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10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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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그 골목에선 우린 춤을 추었지
: 10.29이태원참사 2주기와 기억투쟁
하지만 곧 / 너도 알게 되겠지 /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 기억하는 일뿐이란 걸 / 저 번쩍이는 거대한 흐름과 / 시간과 / 成長, / 집요하게 사라지고 / 새로 태어나는 것들 앞에 / 우리가 함께 있었다는 걸 // 색색의 알 같은 순간들을 / 함께 품었던 시절의 은밀함을 / 처음부터 모래로 지은 / 이 몸에 새겨두는 일뿐인 걸 – 한강, 「효에게. 2002. 겨울」,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73~74쪽. |
2014년부터일까, 우리는 재난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기억하겠다’는 약속을 익숙하게 반복해왔다. 이는 상실을 겪은 이들에게 망자와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다짐이었고, 비극을 서둘러 잊으라 강요하는 권력에 맞선 저항이었다.
문득, ‘기억하겠다’는 약속이 그저 예의바른, 그렇기에 공허한 위로로 느껴졌다. 참사가 남긴 상처를 들여다보기보다, 다수의 희생에 슬퍼하는 일로 참사를 기억하고, 이로써 충분히 애도했다며 끝맺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그래서 우리의 약속이 “희생자의 명복을 빌고,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자”라는 대통령의 추도사로 잠식되고, 그와 반대에서 대통령의 퇴진이 곧 참사의 추모(‘퇴진이 추모다’)라는 함성에 파묻혀 정작 우리가 실천했어야 할 기억과 애도를 잃은 것은 아닌지.
이 글은 이태원참사가 과거의 슬픔으로 감금되지 않도록, 그 책임을 단순히 국가 권력에만 치환하지 않기 위해, 보다 분명하게는 참사에 연결된 우리의 약속과 책임을 상기하고자 쓰게 되었다. 지난 1년간 가족들이 전력을 다해 싸워 쟁취해낸 이태원참사 특별법 제정 과정을 정리하고, 이어질 기억투쟁에 대해 기록하고자 이 글을 쓴다.
1. 진실을 향한 첫걸음을 기억하기: 이태원참사 특별법 제정운동
이태원참사의 진상규명 요구는 참사 직후부터 제기되었다. 경찰 특별수사본부(특수본)의 수사와 국회 이태원참사 국정조사 특별위원회(국조특위)의 청문회가 열리면서 시민들의 관심이 집중되었지만, 특수본은 공무원 6명을 구속 기속하는데 그쳤다. 행정안전부 장관, 경찰청장, 서울특별시장 등 고위급 인사들에 대해서는 무혐의로 결론지었다. 국조특위 역시 구조 실패와 대비 미비 등 국가책임을 부분적으로 확인하는 선에서 활동을 종료했다. 윗선에 대한 ‘꼬리 자르기’식 수사, 정부 기관의 비협조와 위증, 짧은 조사 기간과 조사 과정에서의 유가족과 시민의 참여가 배제되면서 참사의 구조적 원인을 밝히기에는 한계가 명백했다.
참사 100일을 전후로 가족들과 시민사회는 독립적인 조사 기구 설립을 목표로 이태원참사 특별법(이하 ‘특별법’) 제정 운동에 나섰다. 2023년 3월 24일, 국회 국민동의청원에 특별법 제정 청원이 올라오자 열흘 만에 5만 명(100%)의 동의를 달성했다. 국회는 유가족과 시민들의 요구를 반영해 ‘10.29 이태원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법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21대 국회에서 가장 많은 의원의 참여로 발의되었지만, 두 달 넘게 소관 상임위인 행정안전위원회에 상정되지 못했다.
6월 7일, 가족들은 임시국회 종료일인 6월 30일 전까지 특별법 제정을 위한 국회의 노력을 촉구하며 도보행진과 곡기를 끊는 단식농성을 이어갔다. 참사의 원인을 규명하는 기회조차 차단된 상황에서, 슬픔을 위로할 겨를 없이 거리의 투사로 나선 가족들은 지난 재난참사 유가족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다행히 임시국회 종료일에 특별법이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상정되면서 비로소 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한 법·제도적 논의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국회의 시간은 다시 멈췄다. 참사 1주기가 지나도 특별법은 국회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여당은 특별법을 두고 ‘정쟁 법안’이라며 협조를 거부했다. 참사의 원인과 미흡했던 수에 대해 책임을 규명하는 일은 당연히 정치의 임무임에도 불구하고, 국회는 이를 ‘정치적’이라며 자기 역할을 방기했다. 결국 가족들은 꽁꽁 언 땅에 몸을 붙이는 오체투지를 전개했다. 가족들은 참사의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는데 있어 여야의 구분이 없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 이태원참사특별법 제정을 위해 오체투지에 나선 가족들, 한겨레신문, 2023.12.20.
해를 넘겨도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자, 가족들은 수차례 양보하며 법안을 수정했다. 특별검사 임명 요청을 삭제하고, 조사 불응 시 제재는 과태료로 완화했다. 조사위원회 활동 연장 기간 단축, 유가족 몫의 추천권도 삭제했다. 세월호참사특별법이 17인의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그중 희생자가족대표회의에서 3인을 선출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하자면 아쉬운 결과였다. 그럼에도 가족들이 양보를 택한 이유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한 법 제정이 정치권의 분열이 아닌 협의와 타협으로 이루어지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2024년 1월 9일, 참사 438일 만에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되었다. 하지만 절발의 통과에 불과했다. 여당은 “더 조사할 게 없다”, “특별법이 무소불위 권한을 가졌다”, “참사를 정략적으로 악용한다”며 약속을 뒤집고 집단 퇴장했다(여당 권은희 의원만 특별법 찬성). 대통령실은 특별법이 통과되자마자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를 언급했다. 이에 가족들은 분향소에 걸려있던 영정을 내리고 용산까지 행진에 나섰다. ‘위헌’이니, ‘정쟁’이니 날카로운 언어를 내리꽂으며 분열의 책임을 유가족과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비정한 정치에 삭발까지 감행했다. 하지만 정부는 피해지원을 일방적으로 발표한 뒤 특별법을 거부했다.
4.15총선에서 준엄한 경고를 받은 정부·여당은 야당과 특별법 재논의에 착수했다. 당시 쟁점은 조사위원회의 ‘압수수색 영장청구 의뢰권’과 ‘불송치·수사중지 사건에 대한 자료제출 요구권’이었다. 여기서 영장청구의뢰권의 경우 ‘영장청구권’과 분명 다른데도 불구하고, 정부 여당은 이를 독소조항이니, 위헌적이니 훼방을 놓았다. 위의 권한은 과거 조사위원회에도 존재했고, 정부 기관이 자료제출과 조사에 성실히 협조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 조항이었다. 그럼에도 가족들은 참사의 진상을 밝히는 일이 시급하다는 점에서 정부·여당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자면, 참사의 진상규명이 피해자와 유가족의 참여로 이뤄져야 함에도 양당의 타협을 우선시했던 점은 여전히 피해자와 유가족을 진상규명의 주체로 인식하지 않는 한계를 드러냈다. 2024년 5월 2일, 이태원참사 특별법은 국회 재적의원 259명 중 찬성 256명으로 통과되었다. 진실과 정의가 뒤틀린 국가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가족들의 투쟁과, 참사의 고통을 나눈 시민들이 마침내 진상규명의 첫 걸음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2. 애도가 해방되는 순간
이태원참사 특별법의 정식 명칭은 ‘10·29이태원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법’이다. 이 법은 세월호참사특별법과 달리 ‘피해자의 권리’를 제목에 강조하며, 피해자들이 진상조사에 참여할 권리, 혐오로부터 보호받고 조력을 받을 권리, 애도의 권리, 피해지원을 받을 권리, 추모사업 및 공동체회복 등 의견을 개진할 권리 등을 조항으로 담고 있다. 이러한 권리는 흩어진 기억을 되살리며 참사의 의미를 재구성할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는 대의정치의 제도화된 애도로 참사를 가두지 않고,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 범주에서 벗어나 잊힌 기억을 끌어올려 공동체적 애도를 촉구한다.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는 참사 직후 성소수자 커뮤니티 일원들의 안부를 물으며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이틀 뒤에 게이 커뮤니티 일원 중 고인이 된 두 분의 명복을 빌며, 환멸을 느끼게 하는 세상에서도 망자와의 연결을 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태원은 오랜 시간 퀴어들의 게토이자, 사회에서 밀려난 다양한 주체들이 각자의 몸짓으로 의미를 만들어낸 장소였다. 하지만 참사 이후 희생자들의 서사는 이태원과 충분히 엮이지 못하고 있다.
유가족이 말하는, 그리고 사회가 이해하는 희생자의 모습은 주로 ‘미래를 잃은 청년’, ‘범죄와 무관한 순진한 사람’, ‘성실하게 살아온 자녀’라는 서사로 고착되었다. 이는 참사 직후 퍼졌던 ‘놀다가 죽은’, ‘위험한 곳에 왜 갔느냐’, ‘마약에 취했다’는 등의 혐오적 비난과, 참사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하려 했던 사회적 태도의 반작용이었다. 그 결과 희생자의 서사는 단순화되었고 피해자들은 그날의 기억을 발화할 기회마저 박탈당했다.
사회적 혐오의 한편에서는 무관심도 싹트고 있었다. 정부와 사회는 ‘희생된 숫자’에만 관심을 두었다. 유가족에게 연락망조차 제공하지 않았던 정부는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생존자들과, 죽음을 두 눈으로 목격한 이들이 겪은 트라우마를 외면했다. 2주기 시민추모대회에서 피해생존자 이주현님은 피해자로 인정받기 위해 계속해서 고통을 증명해야 했으며, 증명이 불충분할 경우 지원조차 끊겼다며 분노했다. “160번째 희생자가 없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겠는가?”라는 주현님이 던진 질문은 정부만이 아니라 피해생존자에게 무관심했던 한국 사회에 대한 질책이었다.
피해자 권리보장이 법조항에만 머무르지 않도록, 우리는 아직 듣지 못한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존재함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그들이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라도 ‘희생자’, ‘죽음’의 틀로 닫힌 참사의 인식을 성찰해야 한다. 2주기를 맞은 지금, 그들의 목소리에서 우리가 빼앗긴 권리가 무엇이고, 연대를 통해 되찾아야 할 권리가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기억의 정치를 시작할 때다.
2주기 시민추모대회가 끝을 향해 갈 즈음, 이태원에서는 2022년 10월 29일 미처 즐기지 못했던 밤을 추억하는 또 다른 애도의 장이 열리고 있었다. ‘중앙119구조본부’의 붉은 버스를 배경 삼아 다양한 코스튬을 뽐냈고, 노래에 맞춰 불빛을 흔들며, 우리는 그날을, 그날 이태원에 나왔던 이들을, 그리고 그날로부터 이어져온 서로를 기억했다.
공연이 끝나고 참사가 발생했던 이태원 골목까지 행진했는데, 소방대원과 경찰, 용산구 관계자들이 날카로운 호각 소리로 거리를 통제하고 있었다. 국가의 통제에 놓인 거리가 불편하게 느껴질 즈음, 모든 소란을 잠재우는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경쾌하면서도 웅장한 울림에 우리는 환호했다. 티라노사우루스를 깃발 삼아 거리를 헤쳐 나갔고, 우리의 춤이 구호를 대신했다. 너나 할 것 없이 핼러윈을 즐기고자 했던 사람들이 섞여졌다. 그때 나는, 이것이 애도가 해방으로 이어지는 순간이라 생각했다.
슬프지만은 않은, 벅찼던 2주기를 뒤로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니 마음이 무거웠다. 다음날 나는 한강의 시집을 펼쳐, 그 문장들을 오래 매만졌다. 고통이 사라질 수 없듯, 살아남은 자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책임인 기억 또한 쉽게 사라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기억을 통해 슬픔 속에서도 번쩍임과 성장, 그리고 생명이 노래되는 순간을 건져 올려야 한다. 우리의 기억투쟁이 고독할 순 있어도 결코 외롭지는 않기를. 슬픔과 환희로 뒤섞였던 그날이 캄캄한 저녁 하늘을 비추는 희미한 빛으로 남아, 다시 올 애도의 축제를 기다려야지.
▲ 10.29이태원참사 2주기 이태원 골목을 행진하는 핼로윈 액션, 람, 2024.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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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4 19:08
기간 :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