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는다는 것은 저에게 결코 녹록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시를 받아들이기보다 자꾸만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분석하고, 의미와 관념을 찾으며 시인의 머릿속을 기웃거리려고 하기 때문이에요. 시를 해석하려는 습관을 그만두고 나서야 저는 비로소 시집과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시를 읽는 가장 좋은 태도는 어떠한 분석이나 해설에도 영향을 받지 않은 채로 있는 그대로 오롯이 읽어내려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무책임한 결론일지 모르지만, 시를 읽는 것은 멋진 그림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느껴요. 저 같은 문외한에게는 그저 들여다보고 느끼면 그뿐이지요.
시인 기형도는 저와 동갑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제가 그보다는 24년 더 미래에 살고 있다는 거겠지요. 저와 동갑인 그는, 봄이 채 와 닿지 않은 3월에 죽었어요. 우리에겐 너무도 익숙한, 이제는 역사 속에 존재하는 그 종로의 P극장에서요. 덧붙여 그 극장은 당시 남성 동성애자들의 메카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들 속에서 그러한 자의식이 여러 번 발견되기도 해요. 그렇지만 게이라고 해서 그의 시에 무조건 감정을 이입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시는 너무 무겁거든요. 지나치게 비관적인 느낌이 들어요. 심지어 자기혐오마저 느껴집니다. 그러면서도 감상에 젖지는 않아요. 그는 자신의 모든 감정을 타자화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나치게 덤덤해요. 너무 슬퍼서 더 이상은 슬플 수가 없는 사람처럼요. 시인이 흐느끼지 않는 탓에, 그 어두운 감정들은 순전히 시를 읽는 사람의 몫이 되고 맙니다.
그의 시를 통해 나의 정체성과 그 위를 통과하는 많은 괴로움들을 위로받을 수는 없어요. 그럼에도 제가 이 시집을 권하는 이유는, 그가 바로 아무것도 위로하려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의 개인적인 경험을 말하자면, 그의 시를 읽으면 강한 아픔을 느끼고 곧 이만치 온 우리의 청춘이 너무 측은해집니다. 눈물이 또르르 흘러요. 그러면 또 저는 잔물결이 이는 마음을 스스로 위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시인 기형도를 통해 위로받는 방식이에요. 그는 아무것도 위로하지 않는 방법으로 청춘들을 위로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그는 탄식한다. 그는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은가.' ('여행자' 중) 하는 그림 같은 말들로 다가옵니다. 멋지지요. 그가 그림을 그렸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기념할만한 작품을 남겼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질투가 납니다.
그가 가버린 3월은, 그를 기억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계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샌더 (친구사이 감사, 디자인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