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욕구는 당신의 욕구와 얼마나 맞닿아있을까
– LGBTI 커뮤니티 사회적 욕구조사 “게이” 워크숍 참여기
3년이라는 기간. 총 4,176명의 응답. 그 중 3,159명의 유효답변. 총 사업비 3천만원. 183명의 후원자.
모두 <한국 LGBTI 커뮤니티 사회적 욕구조사>의 결과를 나타내는 숫자들이다. 쉽게 가늠조차 하기 힘든, 어마어마한 인력과 비용이 투입되어 세상에 태어난 성과물이 얼마나 의미 있고 유용할는지는 두 말 하면 잔소리일 터. (이에 대해선 이미 8월호 소식지에 글이 실렸으니 참고하시라.) 그런데 고민은 이제부터다. 이 보배 같은 녀석이 도대체 ‘나와 우리에게는 뭐가 좋을까?’
궁금했다. 사실 선착순 2천명 기프티콘 증정 이벤트에 혹해서 별 생각 없이 참여한 조사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닌 결과로 나온 지금에 이르러 당신의 욕구와 얼마나 맞닿아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나와 다른 정체성을 지닌 성소수자의 욕구도 궁금했고, 같은 게이로서의 다른 이들의 생각도 듣길 원했다. 게이의 욕구라고 하면 그저 ‘예쁜 옷을 입고 멋진 남자를 만나 우아한 밥을 먹고, 아늑한 곳에서 그와 함께 뜨거운 섹스를 한 후 꼭 껴안고 잠드는’ 게 중요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그게 다가 아니라니.
그러고 보니 이번 조사 이전에는 성소수자로서의 사회적인 욕구에 대해 듣지도 보지도 생각한 적도 없다는 걸 새삼 떠올리며, 9월부터 시작한 집단별 워크숍 중 10월 17일 열린 “게이” 워크숍에 참여했다. 의무도 아니고, 공동주관 행사에 얼마나 올까 했던 의구심은 금세 깨져버렸다. 많은 성소수자들이 자리를 채워주었고 보조의자까지 필요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믿고 듣는 한가람 변호사의 설명회는 주요 결과보고서를 다시 들춰보게 만들었다. 정말 그런 결과가 나왔단 말이야? 왜? 아무래도 다른 정체성 집단들과 비슷한 결과보다 유난히 두드러지는 결과들에 더 눈이 갔다. 커밍아웃 비율이 현저하게 낮은 건 어째서일지, 근로소득이 더 높은 건 아직 이 사회에서 생물학적 성(Sex)의 이점 때문인 건지, ‘남성성’의 압력 때문에 (본인을 포함하여) 길거리에서 손잡기를 꺼리는 비율이 확연히 높은 건지 등등. 거기에 간담회에서 나온 얘기들까지를 덧붙여 몇 가지 주제에 대해 썰을 풀고자 한다.
# 커뮤니티, 해방구or서바이벌?
올해 초 한 친구에게 되도 않는 기갈을 부린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지금 활동하고 있는 커뮤니티에서 동질감과 많은 위로를 받아 마냥 헤벌레했는데, 앞에 앉아있던 친구가 커뮤니티는 서바이벌이며 정글의 법칙이 있다는 얘기를 한 것이다. 그때 발끈한 걸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물론 커뮤니티에서 ‘숨통이 트인다’는 얘기도 하고, 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면 해방감도 느끼지만, 왠지 애인을 만들어야 될 것 같고 무엇인가 보탬이 돼야 할 것 같으며 끊임없이 (끼든 기갈이든 개성이든) 매력을 뿜어내야 이 안전망에서 살아남을 것 같은 분위기, 누구나 한번쯤은 느껴봤을 것이다. 대부분의 게이가 온라인(97.3%) 및 오프라인(78.6%) 커뮤니티에 참여하고 있지만, 커뮤니티로부터 배제당한 경험이라든지 커뮤니티가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안기 위한 대책 등에 대해서는 좀 더 얘기가 필요해 보인다.
# 섹스, 얼마나 중요할까?
섹스를 사회적 욕구와 어떻게 결부 지을 수 있을지 의아하기도 하지만, 애정(사랑)의 측면에서는 섹스에 대한 얘기도 핫이슈일 것이다. 섹스를 해야만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 섹스 없는 연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사람도 있지만, 반면 굳이 섹스를 안 해도 사랑할 수 있고 나이가 들거나 길게 사귀면 섹스가 덜 중요하다고도 한다. 현재 연애하고 있는(42.0%) 게이, 특히 평균 연애기간(2년 3개월)을 넘긴 게이커플에게 묻고 싶다. 정말 섹스 외에 더 중요한 게 생기는가? 혹 다른 남자에게 눈길을 준 적은 없는 걸까.
# 게이스북, 인기(사회성)의 척도일까?
소위 잘 나가는 게이에게는 인기의 방증이 되고, 그저 그런 게이에게는 푸념과 가십거리의 장이 되는 곳, 게이스북. 과연 ‘게북스타’들은 뛰어난 사회성을 발휘해 뭇 게이들을 홀리는 것일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좋아요’가 삽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을 떠올려보면 게이스북은 심심풀이 땅콩에 불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자기를 어필하고 인정을 바라는 모습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그렇게 해서 ‘좋아요’를 많이 받으면 친구관계가 좋아지고 자긍심이 생기는 것인지 궁금하다. 물론 온라인 인맥이 중요한 것도 잘 알고 있고 ‘좋아요’ 많이 받는다고 싫어할 사람은 없겠지만 말이다.
# 돈, 직업은 중요하지 않지만 돈은 중요하다?
돈에 대한 게이들의 선호는 확실했다. ‘경제력과 자유로움 둘 다 잡고 싶다’, ‘잘 생기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솔직한 답변들에 웃음이 나오는 건 공감 때문일까 아니면 씁쓸함이 더 큰 걸까. 확실히 게이가 돈을 잘 버는 것 같지만, 게이 간 소득격차도 무시 못할 것이다. 게이들의 소비문화가 다른 정체성 집단에 비해 얼마나 큰가는 클럽 수나 게토형성만 봐도 알 수 있다. 과연 그렇다면 저축이나 노후 대비는 얼마나 하는 걸까. 외모가 여전히 경쟁력인 상황에서 ‘얼굴에 월급을 주자’는 어느 게이의 외침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게이” 워크숍 이후에도 <한국 LGBTI 커뮤니티 사회적 욕구조사>에 대한 소식이 계속 들려왔다. 10월 24일은 친구사이 내 욕구조사 읽기모임이 시작된 날이자 최종보고서가 공개된 날이다. (http://chingusai.net/xe/library/416855) 제본되어 나온 최종보고서를 직접 만져보았다. 500페이지에 이르는 보고서의 무게가, 비단 종이뿐만 아니라 조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마음의 무게까지 더해져 그런지 묵직하게 느껴졌다. 11월 10일 전국 도서관, 상담센터, 정신건강증진센터 등에 발송된 394권의 주요 결과보고서와 38권의 최종보고서는 앞으로 누구의 손을 거쳐 어떻게 활용될지 자못 궁금하다.
이번 욕구조사를 통해 개인적으로 변화된 점은, 나뿐만이 아닌 다른 성소수자의 욕구, 또 우리나라만이 아닌 전세계 LGBTI 관련 이슈에 더 큰 관심이 생겼다는 것이다. 팀 쿡(애플 CEO) 같은 유명인이 커밍아웃했다는 소식에 한번 더 눈길이 갔고, 지난 9월 유엔인권이사회에서 LGBTI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차별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는 소식에는 내 일처럼 기뻐했다(우리나라도 찬성표를 던졌다). 11월 20일 예정이었던 ‘서울인권헌장 제정 공청회’가 호모포비아들의 난입으로 무산됐다는 뉴스에는 온 종일 마음이 무거웠다. 이제 이 모든 일들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이번에 나온 욕구조사 결과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나의 욕구만큼 당신의 욕구도 중요하고, 우리 모두의 욕구가 충족되기 위해서는 꾸준한 성소수자/비성소수자들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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