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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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흘리는 연습' #1]
기획자의 말 : 연습장 세 페이지
1. 일기장
1994년 2월 겨울, 저는 세상에 없었습니다. 대신 저희 부모님은 세 살이 된 형을 키우며 사업도 하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계셨겠네요. 한 선생님께서는 “친구사이면 제가 대학 다닐 때도 들어본 적 있었는데 이제 정말 큰 역사가 되었네요”라고 기억을 꺼내오셨고, 전시 소식을 전한 저는 약간 멋쩍어졌습니다. 저보다 나이 많은 사람의 기억이 더 믿을 만한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개구쟁이 만화 같은 그림들과 장식적인 글씨체들로 그때의 즐거움을 가늠했고, 신문물은 모두 르포의 대상으로 촬영되던 시기 영상들을 보며 짜증도 냈으나… 어떻게 헤아려도 제 기억은 아닌 느낌이 들었습니다. 무궁화를 보면 눈물이 나고, 십자가를 보면 머리가 맑아지는 사람들처럼 저도 종로를 오면 경건해지는 사람이고 싶었는데… 잘 안됐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전시를 해야만 하니깐 야망보다는 겁이 많았던 거죠. 아무도 전시장에서 제 멱살을 잡진 않았지만 비슷한 악몽은 자주 꿨습니다. 언니들의 소중한 기억에 알맞은 격을 찾아주지 못할까봐 겁이 났고, 단체에 쌓인 자원을 운용하지 못하고 주저앉을까봐 무서웠습니다.
마음 고생에 지치자, 염치만 챙기기로 다짐했습니다. 그 선택이 저를 타협으로 이끌 줄 알았으나 매순간 염치 있는 선택인지 자문할 때마다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몰염치하다는 이유로 싫어하는 것들이 많았거든요. 퀴어를 미술의 주요한 의제로 다루지만, 정작 성소수자인권운동단체의 전시에는 투자할 심미안도 깡도 없는 미술공간들. 손때 묻은 시간을 빌려가서 자기 이름 아래 두는 미술가들. 아키비스트의 존재를 교묘하게 숨기고 대의만 드러내는 아카이브 전시들. 다양한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한 장애접근성을 저버리는 방식들 등 극도로 싫어하는 것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좌절할 일이 쏟아지는 세상에서도 기념할 만한 일을 기념하는 자리가 되길 바랐습니다. 전시장 벽면에 적힌 문구 중 '일상을 유지하는 힘'과 '미래에 대한 열병'이 마음을 다잡는 큰 축이 되었어요. 일상이란 게 가끔은 너무 소시민적이고 협소한 의미의 권리만을 보장하는 것 같은데, 누군가에게 일상은 버티고 투쟁해야만 성취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고작 우아떨자고 불 꺼놓고 영상 트는 게 아니란 걸 스스로도 계속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어요. 무엇을 기념해야하는지 알아가는 과정, 또 스스로 축하할 수 있는 힘을 세상에 보여주자고 다짐했죠. 다른 축으로는 과거의 글에서 쏘아보내준 '미래에 대한 열병'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30년 전의 글을 읽어도, 10년 전의 글을 읽어도 어째서인지 제가 읽는 오늘을 위해 쓴 글로 느껴졌습니다. 어떤 글은 더 큰 궤적을 그리며 2055년에 도착할지도 모르겠으나, 몇몇 글이 도착한 시간이 2025년이라면 융숭한 대접을 받아야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광장에서 필요한 액션을 전시장에서 하고 싶지 않았고, 글로 써도 될 말을 난해하게 작품을 통해 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대신 아카이브가 전시라는 형태로 등장했을 때만 가능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전시를 준비했습니다. 그것만이 지난 시기를 경험으로 기억하는 사람보다 제가 잘할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 토크 대본
우선 기획에서 제가 유념한 점을 말씀드리는 걸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합니다. 이 전시가 무엇이 될지 생각하고서는 막연하게 ‘커다란 덩어리’를 생각했어요. 30년이라는 역사가 쌓여서 생긴, 한 번에 볼 수 없는 ‘반투명한 덩어리’. 그런데 반투명해서 건너편에 서있는 사람이 보이는 거죠. 그래서 각자 시선의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보는 대상이 같다는 것도 아는 상태를 가정했어요. 다만, 덩어리에서 얼굴을 정의하는 부분이 사람마다 다를 겁니다. 각자 다른 면을 보는 사람들이 이번 전시를 만드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역사학자가 생각하는 얼굴면, 북디자이너가 생각하는 얼굴면, 출판발행인이자 번역가가 생각하는 얼굴면, 미술가가 생각하는 얼굴면은 전부 다르죠. 당연합니다. 얘네(전시)는 실제 얼굴이 있는 애들이 아니니까요. 본 전시를 준비하면서 참여작가들이 주시하는 얼굴을 파악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김대현님의 경우, 이 전시를 통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소식지의 글을 한 톨이라도 더 읽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느꼈고, 동시에 그 소망과 반대로 사람들이 글을 읽지 않을 것이라는 의심이 있던 것 같아요. 기대와 의심. 팽팽한 떨림으로 준비한 글을 섹시하게 배치하리라… 이게 기획자로 처음 느낀 사명이었죠. 기록이 먼지 쌓인 수집품으로 안 보이게끔 돕고, 이러한 자원을 통해 내일을 점치는 것은… 또 김대현님께서 너무 잘하는 일이니까 믿을 수 있었어요. 동시에 역사학자이자 아키비스트인 김대현님이 자료를 매만진 시간이 잘 보여야했죠. 무심한 사람들은 타인의 글뭉치를 올려놓은 게 끝이라고 생각하곤 하니까요. 그러나 2,240건 중에서 32건을 분류하는 일은 창작을 초과하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이 과정을 가시화하고자 김대현님이 찍은 사진을 요청했죠. 사람들을 6가지 주제로 이끄는 역할을 해주길 바랐습니다.
또 미술가인 저 같은 경우에는 '친구사이 소식지의 역사'를 '성소수자 기록의 역사'와 같은 꼴로 상상하며, 조금 더 느슨하고 추상적인 얼굴-흐린 눈, 흐린 얼굴의 뉘앙스를 살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이를 테면, 포커스 아웃 되어서 눈이나 코가 안 보이는 얼굴인 거죠. 또 벽돌처럼 차곡차곡 쌓인 연표가 아니라, 듬성듬성하고 얼기설기 엉킨 난잡한 연표인 거죠. 말 그대로 선별과 분류, 망각의 과정을 지나오며 놓친 것을 내포하는… 그 유실됨을 감각할 수 있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게 저의 사명감이었어요. 열심히 되새김질을 했던 역사학자에게 망각을 전하라고 하고 싶지 않았죠. 그건 굳이? ‘굳이’ 해야하는 건데, 그러한 모호한 것들은 미술가들이 유독 잘하는 일이니까요.
이경민님의 경우, 성소수자의 연속간행물에 있어서는 여느 아키비스트 못지 않은 수집력을 갖고 있는 굉장히 독특한 사람이죠. 과거에 발견되던 존재양식들의 가치를 어떻게 해야 가시화할 수 있을지 생각이 빠글빠글 일어나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옛글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현재의 정성이 개입되어야만 가능한 것들을 보여주고 있었어요. 개발한 웹 사이트에서 145건의 글을 관람자 각자가 인쇄·출력·제본한다는 설명을 들었을 땐, 실제로 보기 전부터 매력적이었어요. 웹진이 유실될지 모른다는 걱정 앞에서 모두를 퀴어 출판의 동료, 소장자로 만든다면 책임을 나눠갖게 되는 거죠. 선택한 글들은 전부 이면지에 인쇄되는데, 관람자가 택한 정보를 생산하는 순간 어쩔 수 없이 수반되는 관람자가 택하지 않은 정보들… 그 설정된 불가항력을 보면서, 저것이 이경민님이 생각해낸 퀴어 출판의 한가닥이구나! 이런 얼굴면을 생각하는구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남선미님의 경우, 경민님의 소개로 알게 되어 전시를 함께 준비하게 되었는데요. 친구사이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믿음직한 협력자로 보였고, 동시에 번역가라는 역할이 계속 아른거렸어요. 단체의 상황을 공유하고 소식지가 긴 세월동안 어떠한 유기적인 관계를 맺어왔는지 알린 상태에서, 다른 퀴어 출판의 사람들과의 관계 - 즉 가깝고 친밀한 외부와는 어떻게 관계 맺어왔는지를 조사해서 알려주기를 바랐어요. 번역가한테 언어를 번역하는 걸 기대한 게 아니라, 외부의 말을 친구사이가 기념할 수 있는 자원으로 만들어 와주길 바란 거죠. 게이도 아니고 친구사이의 회원도 아니지만, 선미님은 정체화 과정에서 친구사이 소식지와 커밍아웃 인터뷰를 먼저 보셨다고 말했죠. 자칫 폐쇄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회원단체가 사실 얼마나 외부와 긴밀히 소통해왔는지 알리고 싶었고, 심지어 자리를 내어줄 준비도 되어있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다만, 선미님 같은 경우는 제가 어떤 얼굴면을 봐주면 좋겠는지 더 요구한 편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정말 끔찍한 컨트롤 프릭일 수도 있겠네요… 죄송합니다.
아직 짧은 경력이지만 이전에도 미술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퀴어예술 자체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물을 때마다 너무 진지해지는 바람에 어떠한 매니페스토… 선언문을 말해야할 것 같은 분위기가 제게 남아있네요. 한 쪽의 누군가는 퀴어한 영상을 실험영화의 다른 이름인 격으로 부르며, 권리 실천보다 그것을 둘러싼 유희만을 즐기기도 합니다. 다른 쪽의 누군가는 분야가 구분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예술과 운동의 문법이 같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전자와 후자 둘 다 계속 보면 조금 짜증나는 거죠. 한 곳만을 오래 주시하는 집요한 제 성격 문제도 있겠지만! 이러한 난처함 앞에서 성소수자인권운동에 뛰어든 우리가 어떤 전시를 만들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으로 《흘리는 연습》을 준비했습니다.
3. 편지지
많은 분들의 관심과 도움을 받으며 전시가 잘 끝났습니다. 얼이 빠진 느낌이라서 지금 후기를 적게 된 것도 이상하게만 느껴지네요…. 그래도 한 번 더 소식지에 《흘리는 연습》 전시 관련해서 글을 남길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인사드리고 싶었던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 기록을 남기는 아카이브 전시에서, 어디에도 크레딧을 남기지 못한 ‘설치부터 철수까지 도움 주신 분들’을 좀 적겠습니다. 제때 감사하지 못하고 “딜레이 땡큐”를 시전하는 저를 용서하세요. 언젠가 저를 품앗이로 써먹으셔도 좋습니다.
설치를 시작할 때, 친구사이 회원분들께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습니다. 전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함께하면 전시를 다른 면에서 사랑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 감각을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윈드밀’ 전시장이 층고가 높다보니, 뼈대를 세우는 초반 과정부터 안전성을 위한 와이어 설치 과정, 마지막으로 조명 설치까지 위험요소가 많아보였습니다. 여러 고민 끝에 전시 설치가 익숙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저의 불안함을 듣고 와주신 귀인들 덕분에 3일의 설치기간 안에 전시가 만들어졌네요. 조용히 의자를 짜맞추고 칠을 반복한 고건호님, 모자란 조명을 구하러 을지로를 뒤집어주신 김근우님, 맵핑 프로그램 문제를 해결해주신 김희경님, 오토바이 타고 칼질하러 와주신 김준철님, 작업을 빠르게 끝내고 와주신 남선미님, 함께 폭설을 뚫고 작품 운송을 해주신 남연주님, 의자 위 올라가서 조명을 막던 송준성님, 온갖 힘쓰는 일을 다 해주신 오어진님, 퇴근하고서 디테일을 봐주러 오신 유민님, 안전모를 쓴 채로 조명 작업을 캐리해주신 이은석님, 독감에도 조용히 현장에서 액자를 짜맞추던 임다울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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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를 하루 만에 해야할 때, 시들어가는 상근활동가 살려주신 친구사이 회원분들 정말로 감사합니다. 여러 구조물을 철거하다가 다치는 일이 생길까봐 철거는 철저히 전문인력인 혜정님과 준섭님네 인력에게 일임했습니다. 그렇게 철수를 진행했지만 사실 작업반장인 혜정님과 제가 놀란 것은… 회원분들이 너무 체계적으로 일해주셔서 다들 전시를 많이 해보셨나 싶었습니다. 그 장면을 눈에 오래 담아 두었어요. 다음부턴 지치기 전에 먼저 말을 꺼내야겠다고 반성했습니다. 닉네임만큼이나 빠르게 뛰어다니신 날다님, 가끔씩 힘나게끔 농담을 던져주던 윤님, 언제나 응원해주는 티파니 윤우님, 업무 전화를 받으면서도 현장에서 손을 쉬지 않았던 제이팍 형, 그리고 도착하기 전에 철수가 끝나버렸지만 마음을 보태주신 도준, 플로우, 스톤님. 해 떠있을 때 철수하는 게 처음이라서 너무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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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곳곳에 있던 금속조형물들을 설치부터 철수까지 책임져주신 금속공예가분들이 있습니다. 주로 가구와 조명, 쥬얼리 등을 만들며 휴먼스케일을 초과하지 않는 작업을 하는 분들께 조형물 제작 및 설치를 부탁드렸습니다. 그들에게도 처음 시도하는 일이어서 어려움이 컸다며… 어쩌면 몰랐기 때문에 도전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알면 이 고생 안하고 말지… 요런 뜻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근데 해주셨죠?) 특히 오랜 친구인 이우연 금속공예가에게는 친구사이 단체의 설명부터, 기획 초반의 설명까지 긴밀히 얘기를 하며 게이 커뮤니티에 대한 이해를 도왔습니다. 적절한 방법론 제시와 안전성을 고민해준 건, 그리고 러프한 저의 말에도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게 된 건 금속공예가 이우연, 이재호, 김승현이 매일같이 소통하며 작업을 진행해줬기 때문입니다. 저와 일면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금속공예가들을 도우러 선뜻 와주신 이진석, 이민규, 정승준님께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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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침내 일당백… 공간 디자이너이자 작업반장인 김혜정님. 저와 혜정님은 3일의 설치일 중에서 2일 안에 설치를 마치고, 하루를 여유롭게 디테일 잡자고 계획했었어요. But, 3일째에도 설치가 끝나지 않았고 새벽 3시쯤에 한 번 크게 싸웠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설치가 끝날 기미가 안 보였기 때문인데요. 돌이켜보면 이유는 영상 작업을 틀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프로젝션 맵핑의 특성상 영상이 어긋나면 안되기 때문에 마지막에 맵핑을 하게 되는데, 설치 도중에는 영상을 틀지 않았으니 전시가 완성된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거죠. 함께 힘든 새벽을 버텨주시고,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일을 배분해주셨던 김혜정님 감사합니다. 또 혜정님과 여러 번 일손을 맞춰보신 준섭님네 인력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설치 철수는 아니지만, 오프닝의 화사함을 맡아주셨던 분들이 있습니다. 마치 한 팀 같던 오프닝 리셉션의 비건 케이터링과 꽃의 조화. 한남동 최고의 꽃집 UUU 서이진 누나와 압구정 최고의 레스토랑 세이지앤버터 장준희 형의 엄청난 재능기부가 있었어요. 제가 능청스럽게 “누나 나 전시하면 꽃다발 줄 거야? 그렇다면 미리 오프닝날 화병에 해주면 안돼?”라고 묻자 흔쾌히 속아주신 이진누나. 그 동안 제가 참여했던 전시에 한 번도 오지 않았다며 미안해하는 장준희 셰프님께 “형이 해줄 수 있는 게 있어…”라며 갑자기 엄청난 미션을 맡겼어요. 과한 부탁에도 오히려 자신들에게 필요했으며 영광인 경험이었다고 말해주는 형, 누나가 있었습니다. 오프닝날 화사함은 그대들 덕입니다.
모두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저는 생기도는 친구사이 상근활동가의 모습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짧은 기간의 전시임에도 시간 내어 방문해주시고, 응원해주신 회원분들께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할게요. 꾸벅.
사진 기록 일부: 이도현(studio anws)
친구사이 상근활동가 / 민영
저는 와서 구경한거 밖에 없는데 부끄럽네요. 저야말로 이번 전시를 통해 놓치고 있던 풍경을 지긋이 되짚어 볼 수 있었던 소중한 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더 미래가 더 환해질지, 어두워질지 알수는 없지만 종 갈피를 잡지못했던 좌표를 되짚었던 감각은 몇번이고 곱씹게 될것 같아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