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맨 워칭', '털없는 원숭이', '인간동물원'의 저자로 잘 알려진 데즈먼드 모리스의 동성애에 대한 입장은 한결 같다. 종 번식 과정에서 이탈된 변종이라는 것.
만물의 이치를 인간의 주관으로 해석하려는 모더니티의 해체 과정에서 인간과 동물간의 유기적 연관성을 캐묻는 농담들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현재 털없는 원숭이의 과거사를 캐묻는 인류학은 전례없이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헬렌 피셔와 마빈 해리스가 고고학과 인류학의 탄탄한 자료들을 기반으로 미국에서 인기 지식인으로 군림하고 있다면, 이 옥스포드 능구렁이 데즈먼드 모리스는 20세기 초기에 절멸했던 인간학과 동물행동학을 배종시켜 얻어낸 특이한 인류학으로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의 인기는 벌써 30년째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이론들을 접하고 있으며, 인간 유전자와 원숭이 유전자 차이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고개를 주억거리곤 한다. 그렇지, 2%의 차이란 98%의 동일함에 비해 얼마나 초라한 일인가? 요즘 출판계에서 가장 많이 내놓은 서적들 중 유전자와 인류학에 관한 책이 많다는 건 2%의 차이의 심연을 확인하기 위해 종교, 문화, 사회적 질서 등을 운운했던 인간의 시대가 점점 다른 시대로 이행하고 있음을 적시해주는 중요한 단서일 게다.
아니나다를까 오늘자 동아일보 신문은 책 표지만 달리해서 출판된 데즈먼드 모리스의 '인간동물원'을 새책이라도 되는 양 호들갑을 떨며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의 논지는 간단하다. 복잡한 도시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과 동물원에 갇힌 원숭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동물원에 갇힌 원숭이가 받는 스트레스의 모양새가 도시살이에 지친 인간들의 스트레스와 거의 같은 수준이라는 것. 데즈먼드 모리스는 현대 인간이 겪는 다양한 성적 스트레스는 동물원과 같은 도시 안에서 살아가는 댓가로 주어진 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헌데 그는 다른 저서에서 펼쳐보였던 호모포빅한 논지를 이 책에서도 주저없이 펼쳐놓고 있다. 그는 동성애는 변종이라는 가설 하에, 동성애 원인을 '동물원' 탓으로 돌리고 있다.
성적으로 개방되어 있지 않은 다양한 폐쇄된 교육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청소년들은 그들의 성을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한다. 거기에서 성적 스트레스가 생기고, 동성애가 발생할 수 있다. 동성애는 성적 대상에 대한 '각인'의 왜곡된 과정이다.
즉, 정상적인 과정이라면 이성에게 쏠려야 할 첫 번째 성적 대상에 대한 '각인'이 동성애자는 동성에게 쏠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만일 그 소년이 좀 더 개방적인 시스템 안에서 생활하고 여성을 자주 만날 기회를 갖았다면 그의 각인은 당연히 이성에게 쏠렸을 것이다.
그러나 데즈먼드 모리스의 자연은 위대하다. 동성으로만 구성된 학교, 기숙사, 군대에서 생활한다고 해도, 그리고 그 동성유대집단에서 성적인 관계를 맺어도 그들은 후에 모두 '정상'으로 복귀하지만 몇몇 변종들은 그 첫 번째 '각인'의 도착을 떨쳐내지 못한다. 그들이 곧 비자연적인 동성애자들인 것이다.
그의 주장은 그리 새로운 건 아니다. 성 혁명가로 알려진 빌헬름 라이히부터 동성애는 이성애가 해방되는 즉시 사라질 운명의 잉여물로 줄곧 인지되어 왔다. 동성애는 성적 자유를 반납할 수밖에 없는 인간동물원의 파생물인 탓에, 동물원의 철창이 제거되면 스스로 제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데즈먼드 모리스는 동물행동학자답게 연장류들 사이에서 보이는 동성애적 관계가 실은 수컷보다 암컷들이 더 많을 때, 반대로 암컷보다 수컷이 더 많을 때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동성애는 이성을 쟁취하기 위한 시장에서 배척된 자들의 보충의 욕망, 그러나 투자 가치가 감소되면 당장 회수되어 폐기처분될 대리 욕망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이런 주장들은 기실 우리가 늘 일상에서 부딪히는 권력의 명제들이다. 니가 그런 것은 이성을 만나보지 못해서 그런 거다. 때가 되어 더 넓은 광장에 나가 이성을 만나면 자연스레 해소될 문제다. 이성과 한 번 자 봐라, 그런 생각이 싹 가실 것이다 등등. 이러나저러나 호모들은 언제나 '동물원의 호모'인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데즈먼드 모리스의 이론 대부분은 역자연주의의 오류의 명백한 모범답안을 제공하고 있다. '도덕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이다'라는 채색된 해석, 그 권력의 진실게임.
자연주의의 오류란 '자연적인 것은 도덕적인 것이다'라는 사람들의 통념이 그릇되었음을 지적하기 위해 고안된 철학적 개념이다. 반면 '역逆자연주의 오류'는 '도덕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이다'라는 그릇된 통념을 의미한다.
인간사회에 관한 그의 도덕적 명제들이 인간과 동물에 관한 그의 분석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려보이는 동물 암컷과 인간 암컷은 남성들에게 성적 유혹을 함으로써 자신과 아이들을 생존경쟁에서 보호하려는 거대한 유방과 엉덩이의 종합이며, 동물 수컷과 인간 수컷은 자기 유전자를 끊임없이 전파하려는 자유로운 가부장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또 동성애는 인구 과밀 상태에서 인구를 조절하려는 유전자(보이지 않는 손)의 친절한 보너스로 기능한다.
그의 이런 아름다운 도덕적 세계는 그가 내놓는 자료와 분석들의 왜소함을 감추지 못할 만큼 추할 뿐이다. 그는 영장류 사이에서 일어나는 동성애적 관계에 대한 세련된 이론을 알지도 못한다. 70년대 한창 주가를 올렸던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주의, 즉 인간 사회는 생물학적 유기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에코 파시즘의 또다른 주류의 후광을 엎은 채 몇몇 싸구려 아이디어를 가지고 장사를 벌이는 지식 영업 사원이다.
그러니 자연, 진화 도상에서 선을 그리며 꿈틀거리는 동성애 욕망에 관한 치밀한 분석이 그의 머리 속에서 나올 리가 없을 것이다. 동물원의 호모가 동물원에서 해방된다고 해도 여전히 호모가 되고, 호모의 아버지가 되는 역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정말 우습게도, 인간동물원이 없어지면, 그래서 이성애적 제도와 공장 제도로 둘둘 뭉쳐진 이 답답한 동물원의 철창이 열리면,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섹슈얼리티를 해방시키면서 동성애를 선택할 가능성이 많아지게 될 거라는 것도 그는 도저히 짐작하지 못한다.
동물원에 호모가 갇힌 게 아니라 실은 그가 동물원에 갇혀 밖을 보고 있는 셈이다.
2003-12-30 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