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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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사슴 2003-11-04 14: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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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나의 육체를 바라볼 때, 그들은 제대로 눈을 들어 바라보지 못한다.

대부분 외면하거나 애써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 딴청을 피운다.

얼마 전 진창 술을 퍼마시고 영화제 측에서 제공한 호텔에서 혼자 쿨쿨 잠을 자고 있었는데, 너무 늦잠을 잔 모양이다. 누군가 내 방문을 쾅쾅 주먹으로 치는 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로 보아 전날 밤 함께 술을 마셨던 친구가 분명했다. 팬티밖에 안 입고 있던 나는 부스스한 몰골로 티셔츠 하나만 얼른 입고 문을 열어주었다. 그 친구는 바로 옆 방에 묵고 있었다.

영화제에 가자며 나를 깨운 그 친구가 나를 따라 함께 들어왔다. 하지만 이내 짧은 티셔츠 밑으로 드러난 내 팬티와 다리 때문이었는지 그는 창문을 바라보다가, 빨리 씻어, 담배 사러 갔다올께 하고는 내처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리고 그가 담배를 사가지고 내 방에 다시 들어왔을 때 간단히 샤워를 마친 난 이번엔 바지만 입고 위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였다. 이번에도 애써 눈을 돌리는 그.

며칠 전 잘 알고 지내는 동생과 MSN 채팅을 하다가 그 얘기를 했다. 그러자 그 친구가 한참을 고민하다 뒤미처 하는 말.

"형, 나도 형이 내 앞에서 옷을 다 벗고 있거나 하면 그럴 것 같아."

하긴 그와 같은 반응들을 처음 느낀 건 아니다. 그간 살면서, 아니 정확히 말해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동네방네 다 알고 난 이후로 남자 친구들이나 선후배들, 특히 이성애자를 자처하거나 이성애자로 커밍아웃한 남자 동료들이 팬티 차림의 내 몸을 의식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들은 충분히 체득하고 있는 터였다.

물론 내 몸이 눈 휘둥그레질 만큼 번쩍거리는 탄탄한 근육의 몸매여서 이성애자들을 자처하는 그들의 시선에 먼지처럼 묻어 있을지도 모르는 '동성애적 감정'을 자극했다고 주장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건 게이들의 '그랬으면 좋겠다'라는 선망욕구가 풀무질해서 정련한 다소 코믹한 픽션일 뿐이다.

이성애자 남성들이 내 벗은 몸을 보고 정작 눈을 돌리는 이유는 사실 '두려움'이 가장 큰 요인일 게다. 그것은 내가 그들에게 게이라고 말하는 순간에 그들은 내 시선과 육체를 성애화하고, 내 시선과 몸이 곧장 되받쳐 응시할지도 모르는 그들의 시선과 육체에 대해 방어의 몸짓을 취하는 것에 불과하다.

호모포비아와 내 육체에 대한 친구들의 코믹한 반응은 같은 맥락, 즉 동성애에 대한 이성애자 남성들의 공통된 반응의 맥락 안에서 직조된다. 동성애자인 내가 그들 앞에 있을 때 그들은 자신의 몸이 내 시선으로 밀렵되고 성애적으로 상상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호모포비아처럼 증오심을 갖거나 또는 내 남자 친구들처럼 애써 내 벗은 몸을 외면하는 것이다. 어찌 감히 그 고적한 순간에 동성애자인 나와 눈을 마주칠 수 있단 말인가!

생각해보라. 이성애자 남성이 (아내나 여자 친구가 아닌) 이성애자 여성의 벗은 몸을 천천히 관찰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이미 그 시선은 약속되고 코드화된 이성애 사회의 성적 제스추어의 한 단락이다.

내 이성애자 남자 친구들은 자신의 이성애자 동료들과 함께 허심탄회 목욕탕에 가거나 팬티만 입고 키득거리듯이 나를 편하게 대하지 못한다. 설령 아무리 나하고 친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내 벗은 몸 앞에서는 말이다. 게다가 내 앞에서 옷을 벗거나 알몸을 드러내는 짓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호모포비아와 내 벗은 몸을 외면하는 친구들과의 차이는 친구들이 내 시선이 자신들을 바라볼 때 성애적일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솔직히 시인하는 점이다. 반면 호모포비아는 가부장제의 권력적 시선이 역전되어 자신의 몸이 동성인 남성의 시선 앞에 전시될 수 있다는 사실을 끔찍히 증오하는 사람들이다.

앞으로도 많은 친구들이 애써 내 몸을 외면할 것이고, 난 그때그때마다 이 코믹한 상황을 즐거이 만끽할 것이다. 적어도 그 시선이 훨씬 편하게 발효되어, 나중에 나에게 '너 지금 내 엉덩이 봤지? 함부로 보지 마'라고 이야기하거나 '니 몸은 성적으로 형편없다'라고 말하는 순간들이 올 때까지는 말이다.

[2002.6.6]




이 글 쓴 지가 벌써 1년이 넘었군요. 참 우습네요. 이성애자가 아니라 난 게이 앞에서 옷을 벗고 싶다고요~~~ 왜 이렇게 지지리도 연애를 못하냐고요~~~~~ 무지 싸니, 저 좀 데려가시라고요~~~~(x20)




마음연결
마음연결 프로젝트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2014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성소수자 자살예방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