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나는 나의 커밍아웃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전에 주변의 나의 친구들 가족들 선후배들에 대해서 너무나 감사하다는 나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나는 어렸을 때 사촌형과 손장난으로 성경험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누구나 당연히 하는 것일거라고 생각했고 나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주변의 친구들이 벽에 붙어있는 3류 영화의 포스터에서 그리고 여성잡지의 속옷광고에 나온 야시시한 포지의 여자들 사진을 보고서는 침을 흘릴때 별 반응이 없었을 때부터였다.
아마도 국민학교-그 당시엔- 4-5학년 때였으리라. 그리고 그 당시는 레이건 행정부가 에이즈의 원인을 동성애자의 책임으로 몰아가고 호모 포비아가 등장하기 시작했을 무렵이라고 나중에 알게되었다. 이제 막 등장한 새로운 질병에 대하여 국민학교 4-5학년 꼬마들이 호모들은 때려죽여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담았고, 나는 내가 호모인가 하고 반문하기 시작했고, 그 고민은 늘 나를 괴롭혔다.
고등학교를 대전으로 전학 가면서 사촌형과의 손장난은 없어졌고, 나는 나의 첫사랑을 만났다. 그 당시에 나는 게이라면 요즘 말하는 트랜스젠더를 연상했고, 사랑했던 이를 위해 수술을 해야하는 것인가 정말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대학에 진학한 그는 나를 떠났고 나는 대전내에서의 또 한번의 이사를 계기로 그와의 마음을 정리하고, -자찬이지만, 강남에서도 잘나가는 학교를 졸업해 대전에 전학간 나는 계속 상위권을 유지하다가 그와의 이별, 나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 곤두박질을 쳤었다. -
1년을 여러가지 상념에 쌓여 보내다가 대학에 진학을 했다.
그리고 재수를 생각하며 대학 기숙사에 들어서다가 창문을 닦고 있던 옆방의 선배에게 사랑을 느끼고 그에게 짝사랑의 감정을 너무나 깊이 느끼며 2년을 보냈다. 그 당시에는 수술이나 그런 생각은 전혀 안했고 그냥 그를 사랑하는 감정과 그와 그의 연인이 사랑하는 것에 가슴아파하며 보냈던 것 같았다. 그의 졸업식에 나의 2년간의 사랑을 기록한 일기장과 편지를 주고서는 그를 잊기고 하였다.
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던 와중에 내 눈에 띈것은 여성지에 나온 친구사이의 누군가의 대담내용이었다.
거기서 전화번호를 얻은 나는 중학교 때 가장 친했던 한 친구를 불러 첫 커밍아웃을 했다. 그 친구는 워낙 외국에서 오랫동안 생활을 해왔고 집안도 개방적인 분위기여서 그런지 아무런 거부감없이 나를 받아주었고 나는 그친구와 함께 처음으로 친구사이의 사무실에 첫발을 디디고는 한동안 사무실을 다녔다. 비록 그때의 나를 기억하는 사람은 재우형밖에 없기는 하지만....
그때 서동진씨와의 세미나도 인상이 남고 롤플레잉같은 활동도 재미있었지만 나는 학교가 수원이었던 것에다 건축과학생들 특유의 바쁜 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