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구석 - <끝말잇기>를 찍고 나서 by 물병자리
예상된 혼란이 끝나고, 구겨진 안쪽에 하나의 모서리가 짙은 그림자를 가지고 드러났다.
뭘 대단한 걸 만들려고 한 게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여러분은 대단한 예술 하고 계신 거예요.’
선생님이 말했다.
‘예. 그렇죠.’
난 조그맣고 짧게 대답했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 마치, 몇 가닥밖에 없는 문장들이 대단해보였다. 갑자기 종이와 내 사이가 어색해졌다.
해가 저문다. 남은 열기를 느끼며 낮의 모서리에서 걸어가다 보면 이상한 기운을 마주한다. 빛을 반사하는 모든 것이 붉고 샛노래진다. 마치 눈이 온 것처럼 밀도가 높아진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도 자기 걸음을 세지 못하고 머리를 여러 각도로 세웠다. 짧은 서사가 끝나고, 내 시각은 완전히 변했다. 분주하게 요란한 소리를 내는 다른 모서리에 도착한 것이다.
게이봉박두 수업의 공식적인 촬영기간이 시작됐다. 아직 방학을 하지 않아서 스케쥴을 잡기 어려웠다. 물론 내가 게으른 탓도 있겠지만. 딱히 빨리 해치워야겠단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느긋하게 기다렸다.
장비대여일이 점점 다가오지만 아무것도 한 게 없다. 시나리오는 나왔지만 수정할 곳이 많았다. 방학이 끝나면 시간이 많아서 여유롭게 작업을 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내 착각이었다. 너무 귀찮다. 하루의 일과는 밖을 돌아다니고. 책을 읽다 컴퓨터를 뒤적거리는 것이 주였고. 마무리는 수영장에 갔다 와서 바로 침대에 누워 잤다.
배우를 한 명 더 섭외를 해야 되서 섭외를 했지만. 조금 불안하다. 둘이 잘 맞을지는 내가 조절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까.
촬영이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다. 배우들이 호흡이 좋아서 수월하게 찍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분량이 얼마 없는 것 같아 불안하다. 모든 장면이 밤 야외에서 일어나는 상황이라 시간이 부족했다. 이틀 동안 장비를 옮기느라 잠도 자지 못했다. 좀 자고 나서 촬영 소스를 체크해야겠다.
내부시사회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니 벌써 아침이 되어있었다. 노트북을 꺼내 뒤적거리다 침대에 드러누웠다. 입대까지 5일 밖에 남지 않았다. 편집할게 아직 많이 남아있는데. 다 끝낼 수 있을까. 갑자기 조금 무기력 해졌다. 노을을 보고서 그냥 지나치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냥 그건 확률게임이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너 세상 못 살아’
아는 형이 말했다.
‘네. 그쵸.’
나는 습관적으로 대답했다. 그 형은 혼자서 소주를 두병 좀 안되게 마셨다. 해가 떴고, 술에 많이 취한 줄만 알았던 그 형은 남은 술은 가방에 조심스레 챙겨갔다. 나는 조금 그 형이 존경스러웠다.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 모서리를 매만지다 보면 이상한 것들이 자꾸 떠오른다. 배시시 웃게 만드는 것들. 이해할 수 없어서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도 있고. 엄마는 이런 나를 항상 걱정한다. 나도 내가 걱정된다. 정말로 뭐가 대단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 낯선 구석들이 당신들에게 기꺼이 착상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여름밤>, 그 후 by 상언니
"아야 머리가 아플걸..잠도 오지 않을걸.."
지_보이스 공연을 앞두고 있는 요즘 거리를 걷다보면 항상 이 부분을 중얼거리고 한다.
(절대 네버 네버 10월 9일 6시 마포아트센터에서 지_보이스 정기공연이 있다는 홍보글이 아닙니다!)
첫 키스, 첫사랑, 첫 경험(?)처럼 처음이란 말은 사람들 가슴을 설레게 하지만 게이봉박두는 마치 사랑니처럼 경험하는 내내 날 아프게 하고 2번의 상영회를 마친 지금은 잇몸 한 구석이 뻥 뚫린 것처럼 마음 한편이 먹먹해진다.
# 악마의 유혹
"형 내가 도와줄 테니 한 번 해봐~"
지난 2기에 성공적인 입봉을 마친 김현감독의 말이다. 사실 나는 신청마감일 새벽에나 겨우 신청할 수가 있었다. ‘잘 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을까?’란 끊임없는 질문에 난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참 이기적일지 모르겠지만
난 도움을 주는 것도 도움을 받는 것도 익숙지 않은 사람이다. 하고 싶단 말 한마디, 도와 달란 한마디에 반색하며 달려와 준 친구사이 친구들이 없었다면 아마도 오늘의 <여름밤>은 없었을 거란 생각을 해 본다.
# 날 울리는 그 사람
"난 내가 먼저 좋아했던 사람이 한 번도 날 좋아해준 적이 없어." 어떤 술자리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어차피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란 걸 알아서일까?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나서는 누군가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해 본적이 없다. 영화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웬 사랑타령이냐고 물으신다면 딱히 할 말은 없으나 기초반 수업과정 중 나를 표현하는 다큐 수업은 나에게 꽤나 용기가 필요했던 작업이었다. 내가 아니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한번은 꼭 말해보고 싶었다.
# 배우와 신림번개
어플 또는 채팅을 통해서 이어지는 즉석만남을 우리는 소위 번개라 지칭한다. 이쯤에서 캐스팅 비화를 하나 밝히자면 캐스팅 중 제일 어려웠던 중년여배우의 캐스팅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2시간이다. <여름밤>의 엄마 역을 훌륭히 소화해준 배우 최인순 님은 버스로 10분 거리에 살고 있어 프로필 보고 연락 이후 2시간 뒤 바로 미팅을 하는 열정을 보여주셨다는..
제목만 보고 기대를 하신 분이 계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보너스!
마지막까지 영화를 유심히 보신 분들은 알고 계시겠지만... 영화에는 나오지 않으나 크레딧에만 이름이 올라가는 남자친구 역할의 크리스는 4시간의 촬영에도 불구하고 발연기로 통편집을 당하는 영광을!!
# 사정전에서 원나잇
여름밤이란 타이틀에 맞게 2회차 촬영 모두 밤씬. 특히나 마지막 촬영지인 풍년집(미남 CEO가 운영하는 종로의 소문난 고기집... 줄 수 있는 게 PPL밖에 없다 ㅠㅠ) 촬영이 새벽 3시에 종료되었다. 아침 8시까지 이어진 스텝들과 배우들과의 뒤풀이는 결국 날 사정전에서 돗자리를 깔고 잠들게 했다는.. 출근하던 상근자 낙타를 서프라이즈하게 만들었다는 후문이..
기획 당시 <여름밤>의 원제는 <One Summer Night>으로 원나잇이 생각나지만, 제목만큼 내용이 섹시하지 않다는 스텝들의 질타로 여름밤으로 타이틀을 변경하게 되었다. 이 에피소드도 제목만큼 내용이 섹시하진 않다.
지금까지 총 두 번의 상영회 모두 전석 매진! 많이 부족한 작품에 관객들 앞에 설 때마다 손발이 오그라들어 없어질 것 같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또 영화를 찍겠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지금은 당장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지난 몇 개월 동안 함께 웃고 울며 동고동락했던 6인의 감독들의 말을 빌리자면..
"언젠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또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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