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 인권 향상에 기여한 공로로 제3회 무지개 인권상을 받은 ‘레즈비언 정치인’ 최현숙 진보신당 확대운영위원이 진보정치와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 김세구 선임기자
“정당함 확신하며 세상과 맞설 때 가장 행복합니다”
여럿이서 중국집에 가서 평소의 취향이나 그날의 기분에 따라 어떤 이들은 자장면을, 또 다른 이들은 짬뽕이나 잡채밥 등을 시켰다고 하자. 결과가 자장면 다섯 명, 짬뽕 두 명, 잡채밥 한 명으로 나왔을 때 다수인 자장면이 소수인 짬뽕이나 잡채밥에 ‘그 따위 음식을 먹느냐’며 탄압하는 일은 없다. 마찬가지로 짬뽕이나 잡채밥이 자장면에 공연히 위축되거나 공포심을 느끼는 일도 상상하기 어렵다. 음식의 선택은 그야말로 취향이기 때문이다. 물론 다수 의견이 한두 가지로 쏠릴 때 소수자들이 그것에 동조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그러나 이 같은 취향도 성(性)의 영역으로 넘어오면 얘기가 달라진다. 흔히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는 인간의 성적 취향이라고 한다. 문자 그대로 이성애는 이성끼리의, 동성애는 동성끼리의 성애(性愛)를 의미하고, 양성애는 이성과 동성 모두에 대한 성애를 뜻한다. 이 가운데 압도적 다수는 당연히 이성애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성적 취향들이 중국집의 음식점처럼 공존하기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오랜 인류의 역사를 통해 이성애만이 성적 취향에서의 절대적 정통성을 인정받았으며, 동성·양성애는 인륜·도덕을 위협하는 이단적 패륜행위로 지탄받아왔기 때문이다.
인권의식의 진전, 차이를 차별로 전이시키지 않으려는 사회적 노력 등으로 동성애는 ‘해괴한 그 무엇’이 아니라 성적 소수자일 뿐이라는 인식이 늘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와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강고하다.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커밍아웃한 뒤 18대 총선에서 진보신당 후보로 서울 종로에서 출마했던 최현숙 진보신당 확대운영위원이 지난 12일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인 ‘친구사이’가 수여하는 제3회 ‘무지개 인권상’을 받았다. 친구사이가 2006년 제정한 무지개 인권상은 성소수자 인권 향상에 주요한 업적을 쌓은 개인 또는 단체에 주는 상이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등에서 정당 활동을 하면서 ‘성 전환자 성별 변경 관련법’ 입법 추진 등에 크게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상을 받은 최현숙을 경향신문 인터뷰실에서 만났다. 그는 이 땅의 진보정치와 성적 소수자 문제 등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망설임 없이 밝혔다.
친구사이가 처음 무지개 인권상 수상 소식을 전해왔을 때 최현숙은 “다 아는 사람들끼리 뭘 상을 주고 받고 그러느냐”며 간곡히 사양했다고 한다. 그러나 주최 측이 “마땅한 적임자가 없으니 꼭 상을 받아야 한다”며 강권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는 것이다. 최현숙은 “정당함을 확신하면서 세상과 맞서는 것은 가장 행복한 일”이라면서 “근본적으로 반역의 피가 흐르는 내게 더욱 열심히 싸우라는 충동질로 알고 상을 받기로 했다”고 말했다. 1회 수상자는 공익법무법인 ‘공감’의 정정훈 변호사, 2회 수상자는 노회찬 전 의원이었다.
최현숙은 민주노동당 여성위원장과 성소수자위원장을 하면서 가부장·이성애 중심의 제도·법률·관행·통념 등과 싸웠다. 성소수자 문제는 시민사회의 영역뿐만 아니라 제도정치영역에서도 다뤄야 한다는 믿음으로 국정감사 등에서 성소수자 의제가 채택되도록 힘을 쏟았으며, 언론과 교과서에서 이 문제가 어떻게 다뤄지는지도 꼼꼼하게 점검했다. 군형법 조항에서 남성간의 동성애를 ‘계간(鷄姦)’으로 표현하며 성추행으로 규정하는 등의 관행에 대해 강력히 문제 제기를 했다. 또 초·중·고교의 국민윤리·체육 교과서에서 동생애를 ‘변태’나 ‘나쁜 성(性)’과 동일시하면서 비하·왜곡하고 있는 점을 발견하고 끈질긴 항의와 설득 끝에 삭제하거나 다른 표현으로 바꾸게 했다. 성전환자성별변경에 관한 특별법의 경우 최현숙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동당의 노력으로 2007년 17대 국회에서 노회찬 의원이 대표발의했으나 법사위에서 논의되다가 폐기되고 말았다. 최현숙에 따르면 성 전환자 수술 비용은 최소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억원대의 돈이 들어가며 수술의 후유증도 만만찮은데 현행법은 성기중심주의에 입각해 성 전환의 요건을 지나치게 까다롭게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번 18대 국회에서 다시 특별법 입법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최현숙은 요즈음 ‘노동의 재개념화를 통한 진보정치의 재구성’이라는 과제와 씨름하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노동의 재개념화’는 기존의 진보정치가 대기업노조의 정규직 남성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노동운동에 치우친 결과 진보정치와 노동운동 모두가 실패했다는 뼈저린 반성에 기초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생산 현장의 임금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노동운동 또는 진보정치는 자본에 갇힌 것이며, 따라서 결코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최현숙은 “아이들을 기르며 가사노동에 몰두하는 전업주부나 노인·장애인의 노동 등 노동의 형태는 실로 다양하다”면서 “계급적 관점을 분명히 견지하면서 이런 노동들을 포괄하고 이것을 다시 지역운동과 결합할 때 진보정치는 재구성되며 이는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최현숙은 또한 ‘무지개 정치’의 실현을 위해 힘을 쏟고 있다. 원래 ‘무지개’는 동성애자들의 상징이었지만 그가 펼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성소수자 인권보호를 훨씬 뛰어넘는 범주의 정치이다. 무지개가 동성애 문화의 상징이 된 것은 1970년대 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최초의 커밍아웃 동성애자 시의원이 암살되자 그를 추모하기 위한 가두시위에서 무지개 깃발이 사용되면서부터라고 한다. 최현숙에 따르면 그동안 한국 사회의 진보는 신자유주의적 양극화에 고통받는 노동자들을 위해 ‘적색’의 실천에 헌신해온 것은 사실이나 생태, 여성, 장애인, 인권, 평화 등 ‘녹색’의 가치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방기해왔다는 것이다. 그는 “진정한 진보는, 그리고 무지개 정치는 계급적 관점을 분명히 하면서도 시민들의 다양한 삶의 가치 전반을 아우르고 보듬을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최현숙이라는 이름 석자는 그가 지난 4월 18대 총선 때 서울 종로에 진보신당 후보로, 그것도 레즈비언 후보로 출마하면서부터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종로 출마자들은 통합민주당 손학규, 한나라당 박진, 자유선진당 정인봉 등 하나같이 거물급이었다. 4년 전 17대 총선에서 그는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출마해야 할 상황이었으나 ‘국회의원 되는 게 과연 내 삶을 행복하게 할 것인가’로 고민하다가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당시 노회찬 사무총장에게 ‘죽을 병이 걸렸다’는 말을 남기고 작은 아이와 함께 훌쩍 인도 여행을 떠났다.
인도에서 돌아온 그는 커밍아웃을 하고 곧바로 성소수자 운동을 시작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당의 18대 총선 출마 제의가 있었고, 그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4년 전과는 달리 성소수자 문제와 녹색정치·진보정치는 결코 제각각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최현숙은 ‘한국 최초의 커밍아웃 레즈비언 후보’임을 공표하면서 종로에 뛰어들었다. 그는 “종로는 이른바 정치 1번지라는 것 외에도 오래 전부터 동성애자들의 커뮤니티가 발달한 곳이라는 상징성도 감안했다”고 말했다.
최현숙은 후보, 운동원, 청중 모두가 어울려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방식으로 선거운동을 전개했다. 인사동,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등에서 펼친 ‘드래그 쇼(Drag Show)’에서 여성은 남성복장으로, 남성은 여성복장으로 나와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고착된 성별 구조를 비틀고 풍자·야유하는 이벤트였다. 또 ‘최현숙 후보’는 거리연설에서 청소년들의 두발과 복장을 규제하는 것과 노인들을 성적 존재로 여기지 않는 것 등은 이들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박탈하는 일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선거운동을 시작하기에 앞서 최현숙은 세 가지를 각오했다고 한다. 후보인 자신과 운동원들이 동성애 혐오범죄에 의해 죽거나 크게 다칠지도 모른다는 것과, 성소수자들이 조롱당했다고 느낄 정도의 선거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것, 마지막으로 부모님들이 딸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알고 의절할지도 모른다는 게 그것이었다. 그러나 세 가지 모두가 가능성으로 끝났다. 선거사무실로 “미친 년!” 등의 비난 전화가 걸려오고, “싫거든!” 등으로 거부감을 보이는 유권자가 있긴 했지만 테러는 발생하지 않았다. 1130표, 득표율 1.61%의 성적에 대해 그는 “선거를 같이한 사람들에게 혹시 큰 상처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면서 “그러나 1%를 훌쩍 넘는 것을 보고 안도했고, 개표방송을 보면서 다함께 박수를 쳤다”고 말했다.
최현숙은 자신이 중·고교 시절 어느 여자 친구에 대해 “우정 이상의 배타적 친밀감”을 느꼈지만 그것이 동성애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 남자와 결혼해 두 아이까지 낳으며 25년간 살아오던 2004년 어느날 운명처럼 ‘인생의 동반자’로 다가온 어떤 여자를 만났다. 최현숙은 그때 ‘아, 내가 이렇구나’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았으며 고통스럽겠지만 자신에게 가해질 비난과 불이익을 감수할 것을 결심했다. 그는 곧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공표했고, 남편과 별거에 들어간 뒤 이혼했다. 최현숙은 “고통스러워했던 남편에게 미안하고 엄마의 결정을 이해해 준 아이들이 지금도 고맙다”고 말했다.
최현숙은 진보정당 활동과 성소수자인권활동을 하기 훨씬 이전부터 비전향장기수들을 도왔다. 80년대 중반 천주교에 입문한 그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활동을 하면서 장기수가족후원회 대표를 맡았다. 그는 한반도라는 공동체 안에서 누가 가장 처절하게 희생당하고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다가 비전향 장기수들이 바로 그들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민중의 정치세력화에 대한 공감과 진보정당에 대한 막연한 부채감’ 때문에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에 참여했고, 올해 봄 민주노동당이 분당됐을 때 노회찬·심상정 전 의원 등과 함께 탈당했다.
정당활동을 하고 있는 현실정치인으로 최현숙이 높이 평가하는 정치인은 단병호 전 의원이다. 그는 “진짜 노동자 출신이라는 점도 있지만 우리 사회에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값진 일”이라면서 “그의 얼굴 주름과 표정에 우리 사회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고 말했다.
지난 4월 선거운동 당시 최현숙은 “성(性)은 인간의 원초적, 근본적, 실존적 문제이며 ‘독한 오르가슴’은 가파른 벽을 기필코 오르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다”면서 “우리 모두 독한 오르가슴을 향해 나아가자”고 유권자들을 ‘선동’한 바 있다. 여성주의와 진보주의가 같이 나아가는 정치를 하고 싶다는 그는 “우리 사회의 모든 선한 이웃들과 함께 정치적 오르가슴을 기필코 느끼고 싶다”고 말했다.
최현숙은
△1957년 전북 남원 출생
△덕성여대 가정학과 졸업
△천주교 장기수가족후원회 대표
△민주노동당 여성·성소수자위원장
△현 진보신당 확대운영위원
<손동우 사회에디터>
원문은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812241725535&code=90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