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9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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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스케치 #1]
국민투표로 동성혼 법제화를 이룬, 아일랜드 출장기
아일랜드에 다녀왔습니다. 주한아일랜드대사관의 초청으로 아일랜드 성소수자 인권 정책과 시민사회 활동가들을 만나고 미팅할 수 있는 일종의 출장 워크숍을 다녀온 것인데요. 7박 8일 정도 되는 시간 동안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과 제2의 수도로 불리는 코크시티에 머물며 아일랜드의 프라이드를 흠씬 느끼고 왔습니다.
아일랜드의 사회문화적인 배경을 몇 가지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아일랜드는 800년 간의 영국 식민지였던 국가로, 영국에 의한 개신교 압박있던 식민기 시절을 벗어나면서 가톨릭 정체성이 강해졌던 나라에요. 독재를 경험했던 나라는 아니지만, 가톨릭의 영향력이 사회정치적으로 굉장히 지배적이었던 나라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국의 소도미법을 따라 아일랜드에서도 동성애금지법이 존재했었구요. 그런데 가톨릭의 영향력이 조금씩 내려가고, 특히 사제들의 성폭력 문제들이 사회적으로 불거지고 국민들의 신뢰를 잃어버렸던 사건들이 일어나면서 아일랜드 가톨릭이 반대해오던 평등 관련 의제들이 대거 부상했다고 합니다.
아일랜드에서는 1993년 동성애금지법이 폐지됐습니다. 데이빗 노리스라는 전설적인 성소수자 변호사가 그 법과 관련된 소송과 변론에 나서면서 국민들을 설득해낸 것이죠. 그리고 1998년 이후부터 고용평등법, 평등법 같은, 한국으로 치면 차별금지법 같은 법 2개가 제정되면서, 이 법을 기반으로 평등 관련 사안이 처리되고 정책들이 만들어지곤 했다고 해요. 이런 과정에서 아일랜드 성소수자 운동은 1970년부터 본격화해온 성소수자 커뮤니티 빌딩이라든가 대중운동 경험이라든가 그동안 빌드업해온 여러 가지 자원들을 발휘하면서 성소수자 인권 의제를 제도화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더블린 프라이드에 있던 사진, 왼쪽은 최최의 프라인드, 오른쪽은 그걸 재현한 현재의 모습. 피켓도 인상적.
다시 아일랜드 출장으로 이야기를 돌리면, 우선 더블린에서의 여정을 시작했어요. 첫번째 업무일에는 아일랜드 국가기관들을 만나서 미팅했습니다. 아일랜드 외교부, 평등관련 부서, 아일랜드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났지요. 얼마나 회의를 알차게 잡아주던지, 1시간씩 스피드데이팅을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청소년, 청년 성소수자들을 위한 커뮤니티/지원 단체 '빌롱투(Belong To)'를 만나고, 더블린 프라이드, ICCL 등 다양한 시민사회단체들을 만났습니다. 뒤에 좀 더 설명할 아일랜드 동성혼 국민투표에 대해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고, 현재 아일랜드 성소수자 인권 현황에 대해 생생한 이야기를 전달받을 수 있었습니다.
더블린 프라이드의 이야기가 좀 인상적이었던 것은, 더블린 프라이드는 아일랜드에서 소비를 창출하는 규모가 1위인 행사라고 해요. 동성혼이 법제화되면서 더 규모가 늘어났고, 참가자 규모는 2위라고 하는데 어떤 모습일지 너무 궁금하더라고요. 아일랜드는 500만명 정도 되는 인구에, 더블린에는 100만명 정도 살고 있는데요. 규모가 서울에 비해서 많이 작고, 그러다보니 훨씬 정감 있고, 건물들도 전통적인 양식들로 너무 아름다워서 만약 이곳에서 축제를 한다면 어떤 모습일지 너무 궁금했습니다. 도시가 어딜 가든 그냥 영화 세트장 같았어요.
그리고 더블린 프라이드 활동가들이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면서 아예 더블린의 주요한 성소수자 스팟들을 대상으로 투어를 시켜줬는데, 이때 들은 얘기 중 인상 깊은 건 아일랜드가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는 얼마 안 되는 국가이고,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BDS, 그러니까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학살에 협조하는 단위에 대한 불매 운동이 굉장히 자연스럽다는 것이었습니다. 더블린 프라이드는 올해 구글 등 BDS에 동참하지 않는 기업들의 후원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국가나 시의 후원이 있다는 점이 재정적인 안정성을 주기도 했겠지만, 끊임없이 운동사회에 함께 호흡하고 축제의 운동성과 정치성을 고민하면서 이런 결정을 내린다는 게 참 멋있었어요.
더블린에서 저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시간은 여성운동가인 알바 스미스씨가 국립박물관과 역사박물관을 투어시켜주셨던 시간인데요. 노구의 몸으로 장장 7시간을 저희와 함께 이야기 나누면서 박물관들을 경험시켜주셨습니다. 아일랜드는 2015년 국민투표의 경험이 굉장히 중요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국립박물관에는 성소수자 인권운동에 관한 섹션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 섹션을 보면서 여러 설명을 들었고, 역사박물관에서는 평등을 위한 아일랜드의 발자취를 보여주는 영상이 있었어요. 여성, 성소수자 운동이 써왔던 피켓들을 오마쥬해서 만들어두기도 하고, 2015년 국민투표 때의 장면을 반복적으로 틀어두는 등 평등에 관한 역사가 이렇게 해설되고 있는 장면을 보면서 많은 감명과 동기부여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자세히 설명해주신 스미스씨가 너무 감사했구요. 여성운동과 성소수자운동이 뿌리 깊게 잘 엮여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어요.
국립박물관 중 성소수자 역사를 다룬 섹션을 설명 중인 알바 스미스 씨
코크시의 경험으로 넘어가자면, 코크를 방문했을 때 코크의 시 직원이 나와서 저와 민희님을 투어시켜주셨어요. 코크시에 있는 거의 모든 성소수자 인권단체들을 방문시켜주셨고, 나중에는 시장님이 직접 나와서 저희를 반겨주셨습니다. 개별 단체 방문 후에 시청에서 인권활동가들 다 같이 모여서 저희를 환영하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가졌는데,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자리를 함께 해준다니 너무 감동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대체로 수다스럽다는 묘사를 하는데, 저는 그보다는 너무 정이 많고 한마디라도 더 해주고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한 친절이 다 같이 체화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설명하고 싶어요.
코크에서는 게이 커뮤니티 단체, 레즈비언 커뮤니티 단체를 만났고, 성소수자에 관련해 아카이빙을 하는 단체, 성 건강을 다루는 센터, 코크 프라이드를 만나서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친구사이처럼 커뮤니티 기반 단체들을 만나서는 커뮤니티 기반 운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커뮤니티를 끊임없이 조직하고 호명하면서 함께 호흡해왔기 때문에 여러 제도적인 성취를 얻을 수 있었다는 설명까지 들을 수 있었어요. 저한테는 그 대화가 아일랜드 방문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던 거 같습니다.
코크시티의 레즈비언 단체 링크의 공간
코크 게이 단체 '게이 프로젝트' 공간에 있던 여러 소모임, 이번트 포스터들
국민투표 얘기를 좀 해볼까요? 2015년 여러 의제 중 하나였던 동성혼 법제화를 메인 타겟으로 추진한 결과 정당의 합의로 동성혼 법제화 여부에 대한 국민투표가 열려요. '레퍼렌덤'이라고도 부르는 이 국민투표에서 찬성 측은 62% 투표를 받아 압승하게 됩니다. 쉽지 않았죠. 모든 국민이 이 사안에 대해서 고민하고 투표를 했어야 하는 만큼, 동시에 혐오세력들의 혐오메시지들을 모든 국민들, 그리고 성소수자 당사자들이 경험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기간 동안 끊임없이 대중을 설득하기 위핸 캠페인에 나서야 하고, 인권활동가들이 상당한 소진을 겪었을 거라는 짐작이 되죠.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이 이 사안으로 국민투표를 하는 일은 없길 바라요. 정말 힘든 일일 것 같거든요.
아일랜드 찬성 측 사람들은 이웃들에게 직접 방문해서 "나의 결혼을 찬성해주시겠어요?" 라고 물어보는 '도어 투 도어' 캠페인을 진행하기도 하고, 할머니와 같은 이 사안에 민감하지만 자녀를 사랑해서 극복할 수 있을 거 같은 대상들을 상대로 전화해 커밍아웃하고 찬성을 요청하는 '링마이그래니' 캠페인 등을 진행합니다. 게이바 사장이자 유명 드랙 공연자인 '팬티'와 수많은 사람들의 연설들이 이어지고, 정치계에서도 이에 맞춰 커밍아웃하는 정치인들이 나서는 등 이때 아일랜드는 소진의 시기이기도 했지만, 긴장과 스릴이 넘치는 가슴 뛰는 열정의 시간이기도 했지요.
역사박물관에서 상영 중인 평등에 관한 영상
아일랜드 활동가들은 동성혼 법제화의 성취를 두고, 위대한 성취는 맞지만 아직도 과제가 많다고 설명했습니다. 최근에 반이민, 반트랜스 정서가 확산되면서 아일랜드도 영향을 받고 있는 탓인데요. 아일랜드는 성별인정법이 있어서 성별정정은 어렵지 않지만, 성형/성확정수술이 발전한 나라가 아니라 성확정수술을 하기 어려운 나라인 점도 있기 때문에 트랜스젠더 권리나 제반 상황이 녹록하지 않은 상황이에요. 한국의 상황도 겹치면서 마음이 아팠던 부분이었고, 다 함께 이 부분에 대응하기 위해 분주히 활동하는 것을 보고 자극도 됐습니다.
아일랜드 활동가들은 이 시기를 기억하면서 한국에서 온 우리에게 "긴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는 걸 안다. 충분히 쉬고, 충분히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호흡을 길게 가졌으면 좋겠다. 당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옳은 방향이라는 걸 우리는 안다. 힘내라." 라는 메시지를 계속 보내주었습니다. 한국도 곧 동성부부들의 집단 소 제기가 있을 예정입니다. 그리고 성소수자 평등을 위한 여러 캠페인을 진행하고, 힘과 마음을 모으는 시간이 있을 거에요. 친구사이 회원들도 더 적극적으로 마음을 모아주시면 좋겠습니다. 한국은 한국만의 시간들을 만들어내고 있으니까요. 우리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좋은 기회로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배우고 온 만큼 더 힘 써서 인권활동에 나서도록 하겠습니다.
코크 시청 앞에 자랑스럽게 전시돼있는 프라이드 플래그와 레인보우 시티로 선정됐다는 문구
친구사이 상근활동가 / 기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