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8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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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추천 도서]
『청춘 액션 플랜—캠퍼스 비밀 삽질 프로젝트』
황윤지, 들녘, 2011.
청춘 액션 플랜 - 캠퍼스 비밀 삽질 프로젝트
건축학은 물론이고 조경학, 도시학,환경학에 문외한인데도 어쩌다 보니 또 다시 공동체에 대한 책을 다루게 됐다.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더불어 살기’가 중요한 화두라는 생각이 갈수록 강해지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이번에는 전에 소개한 성미산 마을같은 거주자 중심의 지역 공동체 대신, 유동적이고 일시적인 공동체에 대해 얘기해보기로 한다.
『청춘 액션 플랜—캠퍼스 비밀 삽질 프로젝트』은 학교도 전공도 성별도 다른 몇 명의 대학생이 단순히 ‘재미있겠다’는 생각으로 캠퍼스 구석에 학교 당국 몰래(!) 텃밭을 가꾸는 과정과 결실을 그린다. 우연찮게도 바로 친구 사이 일부 회원이 2012년 봄에 사무실 주변 인도의 자투리땅에 시작한 ‘게릴라 가드닝’(올해 ‘게이 가드닝’으로 이름을 바꿨다)과 꼭 닮았다.
‘게릴라 가드닝’이란 버려지거나 빈 공유지에 ‘치고 빠지기’식으로 꽃밭이나 채소밭을 가꾸는 일로, 멀리는 1960년대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가까이는2007년에 시작된 외국의 운동이다. 그렇다면 이 운동을 시작한 사람들은 이미 중앙 정부 등 각급 지자체가 제공하는 공원이 있는데도 왜 이런 탈법·불법적 모험을 감행했을까. 그것은 공공 부지란 국가가 규제하는 ‘금지 구역’이 아니라 사회를 이루는 모든 시민의 것이며, 따라서 ‘보통 사람들’을 위해 쓰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즉 사익이 아닌 공익을 바탕으로 땅의 소유권과 향유권을 다시 생각하고 정의하자는 것이다. 그 결과, 아름다운 식물로 환경이 개선되는 건 물론이고 지역 주민의 유대감이 커진다. 게다가 대기업의 일방적 생산·유통망에서 벗어나 믿을 수 있는 채소를 시민이 직접 키워 먹고 나눔으로써 건강권과 생존권을 꾀하기도 한다. 또한 가령 호모포비아 살인 사건 현장에 피해자를 기리는 꽃과 푯말을 심음으로써 사회적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2011~12년 지구촌을 달군 ‘점거하라(Occupy)’ 운동을 기억할 것이다. 물론 이는 세계적 경기 불황뿐 아니라 그것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금융 기관과 다국적 회사의 횡포, 정부의 기업·부유층 중심 정책, 사회 경제적 양극화에 시달리다 못한 남녀 노소가 들고 일어난 사건이었다. 1960년대 이래 가장 큰 국제적 시민 저항이었을지 모르는 이 운동은 인구의 99%임에도 불구하고 그간 무시 당한 약자들이 공원 등 공적 공간을 일시적으로나마 점령하고 함께 목소리를 냄으로써 막강하며 비정한 국가와 기업으로부터 삶과 환경과 주권을 되찾아오려는, ‘다시 주인 되기’ 선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얘기가 거창해졌지만, 게릴라 가드닝과 ‘점거하라’ 운동 모두 사회와 환경이란 법적·경제적 소유를 떠나 그 구성원 전부의 것이며, 따라서 소수의 이익이나 규제에 좌우돼선 안 된다는 생각을 공유한다. 이는 민주주의 및 시민권과도 연결되는데, 저번에 언급한 ‘마레연’의 마포구 성소수자 주민 존재 선언 현수막은 물론이고 친구 사이가 종로 포장 마차 골목에 때때로 내거는 행사 관련 현수막 모두 ‘우리는 여러분과 같은 공간에 이웃으로서 존재하며, 이 사회를 이루는 시민으로서 똑같은 권리와 존엄성을 갖는다’는 점을 드러내고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맥락을 같이 한다.
그렇다면 이번에 소개하는 책의 주인공들이 비밀 텃밭을 만든 대학은 누구의 것이며, 이들의 행동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슬프고 분통 터지지만, 우리네 대학은 교육 기관이기를 거의 포기한 것같다. 국공립과 사립을 막론하고 완전 ‘자율화’된 등록금과 기성회비 장사로 실컷 배를 불리며, 대기업 로고를 이마에 써 붙인 으리으리한 건물 유치 경쟁으로 때깔은 좋아졌지만, 이같은 외적 ‘발전’이 내실을 뜻하진 않는다. ‘반값 등록금’에 대한 처절한 요구가 정치·사회적 문제가 될 만큼 비용은 엄청난데도 대학 졸업장은 취업을 보장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대학이 본연의 존재 이유, 즉 나와 남과 세상과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다시 보게 만드는 교양 교육을 잘하는 건 또 아니다. 오히려 ‘비인기’라는 이유로 가차 없이 학과를 통폐합함으로써 기초 학문의 다양성을 나서서 해치고 있다. 실제 원동력인 학벌주의를 타파하기는커녕 강화하고 악용해왔다는 원죄 역시 씻을 수 없다. 게다가 그나마 맡아온 순기능, 즉 고등 교육을 통한 사회적 계층 이동마저 과도한 학비와 영어 지상주의 등으로 원천 봉쇄하고 ‘귀족 학교’로 변질됨으로써 학생들을 세상에 나가기도 전에 빚쟁이로 만들고 있다. 그 결과, 대학은 아주 비싼 ‘취직 준비소’이자 ‘인맥 양성소’가 돼버렸다.
이와 비슷하게 요즘엔 순전히 ‘재미있어서’ 뭔가를 한다는 건 시간과 돈(또는 적어도 둘 중 하나)이 많거나 ‘현실성’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꼬마들도 맘껏 뛰어놀 자유와 시간이 없는 곳이 돼버렸다. 오죽하면 놀이터 대신 학원에 가야 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말이 나오겠는가. 이미 유치원에서 시작되는 ‘프로그램 인생’은 각급 학교를 거치는 기간은 물론이고 그 이후의 성년기 전체를 지배하게 됐다.이처럼 일과가 시간 단위로 꽉 짜여 있을 뿐 아니라 일생의 단계마다 ‘클리어’해야 하는 목표가 세밀하고 분명하며, 그 중 하나라도 달성 못하면 낙오자가 된다는 두려움과 가능성이 늘 목 바로 위에 걸려 있는 탓에 행복은 ‘먼 훗날의 것’으로 끝없이 미뤄진다. 그 결과, 우리는 매순간을 충만하게 느끼고 오늘을 충실하게 살지 못하는 허깨비가 돼버렸다. 거기에서 비롯되는 초조함, 박탈감, 불만은 역시나 허상인 휘황 찬란한 광고가 부추기는 상품의 구매와 말초적·소비적 향락으로 달래고 잊으려 하지만, 남는 것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공허함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이렇게 사회가 미리 정해놓은 ‘정도’에서 벗어나면 ‘비정상’이라는 딱지가 붙여지고 왕따를 당하기 십상이기에, 지극히 피상적이지만 남들이 나를 손쉽게 파악하고 평가할 수 있는 수치, 자격증, 명함 등에 자신을 끼워 맞추게 된다.
이런 상황이니 ‘재미’를 위해 소매를 걷어붙인 이 책의 게릴라 농부들은 더더욱 느닷없고 엉뚱하다. 화분 하나 제대로 키워본 적 없는 이들은 그야말로 좌충 우돌하며 텃밭 가꾸기를 배워가는데, 그 과정은 한 편의 시트콤 그 자체이다. 일단 직접 먹으려고 기르는 것이니 유기농 재배법을 쓰기로 하는데, 자신의 소변을 페트병에 고이 담아 자취방에 쌓아둘 뿐 아니라 적극적인 ‘오줌 전도사’가 되는 등 눈물 겹고도 웃긴 일의 연속이다. 이들은 ‘진짜 농부’인 귀농인들에게 배우고,생협과 함께 직거래 장터도 열며, 각종 공모전에 응모해 애써 마련한 농사비를 텃밭 가꾸기에 고스란히 재투입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주머니까지 탈탈 터는 과정에서 경험과 지식을 축적한다. 나중에는 제법 알려져 각종 매체에 인터뷰도 하게 되지만, 피상적이고 상투적인 언론 방송의 태도에 피로감이 쌓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경험은 아마추어 농사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일단 이들은 밥상에 오르는 상추 한 잎조차 돈만 내면 어디선가 자동으로 뚝딱 나타나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땀과 노력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자란 것이라는 점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먹을 거리는 공장에서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말이다. 그 결과는 음식에 대한 고마움, 지역 농산물의 중요성에 대한 자각, 그리고 생명과 환경에 대한 존중이라는 생각의 변화이다. 지난 번에 언급한 다큐 영화 <춤추는 숲>에서 어느 열세 살 짜리는 무참히 파헤쳐진 성미산 자락에 간신히 남은 나무 한 그루의 뿌리를 다시 흙으로 덮어주며 “생명에는 주인이 없어요”라고 말한다. 이 아이조차도 온몸으로 느꼈듯, 자연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동시에 모든 사람의 것이다. 애초에 다른 모든 동식물이 오로지 인간을 위해 생겨난 건 아니지 않은가. 소유권뿐 아니라 국경선 자체가 바뀌고 세월에 따라 사람이 죽어 없어져도, 자연은 언제나처럼 그대로 있다—우리가 욕심 부린 나머지 망가뜨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 뿐 아니라 이 얼치기 농부들은 ‘학칙’과 ‘불편’을 내세우며 방해를 일삼는 힘 있는 학교 당국과 달리 평소 대학 구성원들이 지나치기 쉬운 교내의 숨은 일꾼들, 즉 구내 식당 아주머니들과 수위 아저씨들 등에게 동지 의식을 느끼게 된다. 즉 수적으로 가장 많으며 돈도 가장 많이 내지만 결국 학교를 떠나기 때문에 ‘잠재적 외부인’이자 약자인 학생들, 그리고 대학의 물리적 운영에 필수적인 일을 도맡지만 제대로 존중 받기는커녕 가려지고 잊혀지기 십상인 또 다른 약자인 육체 노동자들간에 연대가 생긴 것이다. 이같은 연대는 게릴라 가드닝이 다른 대학들로 전파됨으로써 한층 넓어진다.
또한 이들은 자신의 졸업 후에 없어질 운명인 텃밭을 지키고, 더 중요하게는 캠퍼스 농사 경험의 기회를 널리 나누기 위해 자신들의 활동을 1학점 짜리 교양 수업 ‘레알 텃밭 학교’로 정착시키는 데 성공한다. 즉 어차피 처음부터 소유권도 없었지만, 고생스레 가꾼 땅과 거기서 나오는 수확에 대한 향유권을 손수 일할 마음이 있는 모든 이에게 개방하며 이런 땅을 다른 학교로도 확산함으로써 공공의 선을 실천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환경을 비롯한 물질에 대한 소유권과 이용권이 법과 돈에 의해 배타적으로 규정되며 영토의 확장이 영구적이고 이윤 지향적인 사회 전체의 현실과는 정반대이다.
위의 모든 점에서 이 책의 부제는 의미 심장하다. 알다시피 ‘삽질’은 ‘헛짓’을 뜻하는 속어이다. 대학 구내에서 텃밭을 일구는 이 초짜 농사꾼들은 졸업과 취업을 위해 ‘스펙’ 쌓기에 매진할 수밖에 없는 지금의 대다수 대학생과 비교하면 분명 ‘삽질’을 해도 한창 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말 그대로의 삽질, 즉 식물을 제 손으로 키우고 거두는 노동 자체에 즐거움과 보람을 느낄 뿐 아니라 진정 중요하며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소유’가 아니라 바로 ‘관계’와‘경험’이라는 것을 몸으로 배우고 보여준다. 이처럼 미리 짜인 틀을 과감히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설계함으로써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가치를 얻는 이들은 모임의 이름 그대로 변화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이다.
한편 대표 집필자인 황윤지는 자신뿐 아니라 동료들 모두 지겹도록 들었을 진로,특히 게릴라 가드닝과 장래 직업의 관계에 대한 질문에 뚜렷한 대답을 내놓지 않는다. 물론 이는 일단 구성원마다 생각과 욕구가 다르기 때문이지만, 더 중요하게는 모든 활동과 경험을 오로지 돈벌이 등 ‘실용성’과 연결하진 않으며 생업으로서의 농업이 얼마나 고되고 어려운지 조금이나마 깨달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귀농이나 귀촌을 섣불리 얘기하지 않는다. 이 책은 실용서도 성공담도 아니며, 캠퍼스 농사에서 시작된 일련의 변화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저자와 독자 모두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일종의 태도—즉 나와 남, 인간과 자연, 도시와 농촌, 생산과 소비 등의 관계를 어떻게 보고 그 결과로서 어떻게 살 것이냐는 데 있을 것이다. 가령 전국민이 농사를 짓거나 채식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 모두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고, 개인의 선택이 알게 모르게 세상에 영향을 미치며, 따라서 그만큼의 책임감과 공동체 의식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자각에 이르고, 이같은 깨달음을 삶에서 꾸준히 실천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또한 저자는 몇 년 전부터 유행해온 일반화된 세대론, 특히 20대론을 경계한다. 물론 ‘88만원 세대’, ‘1천 유로 세대’ 등의 표현이 보여주듯 구직난과 비정규직화로 인한 청년층의 사회 경제적 손실과 좌절은 엄연한 세계적 현실이다. 하지만 성별, 출신 계층, 교육 수준, 장애 여부, 인종, 출신 국가 등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변수뿐 아니라—가령 법적 성별 정정이 안 된 트랜스젠더의 취업이 극히 힘겨운 데서 드러나듯—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 또한 나이 못지 않게 크게 작용한다는 점을 기억하면 사회 경제적 양극화는 20대만의 일은 아닌 셈이다. 게다가 이같은 ‘민생고’는 심리적 위축, 시간 부족, 건강 악화 등을 야기함으로써 자신의 권리를 되찾고 보호하는 데 필수적인 정치적 관심과 행동을 어렵게 만드는데, 이는 약자의 유일한 자구책인 집단 행동을 가로막아 사회의 경직과 기득권층의 강화로 이어진다. 따라서 정치적 무관심이나 냉소주의를 청년층만의 탓으로 돌리는 일은 부정확하고 부당한 처사이며, 오히려 협력해 체제 자체를 바꾸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다면 이 게릴라 가드너들의 사례는 우리 성소수자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농어촌보다는 가치관이 개방적일 가능성이 높고, 익명성이 보장되며, 인구가 많으니 동류의 사람도 비율상 많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근대 이래의 성소수자 공동체는 주로 도회지를 중심으로 발달해왔다. 또한 자녀는 물론이고 애인이나 친구 등 동거인도 없는 성소수자의 경우, 교통이 편리하고, 필수적인 의료·복지 시설에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알고 지낼 만한 사람이 많다는 점에서 도시 생활이 나이 들수록 유리할 수 있다. 하지만 한적하고 소박한 전원 생활에 대한 꿈은 어쩌란 말인가. 이 책이 보여주는 또 다른 새삼스런 진실은 삶의 터전, 아니, 아무리 한시적이고 인생의 작은 부분이더라도 생활의 현장이란 반드시 내가 돈으로 사서 소유하거나 영구적 또는 장기적으로 점령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비록 먼 거리와 꾸준한 관리의 어려움 탓에 더 이어지진 못했지만, 친구 사이가 2007~08년에 도봉산 부근 주말 농장 일부를 빌려 꾸린 소모임 ‘그린 보이즈’ 역시 도시에서 자연을 접하며, 소유권과 무관하게 땅을 사용하고, 공동 노동과 수확을 즐기며, 유동적이고 일시적인 성소수자 공동체를 실현했다는 점에서 이미 ‘게릴라 가드닝’이자 ‘게이 가드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본의 아니게 심각한 얘기만 잔뜩 늘어놨지만, 이 책은 뭣보다도 깨알같이 재미있다. 또한 주인공들의 열정은 전염성이 강해서, 읽다보면 기분이 무척 좋아진다. 더구나 이들이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실제의—그것도‘잉여력’ 충만한—인물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일구는 작은 변화가 뜻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더욱 힘이 난다. (예비) 대학생이나 가족이 아니더라도, 농사는커녕 화분 가꾸기에 관심이 없더라도, 1주일에 닷새는 고기를 뜯어야 직성이 풀리더라도, ‘보통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자신의 삶과 세상을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바꿔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이 책을 적극 권한다. 그리고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의 후신인 ‘씨앗들 협동 조합’의 홈페이지 주소는 다음과 같으니 한 번 살펴봐도 좋겠다.http://cafe.naver.com/waithongbo
데미지 / 친구사이 정회원
박재경
페니스 윤의 깊은 고민이 느껴지는 글이네 힘내 ^^소식지 항사 잘 읽고 있고 ... 사람들의 관심도 커져서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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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훠, '*니스 윤'이라니... 언어 순화하세요, 구 대표님!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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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 있는 일만큼 스트레스 주는 게 없는데,이렇게 내부 사정이랑 고충 알려주셔서 고맙삼~다들 개인적으로...
윤기성
이건 저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나전 허구입니다. 원 헌드레드 퍼센트 제 머리 속에서 나온 픽션..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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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속았네...! 글재주 덕이군 ^ㅁ^그래도 고충도 있겠고 자유롭게 얘기하고도 싶을 텐데즐겁고 편하게 쓰삼~
좋은 정보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