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6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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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다] <종로의 기적>을 보고
‘기적’은 소망의 대상이라기 보단 환상의 대상이다. 마음 놓고 ‘기적’의 공상에 빠져 볼 수 있는 건, 그것이 오지 않을 것임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제 아무리 발버둥 치며 붙잡으려 애써 보아도 내일은 결국 어제가 되고 말 것이다. 어제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다신 오지 않을 어제처럼, 어제가 될 내일처럼, 손으로 만져 비틀 수 없는 야속한 시간처럼 ‘기적’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당신을 만나고 나서 어제는 내일이 되었다. 잊힌 어제의 꿈은 내일이 되고, 어제로 묻힐 무용한 오늘은 어제 꿈꾼 내일이 되었다. 표정 없던 박수는 전율하는 감동이 되고, 때 묻어 지친 입술에서는 시가 읊어지고, 거짓말만 같이 날 속이던 세상은 용기 있게 맞서지 못했던 “깨진 알”이 되었다. 가슴 헐떡이며 흘린 눈물 뒤엔 여전하게 남아 옥죌 허무한 슬픔대신 이제는 당신이 내 옆에 있다.
어쩜 ‘기적’은 오고야 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용서할 수 없는 세상 속에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져 겉돌기만 하던 내게 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인연들이 하나 둘 생겨나고, 누구보다 따듯하게 웃어주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밟아간다. ‘기적’처럼, 종로에서, 난 사람들을 보았고, 사랑을 보았다. 영화 <종로의 기적>은 내가 만난, 그리고 우리가 만난 ‘기적’의 기록이다.
네 사람이 있다. 게이로서 게이 영화를 만들며, 그러면서도 게이인 자신 때문에 스텝들과의 관계가 항상 신경 쓰이고, 조심스럽고, 그런 만큼 쉽게 주눅 들어버리는 소심한 영화감독 준문. 더 나아진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직접 소리 내고 뛰어다니며 행동하는 인권 운동가 병권. 오랜 시간 벽장 속 게이로 숨어 지내다 조금은 늦은 나이, 게이 커뮤니티에서 만난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 속에 지금이 “게이 인생의 황금기”라고 이야기하는 수줍은 시골 게이 청년 영수. 일에, 사랑에, 그리고 남들과는 조금 다른 특별한 사랑을 위해 언제나 바쁜 선구적 사랑의 로맨티스트 욜.
아물지 않을 상처로 남은 기억으로 한 번 더 고민하고, 힘들어하고, 그래도 용기를 내어 다시 시작하는, 답답한 억압으로 가득 찬 세상 속에서 어려운 지금을 행동하며 견뎌내면 반드시 세상은 바뀌어 갈 거라 희망하는, 새롭게 만난 사람들 틈에 이제야 제 자리를 찾은 듯 행복해 하는, 사랑을 지켜가기 위해 오늘도 거리로, 사람들 앞으로 나서는 이들의 이야기는 ‘기적’의 이야기로, 어느 사이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데운다.
누구나 사랑을 하고, 그 사랑으로 시간은 ‘기적’이 될 것이다. 네 명의 주인공들이 보여준 ‘기적’의 시간처럼, 모두가 이미 맞았고, 또 맞이할 ‘기적’처럼, 우리는 계속해서 열심히 사랑하고, ‘기적’은 만들어질 것이다. 추억은 값싸게 팔리지 않고, 오늘은 영원히 기억되고, 우리의 내일은 노래가 되어 어제가 되어서도 다시 불릴 것이다. 우린, 종로에서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