. 각 방장의 진행스타일을 비교하고, 각 방에서 대쉬를 하는 형태의 진행을 했고 여러 방장들을 규합했다. 그렇게 강은비, 전설1, 훈남26세, 엘라스틴, 신림준, 스포티 등 번개방장 6명이 연합해 총인원 177명이 참석하는 대규모 모임을 열었다. 앞서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전설1에게 '회비관리'를 부탁했고, 나머지들이 각각 방을 차지하고 진행하고 운영하는 역할을 맡았다. 결과는 대 성공. 1차 크리스마스 이벤트와 2차 MT의 실패를 딛고, 사람들이 이벤트 기획에 대해 칭찬했고, 다음에 똑같은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엘라스틴 번개'가 인권단체는 아니었고, 기업도 아니었지만 나는 '엘라스틴 번개'를 '브랜드화'시키고 '차별화' 시키고 싶었다. 이계덕이라는 이름으로 자랑할 것이 없었기에 내 모임 자체가 내 분신이라고 생각했었던것 같다. 그래서 엘라스틴 번개의 웹사이트인 이반미팅닷컴을 만들었고, 이반미팅닷컴이라는 이름으로 '공익사업'도 진행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해 이반미팅 닷컴이라는 이름으로 '첫 후원'을 퀴어문화축제에 하고 '스폰서'들이 들어가는 '표지'에 이반미팅닷컴 광고를 실었다.
이반미팅닷컴은 당시 현존하던 번개방장들을 모두 규합하여 '별도의 홍보카테고리'를 만들고 이를 양지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구상을 했다. 경쟁체제인 술번개를 '협력형'으로 바꾸는 식으로 술번개 방장들의 고정적 수입을 창출시킨다는 목적도 있었다. 이반미팅닷컴에서 술번개방장을 고용하여 하루 난립하는 대형술번개를 월화수목금토로 나눠 한사람을 밀어주고, 그렇게 발생하는 수익을 방장들에게 고정수입으로 나눠주는 형태다. 나는 이것이 가능할것으로 봤다.
사실 술번개 방장은 '비정규직'보다 못한 완전 영업직이다. 최저임금도 보장이 안되고, 사람들이 얼마나 오느냐, 그날 술을 얼마나 마시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그리고 소문 하나 잘못나면 무너지는..어린시절 재미로 술번개를 시작했고, 그렇게 나온 친구들도 많지만 술번개를 생업으로 하는 사람에게는 '고정적인 수입'이 정말 바랄수밖에 없던 시절이다.그래서 나는 '내가 은행에서 돈을 받으니까 그걸 바탕으로 부족분을 내 돈으로 채워줄테니 이렇게 해보자'고 제안했다.하지만 이 제안은 당시 모임방장을 하던 사람들이 나를 믿지 못하기도 했고, 거부하는 사람이 있어 결국 실패했다.
어떤이들은 '술번개하면 돈 많이벌죠?'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 물론 많이 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30여명 이상만 온다면 13000원씩의 회비를 걷었을때 남는 돈이 '일용직 노동자'보다야 많이 벌것이다. 월 300정도 벌수 있다면 못벌것도 없을것 같다. 그런데 이게 잠시뿐이다. 당시에 잘나가던 D방장이 이제는 J와 C에 밀린 상태인것처럼 '1등번개'를 유지할수 있는 것은 잠시뿐이다. 만약 술번개가 잘되고,사람도 많이오고, 1등번개를 항상 유지할수 있는 상태에서 회비도 13000원씩 꼬박꼬박 받을수 있다고 치자. 그 인기는 짧으면 몇달, 길어야 1~2년이다.
1~2년동안 목돈을 만질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1~2년이 지난 이후 술번개방장은 그동안의 다른 일을 한 경력도 없기에 일반직장에 취직이 어려워지고, 계속 모임을 하더라도 사람이 안오게 되면 생계가 궁핍해진다. 사람들은 항상 새로운 것을 찾고, 더 나은 것을 찾기 때문이다. 또 그 1~2년동안 잘되는 방장 한두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하루 5만원'도 벌까 말까하다. 모임을 열기만 하면 사람들이 모이는 방장과 모임을 열기만 하면 방폭하다가 어쩌다 한번 사람이 오는 번개의 차이라고 할까?
어쨌든 이반미팅닷컴의 원대한 구상이 실패하고 그 다음으로 시도했던 것은 '시민사회운동, 인권운동'과 '술번개'의 결합이었다. 이태원은 노는 곳이다. 술번개도 노는 곳이다. 하지만 이태원과 달리 술번개는 '방장'이 '진행'을 할 막강한 권한이 있고, 나이, 사는 곳 등의 기본적의 대화주제 외에 대화주제는 방장이 만들수 있다. 그래서 나는 술번개 브랜드를 인권과 결합하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시작한게 '지하철, 버스, 현수막' 게시대에 성소수자 차별금지 광고를 진행한 것이었고, 그 과정을 술번개에서 브리핑하고, 동시에 정치사회적인 어떤 의미를 담기도 했다. '선거전날'은 술번개를 열지 말자는 캠페인을 제안하기도 했고, 다른 방장 형들한테 '오늘 하루만 쉬어달라'고 요청해서 두 사람빼고 모두 쉬게 만들기도 했었다. 솔직히 의미없는 제안이었지만 당시에는 왠지 그래야만 했던것 같다.
* 내가 술번개를 중단한 이유는
그렇게 시작한 술번개를 중단하게 된 이유는 일단 '은행'을 일하면서 벌어둔 돈을 술번개에서 거의 탕진하게 됐을대쯤이었고, 신촌에서 5000원 술번개를 하다가 중간에 참가자들이 '내 리드'에 안따라주고 뒷말이 나오는데 대한 실망감때문이기도 했다. 번개에서 '리드'하는 것은 좋았으나 '비난' 받는 것은 싫었다고 해야할까? 그래서 술번개를 접겠다고 생각하게 됐고 '마지막'으로 신촌에서 천원 번개를 제안했다. 사실 말이 천원이지 결국 내가 쏘는것이나 마찮가지인 행사였다.
왜 그런 출혈을 감수하면서까지 천원번개를 했냐면 '엘라스틴 술번개'를 '전설적인 브랜드'로 남기고 싶었다. 최다인원, 최저연령, 최저회비의 전설. 그러면서 남들처럼 생계형도 아니고 동시에 '공익'적인 이벤트 기획이 남달랐던 번개로 나기고 싶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그렇게 남겼다.
*나는 왜 엘라스틴 술모임에 집착했을까?
술번개 참석자나 술번개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의아해한다. 내가 왜 엘라스틴 술모임에 내 돈을 써가면서 집착했는지..솔직히 그건 나도 모르겠다. 추정해보지만 아마도 나는 '술번개'가 내가 잘하는 것들중에 하나라고 생각했고, 술번개에서 사람들을 연결시키도록 진행하는것에 대해서 남들보다 잘한다고 생각했고, 최소한 '기획'면에서 남들과 다른 이벤트를 계속 만들어 왔고, 그것을 실험하고 먹히는데 쾌감을 느꼈다. 사회에서 아무의미없는 일이었지만 그때는 그랬다.
그리고 지금은 술번개 방장이 아니지만 '욕심'은 아직 남아있다. 진행하고 싶은 욕심, 리드하고 싶은 욕심. 그리고 엘라스틴 술번개가 '한국게이의 독특한 문화'로 자리잡고, 인정받고 싶은 욕심. 누군가에게 아무것도 아닌 술자리이지만 내게는 아니었다. 누군가는 관심없는 집착이기도 하다. 퀴어문화축제에 여러 스폰서 명단에 '내 모임 이름'을 넣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나에 대한 자괴감이 커서인것 같기도 하다. 나에 대한 자괴감이 크니 술번개라는 어떤 내 분신을 만들고, 게임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비집고 들어갈수 없는 공간을 어떤 다른 모임을 만들고 내세워 들어가서 일원이 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던것도 같다. 가장 큰 것은 '소속감'이었던것 같다. 내가 어딘가에 소속되었고, 나를 정의하는 무언가가 필요했던건지도 모른다. 아무튼 두서없는 길이지만 1편은 여기서 마친다. 나는 '술번개 방장'이라는 사람들의 삶을 영화로 재조명하고 싶다. 비단 내이야기가 아니라 술번개라는 것은 '한국게이들의 독특한 문화'로써 '술번개 방장'에 다양한 사연과 삶을 알기 때문이다. 단순히 돈때문에? 그 이면에 많은 이야기들이 있고 많은 참가자들이 있었다.
재미삼아 나오는 사람, 외로워서 나오는 사람, 친구를 구하려 나오는 사람, 애인을 구하러 나오는 사람, 정말 술마시러 나오는 사람, 어쩌다가 친구한테 끌려온 사람, 그리고 술번개를 오간 연예인들의 이야기도 있다. 참가자들의 이야기 말고 일단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오해'가 있기도한 술번개 방장 이야기다. 팔리지도 않으면서, 그리고 제대로된 일자리를 못구하고 번개로 생계를 유지하는 생계형 방장들. 다음에 쓰는 '생계형 방장' 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과거 '중한 병'에 걸린 할머니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술번개를 했던 모 방장의 이야기, 술번개를 통해 하루 벌이해 이혼한뒤 자신에 아들에게 매달 생활비를 붙여주는 모 방장의 이야기 등 회고록이라면 회고록이고..아무튼 정리하는글을 한번 써보고 싶다.
번개 모임에 이런 측면들이 있었구나! 잘 읽었어
그런데 네 글을 읽다보니, 우울하고 원망들이 읽혀지네
많이 힘든거니 요새
다음에 글들이 지나치게 개인적이여서 누군가의 개인정보를 드러내면 네가 누군가로부터 비난받을 수도 있을 거 같다. 걱정이 되는구나
네가 두루 살피고 신중하겠지만 말이야
너의 개인적인 작업들이 스스로를 잘 돌보고 보살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