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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의 세상, 세상의 이반] 내가 바로 그 동성애자입니다

꼬마  / 2008년07월15일 21시08분


스무 살, 꿈에 부풀어 갓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적어도 대학교는 조금 다를 줄 알았다. 조금 더 넓은 곳, 조금 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인생에 대해, 학문에 대해 배운다는 이곳은 갑갑하고 폐쇄적이었던 고등학교와는 다를 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입학하자마자 길고 어울리지 않았던 긴 머리를 잘라 짧게 커트를 치고, 늘 입고 싶었던, 하지만 사람들의 눈이 신경 쓰여 입지 못했던 소위 ‘남자애’ 같은 옷을 마음대로 입고 다녔다. 누군가가 말했듯 ‘걸어 다니는 커밍아웃’이 되어도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난 이제 벽장 밖으로 조금 발을 내디딜 결심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같은 학교에 다니던 선배 레즈비언 언니들이 이곳에서도 좋은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그래도 조심을 해야 한다고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가볍게 주의를 주었을 때도 그냥 한 귀로 흘려버리고 말았다. 그 동안 스스로를 숨기며 숨 막히는 듯한 시간을 보낸 세월을 보상받기라도 하듯이 자유롭게, 마음껏 숨 쉬며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나의 생각이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다. 레즈비언은 홀로 나뿐인 것처럼 느껴졌던 고등학교, 온전히 혼자였던 시절과는 달리 멋진 레즈비언들과의 여러 만남이 있었고 적어도 몇몇의 사람들에게는 나 자신을 가감 없이 드러내 보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어디도 동성애자에게 완전히 안전한 곳은 없다. 또, 오랜 시간 동안 호모포비아에 부딪히며 충분히 무디어졌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나는 아주 자그마한 적대감에도 상처받는다. 이것을 대학교에 와서 처음으로 체감했던 것은 어느 토론 수업 시간 중이었다. 조별로 돌아가며 주제를 정해 발표를 준비하고, 그에 대해서 자유롭게 토론을 하는 수업이었다. ‘동성애자의 가족구성권 인정’을 주제로 내가 속한 조가 찬성 입장에 서서 토론을 진행하는 차례였다. 평소에 관심이 많았던 주제이기에 평소보다 더욱 열심히 토론에 임했다.

여러 차례의 논쟁이 오갔다. 한 시간이 채 못 되어 같은 말이 되풀이 되고, 이미 대충 결론이 난 것 같았다. 가장 격렬하게 반대 입장을 펼치던 한 친구는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동성애자의 존재는 인정하되, 생식의 의무를 다할 수 없으므로 권리는 주지 못한다”라고 선언했다. 교수님을 흘끗 쳐다보니, 평소 토론 수업이 있을 때마다 중립의 입장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교수님마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아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못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말하고 싶었다.

내 가 바 로 그 동 성 애 자 입 니 다
존재는 인정해 ‘주’지만, 권리는 ‘줄’ 수 없다던 그 동성애자요. 그런데 말이지요, 내 존재는 누가 인정해‘주’는 것인가요? 도대체 누가 내 권리를 ‘주’거나 앗아간단 말입니까. 당신들이야말로 무슨 권리로요.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고 가르치는 건 바로 당신들 아닙니까.

입 안에서만 맴돌던 말, 끝내 삼켜버릴 수밖에 없었다. 단상에서 내려다 본 학생들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그 표정을 보며, 차마 건드릴 수조차 없을 것 같아 보이는 견고한 벽의 무게를 느꼈다. 이성애자인 그들과 동성애자인 나를 갈라놓는 벽, 눈에 보이진 않지만 그 벽의 존재감은 너무나도 확고해서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다. 그들은 이 중에 동성애자가 있으리라는 상상조차 해보지 않는 것일까? 바닥으로 내려앉는 기분이 들면서 나는 더 이상 말하는 것을 포기했다.

여러 가지 미해결된 감정이 뒤섞인 채로 수업이 끝났다. 그 때, 같이 토론을 준비했던 조의 한 친구가 다가왔다. “수고했어.” 그 친구가 말을 건넸다. “사실, 이거 하기 전까진 나도 동성결혼이니 뭐니 반대 입장이고, 동성애 이런 거 싫게 느껴졌지만 이거 준비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 오늘 토론 정말 좋았던 것 같아.”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니, 유난히 열심히 참여해 마음에 들던 친구였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응어리지고 있었던 분노와 절망과 안타까움, 그 모든 감정들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이었다. 너도 수고했다는 말을 하며 나도 모르게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걸렸다. 여전히 나는 가장 사소한 적대감에 상처받지만, 역시 가장 사소한 따뜻함에도 위로 받는 것이다. 결과야 어찌 됐건, 나는 그 토론을 통해 많은 것을 느꼈다. 아직 갈 길이 한참이다. 휴우. 그래도, 변화는 지속되고 있다. 아주 천천히, 하지만 조금씩, 꾸준히.


* 차돌바우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10-20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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