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투명하고 영롱한 다이아몬드 같은 여름이 바로 얼굴 앞으로 다가온 늦봄의 어느날. 나는 자그만 검은새 한마리를 만났다. 제일 좋아하는 과자를 손에 쥔 아이처럼 쉴 새 없이 종알종알 떠들고 이리저리 날아다니기 바쁜 새였다. 건강한 젊음이란 아마도 그런 것이었으리라.
문득 발견한 밤하늘의 별똥별처럼 유난히 짧게만 느껴지던 뜨거운 여름이 가고 나뭇잎들이 열병을 앓는 여인의 눈물처럼 허망하게 떨어지는 가을이 되어 다시 검은새를 만나게 되었다. 왕성하게 활동하는 화산의 용암처럼 이글거리는 에너지를 주체 못해 가만있지 못하는 건 여전했지만 전에는 미처 몰랐던 활활 타고난 뒤 쓸쓸히 남겨진 재와 같은 공허함과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콩쥐의 밑빠진 독과 같은 고독을 눈속에 간직한 검은새. 어쩐지 검은새의 그 날개가 무거워보였다. 가만히 보다가 검은새에게 손을 내밀었다.
모두가 매서운 겨울이라고 했다. 불같은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이 식자 얼음의 여왕이 되었다는 그 여자의 나라를 조금이라도 예상해볼 수 있는 그런 계절이었다. 거리의 많은 이들이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어깨를 움츠리고 옷을 단단히 여미고 종종 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나 역시 다를 바 없이 몸을 웅크리고 살았지만 그래도 겨울이 유리 긁는 소리처럼 끔찍하거나 형편없는 재활용 요리처럼 싫진않았다. 가을의 언젠가부터 내 어깨에 자주 날아온 검은새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겨울은 새에게 혹독한 계절이다. 세상은 사냥의 신 아르테미스가 물러가고 시기와 질투의 여신 헤라가 지배하는 것만 같다. 나무들이 불치병에 시름시름 앓아가는 것처럼 말라갔다. 벌레들이 말라가는 나무를 애도라도 하는지 모습을 드러내질 않는다. 찬란하게 빛나던 태양도 사랑이 식어버린 여인의 마음처럼 온기를 잃어버렸다. 나는 내 어깨 위에 조심스레 앉아있는 가엾은 검은새를 위해 모이를 구해주었다. 알맹이가 빠져버린 벼 껍질보다 겨우 나은 정도였지만 검은새는 잘 먹어주었다. 수돗물보다 조금 나은 정도의 물을 잘 먹어주었다. 그런 검은새가 고와서.. 참 고와서 쇳가루 같은 먼지가 묻은 검은새의 깃털을 쓸어주고 숨을 목까지 턱 막히게 하는 맹렬한 바람을 두손으로 막아주었다.
생명이 꿈틀대는 봄이 오는 걸 시샘했던지 얼음의 여왕은 겨울의 끝자락에 빗물을 만들어 세상에 뿌려대기 시작했다. 서서히 후둑후둑 떨어지던 겨울비. 나는 어깨 위 새에게 손으로 우산을 만들어줬다.
햇빛이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처럼 다시 온기를 찾은 봄이 왔다. 온기는 예년보다 일찍 오색찬란한 꽃을 피웠고 벌레들이 봄을 반기듯 왕성한 활동을 시작했으며 맑은 바람이 귓가를 간지럽히는 계절이 왔다. 검은새도 기지개를 켰다. 거목나무처럼 거칠던 깃털은 잘익은 포도처럼 윤기를 발하고 길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불안해보였던 눈은 한층 안정되고 깊어졌으며 더이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외로움을 숨기기 위해 과장되게 울어대거나 퍼득거리지도 않는다. 검은새는 모두가 동경해 마지 않는 흑진주가 되어가고 있었다. 제법 수컷의 냄새가 난다. 검은새의 깃털을 쓸어준다. 검은새를 향해 밝게 웃어보인다. 때가 되었다.
비비린내가 날지도 모르겠다. 물얼룩이 남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검은새가 날 찾아줄지 어쩔지 알 수가 없다. 드디어 부모의 손을 벗어나 집밖으로 나온 사춘기 어린아이처럼 쉽게 앞날이 그려지지 않는다. 검은새에 정신이 뺏겨 내 옷이 내 몸이 비에 흠뻑 젖은지도 모르고 있었다. 보내줘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웃는 얼굴로 검은새를 바라보며 몇번이고 다짐을 한다. 검은새는 처음부터 내것이 아니었다. 처음 하는 포옹처럼 떨리는 마음 누르고 소중히 손으로 쥐어보았으니 그때처럼 천천히 손을 펴고 검은새의 깃털을 쓸어주고 어깨를 가볍게 튕겨주면 될 것이다. 하늘은 청옥처럼 파랗고 땅은 대지의 어미가 가슴을 편채 기다리는 듯이 넓다. 검은새에겐 지금부터 진짜 삶이 시작될 것이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언젠간 마르기야 하겠지. 내 몸도.. 내 마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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