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간 ‘가족’ 구성권을 인정하라
[일다 2006-05-24 04:39]
동성애자들은 어떤 ‘가족’관계를 구성하고 있는가, 혹은 희망하는가?
동성애자 ‘가족’구성 발표대회(스피크 아웃)가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주최로 21일 대학로 글로브 소극장에서 열렸다. 이 행사는 국가인권위원회 인권단체협력사업 중 하나로 기획된 것이며, 게이 레즈비언 7명이 각기 다른 사례를 발표하고 의견을 제시했다. 이들은 동성애자의 가족 구성권이 인정되지도, 논의되지도 않는 우리 사회의 차별과 억압에 대해 토로했다.
가족 부르든지 보증금 100만원 내놓든지
파트너와 6년째 동거하고 있는 37살의 게이 천정남씨는 동성애자로서 드물게 가족들과 친구들의 지지와 이해를 얻었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말한다. 천정남씨는 지난해 수술을 하게 됐는데, 법적 보호자인 가족의 수술 동의서가 필요했다고 한다. 그런데 함께 살고 있는 A씨의 파트너는 그 수술동의서에 서명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결국 시골에 있는 형에게 담당 간호사가 연락해 형이 사인을 했다.
함께 살아가고 있는 가족임에도, 수술이라는 급박한 상황 앞에서 가족의 ‘권리’를 박탈당하는 씁쓸한 경험은 이성애자 ‘가족’제도에서 배제된 동성애자들에게 아주 흔한 경우다. 파트너가 응급수술을 하게 돼, 병원에 급히 함께 간 레즈비언 A씨(28세)의 경우도 마찬가지. A씨는 수술 동의서에 서명할 수 없는 ‘친구’로 불려야 했다. ‘친구’가 아니라 ‘가족’임을 반복해 설명하는 A씨에게, 병원 측은 ‘가족을 부르든지 보증금조로 100만원을 주어야 수술을 해줄 수 있다’고 했다 한다. 결국 게이 친구를 불러 파트너의 남편이라고 하고서, 수술동의서에 서명했다.
‘동성애’ 인정해줄게, 어떻게?
레즈비언 카페(bar)를 운영하고 있는 레즈비언 윤김명우씨(51살)는 함께 살고 있는 부양가족인 파트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양가족 세금면제를 받지 못한다. 세금면제를 받아본 적은 딱 한 번 있다. 2000년 대학생이던 파트너의 학비에 대한 세금면제를 받기 위해 동사무소에 가서 파트너를 ‘조카’라고 했던 것이다. 윤김명우씨는 본인의 사후, 유산 상속에 대해서는 형제와 부모의 동의를 얻어 파트너에게 줄 수는 있지만, 보험금의 수익자로 파트너를 지정할 수도 없어 걱정이라고 한다.
6년째 게이 파트너와 노모를 모시며 살고 있는 B씨(44살)는 이성애자 부부가 받는 직장 가족수당을 자신도 받을 수 있다면 얼마일까 계산해보았다. 지난 3년간 다닌 직장에서 받을 수 있는 가족수당은 141만원이다. 꼬박 납입한 국민연금은, 국민연금재단에 확인해 보니 본인 사망 시 파트너가 받을 수 없다고 한다. 산재보험 또한 파트너가 받을 수 없다. 그나마 “부부 한정 특약” 일색인 보험상품 중, 골라서 수혜자를 동성 파트너로 바꿀 수 있었지만 여전히 일상생활에서 가장 큰 비율을 차지 하는 ‘자동차 보험’은 적용이 안 된다.
B씨는 이것이 바로 “동성애를 인정해 줄 테니까 살아라.”라고 말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연금과 의료보험, 유산상속과 재산분할 등
동성애자 가족구성 발표대회를 지지하기 위해 참가한 더글라스 샌더스 교수(방콕 출라롱콘 법과대학)는 이미 많은 국가가 결혼하지 않고 동거해온 이성커플뿐 아니라 동성커플에게도 법적 평등을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덴마크에서 1989년 세계 최초로 제정된 ‘시민결합’(Civil Union)과 2005년 영국에서 발효된 ‘동반자법’(Civil Partnerships Act) 등은 ‘파트너 등록제’에 등록한 동성커플에게 법적 부부가 누리는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게 했다.
최근 들어서는 동성커플이 파트너의 사망 이후에도 거주권을 가질 수 있다고 판결한 유럽인권재판소(ECHR) 판결, 호주에서 진행된 소송에서 유엔 인권위원회(UNHRC)가 동성커플에게 연금 수급을 인정한 판결 등 동성관계의 권리에 관한 측면이 눈에 띄는 진전이 보이고 있다. 특히 동성커플의 권리가 단지 ‘결혼’ 제도를 통한 법적 ‘부부’ 규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란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동성커플은 헌법이 보장하는 법적 평등권을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 이성애자 부부가 당연한 권리로 가지고 있는 연금 수급권, 의료보험 수급권, 이민 보증, 유산 상속, 재산 분할, 생활비 또는 위자료 지급 등에서 동성애자들은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 성소수자 관련 법 입안 촉구 등 당사자들에 의해 법적 평등권 확보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이성애 중심의 가부장제와 혈연 중심의 가족주의를 고수하고 있다.
삶을 제한하고 파괴하는 ‘차별’
동성애 정체성을 깨닫고 남편과 이혼소송을 준비중인 최현숙씨는 “너는 튼튼한 보험을 깨고 나온 것이다”라고 한 오빠의 말의 의미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고 한다. 최현숙씨는 “결혼제도를 깨고 나올 때 들었던 비난과 모멸쯤은, 친권이나 양육권, 재산 분할권 등 정당히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지켜지지 않는 이 상황에서 느끼는 괴로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한편 한-일간 게이커플인 S씨와 K씨는, 지금 당장의 차별보다도 노후에 일본인 K씨가 직업을 가지지 못하게 될 경우 비자문제로 인해 한국에서 머물 수 없게 될 것을 더 걱정하고 있었다.
파트너의 수술 동의서 사인을 거부 당했던 A씨는 최근 친구의 결혼식에서 부케를 받으며 처음으로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의 말은 이성애 결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외부 사람들에게 ‘관계’를 인정 받고 싶다라는 뜻만도 아니다. 자유롭게 ‘가족’을 구성할 수 있고 삶의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것은 모두가 누려야 할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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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조이승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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