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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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문화운동' #1]
지보이스 뮤직캠프 기획포럼 녹취록
: '연대와 연애하자'
- 소수자 문화운동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는가?
▲ 지보이스 뮤직캠프 기획포럼 (사진 : 광훈)
지난 4월 14일 '지보이스(G Voice)'의 뮤직캠프 일정 중 일부로 소수자 문화운동과 관련하여 2018 뮤직캠프 기획포럼 ‘연대와 연애하자’를 진행했습니다. 지보이스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소규모의 코러스 소모임으로 시작했으나, 15년의 활동을 거치면서 성소수자를 위한 합창공연 뿐 아니라 다양한 국내 시민사회운동과 관계를 맺으면서 40명의 단원이 활동하는 합창단으로 성장해왔습니다. 지보이스를 비롯한 국내 소수자 운동, 혹은 인권운동 진영 내의 다양한 문화 운동/활동의 가치와 성과를 공유하고, 연대의 필요성을 고민하며, 앞으로의 전망과 과제를 함께 모색하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친구사이 소식지팀에서는 이날 나누었던 고민들을 널리 나누고자, 팀에서 작성한 기획포럼의 녹취록을 아래와 같이 공개합니다. 공개를 허락해주신 발제자 4분과 지보이스 단원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주)
발제 1 - 지보이스 : 지보이스 연대활동 성과와 전망 발제 2 - 장애여성공감 : 성소수자인권운동과 장애여성인권운동은 어떻게 노래로 만나게 되었나? 발제 3 - 아시아인권문화연대 : 이주민 인권과 공동체 중심의 예술운동 발제 4 - 퀴어문화축제 : 퀴어문화축제는 어쩌다가 한국인권운동사의 최전방에 서게 되었나? |
발제 1 - 지보이스
: 지보이스 연대활동의 현황 및 전망
100번이 넘는 공연횟수
전재우(지보이스 음악감독) : 지보이스 음악감독 전재우입니다. (일동 박수)
지보이스가 작년까지 단일 컨텐츠로 공연한 횟수는 100번이 넘어요. 예를 들어 <변칙 판타지>(정은영 연출, 2016) 같은 무대에서 공연한 건 1회로 잡은 거거든요. 그러니까 실제로 보면 훨씬 많이 공연을 한 거고, 점점 갈수록 활동이 많아지고 있고, 저 중에서 정기공연 외에 나머지는 다 협연이라든가 연대공연이에요.
정기공연 참여자도 많이 늘었어요. 그래서 2006년에 스탭까지 합쳐서 30명 정도, 관객은 50명 정도였거든요. 지금은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공연을 같이 준비하고 있고, 공연장을 찾는 사람은 500-600명 이상 되고 있죠. 언론 노출은, 처음에 만들어졌던 2003년에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인권콘서트에 섰기 때문에 언론을 한번 탔던 적이 있었고요. 2011년도에 지보이스를 비롯한 게이들의 커밍아웃을 다룬, 친구사이와 연분홍치마가 같이 만든 <종로의 기적>이 개봉했을 때 잠시 언론을 탔었고. 2013년에는 10주년 기념 공연이 있었던 해인데, 김조광수·김승환의 당연한 결혼식 축하공연 때 똥물 맞은 사건 때문에 매스컴을 탔었어요.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언론에 다뤄졌던 것은 재작년 말에서 작년 초까지 영화 <위켄즈>가 개봉하면서 많이 노출됐던 것 같아요. 네이버 뉴스에 뜬 것만 집계한 거라서, 실제로는 더 많겠죠.
지보이스의 노래를 한두 사람이 만들어왔던 건 아니었더라고요. 저도 제가 다 만든 줄 알았는데, (일동 웃음) 작사에 참여한 사람이 최소한 30명이었고, 작곡에 참여한 사람도 14명이나 되더라고요. 워크샵 창작곡 같은 경우 보면 진짜 많죠. 제가 다 뒤져서 적어놨는데, 혹시 빠진 사람 있으면 죄송합니다. (웃음) 이렇게 집단적으로 우리 컨텐츠를 생산하고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지보이스는 정기공연, 연대공연, 음원 제작도 하고 있어서 요즘 열심히 녹음하고 있고요. 그리고 영화나 다른 분야의 예술 활동, 저희가 미술이나 음악예술쪽 작가들과 협업을 많이 했었죠. 물론 술먹고 노는 것도 있고요. (웃음)
이제 본격적으로 연대활동 이야기를 할 건데요. 일단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부, 게이 커뮤니티 내부에서 게이·성소수자 이슈를 가지고 이야기했던 연대공연을 적어봤어요. 제일 많았던 건 역시 문화 관련된 거고요. 우리도 예술, 문화를 하는 조직이니까. 퀴어퍼레이드나 영화, 도서 출판회도 한 적이 있더라고요. 비혼여성코러스 아는언니들의 공연에서 게스트로 같이 노래했던 적이 있었고, 혐오 반대, HIV/AIDS 이슈 관련 공연도 했었고. UNICORN 같은 경우에는 게이 커뮤니티 내의 보컬팀이나 음악하는 팀들이 모여서 같이 했던 행사죠. 그리고 군인권문제, 제도개선, 청소년 문제, 또 3-4년 전부터는 HAND IN HAND 등의 행사를 통해 외국 친구들과도 교류를 시작했죠.
민가협 인권콘서트, 장애여성학교 졸업식, '위안부' 피해여성 프로젝트, 인종차별철폐의 날 행사
일단 지보이스가 창단된 그 해에, 아까 말씀드렸듯이 2003년 민가협 인권콘서트에 섰었어요. 당시 홍석천씨, 하리수씨와 함께 무대에 섰었고요. 그런데 처음에 지보이스 만들었을 때는 친구사이 행사하거나 송년회 할 때 나가서 노래했는데, 회원들한테 엄청 욕을 많이 먹었고요. 못하는데 왜 자꾸 나오냐고. (일동 웃음) 그러다 조금 지나니 지보이스 친구들을 자기 행사에 불러주기 시작했어요. 그 시작은 오늘 좌담회에 참석해주신 장애여성공감에서 개최했던 장애여성학교 졸업식에 저희가 초대되었어요. 2010년 정도로 기억하는데요. 그게 인연이 돼서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폐지 투쟁을 광화문에서 진행하실 때 우리가 몇번 연대공연을 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 다음에 여성문제는, '위안부' 피해여성 프로젝트 때 저희가 참여한 적도 있었고, 여성성소수자궐기대회에도 연대공연을 했었어요. 최근에 연대하게 된 사안는, 고맙게도 인종차별철폐의날 행사에 저희를 불러주셔서, 우리가 그동안 조금은 관심이 적었던, 이주민이나 외국인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고요. 노동문제에 대해서는 2011년 부산 한진중공업 사태 당시 김진숙 지도위원이 고공농성을 했을 때 희망버스를 타고 연대공연을 했었고, 같은 해 평택 쌍용자동차 복직 투쟁 현장에서 개최된 '희망텐트 1차 공장 포위의 날-와락 크리스마스' 무대에도 섰었어요.
종교단체와의 연대는, 보니까 개신교, 천주교, 불교 조계종까지 해서 3개 종단의 공연에 무대를 섰더라고요. (일동 웃음) 그 다음에 양심수 문제. 사실 시작은 양심수 문제로 우리가 연대공연을 처음 섰었는데, 작년에 한번 또 계기가 있어서 양심수 관련 광화문 문화제 때 무대에 섰던 적이 있었죠. 철거 문제에 대해서도, 홍대 두리반이라는 칼국수집이 철거당하면서 홍대 인근의 젊은 문화예술인들이 많이 연대해서 거기서 공연하고 그랬었는데, 그 때 우리도 거기에 들러서 공연을 한번 했었어요. 공터에서 우리가 노래했었는데, 깨진 화단을 단상 삼아서 지휘자가 지휘했던 기억이 나네요.
왜 연대하는가
제가 여러분과 같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지금부터예요. 왜 연대하는가, 연대활동에 참여하는 지보이스 단원들의 욕구는 무엇인가, 제가 여러분들 한분 한분 찾아가면서 여쭤봤는데요.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서, 선배들이 가니까 따라간다, 사실 이런 게 제일 많을 것 같고요. 개중에는 우리 사무국장 같은 경우는 되게 인권의식이 투철하셔서, 저 이슈를 내가 꼭 해결하는 데 힘을 보태야겠다, 이런 마음으로 가시는 분들도 있을 거고요. 그 다음에 무대에 설 기회를 갖기 위해 올라가시는 분들도 있을 거고요. 어쨌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활동 초기에는 사실 나는 그냥 게이들이랑 노래하는 게 좋아서 합창단에 들어왔는데 왜 자꾸 다른 문제에 날 데리고 나가서 노래를 같이 부르자고 하느냐-는 그런 저항이 조금 있었어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정기공연의 경우 우리 공연에 돈을 내거나 시간과 마음을 투자해서 보러 오는 사람들이지만, 길거리나 이런 데서 하는 공연들은 그냥 아무나 모르는 불특정 다수의 대중이 볼 수 있기 때문에, 커밍아웃의 부담이 아무래도 가장 컸죠. 그래서 그게 큰 문제였던 것 같고, 또는 다른 이슈에 대해서 머리로는 그 사람들 하는 얘기가 옳고 힘을 보태준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연대공연까지는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들이 대부분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혹자는 내가 노래를 못하는데 과연 저 무대에 같이 서도 될까? 이렇게 생각한 분들도 있었길 바라요. (일동 웃음)
지금은 사실 그런 저항감이 많이 줄어들었어요.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봤는데, 대부분 지금 들어오는 신입단원들은 이미 지보이스에 대해서 많이 공부를 하고 들어오세요. 영화를 보고 들어온다거나, 언론 기사를 보고, 아, 저길 나가면 얼굴을 까야 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겠구나, 이런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들어오는 경우도 있고. 또 다른 경우는 아무래도 예전에 비해서 성소수자 혐오가 많이 가시화되다보니까,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좀더 울분이 생기는 거예요. 나 더 이상 못참겠어, 이야기하고 싶어. 예를 들어서 2013년 당연한 결혼식에 나가서 똥물을 맞았는데, 그 때까진 몰랐는데 똥물을 맞고 보니까 아, 이거 그냥 사무실에 모여서 노래만 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었구나, 좀더 적극적으로 노래로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런 의지들이 더 생기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들고요.
또 2015년 아이다호 행사 할 때, 우리가 쌍차 투쟁할 때 가서 노래를 불렀지만, 그 분들도 와서 자신들도 성소수자 인권에 힘을 보태고 싶다, 혐오에 반대한다, 그런 마음을 표시하기 위해서 노래를 해주시잖아요. 그리고 장애여성공감이나 이런 분들도 마찬가지고, 아시아인권연대에서 본인들의 행사에 우리를 불러준다는 것은 우리 이슈에 대해서도 공감을 하고 있다는 뜻이잖아요. 그래서 아, 누가 우리 편이고 우리 적인지 알겠구나, '종북좌파게이'라는 게 그냥 웃기는 얘기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사실이 아닐까? 막 이런 생각을 하시더라고요. (일동 웃음) 그런 것들, 그런 부담도 좀 덜고 관심도 점점 많아지고.
가장 중요한 건 많이 보게 되니까, 친구가 된 거예요. 그래서 내 친구가 정말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는데, 내가 나몰라라 할 수는 없다, 이런 생각이 들잖아요. 그런 게 저는 사실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우리가 조금 더 연대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계기가. 이제는 연대공연 갈 사람 하면 서로 손 들잖아요. 아닌가? (일동 웃음)
예술과 운동의 딜레마
그리고 두번째는, 지보이스가 갖고 있는 고민들을 몇 가지 나누어볼 텐데요. 지보이스 단원이나 여기 계신 다른 단체 선생님들에게도 조언을 구하고 싶은 부분이에요. 첫 번째는 운동과 예술의 경계를 우리가 어떻게 지어야 될 것이냐. 우리는 예술하는 곳이냐, 운동하는 곳이냐. 사실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으면 좋은데, 정말 힘들잖아요. 특히 연대공연 무대에 설 때에는 좀 예술적인 기량을 쌓을 만한 마음의 준비가 덜 됐거나 실제로 연습이 부족한 상태에서 나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럴 때 정말 나가는 게 맞을까, 좀더 기다려서 우리가 정말 잘하는 노래가 생겼을 때 이걸 가지고 가는 게 맞을까. 그런데 우리가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그 시기에 맞춰서 단체들이 우리를 불러주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준비가 안돼 있지만 정말 중요한 사안이 터졌을 때는, 준비가 안됐더라도 어쨌든 가야 되잖아요. 이럴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딜레마가 우리에게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실 지금까지는 우리가, 물론 100% 딱 그런 건 아니고 다르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노래는 조금 덜 잘하지만, 중요한 이슈가 있을 때 조금 더 운동적인 부분을 더 강조해서 이야기해도 되겠다, 이런 흐름이 있고요. 그리고 지보이스는 이미 다른 아마추어 합창단들이 가는 길에서는 살짝 어긋나있어요. 그래서 종종 예술적 기량을 쌓는 데 그렇게 시간을 할애하고 있지는 않고, (일동 웃음) 내적인 품성을 함양하는 데 시간을 더 많이 쓰고 있는 거잖아요. (웃음) 대신에 우리 공연의 결과물 같은 것들도, 대부분 우리 이슈나 소수자 이슈를 가능하면 공연에 담으려고 노력을 많이 하고, 노래가 안되면 춤으로, 춤이 안되면 얼굴, 얼굴이 안되면 눈물로라도, (일동 웃음) 이렇게 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보여줄 수 있는, 굉장히 좀 특별한 합창단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 같아요.
이건 저희가 잘 몰랐던 부분이기도 한데, 사실 <위켄즈>라는 영화를 만들고 나서, 또는 아시아 HAND IN HAND 페스티벌에 참가했던 외국 게이 합창단들하고 비교했을 때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포지션이 굉장히 독특한 거예요. 그 분들도 벽장 안에서 노래만 하고 싶어하는 분도 굉장히 많고, 우리처럼 우리 이슈를 적극적으로 노래로 풀어내고자 하는 욕구가 우리보다 조금 덜한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분들이 사실 우리한테 많이 배운다는 얘기도 하거든요. 그러니 우리가 노래를 좀 못하더라도, 자긍심을 가져도 되지 않나, 그런 생각을 좀 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그게 예술적으로 전달이 안될 수가 있잖아요. 예를 들어서, 지난 번에 우리 광화문에서 성소수자 촛불문화제 때 노래를 하나 했어요. 음향이 안좋았다, MR이 안좋았다, 그런 핑계도 있었지만, 그 때 노래가 정말 테너하고 베이스가 다른 노래를 막 부르는 상태가 벌어졌어요. (일동 웃음) 너무 당황했는데, 다행히 그 때 음향 상태가 안좋아서, 집회 뒤쪽에 있던 사람들은 노래가 하나도 안 들렸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정말 다행이다 싶었는데, 어쨌든 그 때는 되게 부끄러웠거든요. 이게 전혀 전달도 안되는데 그냥 나가서 차라리 인사만 하고 들어오는 게 낫지 않나 이럴 바에는, 그런 생각도 좀 들었었어요. 그래서 이게 항상 우리가 가지는 고민 중의 하나고요.
나와 지보이스의 경계, 그리고 연대의 깊이와 넓이
두번째 고민은 나와 지보이스의 경계는 어디일까-인데, 노래를 잘하고 공연을 잘하고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지보이스가 게이 커뮤니티에서 자기에게는 첫번째 데뷔 무대다, 이런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리고 굉장히 젊은 친구들도 많고. 이런 분들이 음악이나 단체 내 생활을 통해서 개인적인 성장을 많이 해요. 음악적인 성장도 있겠지만, 같이 공연 준비하면서 지지고 볶고 싸우면서, 자기가 개인적으로 성장하는 분들도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오랫동안 활동한 사람은, 내가 지보이스인가, 지보이스가 나인가, 이런 고민을 하기도 하고, 그것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고, 나는 이만큼 지보이스에 애정을 갖는데 왜 저 친구는 애정을 갖지 않을까-에 대해서 이제 힘들어하기도 하고 그렇죠. 그래서 약간 교회와 같은 공동체의 성격을 갖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조직력이 그 개인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도 강력해서, 이게 좋게 좋게 말하면 굉장한 소속감과 안정감, 평온함, 이런 것들을 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지보이스에 나오면서 표정이 많이 밝아졌다, 예전에는 잠을 못잤는데 지금은 잠을 잘 잔다, 술을 먹어서 잘 자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웃음) 뭐 이런 것들, 그리고 어떤 경우는, 그동안 철저하게 자기는 일반과 이반의 삶을 분리해 살고 있었는데, 지보이스에 나오면서 그게 다 깨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과정 가운데 혼란스러워하기도 하고, 거기서 한 단계 더 나가 성장하기도 하고, 자기만의 삶의 방식들을 찾기도 하죠. 그런 것들을 같이 얘기해보고 싶었어요.
마지막으로는, 사실 게이들끼리 모여서 노래하는 취미생활로 시작된 지보이스는 이제 단원 개개인의 욕망만으로 규정할 수 없는 조직이 되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지보이스에게 시간과 목소리를 제공하고, 지보이스는 우리에게 개인적인 삶의 성장 뿐만 아니라 게이로서의 삶 너머에도 또 다른 삶이 있다, 네가 충분히 더 성장하고, 너의 삶의 경계를 넓힐 수 있다, 이런 것들을 지보이스에 참여하는 단원들에게 가르쳐주는 것 같아요. 굉장히 중요하고 고마운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늘 내가 가지는 역량보다 한발 앞서서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가 거기에 좇아가려면 너무너무 힘들다는 거죠. 그래서 이 갭을 좀 극복하는 게 우리 과제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지보이스가 연대하는 장은 점점 넓어지는데, 그만큼 깊이를 가져가나? 우리는 그냥 이름만 걸어주는 건 아닐까, 이런 고민을 하는 부분이 좀 있고요. 또 우리가 늘 수동적으로 가잖아요. 불러주면 가고 그러는데, 이슈가 있을 때 왜 우리가 먼저 가지 못할까, 이것에 대해서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나 다른 소수자 이슈가 있을 때 왜 먼저 우리가 제안하지 못할까, 이런 고민을 갖고 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 다른 선생님들 얘기를 들으면서 이 고민들이 조금도 깊어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동 박수)
▲ 지보이스 최초의 연대공연, 민가협 15회 인권콘서트 (2003.12.18)
청중토론
석(지보이스 단장, 사회) : 네, 지보이스 음악감독 전재우님께서, 지보이스가 가지고 있는 고민들, 지보이스가 운동하고 활동하면서 갖게 되는 고민들을 발제를 통해서 점검해주셨습니다. 졸던 분들 일어나시고요. (웃음) 발제 관련해서 질문을 해주시거나, 활동하는 데 있어 자기의 의견이나 생각을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카노(지보이스 단원) : 연대에 관해서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저희가 불과 1-2년 전만 해도 연대공연에 참여하고 공연만 끝나면 바로 집에 가는, 사실상 연대라고 하기 민망한 섭외 공연으로 끝이 나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아까 말씀하셨던 게 섭외가 들어오면 저희가 수동적으로 가는 문제에 있어서, 저희가 약간 인권단체인데 다른 인권 이슈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평상시에도 이슈에 대한 연대활동이 있다가 공연 얘기가 나오면 같이 하고, 그렇게 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데, 저도 그렇고 평상시에는 관심이 없다가 그 시즌만 되면 찾아가는 게, 결과적으로는 좀 안좋아보이더라고요. 그렇다면 앞으로의 방향은 어떻게 잡아야 할지, 우리가 평소에도 교육이 있다고 했을 때 찾아가고, 연대하고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공연 한번 서주세요-할 때 참여하는 게 맞을지, 아니면 지금처럼 섭외요청 들어올 때 수동적으로 응하는 식으로 해야 되는 것인지. 그런데 사실 다 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지보이스 활동이나 친구사이 활동을 하면서도 다른 단체와의 연대를 꾸준히 가져가는 게 어려운 일이잖아요.
전재우 : 질문이라기 보다는 굉장히 중요한 의견을 제시해주셨고, 같이 이야기해보고 싶은 고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비슷한 얘기를 했었고. 저는 사실 문제제기해주신 부분들 덕분에, 예전에는 뮤직캠프 안에서 이런 자리를 많이 마련하지는 않았잖아요. 그런데 어쨌든 그런 것 때문에 이런 자리를 마련했고, 평소에도 마음의 준비를 하거나 관심을 갖자, 우리가 사실 지보이스의 이름으로 결합할 수 있는 건 저는 노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지보이스는 우리에게 계속 삶의 이정표들을 알려주고, 게이 이외의 삶에 대해서 계속해서 찌르잖아요. 계속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잖아요. 그럴 때 내 개인의 삶의 변화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요. 만약 그런 이슈가 있을 때 노래로 결합하기 어렵다고 한다면, 성명을 한다든지, 농성장에 지지를 하거나, 여러 가지 결합할 수 있는 방법은 있을 것 같아요.
석 : 그럼 이어서 의견 내주시거나 다른 질문 있으신 분 있으신가요?
종걸(지보이스 단원) : 아마도 매번 연대공연이나 섭외를 제가 많이 받았기 때문에, 또는 섭외공연에 대해 개인적으로 고민을 많이 하고 있어서, 이것이 지보이스에 전달하면 지보이스가 받을까, 아닐까, 그런 고민도 많이 하거든요. 사실 개인적으로 같이 무대를 하지 못해서 아쉬웠던 부분은, 삼성 반올림이에요. 반도체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사망했었던 사건들 때문에 지금 3-4년째 농성하고 계시는. 어떤 상황 속에서 저희에게 섭외를 해주셨는데, 저희가 정기공연 연습 중이어서 외부 공연을 못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정중히 거절했는데, 마음에 계속 남는 거예요, 그런 상황들이. 그 때도 한창 운동이 집중되었던 시기였어서, 각 당과 사회단체들이 연대해서 뭔가를 해주면 좋겠다는 시기였었는데, 연대를 하지 못해서 아쉬웠었던 것 같아요.
최근에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단식 농성이 있었잖아요. 예전에 연대를 하긴 했지만, 그 이후의 A/S같은 게 부족했던, 어떻게 챙기지 못했던 상황들이 있는 것 같거든요. 순간순간 찾아가기도 했지만, 거기에 다시 우리가 먼저 찾아가지 못했던 상황도 있는 것 같고요. 사실 운동이라는 게 단번에 끝나지는 않으니까요. 계속 이어져가고 있으니까요. 그런 것들에 대해 아쉬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에요.
그런데 이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제가 친구사이 사무국장으로서, 혹은 개인으로서 지보이스에 갖고 있던 어떤 목표나 욕망들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목표나 욕망들이 다들 다르다고 전 생각이 들거든요. 어떤 사람들은 지보이스에서 그런 공연 뿐만 아니라 공동체로서의 욕망이 더 크신 분들이 있을 것 같고, 어떤 분들은 일요일에 노래연습을 위한 목표들이 더 있을 것 같고. 그런 것들이 다 다르다는 생각들에 대해서, 전 요새 이해도 되고 그러는 것 같은데, 한편으론 또 개인의 욕망이 있어요.
저같은 경우에는 하고 싶은 공연이 뭐냐면, 뉴욕 게이코러스가 주로 이슈 자체로서 조명될 때 하던 공연들이, 아침 방송에서 생방송으로 공연을 하는 거예요. 그게 어떤 이슈였냐면, 올랜도 참사 때 희생된 분들을 추모하기 위해 굿모닝 아메리카라는 쇼에서 공연을 했던 거죠. 공연의 퀄리티도 높았지만, 의미도 너무 좋잖아요. 그런 걸 준비할 수 있는 지보이스가 되어야 되지 않을까, 이런 고민이 있는 거예요. 그런 역할을 하면 좋겠다, 그런데 이건 우선 개인의 고민인 거고, 이걸 지보이스 전체가 가져가려면 저는 아직은 시간과 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지보이스의 목표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것들을 이뤄가는 것에 대해서 충분한 논의가 필요한 것 같고, 고민들을 같이 나누고, 그 시간 안에서 저는 그래도 꿋꿋이 계속, 지금 14-15년째 활동하고 있으니까, 20년, 30년째에 우리 전국방송의 아침마당에서 노래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그런 방송에서 가시화하는 전략들이 지보이스의 하나의 목표였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들이 어느 정도 논의되고 공유되고 있을까, 그런 고민들이 좀 있는 것 같아요.
전재우 : 하나만 덧붙이면, 오늘도 일정이 겹쳤어요. 오늘 세월호 4.16집회가 있어서, 거기에 시민연합합창제라고 지보이스와 유사한 성격을 가진 시민합창단들이 광화문 앞에서 작은 공연을 하는데, 저희도 섭외를 받았는데 우리는 뮤직캠프에 와서 좀더 공부를 하고, 공동체 의식도 다지기 때문에 못하게 된 상황이잖아요. 둘다 전 중요한 부분인 것 같고, 어쨌든 오늘 주제는 연대이기 때문에, 연대에 대해서 더 세게 말씀하셔도 될 것 같아요.
석 : 말씀하셨다시피 저희가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 이런 부분에 대해 조금더 초점을 맞춰서, 시간 관계상 한분만 더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물병자리(지보이스 단원) :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저 개인 스스로 불편했던 경험을 하려고 하는데요. 여기 단체 내부에서 겪었던 불편한 경험은 아니고요. 지금 만나고 있는 애인이 있는데, 그분은 예전 금속 관련 산업 쪽 회사에서 계셨었어요. 제가 지보이스를 나가는 걸 알고 있었고, 그런 연대활동에 대해서 얘기를 했던 적이 있었는데, 저는 금속노조 관련해서 연대공연을 가진 않았지만, 이슈에 대해서 맥락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고 같이 연대를 해왔고, 그런 연대공연을 자주 갔으니까, 당연히 좋은 연대겠구나 하는, 되게 막연한 맥락을 가지고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제가 만나고 있던 파트너분은 그런 연대에 대해 그렇게 긍정적인 생각을 갖지 않고 있었던 거예요. 왜냐하면 금속노조 자체의 이슈가 되게 많잖아요. 귀족노조다 이런 얘기도 많고, 그런 부분에 대해서 자기가 현장에서 겪었던 일들을 얘기하면서, 그분들과 연대를 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는 이런 얘기도 하더라고요.
가슴이 아프기도 하면서, 생각이 되게 복잡했었어요. 내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얼마만큼 생각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고, 이런 걸 내가 혼자 찾아본다고 해서, 단체로서 이런 고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저 뿐만은 아닐 것 아니에요. 이런 맥락들이 단원 전체 모두에 공유되고 있는 건 아니잖아요. 연대를 가는 것에 대한 생각이. 우리가 연대를 가는 건 정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운동이 가지는 맥락과 우리가 가는 맥락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건 그렇게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많이 연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단원들이 운동과 연대에 대한 맥락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전재우 : 저도 동의가 가는 부분인 것 같고요. 사실 다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피상적으로 알고 갈 것이냐, 조금 더 깊이를 가질 것이냐, 어디까지 깊이를 가지는 게 맞는 것이냐, 이런 이야기들이 있고요. 사실 저는 게이 커뮤니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거든요. 비슷하게 나눌 수도 있겠지만, 너무 다른 사람들이고, 커뮤니티 안에서 특정 생각을 가지는 사람 중에서도,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예쁜 사람들이 지보이스에 들어오듯이, (일동 웃음) 커뮤니티 안에서도 인권의식에 전혀 관심이 없고, 박근혜·이명박을 찍는 사람들도 있고, 그러면서도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고 감히 우리가 말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다양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고민을 가지고 결정해서 해 나가면 될 것 같아요.
석 : 네, 전체적인 의견으로는 우리가 연대를 할 때 어떤 생각을 갖고 해야 되냐, 이런 고민을 하시는 단원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고민을 안고, 다음 발제 순서로 넘어가겠습니다. 장애여성공감 이진희 선생님께서 "낯선 이들의 예술하기 : 실패하는 연습실, 삶을 살아보는 리허설, 세상을 바꾸는 투쟁"이라는 제목으로 발제를 진행해 주시겠습니다.
발제 2 - 장애여성공감
: 실패하는 연습실, 삶을 살아보는 리허설, 세상을 바꾸는 투쟁
2003년 춤추는허리 창립, 2011년 일곱빛깔무지개 창립
이진희(장애여성공감 사무국장) : 안녕하세요, 소개받은 장애여성공감 이진희이고요. 아까 재우님께서 발제하시는데, 제가 춤추는허리에서 하는 거랑 캐릭터가 비슷하셔서 좀 놀랐어요. (일동 웃음) 약간 뭔가 자기 모순적인 말을 계속 하는 것. 우리가 예술적 완성도를 위해서 하진 않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지 않은가. 그렇지만 또 우린 운동성을 가져야 되기 때문에 예술적 완성도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으나, 그러나 또 이건 좀 개선이 되어야 하지 않은가, (일동 웃음) 뭔가 외줄타기같은 소수자 문화운동이라고 해야 되나요. 뭔가 동전의 양면처럼 쉽게 뒤집어지기도 하는 이런 느낌들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었고요.
저는 2011년에 한번 왔었고 뮤직캠프에, 그리고 7년만에 왔는데, 그 때 고민하셨던 거랑 지금 고민하시는 것들이 또 색깔이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아마 춤추는허리나 일곱빛깔무지개에 대한 이야기도 그 때에 비해 많이 달라졌을 것 같고요. 춤추는 허리는 지보이스가 창립된 2003년에 창립되었고, 일곱빛깔무지개는 2011년에 창단되었습니다.
오늘 제가 준비한 건, 성소수자운동과 장애여성 문화운동이 어떻게 만났을까-이긴 한데, 제가 이걸 아주 거창하게 말할 수 있다기보다는, 저희가 하는 활동들의 면면이 지보이스의 면면과 얼마나 닮아있는가, 현장의 모습들이, 고민의 궤들이 얼마나 비슷한가, 그런 얘기를 같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대에 섰을 때의 시선과 일상에서 차별을 받을 때의 시선은 유사하다
춤추는허리와 무지개 사례를 주로 가지고 왔는데요. 춤추는허리가 공연을 마치면 제일 많이 듣는 말들이 이런 것들이에요. 고생했고 감동적이고, 사랑한다고 갑자기. 처음 만났는데. (일동 웃음) 따뜻한 마음의 표현이죠. 그런데 사실 이런 부분들이, 이주민 운동 하실 때도, "한국사람 같아요", "한국말 잘하시네요", 이런 말들이 격려라고 하시지만 사실 이것이 차별의 다른 얼굴인 것처럼, 이런 얘기를 할 때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되게 난감해지는 거죠. 그러면서 사실 공연을 하면서, 이게 개별적인 존재로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소수자 집단의 정체성, 장애여성이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서 나의 어떤 면들이 보여지는 건 아니지 않은가. 물론 그 정체성이 싫은 것이 아니에요. 그 정체성과 내가 분리되는 것도 아닐 것인데, 이 집단에게만 향하는 시선들이 상당한 불편함을 주었었죠.
무대에서 경험하는 이런 고민들이, 그냥 선한 사람들의 자칫 실수가 아니라, 저희는 이제 장애여성운동을 하면서, 몸의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 사회에서 비정상으로 취급받나, 이런 걸 고민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다른 몸을 가진 사람들이 차별받는 이유들을 쫓아가다보니까, 사회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정상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비정상이라고 하고, 표준이라고 하는 손에 잡히지 않는 무대를 좇지 않으려고 하면, 다들 규범 밖, 제도 밖으로 밀려나는 차별받는 사람들이 되는구나, 이런 것들을 발견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무대에 서는 경험들이, 이런 반차별운동을 했을 때 우리를 비난하거나 동정하거나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의 느낌과 시선과 동일하다는 감정을 많이 갖게 됐어요.
그래서 저희가 문화예술 공연하는 걸 보면 어떤 사람들은 그래요, "장애인들이 갈 데가 없으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간이 많이 남으니까 하는 거겠지", 혹은 또 잘하는 천재 예술가가 있잖아요. 그러면 또 이렇게 말하기도 하죠. "장애인들이 원래 집중력은 좋아", (일동 웃음) 재밌는 분석이죠. 그래서 뭔가 할일없는 사람들, 혹은 어떤 장애로 인한 몰입도의 천재성, 이런 것들로만 평가받고 있는데, 그래서 치유, 치료, 뭐 이런 말들로 장애인 예술이 많이 일컬어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제가 앞서 말씀드렸던, 거리에서 우리가 섰을 때 사람들의 반응, 무대에서 우리가 섰을 때 뭔가 우리를 반대하거나 우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결국 무대에 서는 것이 상당히 정치적이다, 내 경험과 몸과 이야기를 드러내는 것은 상당한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 하는 거고, 사회의 정상적인 규범과 맞서는 되게 도전적인 행동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이런 활동들이, 매일매일 우리가 무슨 머리띠를 두르고 깃발을 두르고 정치적인 어떤 것이야! 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순간순간 우리가 웃으면서 노래를 하고 웃으면서 몸을 움직이고, 싸우기도 하고 얼굴 붉히고 갈등하고 이런 과정들 자체가, 첨예한 사회적 조건들 안에서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기 위한 간절한 순간들이란 생각을 많이 해요.
보여지는 존재에서 보여주는 주체의 삶으로
특히 장애여성에 대해서는 어떤 영감거리, 감동을 줄 거라는 기대가 많기도 하죠. 그래서 저희는 차별받는 속에서 보여주는 주체가 아니라 보여지는, 평가를 당하는 사람들인 거죠. 내가 뭔가 나로서 얘기을 할 수 있는 조건들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오고 있고요. 그렇게 보여지는 몸을 가진 채, 소수자 집단의 정체성으로서 동일하게 계속 사람들이 혐오·차별하거나 동정하는 표현들을 듣거나 노출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예술하기, 혹은 예술가 되기는, 일상에서부터 우리가 연습실, 그리고 무대에 서는 그 순간까지 연장선상에 있는 고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핵심적으로 저는 우리가 문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니까, 보여지는 존재를 거부하면서 보여주는 주체의 삶을 선택하는 과정이 우리가 문화운동을 하는 결정적인 동기라고 생각해요.
물론 이것들을 모두가 언어로서 말하지는 않아요. 저희 배우님들도. 그런데 어떤 부분에 있어서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라는 힌트를 얻었는지를 좀 뒤에서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그래서 예술하기-라는 것은, 노래를 하는 것, 연극을 하는 행위는 각자 주체적인 삶을 일구는, 나답게 살고 싶은 그 삶을 일구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하는 거죠.
춤추는 허리의 공연 장면인데, 이게 보면 <세상에이런일이>나, <서프라이즈> 이런 데서, 그리고 장애인들이 많이 나오는 다큐멘터리랑은 되게 다른 장면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이런 부분에 중점을 두고 저희의 예술활동, 운동들을 해나가고 있는데, 춤추는 허리의 경우 대부분 지체장애여성들이고, 2년 전부터 발달장애여성들도 같이 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안에서 어떤 고민을 마주하게 되냐면, 지체장애여성과 발달장애여성이 소통함에 있어서, 언어장애가 있는 지체장애여성과, 지적장애가 있는 장애여성과 의사소통하는 것부터 난관의 시작인 거죠.
지보이스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데, 바깥에서 보면 우리를 그냥 한 덩어리로 보잖아요. 한 묶음으로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안을 들여다보면 각자가 너무 다르고, 지향도 다르고 욕구도 다르고, 너무너무 다른 거죠. 그래서 사실 그 안에서 서로 불화하면서 토론하고 갈등하면서 만들어나가는 역동이, 그 힘이 되게 큰 거죠. 그래서 우리 힘이 되게 커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안에서 발달장애여성이, 지체장애여성이, 언어장애가 심한 사람이 하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가졌던, 스스로 도전했던 시간이 있고, 지체장애여성들은 또 발달장애의 특성을 잘 이해 못해요. 장애인들끼리 다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런 시간들을 거치고 나니까 단단해졌었는데, 밖에서 봤을 때는 동일한 어떤 정체성, 모두가 다 동일하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얘기를 들어보니까 서로 다른 모습들을 서로가 발견해나가면서 성장해나간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춤추는허리는 이제 15년 됐거든요. 우리는 장애여성 문화운동을 해-라는 합의점에 도달했어요. 왜냐하면, 저희가 이런 합의점에 도달한 결정적인 이유가, 저희가 신입 배우를 받지 않았어요, 5년 동안. 그런데 그건 약간 시기도 공교로웠는데, 모집을 해도 안 와요, 사람들이. (일동 웃음) 그러면 있는 우리들이라도 좀 잘하자, 그래서 6명의 배우가 상주했었고요. 그러면서 사실은 논의가 계속 깊어지게 된 과정이 있었어요. 최근의 고민들이 뭐냐면, 무엇이 기술적인 연마인가, 뭐가 예술적인 완성도와 성취인가에 대한 것인데요.
무대 자체를 사회가 기대하는 이미지를 거부하면서, 장애와 권리를 보여주는 움직임 자체를 보여주는 것 자체가 우리가 사회에 저항하고 인권을 외치는 것이다-라고 얘기하고 있고요, 일단. 그리고 다음은 어떤 것이냐면, 저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술적 연마는, 예술적 성취의 기준이 우리는 비장애인의 예술의 어떤 지점과는 되게 다르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무대 위에서 발성이 좋고 발음이 좋은 어떤 성취를 위해 비장애 배우가 노력한다면, 장애가 있는 배우들의 예술적 성취는, 예를 들면 언어장애가 되게 심한 장애여성 배우가, 자신의 언어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 발음연습을 하는 게 아니라, 언어장애가 있는 그 특성이 어떤 주제와 어울릴 것인지를 찾는 것이 우리의 예술적 성취다-라는 내용들로서 합의해가고 토론해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소수자에게도 실패할 권리가 있고, 삶의 주도권을 쥘 권리가 있다
어쨌든 얘기를 들어보시면 저희도 복잡한 일이 많고, 시끄러운 일들이 많아요, 내부적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망하지 않았나-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은데요. 저희는 연습실에서는 실패가 보장되기 때문에 저희가 망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이야기냐면, 배우분들이 하신 얘기인데요. 한 분은 생활시설에 오랫동안 계셨던 분이신데, 이 분이 이런 말씀을 하세요. 옛날에 시설에서 자기와 같이 있었던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자길 만나면, "너 옛날보다 똑똑해졌다", "말 잘한다", 이런 말을 한다는 거예요.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일동 웃음) 그럼 옛날엔 어떻게 봤다는 거지? 이런 거잖아요. 불편한 얘기죠. (웃음) 그런 얘기를 하면서, 자기 자신도 달라졌다는 걸 느낀다는 거죠. 그리고 어떤 분은 공감에 오면 고민하라고 하고 생각하라고 하고, 토론하자고 하고 의견 얘기하라고 하고, 피곤하다고, 왜 운동을 해야 되냐, 난 여기서 주인공 하고 싶어서 왔지, 왜 자꾸 불편하게 하냐, 그래서 나 이것만 하고 다시는 안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몸이 여기 와 있네? (일동 웃음) 약먹으면서 졸려 죽겠는데 또 여기 와 있네? (웃음) 이런 이끌림.
그래서 저는 이게, 그냥 진짜 장애여성들이 할일이 없어서 오는 게 아니라, 과거의 삶과 결별하겠다는 정치적 결단이라고 생각해요. 과거에 시설에서 선생님들 말을 잘 듣고 착한 장애여성으로 살아야 생존할 수 있었던 시간들, 그리고 내가 조금 몸은 편할 수 있었지만 비주체적이어야 사람들의 활동보조도 받고 그랬던 시간들, 내가 눈 동그랗게 뜨고 하기 싫다고 말하면 아무도 날 살갑게 케어해주지 않으니까, 그 시간이 몸은 더 편했을지 모르지만 그 시간들이 나에게는 이제 다시 돌아오는 게 싫다-라는 어떤 결별의 선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같이 연습을 하는 이 공간이.
저는 이게 실패하는 연습실이라고 왜 생각하면요, 장애인들이 실패하면 "그러니까 장애인들이 그렇지 뭐" 라거나, 저는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실패는 보장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실패의 원인을 사람들은 그 소수자성에서 다시 찾으려 고 하니까요. 네가 장애인이라, 네가 이주민이라, 네가 성소수자라, 네가 여자라, 이렇게 환원시킨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은 더 조심해야 되고, 더 정상적으로 보여야 되는 압박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장애여성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이 연습실에서는 정말 나답게 살 수 있는 많은 실천들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많이 싸울 수밖에 없지 않나. 그래서 저희의 연습실은 보이지 않는 완성을 향해 가는 거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리고 이 보이지 않는 완성이라는 것은 이 무대 위에서의 주도권을 연습하는 시간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공적인 장소에서 노출되는 경험이 적었거나 노출되는 경험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던 사람들이, 공적인 무대를 같이 만들어가는 과정인 것 같기도 하고요.
배우분들 중에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세요. 나는 무대 밖에서는 한번도 내가 계획해본 대로 해본 적이 없는데, 무대 안에서는 내가 내 이야기로 만든 대본을 가지고 처음과 끝을 내가 정할 수 있다, 그런 주도권을 가진 삶을 나는 무대에서 연습하고 있다. 이런 경험들이 그래서 되게 중요하고, 지보이스를 처음 만났을 때 춤허리나 무지개나, 저는 서로 무대 위에서 섰을 때의 느낌들, 그 한 순간의 무대에서의 경험. 우리가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무대를 잊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 순간에 또 나를 보러와준 사람들과 맺었던 평등한 감각들을 저는 잊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무지개나 춤허리나 지보이스를 만날 때 이들도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겠구나-라는 감각들은, 서로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초면에 반말을 하지 않은 사람들
지보이스랑은 이렇게 춤허리나 장애여성학교랑 만나다가, 무지개를 통해 본격적으로 만났는데요. 성소수자를 차별하면 안된다, 이런 인식을 무지개가 완벽하게 준비해서 지보이스를 만났다기 보다는, 사실 무지개 분들도 다들 제각각이셨어요. 그런데 지보이스를 만나시면서, 함께 하기 위한 사전 준비를 길게 가졌다고 생각해요. 한 4년 전부터, 서로 공연 보는 것부터 시작했다고 생각하고, 작년에 재우님이랑 지휘자님께서 오셔서 워크샵을 같이 해주셨는데요. 그 워크샵을 하면서 서로의 소수자성에 대해서 배워가는 시간을 가지게 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춤허리나 무지개가 뭔가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서로 만나게 됐던 과정, 만나서 뭔가를 만들어가면서 다투고 갈등했던 과정들이 사회에 대한 도전이고, 그런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각자의 삶에서 중요한 문제일 수 있죠. 그건 나의 소수자성을 발견하는 시간일 것이고요. 그리고 연대는 타인의 소수자성에 대해서 발견하고 서로 알게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성소수자를 차별하면 안된다는 인식을 처음부터 정확하게 가지고 무지개가 만남을 시작했다기 보다는, 지보이스를 만나면서 친구로서 알게 된 거예요, 관계로서, 얼굴을 가진 존재로서. 성소수자 차별이 이거예요-라고 저희가 교육이나 워크샵을 많이 하지만, 그런데 그게 추상적인 감각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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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일곱빛깔무지개가 지보이스 분들을 만났는데, 너무 놀란 게 지보이스 분들이 일단 반말을 안하셨고, 친절했고 존중해주시는 거예요. 어딜 가도 맨날 반말하고, 어딜 가도 맨날 선생님들인데, 지적장애여성들은 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친구가 아니라 지적장애여성, 그리고 그를 지도하는 선생님, 이 관계인데, 전혀 다른 식의 관계를 지보이스 30명하고 동시에 맺은 거죠. 한 3주간의 시간을 통해서. 그래서 이것이, 이들이 우리를 대하고 바라보는 것이 상당히 인권적이구나, 존중감이 있다는 걸 무지개 분이 많이 느끼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자주 연락하시고 할 텐데, 오해하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일동 웃음) 다른 뜻은 없어요. (일동 웃음)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해하지 말아주시고요. 평등한 대접에 대한 메아리라고 생각해주세요. (웃음)
공연이 끝나고 난 뒤 난데없이 "사랑합니다" 이런 말 해주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피드백을 했던 사람들을 처음 만난 거죠. 연대란 게, 저는 학습을 많이 하고 나가야 되나, 준비하고 나가야 되나, 언제 준비가 되나, 저희도 내부적으로 그런 고민이 많은데, 그런데 또 어느 순간 나가다보면 학습을 통해서도 얻지 못하는 몸의 경험들이 중요해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같이 싸운다는 그 느낌. 특히 올해 2월 장애여성공감 20주년 기념식의 무대는 더 각별했단 생각이 들어요. 며칠 전에 여러 사건이 있었잖아요. 무대를 같이 서기 전에. 그런 사건들을 통해서 서로 연대해야 되는 이유가 분명해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래서 무지개 분들이 평가할 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지보이스 목관리 잘하면 좋겠다", 이렇게 쓰면 오해가 생기잖아요. (일동 웃음) 이러면서 지적장애여성과 소통하는 감각을 또 서로 배우는 것 같은데, 이건 목소리 안좋다는 게 아니고, 건강 걱정차원에서, (웃음) 컨디션 안좋아지실까봐 그런 거고요. 그리고 이런 것도 있죠. "지보이스가 연습을 많이 하더라, 생각보다, 우리보다 많이 하더라, 지보이스를 통해 배우자." (웃음) 혼자 있을 땐 몰랐던 거죠.
불화하지만 안전한 커뮤니티의 감각
어떻게 연대를 하게 되었을까, 저는 숙명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만나면서 서로를 존중하는 미소와, 카톡과, 사진과, 이런 것들을 경험한 거죠. 그것들을 기억하는 것. 그래서 사실 연대가 완성된 게 아니라, 이제 어찌보면 무지개와 지보이스와의 연대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일 수 있겠다, 노래 같이 만들었으면 좋겠다, 같이 집회 나갔으면 좋겠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데요.
이 과정에서 수많은 불화가 있겠죠. 그 불화가 역설적으로 저희를 안전하게 해주는, 우리 공동체를 안전하게 해주는 모습인 것 같고요. 이건 무지개 멤버 중의 한 분이 하신 말씀이에요. "지적장애여성들, 머리 나빠서 잘 기억못한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슬픈 일은 머리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아요, 비장애인들은 안 그렇습니까?" 이렇게 저한테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기억이든 공유할 수 있는, 불화하지만 안전한 커뮤니티라는 것을, 무지개와 지보이스는 서로 좀 알았던 것 같고, 그걸 서로 알았기 때문에 만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너무 길었어요, 죄송합니다. (일동 박수)
석 : 지보이스랑 일곱빛깔무지개랑 되게 비슷한 것 같아요. 아까 이야기 들으면서 어, 이거 지보이스 얘기인데 (웃음) 그런 지점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럼 다시 말씀하신 내용들에 대해 질문이나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누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청중토론
재우 : 한 가지 쉬운 질문 드릴게요. 저는 일곱빛깔무지개 공연도 정말 좋아하지만, 춤추는허리 공연도 너무 재밌거든요. 그래서 내가 얼마나 한 가지 생각만, 가치관만 가지고 살았나, 정말 예술을 보는 다른 관점이 있을 수 있다, 이런 걸 춤추는허리를 보면서 많이 배웠는데, 대본을 직접 쓰시는 거잖아요. 그게 전 되게 궁금해요. 누가 어느 정도로 개입해서,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어느 정도 시간을 가지고 만드나, 뭐 이런 것들.
이진희 : 작품마다 다른데요. 보통 워크샵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건 몇 개월 걸려요. 저희는 장면 만들기라고 해서, 어떤 주제에 대해서 각자 자기 삶의 이야기를 어떤 한 사람이 하면, 그 주인공을 다른 사람이 즉흥극을 하는 거죠. 그러면 담당 활동가나 워크샵 진행하는 극작가가 그걸 다 속기를 해요. 거기에서 중요한 장면들을 찾고, 배우들이 직접 즉흥극했던 말에서 대사를 찾고. 그래서 저희 극작 해주시는 분이 춤추는허리를 시작부터 같이 해주셨던 분이고, 연극계에선 되게 유명하신 분이에요. 그런데 저희랑 작업을 할 때는 춤허리가 소스 주지 않으면 못한다, 배우들이 계속 말하고 움직이고 얘기하는 것, 그걸로 창작하는 거고요. 그래서 워크샵을 몇 개월 해요. 최근에는 조금 속도가 빨라지긴 했고요. 초안을 장애여성 연출가가 쓰기도 합니다. 그 초안을 가지고 극작가가 한번 조금 더 극적으로 재밌게 만들어주기도 하고요.
바로(지보이스 단원) : 안녕하세요. 저는 연대활동도 그렇고 지보이스도 들어온 지 얼마 안됐는데, 저희 지보이스 정기공연과 비슷한 공연이 있으면 어디서 하는지 알려주세요.
이진희 : 홍보드릴게요. 저희 7월하고 11월에 대학로 이음센터라고요, 올해는 두 번 공연할 거예요. 7월에는 <불만폭주라디오>를 할 거고, 그리고 이번에는 장애여성 1인극을 준비 중이에요. 그건 11월에 하게 될 것 같아요. 그 때 꼭 보러 와주세요.
바로 : 홈페이지나 이런 데서 찾아볼 수 있는 건가요?
이진희 : 네, 저희 홈페이지에 안와보셨나봐요. (일동 웃음) 죄송해요, 제가 마음 속에 있는 말을 항상 해서, (일동 웃음)
전재우 : 진희씨도 출연하나요?
이진희 : 저도 배우 없으면 출연을 하거든요. 저는 이제 주로 비장애인 역할, 나쁜 비장애인 역할, (일동 웃음) 평등하지 않은 사회복지사 역할, 이런 걸 주로 하고 있습니다. 꼭 보러오세요. (웃음)
석 : 그럼 마지막으로 질문 한 가지 더 받겠습니다.
싸게(지보이스 단원) : 저는 무지개 분들이랑 같이 공연할 때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하신 말씀이, 자기가 원래는 기독교에서 교회를 나갔었는데, 교회를 이제 안나간다는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목사가 설교를 하고 있는데, 거기서 성소수자, 동성애자에 대해서 굉장히 혐오발언을 많이 했는데, 그게 너무 화가 나서 거기서 뛰쳐나오셨다고 했고, 그 다음부턴 안 가신다고 들었거든요. 그게 기억에 너무 많이 나는데요, 평소에 저희도 성소수자가 아니라 다른 것에 대해서 계속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하지만, 이 분들도 그렇게 노력을 평소에 많이 하시는구나, 그런 교육같은 걸 하시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진희 : 네, 같이 워크샵이나 프로그램을 정말 많이 하고 있고요, 많은 얘기를 하려고 노력해요. 공감에서 활동가들이 매일 활동을 하니까, 좀더 많은 정보를 갖게 되고 생각할 시간도 많은데, 회원분들이 그럴 시간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공감에서 사실 운동을 추동하는 것은 회원분들의 의견과 목소리라고 생각해서 이런 이야기 나눌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해요.
그리고 그 분이 그래서 교회를 바꿨어요. 성소수자 차별하는 발언을 비롯해서, 선거 때 찍지 마라, 기독당 찍어라, 이런 말도 재작년에 하고 교회에서. 그런데 그 교회에 어머님이 집사이셔서 금방 그만두지는 못하셔서, 너무 힘들었죠. 그래도 결국 결별을 하셨고요. 그리고 이 분이 교회를 섬돌향린교회로 옮기셨어요. 옮기시면서 첫 헌금 봉투에 이렇게 쓰셨대요. "주님, 제가 OO교회를 다녔는데, OO교회는 너무 인권 차별, 성소수자를 차별해서 섬돌향린교회로 다니게 되었어요, 그래도 하나님 지켜주세요." (일동 박수)
석 : 저 말 너무 찡하네요. 장공감의 춤추는허리나 무지개의 활동을 들으면서 공감의 지점들도 있었을 것이고, 우리가 또 어떤 연대를 했고, 어떤 연대를 하고 싶다, 이런 생각들도 하셨을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을 담아서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을 해봐야겠죠. 그럼 잠시 쉬었다가, 다음 발제 이어가기로 하겠습니다. (10분 휴식)
발제 3 - 아시아인권문화연대
: 다름을 존중하며 '모두가 즐거운' 마을을 꿈꾸다
이주민이 문화를 향유할 권리
이정은(아시아인권문화연대) : 안녕하세요. 아시아인권문화연대에서 일하는 이정은입니다. 아시아인권문화연대는 부천의 도당동이라는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저희는 이주인권운동을 하는 시민단체인데, 단체 이름에 '문화'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주민의 권리를 이야기할 때 보편적 인권을 얘기하는데요. 보통 '이주민' 하면 이주노동자를 먼저 떠올립니다. 그런데 이주노동자는 주말이나 휴일이나 관계없이 끊임없이 일만 하는 모습으로 그려지죠. 인간으로서 누려야 하는 권리 중에는 일상적으로 문화를 향유해야 할 권리도 있는데 말이지요. 그 부분에 대한 편견이 있는 거예요.
이주민들이 자신이 가진 문화를 존중받고 스스로 마땅히 누려야 할 문화적 권리, 시민으로서의 권리도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단체 이름이 '아시아인권문화연대'가 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 저희는 틈틈이 이주민과 선주민들이 소통할 수 있도록 '문화예술'을 매개로 한 접점들을 만들고 있는데요. 그렇다고 전문적으로 예술활동을 하는 곳은 아니어서요. 사실상 이 자리에서 발제를 하는 게 과연 적합할까 고민이 있었어요. 부담이 크지만 지역사회에서의 경험을 편안하게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전에, 지보이스가 지난 3월 18일, '2018 인종차별철폐의 날 공동행동'에 연대해주셨잖아요. 2년 연속 지지해주시고 좋은 공연을 해주셔서, 그 마음이 너무 감사했어요. 일단 그 감사의 인사부터 드려야 할 것 같아요.(일동 박수)
이번에 '인종차별철폐의 날' 행사 평가를 하면서, 이주민 공동체들의 의미 있는 반응에 대해 전해 들었는데요. 올해 집회에 처음 오셨던 분들 중에 지보이스 합창단 공연을 정말 뚫어져라 집중해서 보시는 분들이 많이 계셨다고 하더라고요. 공연으로서 이주민들의 인권 이슈에 연대하는 모습을 보고 뭐랄까, 고마움 이상의 감정을 느끼셨던 것 같아요, 첫 만남 자체가... 그래서 여러 순서 중 특히 인상이 깊었다고 말씀하셨대요. 지금 너무 떨리는데요, 얼굴이 빨개지고 있어요. (일동 웃음)
지역 속의 이주민과 선주민
아시아인권문화연대는 위와 같이 정리된 내용의 운동방향을 갖고 있어요. 부천 도당동에 사무실이 위치해있는데, 이곳이 구도심이에요. 지역적 환경은 작은 규모의 영세 사업장들이 많다보니 이주노동자 분들이 인근에 거주하는 비율이 높습니다. 비율로는 18% 정도 되고요. 그러니까 이 지역을 거닐다 보면 아주 쉽게 이주민을 만날 수 있는 거죠. 이주노동자 뿐만 아니라 결혼을 통해서 가족을 형성한 이주민들, 난민들, 그리고 그들의 2세 자녀들도 거주하고 있어요. 전통시장을 가운데 끼고 주변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요. 이곳 시장에는 각국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음식점이나 다양한 식재료를 판매하는 식료품점들이 눈에 띕니다. 저희 사무실도 시장 안에 있습니다.
이 공간 안에서 이주민들과 선주민들이 공존함에도 사실 이웃으로서의 직접적인 만남이 거의 없어요. 그냥 스치듯, 길에서 버스에서 피부색과 생김새가 다른 사람을 만나긴 하지만 잘 교감할 수 없는 것처럼, 살고 있는 거주 지역에서도 그런 식이었습니다. 문화가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함께 살고 있을 때 어떻게 하면 접점을 만들까를 고민하기 시작했고요.
(피피티 화면을 보며) 흔히 이주민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조사한 결과에서, 긍정적인 것을 찾아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주민 혐오표현 실태조사 결과에서 나타난 표현들을 살펴보면요. '더럽다', '시끄럽다', '냄새난다', '남의 나라에 와서 일자리를 빼앗는 집단이다', '미개하다', '무식하다', '게으르면서 돈을 밝힌다', '잠재적인 테러리스트'-특히 이것은 이슬람교 신자들을 지칭하는 거고요. '아이를 낳으러 팔려온 불쌍한 사람', 결혼이주 여성을 향한 표현입니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표현도 마찬가지겠지만, 직접적인 교류와 소통이 없고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막연한 고정관념과 편견들이 있잖아요. 그런 것들이 미디어를 통해 재현되는 부분도 많이 있죠. 한번 이주민과 관련된 범죄가 일어나면 그것과 관련된 보도가 연일 이어지고, 그걸로 인해서 '이주민 집단=범죄' 식으로 각인되는 것이죠.
'더럽다, 시끄럽다, 냄새난다.'는 실제와는 무관하게, 그런 느낌적인 느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 그렇게 느낄까, 바로 피부색에 대한 차별 때문인데요. 피부색에 대해서도 똑같은 이주민이라 하더라도 하얀색 피부를 가진 사람들보다 어두운 색 피부를 가진 사람에게 더 거리감을 느끼고, 한 가지 사례가 있는데요. 똑같은 상황에서 영어로 이야기를 하는데, 길을 묻는 질문을 했을 때 질문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이 다 다른 거예요. 피부색이 검은 사람에게는 조금 더 불친절하거나 바쁘다고 지나치는 반면, 피부색이 하얀 사람에게는 친절하게 길을 안내하죠. 피부색, 인종차별에 대한 민감성에 있어 한국사회가 매우 둔감한 상황입니다.
막연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갖고 있다 보니, 이주민을 바라보는 시선이 굉장히 혐오적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다문화적인 수용성, 피부색과 인종과 출신 국가가 다른 존재들에 대해서 개방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을까-했을 때, 다문화수용성에 대한 연구 결과, 연령별로 봤을 때, 성인보다 청소년들의 수용성이 더 높았고요, 다문화교육 및 활동 경험이 있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다문화수용성이 상대적으로 높았습니다.
이 연구 결과는 저희가 있는 지역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장을 끼고 있는 구도심으로 이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인데, 시장 상인들조차 항상 고객을 마주할 때 이주민인 경우에는 차별적인 태도로 대하는 거죠. 무턱대고 반발을 한다거나... 이런 상황에서 상호 만나는 계기를 다양하게 마련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상인들 입장에서는 친밀하지 않은 관계에서 무심코 반말을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고요.
다문화주의가 포함하는 것 : 인권, 문화다양성, 그리고 소수자 주권
우리가 최근에 '다문화'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쓰는데요. 사실 '다문화'는 국적이나 인종, 피부색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지역, 성별, 성적 지향, 종교, 학력, 학벌, 직업 등 여러 가지 개인이 갖고 있는 문화적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 존중되는 가치 자체를 이야기하는 건데요. 한국 사회에서는 '다문화가족'이란 말이 만들어지면서, '다문화' 하면 결혼이주여성을 먼저 떠올리고 결혼을 떠올리게 됐거든요. 그리고 무조건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다문화주의가 포함해야 하는 것들은 이런 것들이에요. 인권, 가장 보편적인 인권을 담고 있어야 하고요. 문화다양성,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하고요, 그리고 더불어서 보편적 인권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특히 배제되고 소외되는 '소수자 주권'이 더 강조되어야 하는데, 이걸 어떻게 지역에서 실천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앞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만남을 통해서 수용성이 증가한다는 것에서 드러나듯이, 결국 접점을 계속 만들어야 되는데요. 지역 안에서는 만나는 경험을 통해서 소통하고 교류하면서 다름에 대한 이해를 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막연하게 그냥 피부색이 다른 이주민이 길에서 만났을 때 거리끼게 되고 멀리하게 되었던 상황에서, 이런저런 기회를 통해 만나면서 존재를 인식하게 되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같이 사는 이웃으로서 공존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하는 거죠.
지역에서 문화예술활동을 매개로 해서 하고자 하는 목표는 바로 이런 것들이에요. 첫째로 이주민 입장에서는 자기 문화에 대한 정체성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었고요. 한국에 왔으니까 한국 문화만 습득해야 하고 한국 문화만 누려라-라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데에서 출발하는 거고, 선주민의 입장에서는 다른 문화에 대해서, '상호문화', 즉 다른 문화와 교류하면서 이해하고 존중하는 목표가 있었고요. 이를 통해서 이주민과 선주민이 함께 살아가는 공간으로서 지역사회에서는 사회 통합 차원의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에 거주하는 거주민으로서 누려야 하는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자는 취지가 가장 컸습니다.
그럼 실제 사례에 대해서 조금 더 집중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가 마을에서 축제를 하기 시작했어요. 2012년부터 1년에 한번씩, '강남시장마을축제'라는 이름으로 하는데요. 저희가 두번째 해 때, 시장축제를 하면서 뒷면에 캠페인 포스터를 만들었습니다. 여기 보시면 "고향은 달라도 여기 살면 부천시민"이라는 메시지를 담았는데요. 포스터에 나온 분들은 모두 시장의 이주민, 선주민 상인분들이세요. 여기 머리 위에 있는 말풍선에는 고향의 이름이 적혀 있고요. 한국에서는 시민권이라는 개념이 없는데요. 국적을 기준으로 국적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보장되는 권리가 다르잖아요. 그것이 아니라 이 곳에 함께 살고 있으면 거주민으로서의 권리가 동등하다는 것이죠.
다문화는 이주민과 선주민 모두를 위한 목표
주민들이 다같이 모여서 즐기는 축제라는 의미를 담기 위해서 해마다 포스터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얼굴이 다 달라지거든요. 그래서 "올해는 누가 나왔네?", "내년에는 나도 나가볼까?" 이렇게 되는 거죠. 남녀노소 시장 상인분들과 주민들이 같이 어울리는 모습이 다정하게 연출됩니다. 사실 이름의 유래가 불명확한 '강남시장'인데요.(일동웃음) 우리가 해석할 때는, 이 해의 주제를 '박씨 물고 온 제비'라고 했거든요. 흥부전에 보면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가 흥부네 가족을 풍요롭게 만드는 근원이 되잖아요. 자신의 모국에서 이동한 존재인 이주민들을 떠올려 '제비'라고 생각했어요. '박씨 물고 온 제비'라는 데에는 이주민들이,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이동하면서 본국에서 품고 있던 자기의 존재성, 문화적인 고유성이 고스란히 전해지게 되죠. 그 다양한 문화를 '박씨'에 비유한 것이죠. 그 존재에 대해서 감사해야 되는 거거든요. 그 존재로 인해서 풍요로워지니까, 그런 의미를 담았습니다.
축제를 하는 동안 참여하는 사람도, 축제를 운영하는 주체도 다 선주민과 이주민들이 서로 어울립니다. 이주민들은 이렇게 부스에서 음식을 만들거나, 놀이 등을 통해서 자기 나라 문화를 함께 전달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주 배경을 가지고 있는 아동·청소년들도 많이 살고 있는데요. 그 친구들이 흥부와 놀부의 한 장면을 마당극으로 꾸미기도 했어요. 이 날 시장은 각자의 끼를 발산하고, 주민들과 교류하는 현장이죠. 동네 무대에 멍석을 깐 작은 무대이긴 하지만, 그 친구들은 이 문화예술활동을 통해서 사람들을 만나고, 소통하고, 자기를 주체로서 당당히 내보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거죠.
퍼레이드도 했는데요. 이 지역의 특성이 있다 보니까 각국의 문화를 이 곳에 오면 한 눈에 볼 수 있어요.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한껏 즐거워보이는 축제도 시작은 참 엄했습니다. 특히 시장상인분들의 반응이 굉장히 냉담했어요. 왜냐하면 다문화 축제 하면 이주민만의 축제라 오해를 하시고, "우리는 상관없는데?", "이걸 왜 굳이 시장에서 해야 돼?" 하시면서 절레절레하시는 분들이 많았거든요. 시장 공간 곳곳을 활용하는 행사다 보니 미리 협조도 구해야 하는데 상인회 임원분들이 나서서 설득을 해도 막무가내였지요. 그런데, 한 해 두 해 경험이 축적되다보니까 생각들이 변하기 시작했어요. '다문화라고 하는 것이 이주민들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결국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되는구나.', '우리 마을은 다문화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특성이 있고, 이걸 잘 살려야 되겠구나.'-라고 의견이 모아지게 되었어요. 시장 상인분들이 축제를 환영한다는 의미로, 각 나라 말로 '안녕하세요'라는 팻말을 직접 들고 퍼레이드를 이끄는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함께 무대에 서는 사람들
상인회에서 앞치마 중창단을 조직하신 일도 있습니다. 우리도 뭔가 하고 싶은데, 영업시간을 쪼개어 연습해야 하니 대단한 걸 배워서 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우리 노래하는 거 좋아하니까 노래를 재미있게 해보자고 해서 앞치마 중창단을 만드셨고, 공연을 하셨어요. 그리고, 이렇게 단체가 마련한 별도의 공간에서 다른 나라 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영화를 통해 만나기도 하고요. 이주노동자 밴드도 조직되었어요. 발표를 시작하면서 문화적 권리를 말씀드렸는데요. 미얀마,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 중에서 본국에서 기타를 좀 쳤던 분들이 계셨어요. 그런데 지금 여기 와서는 일하느라 바쁘고 손을 놓고 있었는데 같이 연주를 해보고 싶다고 하셨고요. 때마침 좋은 기회가 와서 예술인들이랑 협업을 해서 밴드를 구성했고, 작년연말에 파티를 하면서 공연을 했었습니다. 한국 노래도 하고, 미얀마 노래도 했어요.
이 작은 공간 안에서 삶을 이야기하는 토크 프로그램을 하는 날도 있고요. 이웃 나라 음식을 함께 만들어 먹기도 해요. 음식을 통해서 만나는 게 친화력이 생기는 조건이 되거든요. 그래서 이런 활동을 자주 합니다. 야외에서 맥주를 먹는 베트남의 맥주거리를 지역에 재현해서 이웃 나라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저렴한 가격에 파는 '디디파티'를 열기도 했고요. 또 청소년들이 뮤지컬을 하기도 했습니다. 뮤지컬을 하게 된 계기는 여러 가지인데, 그 계기 중의 하나가 지보이스이기도 합니다. (웃음) 제가 2년 전에 영화 <위켄즈>를 봤는데, 말로만 듣던 지보이스 활동이 압축된 영화를 보면서 큰 감동을 느꼈었어요. 당사자의 목소리를, 스스로 자기 이야기를 담아내고 공동체를 형성해서 연대하는 이 지보이스의 경험을, 제가 만나는 이주민들, 이주 배경을 가진 청소년들과 연결해보면, 그래서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보면 좋겠다,
저희가 문화예술적인 활동을 전문적으로 할 수는 없으니까, 당연히 예술인들과 협업은 필요했고요, 이 친구들 중에는 이주배경을 가진 사람이 반 정도, 나머지 반은 선주민 자녀들인데요. 그 안에서 노래를 정말 잘하고 좋아하는 친구들은 한 세 명 정도 될까요? (일동 웃음) 그래서 계속 음도 안 맞고, (웃음) 워낙 춤과 노래를 좋아하긴 하지만 초기에는 뮤지컬을 해야 한다는 동기가 부족하기도 하고 첫도전이라서 부담도 엄청 컸었죠. 이 뮤지컬의 줄거리는 다문화 가정 자녀들이 겪는 어려움과 스트레스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건 실제 자기들이 경험했던 거예요, 중고생이 된 지금,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만들었었죠. 연습과정에서 우여곡절은 있었는데 총연습까지도 과연 무대에 오를 수 있을까 너무너무 걱정됐어요. 그런데 정말 친구들은 무대 체질이었어요. 그거 하나는 믿고 있었거든요. 이 친구들이 무대에 오르면 그 순간 집중을 받으니까, 감쪽같이 변신을 해요. 자기가 가진 끼와 능력을 맘껏 발산하며 무대에서 환하고 밝아지는데, 그날이 그랬고요. 무대가 소극장이었는데 관객으로 꽉 차서 더 신이 났던 것 같아요. 권정생 선생님의 <강아지똥> 작품을 각색해서, 강아지똥이 놀이터에 앉아 오고가는 아이들의 고민을 내내 들어주고요. 친구들끼리도 가지고 있는 서로의 갈등을 들어주면서 연대하고요. 마지막에 강아지똥이 자기 몸을 녹여 민들레 꽃을 피우고요. 그 꽃을 보며 모두가 각자의 희망을 담아내며 막을 내리죠. 다시 한번 저희에게 용기를 주신 지보이스에게 감사드립니다. (일동 박수)
이주배경청소년들은 스스로 이주 경험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부모님을 통해 이주배경을 갖는 경우도 많거든요. 성장하면서 정체성의 갈등을 겪게 되는데요. 앞으로는 이주인권운동에 있어서 2세들의 운동이 더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1세 분들은 한국사회에 적응하는 것 자체도 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은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고, 선주민들과 동등한 조건에서 교육받고 성장했기 때문에 자기의 자원을 갖고 있고요. 거기서 자기 정체성을 인식하는 순간, 자기의 운동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존재들이 되는 거죠. 이 친구들에게 그걸 막 주입해서 하진 않지만, 이런 경험을 통해서 당당하게 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희는 큰 걸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무대에 선 청소년들을 보면 하나하나 다 환하게 웃고 있어요. 올해도 준비하고 있는데요, 자기들이 이렇게 신나게 무대에 올랐던 걸 까먹고는, 올해 초에는 그거 또 해야 되냐고 하기 싫다고, (일동 웃음) 원망을 하면서 하는데, 분명히 열심히 하다가 또 무대에 오르면 또 이런 모습이 연출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희는 10월 말에 공연하는데, 그 때 혹시 시간되시면 그날 초대해드릴 테니 멀지만 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동 박수)
지보이스가 '인종차별철폐의 날'에 연이어 저희와 함께 연대해주신 것도 그렇고요, 결국 소수자의 운동의 연대가 점차 강조되고 있는데요. 저희로서도 이렇게 연대공연 초대하고 와주신 것 감사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소수자 운동이, 또 지보이스가 나아갈 방향에, 이주인권 진영이 어떻게 함께 연대할 것인가도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아요, 오늘 이 자리가요. 그래서 우리 모두 나아가야 할 길에 함께 손잡고 힘내서 갔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동 박수)
▲ 지보이스 뮤직캠프 기획포럼 (사진 : 광훈)
청중토론
석 : 감사합니다. 되게 말씀해주신 행사에 가보고 싶네요. 말씀하신 것과 관련하여 질문해주실 분은 질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카노 : 말씀 잘 들었고요, 궁금한 게 제가 항상 혜화 쪽에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 보면 필리핀 마켓이라고 해서 장을 열더라고요. 그리고 이태원 세계음식 축제도 그렇고, 그런 행사들이 곳곳에서 열리는데, 그런 행사들이 그 지역 이주민들과 어떤 커뮤니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각자 지역에 맞춰서 그런 일정들이 소화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이정은 : 말씀하신 것처럼 필리핀 마켓은 매주 일요일 혜화동성당 앞에 장이 서요. 그 이유는 필리핀의 국교가 가톨릭이고, 그러다보니까 이주민들이 종교생활을 하기 위해 성당을 중심으로 모이는데요. 혜화동성당의 규모가 크고 필리핀어 미사도 있다 보니까 매주 일요일을 중심으로 모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자기 나라 음식을 판매하는 장이 서는 거고요. 서울에서도 이밖에도 이주민들이 집중해서 거주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커뮤니티가 형성되기도 합니다. 중국 출신의 이주민은 구로, 대림동에 많이 살고, 동부 이촌동은 일본을 배경으로 하시는 분이 많다거나... 이태원은 1년에 한번 정례적인 연례행사로 여는 것 같아요. 성북구에서도 비슷한 행사를 하고 있고, 요새는 다문화라는 이름으로 하는 행사들이 많은데요.
한 가지는 자칫 다문화라는 이름으로 소비되는 것들도 좀 있는 것 같아요. 그냥 단순히 다문화를 세계적인 , 다양한 나라의 문화를 열거해놓으면 그게 다문화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데요. 그 안에서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려고 하는 마음, 이해하려고 하는 태도, 이런 것들을 지역에서 엮어내려는 노력이 조금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샌더(지보이스 단원) : 말씀 재밌게 들었고요, 저희도 어쨌든 이주민, 혹은 다문화 가정에서 단원들이 있잖아요. 그리고 이주민 커뮤니티에도 성소수자가 있을 거고, 그래서 이렇게 저희들의 세계가 넓어진 것 같은 느낌이어서 좋았어요. 그리고 궁금한 건, 이주민 커뮤니티 분들이, 각자 다른 박씨를 가지고 오는 거잖아요. 그들도 결코 균일한 집단이 아닐 텐데, 운동을 전개해나갈 때 충돌이 많을 것 같아요. 각자 입장들도 많이 다를 것 같고, 장애여성공감 만큼이나 소통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관련해서 어떤 문제들이 있었고, 어떻게 극복해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이정은 : 사실 어떤 소수자의 권리를 주장할 때, 어떤 집단과 그 속에서 개인의 다양성이 분립하는 경향에 대해서 앞에서도 다 말씀해주셨고요, 이주민에 대해서도 말씀하신 부분이 맞아요. 출신 국가나 배경에 따라 층위가 달라지고 계급이 달라지기 때문에, 권리를 주장함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굉장히 어렵거든요. 그래서 저희도 그런 부분에서 실제 갈등이 있기도 하고요.
결혼이주여성 같은 경우에, 국민의 배우자라는 성원권을 얻게 되죠. 체류권이 안정적으로 보장되는 한편, 이주노동자 분들은 그렇지 않죠. 그래서 이주노동자 분들은 안정적인 체류가 권리투쟁할 때 가장 주요한 문제인데요. 정부정책 등 제도적 문제가 큽니다. 이주민 지원 정책에 있어서도 이주노동자에 대한 지원정책은 범위가 굉장히 좁은 부분이고, 많은 부분이 '다문화가족'에만 집중되어 있으니까요. 여기에도 허점이 많습니다. 또, 이주민을 하나의 집단이 아니라, 내부의 다양한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각 입장과 상황이 다르다보니 때때로 연대가 느슨해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연결하여 모아가면서 운동의 초점을 맞추는 것이 관건이죠. 중요한 질문을 해주셨는데 제가 바로 답해드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주민들 안에도 분명히 성소수자 분들이 계시고요. 향후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중요한 이슈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석 : 네, 감사합니다. 그럼 시간관계상 빠르게 다음 발제로 넘어가겠습니다. 퀴어문화축제 홀릭님 발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발제 4 - 퀴어문화축제
: 퀴어문화축제의 역사
퀴어문화축제 역대 슬로건의 변화
홀릭(퀴어문화축제) : 안녕하세요, 퀴어문화축제에서 영화제 일을 맡고 있는 홀릭입니다, 반갑습니다. 너무 오고 싶었던 자리라서, 사실은 제가 퀴어문화축제에서도 일하지만, 주로 밥벌이를 하는 곳은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KSCRC)라는 곳에서 활동가로 일하고 있어요. 북토크 행사가 있었는데 섭외 전화를 받고, 지보이스 분들과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저희 행사 버리고 여기로 왔습니다. (일동 탄성)
우선 문화운동 관련해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었고요, 또 지보이스 여러분들이 퀴어문화축제, 또 수많은 투쟁 현장들에서 목소리를 내주었던 것들을 같이 나누고, 이 자리를 빌어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야기를 할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퀴어문화축제라는 곳이 지금은 굉장히 크게 보이지만, 처음에 어떻게 시작을 했는지부터 보시면, 이게 어떻게 조금씩 운동이 될까, 문화운동이 인권운동이 될 수 있을까를 알 수 있어서, 슬로건의 변화만 봐도 사실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퀴어문화축제는 퍼레이드로 많이 인식되어 있는데요, 처음 시작했을 때는 퍼레이드를 우연히 시작했다고 들었어요. 저는 그 때 없었지만, 그 때는 공동조직위원회, 무지개2000이라는 조직위원회가 주최를 했었고요. 그 당시에 퍼레이드도 없었고요, 파티와 영화제도 없었어요. 그냥 스페셜 이벤트, 연극, 토론회, 이렇게만 있었는데요. 우연히 독립예술제에서, 지금의 프린지 페스티벌이에요. "우리 퍼레이드 하는데, 너네도 좀 나와서 같이 할래?" 이런 제안이 있었다고 해요. 저희는 퍼레이드를 처음 하니까, 한번 나가보자고 해서 나갔는데, 그날 비가 온 거예요. 그래서 독립예술제 페스티벌에서는 한명도 안 나오고, 저희만 나간 거예요. (일동 웃음) 70여명이 대학로를 두바퀴를 돌았던 게 첫 퍼레이드입니다. 비가 오는데 저희만 무지개 깃발을 들고 열심히 행진했었어요. 그리고 용어들을 보시면, 게이·레즈비언·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 열린 마당, 다 혼용해서 썼어요. 지금은 '퀴어'라는 말을 쓰지만.
제1회 퀴어문화축제 무지개2000 : 크게 외쳐라, "나는 동성애자다" 제2회 퀴어문화축제 무지개2001 : 한걸음만 나와봐, 놀자 제3회 퀴어문화축제 무지개2002 : 멈추지마 지금부터야, 두근두근! 제4회 퀴어문화축제 무지개2003 : 움직여! 제5회 퀴어문화축제 무지개2004 : 모두를 위한 자유와 평등 제6회 퀴어문화축제 무지개2005 : 퀴어절정 제7회 퀴어문화축제 무지개2006 : 위풍당당 퀴어행복 2007 제8회 퀴어문화축제 : This is QUEER 2008 제9회 퀴어문화축제 : 작렬! 퀴어스캔들 2009 제10회 퀴어문화축제 : 십년감수 2010 제11회 퀴어문화축제 : OUTING - 지금 나가는 중입니다 2011 제12회 퀴어문화축제 : 퀴어예찬 2012 제13회 퀴어문화축제 : 퀴어연가 - 가족, 연을 맺다 2013 제14회 퀴어문화축제 : THE QUEER - 우리가 있다 2014 제15회 퀴어문화축제 :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 2015 제16회 퀴어문화축제 : 사랑하라, 저항하라, 퀴어 레볼루션 2016 제17회 퀴어문화축제 : QUEER I AM 우리존재파이팅 2017 제18회 퀴어문화축제 : 나중은 없다, 지금 우리가 바꾼다 |
▲ 역대 퀴어문화축제 슬로건 (2000~2017)
2회로 넘어가면, 1회가 "나는 동성애자다", 이렇게 했는데 지금 그 슬로건을 쓰면 난리가 나겠죠. (웃음) 두번째는 "한 걸음만 나와봐, 놀자". 한 걸음도 안나오니까 이렇게 했겠죠? (웃음) 그래서 슬로건을 이렇게 지었고요, 홍대 거리에 전시를 했던 적도 있었어요. 홍대 놀이터에서 전시를 했고, 첫 해는 퍼레이드랑 토론회, 연극, 몸짓패, 이런 것들을 했다면, 영화제는 2회 때부터 시작했습니다. 영화 한 편으로 시작했고요. 홍대의 '떼아뜨르 추'라는 곳에서 한 편을 상영했고, 파티는 이 때 댄스파티로 이태원에서 했었습니다.
당시에는 계단에 무지개를 펼치고, 나름 예쁘게 꾸미려고 했던 것 같아요. 퍼레이드를 홍대 앞에서 했을 때는 200여명, 좀 늘었죠? 70여명에서 200여명으로 늘었고요. 9월달에 했습니다. 저희도 이 발제를 준비하면서 옛날 사진들 찾고, 역사 정리가 돼서 공부가 됐던 것 같아요. 퀴어문화축제의 첫 시작은, 다들 아시겠지만 퀴어퍼레이드는 스톤월 항쟁에서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스톤월이라는 바에 경찰들이 굉장히 상습적으로 습격하는 사건이 있어서, 그날도 돈을 뜯었던 거죠. 그 날은 주디 갤런드(Judy Garland)라는 배우가 죽었던 날이었어요. 그래서 너무 슬픔에 잠겨 있었어요, 게이바의 성소수자들이. 그 날에도 경찰이 돈을 뜯으러 나왔을 때, 왜 우리가 계속 이렇게 경찰들한테 맞아야 하고, 피해를 당해야 하고, 돈을 뜯겨야 하냐고 해서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스톤월 항쟁이 퀴어퍼레이드의 유래가 되어서 각 나라별로 열렸고, 시드니의 마디그라에 한채윤씨랑 강명진씨랑 한번 구경해보러 가자고 했다가, 여지껏 이렇게 일을 하고 있다는 후문을 남겨주셨습니다. (일동 웃음)
축제 현장에서 언론취재 거부를 뜻하는 빨간 띠의 등장
퀴어문화축제 3회 슬로건은 "멈추지 마, 지금부터야, 두근두근"으로 정했습니다. 2002년 6월 6-8일 열렸고요. 이 때도 이태원에서 게이, 레즈비언 파티를 따로 진행했었고, 영화제는 한 편에서 12편으로, 아트큐브에서 열렸고요. 더글러스 샌더스(Douglas Sanders) 교수 강연회, 사진 전시회, 이런 것들이 함께 열렸습니다. 이 때 좀 중요하게 봐야 하는 것이, 기억을 하실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굉장히 많은 미디어들의 아웃팅, 노출의 위협이 있지만, 그래도 당당하게 퍼레이드에 많이 나오시잖아요. 그런데 그 때는 미디어에 노출이 되거나 퍼레이드에 나오는 것 자체가 굉장히 공포스러웠기 때문에, 주최 측에서 빨간 띠를 나눠줬습니다. 그걸 어딘가에 묶으면, 빨간 띠가 있는 사람은 미디어에서 찍지 마세요-라는, 빨간 띠 운동을 꽤 오랫동안 했었습니다. 그 해엔 이태원에서 퍼레이드를 했고, 400여명이 참석했습니다.
2003년 4회의 슬로건은 "움직여"였어요. '한 걸음만 나와봐'에서 이제 좀 움직여라, 이렇게 해서 슬로건을 정했고, 여전히 퍼레이드, 댄스 파티, 전시회, 영화제,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이 때 주목해야 될 것은, 세계 HIV/AIDS 포토 전시회, 스톤월 항쟁 기념 토론회, 그리고 영화제는 7편을 상영했고요. 퍼레이드에 600여명의 사람이 참여했습니다. 이 때만 해도 공연 팀들 중에는 얼굴을 가리고 나온 분들이 계셨어요. 그리고 퍼레이드 앞엔 친구사이 분들이 선두에 나와 계셨어요. 그래서 친구사이 분들이 매년 주목받는 사진들을 남겨 주셨죠.
제5회 퀴어문화축제2004는 "모두를 위한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 때부터 슬로건이 많이 달라진 걸 느끼실 텐데요. 이 때는 퀴어문화축제가 사실 상시적으로 있었다기보다는 기획단 조직이었기 때문에, 개인자격으로 기획단에 들어와서 매년 각자 단체나 직업들이 있지만 자원활동가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래서 퀴어문화축제가 되게 커 보이지만 CMS나 정기후원금이 지금도 월에 250만원이 안 남거든요. 굉장히 열악한 환경에 있고요. 상근자도 너무 힘들어서 지금은 강명진 원장님이 상근을 하고 있는 상황인데요. 그래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나 이런 데에 기금을 받아서, 2004년에는 천만원을 받아서 종로와 광화문 일대에서 축제를 열었습니다. 이 해에도 비가 왔는데, 당당하게 노출을 하고 퍼레이드를 했었습니다. (웃음)
제6회 퀴어문화축제2005 "퀴어절정"은 포스터가 특히 예뻤고요. 핑크빛으로 예뻐지고 세련되게 바뀌었죠. 제7회 퀴어문화축제2006 "위풍당당 퀴어행복" 때는, 이 때는 폭우가 내렸어요. 퍼레이드엔 600여명이 참여했고요. 이 때 수다회도 열고, 콘돔카페를 열어서 아이샵(iSHAP)과 함께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이 해에 최현숙 선생님이 "페니스 없으면 남자 아니냐" 이런 제목으로 행사를 개최하셨고, 당시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라는 단체가 있어서, 지렁이의 행보, 또 성소수자와 트랜스젠더의 인권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이 해엔 일반으로 구성된 살사 댄스 팀이 무대에 올랐는데, 지금은 사실 이런 팀은 섭외되기가 힘들죠. 우리가 퀴어퍼레이드 무대에서 일반 살사 팀을 왜 올리냐, 아주 난리가 날 텐데, 이 때는 이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던 시대입니다. 퀴어퍼레이드를 하면 대형 무지개 깃발을 자원활동가들이 드는데, 비가 오면 그 무게가 엄청나요. 되게 힘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2006년의 가죽 의상과 2014년 똥꼬팬티의 간극
그리고 이 해에는 SMer들이 주로 입는 가죽 옷을 입고 퍼레이드에 나오는 사람도 있었어요. 파격적이죠? 지금은 퀴어문화축제=변태축제=음란축제, 이런 식으로 많이 선동되고 있잖아요. 2006년 이 때는 이런 식의 복장이 가능했다는 거죠. 2014년만 돼도 저 정도의 노출도 아니었는데 경찰이 퍼레이드 현장에서 경범죄로 잡아가는,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2007년 제8회 퀴어문화축제는 "This Is Queer"라는 슬로건으로 진행했고요. 이 때는 드디어 청계천광장으로 나오게 됐습니다. 퍼레이드에 1,000여명의 인원이 참석했고요. 무지개영화제라는 이름에서 정식 영화제 느낌으로 바꿔보자고 해서 서울LGBT영화제라는 이름으로 바꾼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 해의 가장 역사적인 장면이라고 하면, 이 때는 퀴어퍼레이드가 별로 안 알려져서, 이 사건이 조용히 묻혔던 것 같은데, 존 카메론 미첼(John Cameron Mitchell)이 내한했어요. 이 분이 퀴어퍼레이드 무대에 서게 된 배경은, 우연히 퀴어문화축제 측에서 인사동을 지나가다가, 존 카메론 미첼을 본 거예요. (일동 웃음) 그래서 그 분을 불러세워서 퀴어문화축제 무대에 서달라, 그래서 <헤드윅>에 나온 노래 두 곡을 불러주셨어요. 그 때 무대를 찾아오셨던 분들 중에 존 카메론 미첼의 팬 카페에서 오신 분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지금 오시면 딱 좋은데, 너무 일찍 오셨던 감이 있죠. 나름 역사적인 장면입니다.
2008년에는 "작렬, 퀴어 스캔들"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제9회 퀴어문화축제 행사를 했는데요. 지금은 슬로건을 응모하고 있거든요. 그 때는 기획단끼리 지었는데, 어떤 식으로 슬로건을 만들 건가 했을 때, 그 때 많이 쓰던 용어를 슬로건으로 많이 써요. "작렬"을 그 때 많이 썼던 것 같아요. (일동 웃음) 아이샵의 현구님이랑 채윤님이 무대 사회를 봤습니다. 현재의 행성인(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이전의 동성애자인권연대가 깃발을 가지고 나오기도 했고요.
언론취재 거부를 뜻하는 빨간 띠의 소멸
그 다음에 2009년 10회 퀴어문화축제의 슬로건은 "십년감수"라고 지었는데요. 슬로건에 대해서 할 얘기가 진짜 많아요. 논문 주제를 지으시든가 어떤 주제를 지을 때, 슬로건대로 갑니다. 저희 이 때 십년감수하는 줄 알았어요. 이 해에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서, (웃음) 우선 이 때 퀴어퍼레이드를 열어야 되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셨어요. 그래서 퍼레이드 날짜가 노무현 대통령의 추도제가 4월 말이었어서, 퍼레이드 날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비상이었고요. 그 외에도 기획단에게 힘든 일이 많았었어요. 그 대신 의미있던 사건들 중 하나는, 언론 취재 거부 의사를 식별하기 위해 빨간 띠를 맸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 이후엔 빨간 띠를 목에 매거나, 장식처럼 매는 경우가 많아서, 노출이 안되는 거예요. 빨간 띠를 했는지, 이게 장식인지. 그래서 스티커로 바꾼 적이 있었어요. 스티커를 얼굴에 붙이면 미디어에서 촬영을 안하는 것으로 했는데, 스티커가 퍼레이드 하다 보면 땀에 흘러 떨어지는 거예요. 그 세월을 지나서, 이제 빨간 띠나 스티커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표명을 축제 조직위에서 하게 되었어요. 중요한 변화였습니다.
2010년으로 넘어오면, "아웃팅, 지금 나가는 중입니다"라는 슬로건으로 축제를 열었는데요. 지금은 아웃팅이 범죄, 자신의 정체성이 드러났을 때 위험한 것으로 읽히지만, 아웃팅이라는 용어의 역사는 사실 미국에서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있었을 때, 사실 그 사람들도 성소수자다, 이렇게 운동적인 역할을 통해 긍정적인 용어로 썼던 거거든요. 그래서 퍼레이드의 기조도 이렇게 잡았던 거죠. 2011년에는 "퀴어예찬"이라는 이름으로 축제를 했고, 2012년에는 "퀴어연가 : 가족, 연을 맺다"라는 슬로건으로 축제를 했는데, 퀴어퍼레이드에서 결혼식 퍼포먼스를 해볼까, 동성결혼 또는 다양한 가족구성권을 가지고 퀴어문화축제를 해볼까 해서 주제를 저렇게 지었습니다.
2013년 14회 퀴어문화축제는 "THE QUEER 우리가 있다"는 슬로건으로 열었고요. 이 때 굉장히 많은 사람이 왔습니다. 홍대에서 개최했었는데요. 드디어 청계천광장에서 홍대로 넘어왔는데, 이 때 유의미했던 것은, 홍대 상인회랑 같이 퀴어문화축제를 여는 걸 합의했습니다. 홍대 걷고싶은 거리에 10,000여명의 인파가 몰렸습니다. 퀴어문화축제가 열린다고 홍대 상인회에 소속된 가게들이 다 깃발을 달아주는 일도 있었고요.
2014년 혐오세력의 등장과 '똥'의 연대
2014년 15회 퀴어문화축제가 가장 중요했던 해였다고 생각합니다. 슬로건이 모든 걸 따라간다고 말씀드렸듯이,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는 슬로건을 했는데요. 이 때부터 혐오세력이 거대한 숫자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신촌에서 개최되었는데요. 보통 퍼레이드 참가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천천히 걸으면 1시간, 빨리 걸으면 20분 거리를, 사람과 트럭, 이렇게 해서 행렬을 만들어 행진하는데요. 이 때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트럭이 출발하려고 했었을 때, 반대세력에서 의자를 3,000개를 깔았습니다. 그래서 동성애는 대한민국 망하게 하고 가정을 파괴한다는 피켓들이 나왔고요. 그리고 퍼레이드 행렬 앞에서 드러누웠습니다. 그래서 퍼레이드가 원래 낮에 진행됐는데요, 계속 지체되다가 밤 9시 반에 최초로 야간 퍼레이드를 진행했습니다.
그 다음부터, 신촌 퍼레이드 이후로 퀴어문화축제는 혐오 집단과 같이 축제를 여는 형국이 되어버려서, 우리도 저항하는 힘을 담은 구호를 축제의 슬로건으로 세웠고요. 2015년 16회 퀴어문화축제의 슬로건은 "사랑하라, 저항하라, 퀴어 레볼루션!"이었습니다. 이 해에 인상깊었던 것은, 저희가 축제를 열기 위해 장소 확정을 하려면 집회 신고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집회 신고가 선착순이에요. 반대편의 아저씨가 노숙을 돌아가면서 1순위로 받으려고, 저희를 남대문경찰서에 줄서게 했던 적도 있었죠. 그래서 이 해에 드디어 시청광장에서 축제를 열었고요. 일본도쿄퍼레이드에서 온 트럭도 왔었고요. 이 때 한복을 입은 반대편 세력이 오셨었죠. (일동 웃음) 그런데 재밌는 건 차이코프스키, 게이 음악가의 음악을 틀고 춤을 추시고. 이런 식으로 대대적인 반대집회가 열렸죠.
의미 있었던 건, 대구에 내려갔었을 때, 지보이스도 같은 경험을 했었을 텐데요. 퍼레이드에서 저는 뒤에서 행렬을 걷고 있었는데, 뒤에서 똥냄새가 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홍해처럼 갈라지면서 맨 앞의 무지개 깃발에 바르고, 나머지 똥을 자기 몸에 바른 분이 계셨어요. 그래서 기획단이 똥물 막고, 경찰서에 갔던 일이 있었어요. 똥을 지보이스 분들도 맞으셨는데, 그래서 우리는 똥을 맞은 사이인 셈인 거죠. (일동 웃음)
2016년 17회 퀴어문화축제는 "Queer I Am, 우리 존재 화이팅"으로 슬로건을 정해서, 굉장히 많은 욕을 먹었죠. (일동 웃음) 예전에는 무슨 슬로건을 하더라도 아무 관심이 없었는데, 요즘엔는 사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집중해주시는 것 같아요. 그만큼 의미가 커졌다는 의미인 것 같고요. 친구사이 트럭도 굉장히 커졌고, 외국 대사관에서 오셨던 분도 있었고, 반대편 혐오세력들도 영어 피켓을 들고 나왔어요.
2017년 18회 퀴어문화축제 슬로건은 "나중은 없다, 지금 우리가 바꾼다!"였습니다. 이 슬로건은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나중에"를 외쳤기 때문에, 왜 우리의 인권은 늘 나중이고, 왜 우리의 사랑은 늘 한때인가, 그래서 나중은 없다, 이렇게 슬로건을 만들었습니다. 늘 같은 상황인데요, 이 해의 포스터 중엔 "올해 퀴어퍼레이드 어디서 해?" 라는 문구도 있었는데, 정말 어디에서 할 지 몰라서 이런 포스터를 냈고요. 올해도 지금, 시청광장 사용을 위해서, 90일 전에 신청을 내야 되거든요. 신청을 내면 꼭 다른 단체와의 경합이 있어요. 그걸 조정하는 일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소수자 문화의 함의 : 우리는 당신들과 똑같지 않다
이렇게 퍼레이드의 슬로건과 역사를 보여드린 이유는, 지금은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가 굉장히 커보이고, 어떤 중심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개개인의 활동가들이 문화운동으로서 바꾸고자 했던 것을 시작으로 이렇게 커졌던 것 같습니다. 일반 사람들 만나면 이런 얘기 많이 하거든요. "성적소수자가 우리랑 뭐가 달라, 우리랑 똑같은 사람이잖아, 차이를 차별하지 말자." 그런데 저는 그 말이 교묘하게 기분이 좋지 않아요. 우린 달라요. 그렇죠?
성소수자는, 성소수자를 이해한다는 것 자체도 이상한 말이지만, 성소수자의 문화를 이해하는 게 저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소수자 영화는 청소년들끼리 모여있을 때 웃음도 줄 수 있고 슬픔도 줄 수 있고 그걸 같이 느끼잖아요.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 어디인가에 따라 느끼는 것도 다르듯이, 성소수자 문화를 그들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성소수자를 단순히 이해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저는 인권운동의 측면에서 문화운동은, 지금 하고 계신 분들, 지보이스, 춤추는 허리, 이주민 운동도 있으시지만, 좀더 같이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인권운동의 굉장히 중요한 지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동 박수)
청중토론
석 : 말씀 감사합니다. 시간 관계상 질문을 한 분만 받을 게요.
전재우 : 저희가 제일 궁금한 건 올해 퀴어문화축제가 언제 어디서 하느냐인데, 대충이라도 좀 알 수 없을까요.
홀릭 : 제가 여기서만큼은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 (일동 환호) 사실 저도 몰라요, 제가 정보원도 아니고 (웃음) 비밀이 아니고요. 올해 지방선거가 있어요. 그리고 굉장히 중요한 남북정상회담이 있어서, 시국을 많이 좇아가잖아요. 그래서 눈치보기를 할 수밖에 없는데, 시청광장에 신청서를 내기는 했는데, 예상은 7월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6월에는 지방선거가 있기 때문에, 7월에 하려고 합니다. 날짜는 1·2·3·4주차에 다 넣고 있는 상황이에요. 경합 끝에 언제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7월에 축제가 열릴 예정이라는 걸 알려드립니다.
석 : 네, 7월, 7월입니다. 준비하시고요. (웃음) 그러면 패널분들 한 분씩 마무리발언 잠깐 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듣다보니까,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들이 비주체에서 주체가 된다, 무대 위에서. 그 순간의 어떤 반짝임들이 있다, 이것이 같은 문화운동을 하는 소수자 단체로서 느끼는 지점들인 것 같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런 것이 공통점이라는 걸 느꼈었어요.
전재우 : 네, 전체토론에 시간을 좀 할애해서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는데, 죄송하게도 다음 강사분께서 바깥에서 20분째 기다리고 계셔서요. 끝나고 나서도 얘기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일동 박수)
이진희 : 네, 거리에서 무대에서, 노래 계속 들려주고 계셔서 지보이스에 감사하고요. 오늘 와주신 이정은님, 홀릭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이런 자리를 만들어주신 지보이스 분들에게 너무 감사드립니다. (일동 박수)
이정은 : 너무 떨린다는 이유로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서 죄송하고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저희 이주인권 진영에서도 함께 연대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같이 고민하도록, 이 시간 이후부터 더 노력하겠습니다. (일동 박수)
홀릭 : 시간을 제가 제일 많이 잡아먹었는데요. (웃음) 좋은 자리 마련해주셔서 너무나 감사드리고, 좋은 퀴어문화 판을 만드는 데 더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동 박수)
석 : 오늘 전체토론이 예정돼 있었지만 못해서 아쉬움이 있어요.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더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들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아쉬움을 담아서 이 자리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동 박수)
녹취 /
[172호][활동스케치 #4] SeMA 옴니버스 《나는 우리를 사랑하고 싶다》 관람기 (1) : ‘친구사이’를 보는 친구사이, ‘지보이스’를 보는 지보이스
2024-11-04 19:08
기간 : 10월
고민과 즐거움 두 마리 토끼를 잡아 나가는 욕심이 많은 분들이네요.
응원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