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나우누리 레인보우 미네르바의 방패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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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20에서 21로] 동성애자의 운동역사
뉴스제공시각 : 2000/01/12 17:27                              출처 :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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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자유대학 구내엔 게이들이 운영하는 카페 ‘로자’가 있다. ‘로자’란 ‘분홍색’이라는 뜻으로, 어두운 나치 시절 동성애자들의 가슴에 붙어 있던 딱지의 색깔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그 시절 유대인들이 가슴에 노란색 별을 달아야 했다면, 함께 수용소에 갇혔던 사회주의자들은 붉은 삼각형을, 동성애자들은 ‘분홍색’ 삼각형 딱지를 달고 다녔다 한다. 이 세 규정 중에 둘 이상을 가진 사람은 그 딱지를 다비드의 별 모양으로 겹쳐 달아야 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더라면 노랑, 빨강, 분홍 3색 딱지를 겹쳐 달 뻔했다. 이렇게 한 인간집단이 다른 집단에 딱지를 붙여 차별을 하는 못된 전통은 아득한 구약 시절까지 거슬러올라간다.

성서에 '가증한 일'로 규정…근대까지 적대적 태도

“너는 여자와 교합함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레위기> 18:22) 이것이 모세가 이스라엘의 백성들에게 부과한 율법이었다. 모세의 율법은 이 “가증한” 자들을 사회가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분명하게 규정해 놓고 있다.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20:13) 동성애자는 반드시 죽여야 하고, 그 피의 책임은 동성애를 저지른(?) 자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구약 시절부터 이미 동성애는 간음, 수간, 근친상간, 월경 중의 성행위와 함께 “반드시” 죽여야 할 범죄로 간주되어 왔다. 중세 말의 그림 중엔 동성애자를 처형하는 장면을 담은 것이 더러 남아 있어, 그 잔인함을 아직까지 전해준다.

동성애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는 근대까지 이어진다. 심지어 ‘계몽’의 철학자들도 거기에 적대심을 표하곤 했다. 칸트의 말이다. “만약 한 여자가 다른 여자와 함께, 한 남자가 다른 남자와 더불어 성욕을 충족시킨다면, 이는 인류의 목적에 위배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욕에 관하여 인류의 목적은 종의 보존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동성애)을 통해서는 종을 보존할 수가 없다. (…)따라서 그것은 자신을 짐승 아래 놓고 인류를 능욕하는 짓이다.”(<도덕철학 강의>) 여기서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그가 동성애에 반대했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반대를 표현하는 방식의 과격함이다. “짐승 아래….” 즉 동성애자는 짐승만도 못하다는 것이다. 왜? 최소한 짐승들은 종의 보존을 위해 교미를 하니까. 이는 물론 철학적으로 도저히 정당화될 수 없는 견해, 즉 편견에 불과하다.

사상 최초로 이 편견을 깨뜨리고 나선 것은 그 자신 동성애자였던 독일의 성(性) 연구자 히르쉬펠트였다. 가명으로 펴낸 소책자 <사포와 소크라테스>(1896)에서 그는 동성애자의 동등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당시에는 물론 이와 비슷한 책자들이 이미 많이 나돌고 있었지만, 하필 이 책이 근대 동성애자 운동의 선언문이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익명으로 남고자 했던 다른 저자들과 달리 히르쉬펠트는 출판사에 책의 저자를 묻는 모든 이에게 자기의 실명과 주소를 가르쳐주라고 얘기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커밍 아웃’을 한 것이다. 이 책을 쓸 때부터 그는 동성애자 운동을 구상하고 있었고, 1897년 5월15일 드디어 그를 중심으로 몇몇 사람에 의해 세계 최초의 동성애자 운동단체 ‘과학 인도주의 위원회’가 결성된다. 계기가 된 것은 동성애를 범죄로 규정한 기본법 제175조 철폐의 청원을 위한 서명운동이었다. 이때 서명한 사람의 명단에는 독일 노동운동의 아버지 아우구스트 베벨의 이름도 눈에 띈다.

이 위원회의 영향 아래 스위스와 네덜란드에서도 같은 이름의 운동단체가 만들어진다. 영국은 상황이 열악했다. 오스카 와일드가 동성애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은 후 공적으로 동성애에 관해 얘기하는 것은 금기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1914년 ‘과학 인도주의 위원회’를 결성하는 시도에 이어 1929년 ‘브리티시 섹솔로지 소사이어티’라는 운동단체가 결성된다. 프랑스에서는 앙드레 지드가 1911년 익명으로 동성애자의 인권을 옹호하는 글을 발표한다. 세계의 중심지답게 이곳에서는 이미 살롱을 중심으로 강력한 동성애자 문화가 형성돼 있었다. 시인 폴 베를렌와 “마드모아젤” 랭보의 관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함께 뭉쳐 있던 동성애자들은 드레퓌스 사건, 스페인 내전과 같은 정치적 사건을 계기로 좌우익으로 나뉘어 서로 싸우기도 했다.

짐승만도 못하다며 성향만 보여도 처벌

1차대전 이후 독일의 베를린은 동성애자들의 메트로폴로 떠올랐다. 다른 도시보다 비교적 자유로웠던 베를린에서는 시내 여기저기에 동성애자 하위문화가 형성되어, 전세계의 게이들을 끌어모았다. 하지만 나치 집권 후 사정은 달라진다. 핍박의 신호탄은 동성애자였던 나치 돌격대장 에른스트 룀의 암살이었다. 그를 제거한 후 나치는 전국적으로 반동성애자 캠페인을 벌인 후 경찰과 게슈타포를 통해 전국의 동성애자들의 명단을작성하여 이들이 드나드는 술집과 집회소를 단속했다. 기본법 175조의 집행도 엄격해졌다. 그전엔 동성애 행위를 하는 것만 범죄로 간주되었으나 이제는 동성애의 성향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처벌을 받게 되었다.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동성애자를 색출하는 작업이 진행되었고, 특히 소년들이 모여 있는 히틀러 유겐트는 각별한 감시의 대상이 된다. 이렇게 수용소로 끌려간 동성애자들은 모욕당하고, 고문당하고, 학살당한다.

전후 동성애자 운동의 메카로 떠오른 것은 유럽에서도 가장 자유분방한 도시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이었다. 전쟁 후 동성애자 운동은 이제 전세계로 번져나간다. 지하에 숨어서 만나던 동성애자들이 오늘날처럼 떳떳하게 자신을 주장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마련된 것은 동성애자 운동이 비교적 늦었던 미국에서였다. 1969년 뉴욕 경찰은 크리스토퍼 스트리트라는 곳의 게이바에 난입하여 거기에 있던 게이들을 체포한다. “남자와 남자가 춤을 추면 안 된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이 경찰 폭력에 격분한 게이들은 지하의 술집에서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나온다. 시위는 성공적이었다. 이 사건 이후 미국 전역에서는 전투적 형태의 게이 해방운동 단체들이 잇따라 결성되고, 이 운동의 모델을 유럽에서도 그대로 복사해 간다. 해마다 이날이 오면 세계의 주요 도시에서는 게이들의 축제와 시가행진이 벌어진다.

동성애를 치료(?)한다는 얄팍한 선심

서구에서 전통적으로 동성애자를 핍박해온 주체는 국가와 교회였다. 사실 1969년까지 동성애는 독일에서도 법적으로 범죄행위였다. 그뒤로도 좀더 완화된 형태로 존재하다가 이 차별조항이 완전히 철폐된 것은 1994년의 일이다. 교회의 핍박도 무시할 수 없다. 미국에서는 지금도 가끔 청소년들이 자기가 가진 동성애적 성향과 자기가 배운 기독교 신앙을 조화시키지 못해 자괴감에서 자살하는 일이 벌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동성애자를 신앙공동체 안에 끌어들이기 위한 신학적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일례로 얼마 전 베를린의 어느 교회에서는 동성애자들의 삶을 다룬 사진전을 개최하였는데, 전통 성화의 양식을 빌려 연출한 사진 아래에는 예수의 말이 적혀 있었다. “저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 .” 얼마 전 베를린에서 열린 ‘동성애 운동 100년 전’에 갔다가 동성애 치료기라는 것을 보았다. 전기충격으로 동성애를 치료(?)하겠다는 것이다. 동성애자를 더이상 범죄자가 아니라 가련한 환자로 봐주겠다는 이 얄팍한 선심. 과학도 이렇게 얼마든지 미신적일 수 있다.

초보수적인 우리 사회에서 동성애는 아직 금기의 대상이다. 우리사회에서 ‘커밍 아웃’이란 아직 대단한 용기를 요하는 모험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제 가족에게조차 털어놓지 못하고 있다. 가족의 눈 혹은 직장 때문에 이성과의 원치 않는 결혼생활을 하는 이도 적지 않다고 한다. 왜 그래야 할까? 우리 사회가 수학적 평균에서 벗어난 소수자에게 유형무형의 집단적 폭력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성취향의 차이를 인간 차별의 근거로 삼는 것은 정말로 비열한 짓이다.

진중권/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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