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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거기에 분명 무언가가 있었다
: 커뮤니티 운동 단체 ‘친구사이’의 경험
2024년 2월 17~18일,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의 주최로 제16회 성소수자 인권포럼이 한양대학교 정몽구미래자동차연구센터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첫날 세션인 '커뮤니티는 어떻게 운동이 되는가'에서 발표된, 친구사이의 활동 내역과 커뮤니티 운동의 이념·실천을 연결한 발제문을 소식지에 공유합니다. |
제16회 성소수자 인권포럼 | 커뮤니티는 어떻게 운동이 되는가
"거기에 분명 무언가가 있었다 : 커뮤니티 운동 단체 ‘친구사이’의 경험"
1. 들어가며
2. 전위당과 대중당, 인권과 친목의 이중주
1) 과학적 사회주의 노동운동론과 68혁명 이후의 운동론
2) 1990년대 성소수자 인권운동 단체의 고민 : 성소수자 대중 속으로
3. 게이커뮤니티를 가로지르는 자생성과 의식성의 다층적 긴장
1) 커밍아웃과 문화운동의 정치 : 비가시성에 대한 책임을 올바르게 따져묻기
2) 종로3가와 연대의 정치 : 동성애 차별적 교과서 개정운동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운동까지
4. 나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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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1993년 12월 한국인으로 구성된 최초의 동성애자인권운동 단체인 초동회가 결성된 후, 남성동성애자 단체 ‘친구사이’가 1994년 2월 7일 초동회로부터 분리 발족되었고, 3월 초 친구사이 이름의 첫 소식지가 발간되었다. 단체 발기 30주년을 맞는 2024년 2월, 친구사이 운영위원이자 소식지팀장으로서 단체의 활동을 소개하는 자리에 초대된 것이 무척 뜻깊다.
친구사이는 2006년 2월 25일 회칙개정을 통해 ‘한국남성동성애자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로 명칭을 변경하고, 회칙의 2조를 통해 단체의 목적을 “게이의 인권을 보호하고, 성적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없는 사회를 건설”할 것으로 규정하였다.[1] 2010년 1월 16일 친구사이 상반기 LT 겸 운영위원회 때에는 친구사이의 ‘가치와 비전’이 채택되었고, 친구사이의 가치에 ‘대안의 공동체’, 비전에 ‘커뮤니티 성장을 위해 투자하는 친구사이’를 명시함으로써 친구사이의 주요 운동 및 사업 대상으로 ‘게이커뮤니티’를 특정하였다. 이 게이커뮤니티란 초창기에는 “게이들이 모여 형성한 온라인/오프라인의 공간”을 의미하였으나,[2] 차츰 게이 정체성을 넘어 게이들의 공간에 인접한 다른 성소수자 및 앨라이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이는 회칙에 명시된 단체의 목적에서 ‘게이’와 ‘성소수자’ 중 후자의 맥락이 점차 친구사이 활동에서 강조된 것과 맥을 같이 한다.[3]
그렇다면 ‘커뮤니티 운동’이란 과연 무엇일까. 마치 사회라는 개념이 그렇듯이, 커뮤니티라는 개념 또한 그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범주 설정이 쉽지 않다.[4] 통상적으로 친구사이에서 사용된 커뮤니티 운동단체의 용례는 다음과 같은데, 몇몇 주요 활동가로 구성된 조직과는 달리 꼭 활동가로 준별되지 않는 일반회원 및 자조모임을 일정하게 보유하고, 그들을 단체의 주요 참여자이자 운영 원리로 취급하는 곳을 일컫는다.[5] 친구사이가 커뮤니티 운동단체로 평가받는 이유 또한, 1998년 5월 24일 단체의 사무실을 종로3가로 이전한 이래 단체의 일반회원들이 드나드는 업소가 위치한 종로3가에 사무실을 줄곧 유지하는 한편,[6] 그 업소들에 대한 사업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친구사이의 ‘커뮤니티 운동’은 활동가 집단으로만 구성되지 않는 운동의 주체와 방법론에 대한 고민, 즉 사회운동의 대중적 전략 및 대중의 재구성에 대한 개념과 연결된다. 이러한 사회운동의 심급은 비단 친구사이를 비롯한 성소수자인권운동뿐만 아니라 사회운동이 태동한 당시부터 고민되어온 것이다. 한편 성소수자인권운동이 성소수자 당사자의 입장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성소수자 집단에 특유한 성격으로 발생하는 다른 사회운동과의 차이점도 일면 존재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사회운동 일반에서 고려되어온 대중성 관련 논의들을 살펴보고, 1990년대 이래 친구사이와 성소수자인권운동이 전개해온 성소수자 대중에 대한 시각 및 커뮤니티 운동의 실제를 추적하고자 한다.
2. 전위당과 대중당, 인권과 친목의 이중주
1) 과학적 사회주의 노동운동론과 68혁명 이후의 운동론
대중 운동은 고대부터 존재해온 현상이지만, 근대적 사회 및 사회 구조의 개념과 사회운동에 대한 ‘과학’적 이론화의 시작은 19세기 맑스주의가 정식화한 계급 구조 및 과학적 사회주의 운동론, 그리고 그것이 일부 실현되고 적용된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이 시초다. 가령 성소수자인권운동이 겨냥하는 사회 구조가 이성애·시스젠더 중심주의라면, 그 사회 구조에 대한 발상의 시초에는 사회주의자들이 발견한 계급 구조가 있다.[7] 운동이 따라야 할 정전이 아니라 운동이 참조할 사건 대 사건의 비교로서 맑스레닌주의 문건을 읽는 것은 오늘날 여전히 유의미하다.
20세기 인민민주주의·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국가에서는 거의 예외없이 노동당과 공산당이 함께 존재했고, 그것의 기원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주장한 대중당과 전위당의 상호 분리 및 병존이다. 그러한 전위당·대중당의 분리를 정식화한 레닌의 텍스트가 바로 1901년 발표된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이 책의 골자는 자생적으로 발생한 대중 운동에 더하여 인적·이론적 개입을 통한 의식적 고양, 소위 ‘의식화(conscientization)’가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 운동에 반드시 필요하고, 후자의 과업을 맡을 사람들이 “혁명가 조직”, 즉 전위당의 구성원이며, 전자와 후자의 경계를 흩뜨리지 말고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8] 레닌은 자생적인 대중 운동을 가리켜 “경제 투쟁”, “조합주의”, “자생적 요소”, “의식성의 맹아적 형태” 등으로 불렀고, 그것과 분리된 형태의 “사회민주주의 의식”이 외부로부터 주입되어야 한다고 보았다.[9]
전위당과 외부로부터의 의식화가 필요한 까닭으로 레닌은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존재했기 때문에, 운동의 자생성에는 필시 계급 구조로부터 배태된 부르주아지의 입장이 거의 반드시 반영되었기 마련이고, 따라서 그를 배격하기 위한 의식적인 투쟁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10] 이런 방식으로 정식화된 과학적 사회주의에 동의하는가의 여부와 별개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대한 레닌의 문제의식은 사회 구조 일반을 사유할 때 참조할 지점이 있다. 가령 남·여 젠더 위계,[11] 인종 위계와 더불어,[12] 이성애·비이성애 사회 구조 또한 ‘사회계약’의 차원에서 작동한다는 입론은 이러한 지적을 뒷받침한다.[13]
또한 레닌이 대중당과 분리되는 전위당을 강조하기는 하였지만, 그 역시 운동의 자생적 조직화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가령 사회주의적 의식화가 필요한 것과 별개로, “경제 투쟁”에 임하는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이 “모두 사회민주주의자”일 필요는 없고, 그런 무리한 요구야말로 사회주의 운동에 “전혀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전위당을 기반으로 하는 의식화의 노선이 선명해야 하는 것만큼, 노동 계급의 “기본적인 단계의 이해”에 기반한 “폭넓은 조직” 또한 운동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레닌은 함께 언급했다.[14]
이러한 경위로 정식화된 전위당·대중당의 이분법은, 세월이 흘러 1968년 발생한 프랑스의 68혁명을 기점으로 운동론의 변화를 맞게 된다. 맑스주의의 문제의식을 확장하여 자본주의 세계경제를 세계체제론으로서 분석한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소위 ‘구좌파’, 즉 소련·동유럽을 위시한 현실사회주의의 운동적 정통성을 흔든 핵심적인 사건으로 68혁명을 꼽았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기존의 사회주의 혁명론은 수정을 피할 수 없게 되었는데, 그가 수정이 필요하다고 본 맑스레닌주의 혁명론은 곧 민주주의를 “부르주아 권리”로서 경멸하고, 전위당의 판단을 스스로 “과학적”이라 믿으며, 전위당 스스로 그 혁명의 담지자라 자임하는 관행 등이었다.[15]
한편 그는 당대의 사회 변혁 및 운동에 맞게 기존의 혁명론을 재규정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보았다. 이러한 점들이 부분적으로 가시화된 “대안적 전략”에 대해 그는 주목했는데, 이 새로운 운동의 “행동지침” 중 하나로 그가 열거한 것이 바로 이전의 전위당 전략과는 상반되는, 운동단체에 대한 “더 높은 대중참여와 더 공개적인 의사결정” 요구였다. “좌파운동 전위주의”는 19세기의 정세라면 정당했을지 모르나, 지금은 운동에 대한 진정성 있고 깊은 수준의 동기부여에 힘입은 대중적 지지(genuine, deeply motivated popular support)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16] 나아가 이러한 전략의 영향 속에 구성된 사회 운동의 후계자로, 그는 기초공동체 운동, 인종적 소수자 운동, 여성운동과 더불어 동성애자 운동(gay and lesbian movements)을 열거하였다.[17]
정리하면, 19세기 말~20세기 초 정립된 과학적 사회주의 운동론에서 전위당과 대중당의 분리를 합리화한 근거 중 하나는 계급 구조에서 파생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의 필요성이었다. 그러한 정식화된 운동론은 현실사회주의의 모순이 가시화된 68혁명 이후 변화를 맞게 되어, 운동의 목적에 깊이 감화된 대중적 지지, 운동단체 내의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 등이 운동론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2) 1990년대 성소수자 인권운동 단체의 고민 : 성소수자 대중 속으로[18]
운동론의 고전적인 전위당·대중당 이분법에 비견되는 성소수자인권운동의 유서깊은 구도가 있다. 바로 인권과 친목의 이분법이 그것이다. 초창기 게이인권운동의 경우, 이러한 이분법에는 기존에 이미 존재하던 게이업소의 인프라와 비교하여, 1990년대 초 새로 생긴 게이인권운동이 스스로를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깔려 있었다.
종로3가의 경우 1970년대부터, 이태원의 경우 1990년대부터 게이업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곳은 당대의 성매매집결지로서 정상가족 내 성적 실천과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존재들이 모여들던 공간이었다.[19] 이곳은 소위 ‘남성 동성애자 대중’들이 모여있던 곳이고, 따라서 친구사이는 초창기부터 이들의 존재를 의식하여 사업을 꾸려나갔다. 친구사이 분리 발족 후 처음 발간된 소식지에서는 종로·이태원을 비롯, 신당, 충무로에 있는 게이업소의 약도가 실렸고,[20] 친구사이가 참여한 성소수자인권운동 최초의 연대체 한국동성애자인권운동협의회(동인협)의 제1주년 기념식은 당대의 유명 게이 나이트클럽인 이태원의 ‘파슈’에서 개최되었다.[21] 대학동성애자인권연합(대동인, 현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의 후원인으로 가입한 이태원 게이클럽 ‘지퍼’ 측은 업소와 인권운동단체간의 협력을 강조하기도 하였다.[22]
하지만 이 시기 게이업소와 게이인권운동단체의 관계가 늘 원만했던 것은 아니었다. 가령 1990년대 말 유명 이태원 게이클럽인 ‘스파르타쿠스’ 측은 입구에서 친구사이 소식지가 배포되는 것을 가로막아, 친구사이 회원들이 해당 클럽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이는 일이 있었다. 업소측이 이렇게 반응한 이유는 첫째, 당시는 자정 이후 심야영업이 불법이었던 시기였고,[23] 둘째로 업소측에서 자신들의 영업 대상이 게이임을 공개적으로 알려지기를 꺼려했기 때문이었다.[24]
이렇듯 유흥업소 위주로 구성된 동성애자들의 생활 반경에 대해 친구사이는 일찍부터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게이업소는 “정신적인 인간관계”보다 “육체적인 욕망의 행위만이 강조되는 곳”, “사생활에 관련된 자그마한 일”도 드러내길 “기피”하며 “하룻밤의 성관계”에 몰입하는 공간이었다.[25] 따라서 기존의 게이업소는 “공동체”라기보다 관계의 형성이 일반적으로 기피되는 “심리적으로 고립된 탈-현실의 공간”,[26] “은폐되고 가려진 채 성애적 표현만을 가능케” 하는 공간,[27] 숨어서 섹스하는 “도덕적인 괴리감만 안겨”주는 공간으로 몇몇 친구사이 활동가에게 자리매김되었다.[28] 게이업소에 대한 인권운동측의 이러한 적대에는, 초창기 운동의 단계에서 동성애자의 개념을 기존의 사회적 낙인을 벗어뜨리는 방식으로 구성하려 할 때, 그의 일환으로 동성애자를 “순결하고 고상”한 사랑이 가능한 존재,[29] 에이즈의 예방을 전제로 “건전”하고 “건강한” 문화를 가질 수 있는 주체로 다시 쓰고자 하는 규범적 욕망이 존재했기 때문이다.[30]
이러한 인식 가운데 1997년 친구사이는 인권운동단체로서 스스로의 입지를 재규정하고, ‘친목’과 ‘인권’ 가운데 후자에 주로 역량을 집중하는 노선을 채택하였다. 즉 ‘친목’과 ‘인권’을 모두 잡으려는 것은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는 시도와 같다고 판단되었고,[31] 후자에 집중하는 단체의 상은 “불쌍하고 외롭고 쓸쓸한 게이들이 모일 수 있는 사랑방”과는 구별되는 “투쟁”의 단체, “혁명을 위한 단체”로 자리매김되었다.[32] 이러한 변화에는 1996년 12월 26일 새벽 신한국당에 의해 날치기 통과된 노동법·안기부법 개정안에 따른 정국의 격화와 운동진영의 정세 변화, 그에 힘입어 1997년 성소수자인권운동 단체들이 집회 현장에 처음으로 무지개 깃발을 들고 나선 경험 등이 자리하였고,[33] 다른 한편으로는 게이들이 친구사이를 거치지 않고 곧장 종로·이태원으로 나가는 현실 속에서 친구사이가 굳이 쉼터나 사랑방의 역할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진단도 거기에 개입되었다.[34] 이런 판단 속에 친구사이 사무실은 발족 당시의 연남동에서 성수동으로 1997년 4월 이전하였다.
그러나 사랑방보다 인권운동단체를 내세운 단체의 노선 변경과 사무실 이전은 1998년 초 회원수의 급감을 불러왔고,[35] 이러한 노선 변화에 대해 친구사이가 동성애자 대중의 이해를 대변하고 그들을 운동의 대열로 끌어들이는 데 실패했다는 외부의 평가도 잇따랐다.[36] 또한 운동 스스로 기존 동성애자 문화와의 “차별화”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몇몇 스타(?) 운동가들의 역량과 지명도에 의지하는 경향”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존재했다.[37] 이에 따라 친구사이는 1998년 5월 24일 사무실을 종로3가로 이전하게 된다. 사무실 이전 소식을 알리는 1998년 6월호 친구사이 소식지 기사에서, “친구사이는 몸바쳐 일하는 활동가들만의 집단”이 아니며, “특정한 사회집단에 토대를 둔 단체라면 당연히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자신의 존재 근거 가까이에 있어야 마땅”하다는 “기본에 충실”할 것이 강조되었다.[38]
이 과정을 거치면서 확인된 바는 다음 두 가지다. 첫째, 기존의 게이 문화는 무지하고 운동단체의 문화는 세련된 것이라는 차등적 관점을 재고해야 한다는 점,[39] 둘째로 인권운동단체 내에서 친목과 인권은 반드시 함께 추구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는 친구사이뿐 아니라 비슷한 시기 다른 성소수자인권운동 단체들, 즉 끼리끼리를 비롯하여[40] 또하나의사랑에서도 마찬가지로 고민되고 결론지어진 내용이었다. 작은 일에서 출발하는 회원들의 친목과 자긍심·정체성 확립,[41] 동성애자도 평범한 일상생활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또한 인권운동의 방법론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42]
특히 게이업소와 게이인권운동 사이의 간극에서 드러난 학력 위계와 차별도 의식되어, 1996년을 기준으로 친구사이 회원들 중 고학력자가 95%를 차지한다는 지적도 잇따랐다.[43] 대학 성소수자 모임을 기반으로 발족한 대동인의 경우 이를 일찍이 의식하여, 1998년 8월 1일 동성애자인권연대(동인련)로 개칭한 후에는 단체의 원칙으로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뿐 아니라 “계급적·계층적·문화적 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한다는 조항이 삽입되었다.[44]
친구사이에도 비단 고학력자만 활동한 것은 아니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1995~1996년 친구사이 부회장을 역임한 오준수의 존재였다. 그는 단체 가입 전 HIV에 감염되었고, 관련 경험을 다룬 국내 최초의 단행본을 가명으로 발표했으며,[45] 1998년 9월 13일 에이즈 합병증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친구사이는 2000년 그의 유고집을 펴냈으며, 책의 서문을 통해 생전의 그를 “낙원동 뒷골목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호모”이자 “종로의 게이커뮤니티와 동성애자 인권운동 사이를 연결하는 유일한 고리”였다고 평가했다.[46]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성소수자인권운동에서 친목과 인권이 반드시 함께 추구되어야 함을 고통스레 확인하는 과정과 같았다. 친구사이는 1997년 2월 소식지를 통해 친목에 머무르지 않고 “남성동성애자의 인권신장”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로 자리매김하였고,[47] 한편으로는 68혁명 이후 대중에 대한 운동의 주목과 맞물려 1998년부터 게이 대중 속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하는 가운데 인권운동을 전개하는 원칙을 재확인했다. 이는 전위당·대중당의 해묵은 이분법에서 벗어나, 친목과 인권의 의제가 서로 칼자른 듯 나뉠 수 없고, 단체 안에서 그것들 중 어느 한쪽을 누구에게 외주 주는 일이 가능하지도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3. 게이커뮤니티를 가로지르는 자생성과 의식성의 다층적 긴장
1) 커밍아웃과 문화운동의 정치 : 비가시성에 대한 책임을 올바르게 따져묻기
친구사이의 ‘커뮤니티 운동’을 논하기에 앞서 ‘커뮤니티’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풀어보고자 한다. 앞서 설명하였듯이 게이커뮤니티는 게이인권운동과 더불어 게이 대중이 있는 곳, 즉 이전부터 존재한 게이업소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상상되었다. 전위당과 대중당의 운동론에 착안하여 그들 가운데 게이인권운동이 밟아온 의식성과 자생성의 요소를 앞에서 살펴보았다면, 게이업소들 사이에서는 과연 그러한 요소들과 각각의 구분이 없었는지 한번 살펴보기로 한다.[48]
종로·이태원으로 상징되는 게이업소에는 그곳으로 게이들이 몰려드는 형태의 자생성이 존재한다. 게이들이 그곳에 가는 이유는 주로 “이반이라고 끼떨어도 아무도 손가락질을 안해서” 좋기 때문이다.[49] 문제는 어떤 게이들에게는 그런 게이업소에 들어가는 일조차 장벽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가령 ‘공적 영역’에서 표준이 되는 신체는 주로 남성·백인으로 간주되고, 그런 이들만이 상대적으로 눈에 덜 띄는 존재가 되며, 그렇지 않은 여성 및 비백인은 눈에 띄는 존재로서 스스로를 과잉 감시하고, 자기가 속한 집단의 “대표성에 대한 부담감”을 떠안게 된다. 이것은 공적 영역 안에서 소위 “비가시성”이 “권력의 장소”이자 “일반적인 도구”로 작동한다는 증거가 되는데,[50] 이러한 구도는 이성애중심주의 사회와 성소수자 당사자에 이르러 한층 강한 형태로 적용된다.
성소수자들은 대개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 침묵하고 그것을 돌아보지 않는 것을 “자기 보호의 한 형태”로 인식하며, 이성애자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규범을 스스로 뒤집어쓰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자신을 숨기는 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비가시화된 자아를 재발견하고 자신을 성소수자로 정체화하는 일은 대체로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초기 도움 없이” 해내야 하는 과업이 되는데, 이는 “다른 민권 집단”과 다른 성소수자 고유의 억압 가운데 하나다.[51]
그렇기에 그것을 뛰어넘어 자신의 성정체성을 탐색하거나 확신하기 위해 게이업소를 찾아 제발로 걸어들어가는 일은, 비단 자생성뿐만 아니라 의식성의 지분 또한 함께 지니게 된다. 이성애자들이 숨쉬듯 향유하고 있는 돌봄의 장, 즉 자신의 성정체성을 기반으로 구성된 인간관계, 친지, 이웃 등 일련의 돌봄 관계, 혹은 “둘레 세계”를,[52] 성소수자들은 그들을 낙인찍지 않는 어떤 동류와의 네트워크에 의식적으로 진입하는 일을 통해 비로소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퀴어 즐거움이 단순히 “성적 친밀성”으로만 요약될 수 없고 “공간에 대한 권리를 되찾는 운동”의 성격을 지닌다는 평가가 그래서 존재한다.[53] 설령 그 네트워크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의 정체를 완전히 밝히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러한 점들은 일정하게 기능하는데, 이는 1990년대뿐 아니라 2000년대 이후 등장한 트위터·텀블러 등 익명성이 보장되는 SNS의 경우도 마찬가지다.[54]
게이업소의 운영자들 중 일부는 이러한 자생성과 의식성의 긴장 가운데 게이업소가 놓여있음을 알았고, 이에 따라 자신들의 업장을 문화지킴이, 문화파수꾼으로 인지하였다.[55] 또한 서로 얼굴을 확인하거나 통성명하기조차 어려웠던 크루징 문화에서 벗어나, 서로의 얼굴이라도 확인할 수 있는 업소를 통해 관계맺는 것을 “인격적인 이반사회”, 혹은 “내부적인 커밍아웃”으로 의미화하기도 하였다.[56] 이에 따라 몇몇 게이업소의 업주들은 인권단체 장에 부족하지 않을 만큼 “한국이반문화의 장으로서 책임”을 인식하는 한편,[57] 게이업소의 운영 자체를 인권운동의 일환으로 파악하였다.[58] 따라서 친구사이가 종로3가에 사무실을 두고 게이업소들을 지척에 두면서 그들을 게이커뮤니티의 일부로 파악한다는 것은, 게이업소에 가로놓인 이러한 종류의 자생성과 의식성의 긴장, 그로부터 추동되는 게이업소 고유의 입지를 존중한다는 뜻과 연결된다.
물론 친구사이를 비롯한 성소수자인권운동의 입장과 운동적 목표는 이러한 “내부적인 커밍아웃”을 상회하는 무엇이고, 그것은 바로 일반 사회를 향해 자신을 드러내는 형태의 공개적인 커밍아웃이다. 친구사이 발족 초기부터 단체의 핵심 모토가 되었던 커밍아웃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숨기지 않고 당당히 공개하여 성소수자가 사회 속에 존재함을 드러내고, 이를 통해 다른 성소수자의 자력화를 도움은 물론 성소수자에게 비가시성을 장려하는 이성애중심주의 사회에 균열을 내는 선언이자 활동이다.[59] 이에 따라 친구사이는 1990년대부터 언론을 통한 공개 커밍아웃을 꾸준히 감행했고, 2002년부터는 친구사이 홈페이지 ‘커밍아웃 인터뷰’를 게재하여 현재까지 총 42명의 성소수자의 목소리를 담아냈으며, 2009년과 2016년 각각 영화 <종로의 기적>과 <위켄즈>를 제작하여 스크린을 통한 성소수자들의 집단적 커밍아웃을 전개하였다.
또한 2003년 창단한 친구사이 소모임 게이코러스 지보이스는 2006년부터 단원들의 커밍아웃을 전제로 매해 정기공연을 개최하였고, 이는 커밍아웃을 전제로 한 문화운동의 방법론으로서 2000년대 이후 친구사이의 주요 운동전략으로 자리잡았다.[60] 2015년부터는 친구사이 소식지 인터뷰를 통해서도 적지 않은 게이커뮤니티의 일원들이 사진과 서사를 통해 커밍아웃을 단행했다. 이는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유튜브 및 기타 플랫폼을 통한 성소수자의 집단적 가시화에 분명한 밑바탕을 제공했다.
게이커뮤니티의 일원이 공개적 커밍아웃을 전제로 문화운동을 한다는 것은 일반 사회와 게이커뮤니티에 다양한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사회적 소수자의 존재가 으레 그렇듯이 자칫 게이의 특정 면모가 과잉 대표될 가능성과 위험이 상존한다. 그럴 때 중요한 전략은 첫째, 게이커뮤니티에 가로놓인 밝은 면과 어두운 면 모두를 게이커뮤니티 일원의 입장으로 해석해 담아내고, 둘째로 커뮤니티 안에서 상대적으로 낙인이 심한 존재들, 가령 HIV 감염인이나 성별 비순응(‘끼순이’) 등에 대한 재현을 거기에 빠뜨리지 않는 것이다.[61]
게이커뮤니티의 자긍심과 당당함, 피해와 절망은 서로 분리된 채 존재할 수 없다. 퀴어문화축제의 하루가 퀴어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놓고 거리를 걷지 못하는 다른 364일 위에 존재하듯이, 종로·이태원, 혹은 게이인권운동단체에서만 풀리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곧 그곳 외 다른 자리가 그 사람에게 얼마간 끈질기게 불편했다는 이야기가 된다.[62] 그러한 삶의 조건을 대체로 눈치껏 모른척 해주는 것이 게이업소의 예의이자 그 나름의 긴장이라면, 그걸 조금이라도 조심스레 꺼내어 짚어주고 그것을 어루만지는 것이 곧 커뮤니티 운동 단체가 전개하는 문화운동의 요체다. 그 활동들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끼떨고 노는’ 것을 거의 반드시 상회하는 의미를 가지는 까닭이 이러하다.
한편으로는 게이커뮤니티에 여전히 자신의 성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게이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처한 비가시성의 책임을 그들 개인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 것이다. 그 비가시성의 책임은 성소수자 개개인을 그런 상태로 몰아넣는 이성애중심주의 사회에게 있다. 커밍아웃이 그토록 중요한 선언이고 실천인 것 또한 그 구조의 힘을 개인의 결단으로 돌파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며, 궁극적으로 성소수자의 비가시성을 상징하는 ‘벽장’은 개인의 힘만으로는 온전히 없앨 수 없다.[63] 결정적으로 성소수자의 삶 가운데 커밍아웃은 어느 한 시점에서 치르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끝없이 반복하게 될 과정에 가깝다. 그 점에서 대사회 커밍아웃을 한 사람 또한 벽장의 세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64]
친구사이의 운동 전략은 이러한 갖가지 게이커뮤니티의 사정을 되도록 힘껏 껴안는 것이다. 단체의 모토인 공개적 커밍아웃과 자긍심을 장려하면서, 동시에 게이업소에 모여있지만 게이인권운동단체에 들르지 못하는 어떤 이들을 대하고 상상할 때 그들 역시 그 나름의 자생성과 의식성의 긴장 위에 있음을, 게이업소마저 섣불리 오기 힘들었을 누군가에 비할 때 거기에 있는 그들도 나름 그 자리를 애써 버티고 있음을 해량하는 것, 그리고 그 모든 위치와 입장과 거기에 깔린 피해의 원인과 책임이, 궁극적으로는 게이커뮤니티 구성원들 서로가 아니라 이성애중심주의 사회 구조에 있음을 잊지 않는 것, 이것이 친구사이를 커뮤니티 운동 단체로 만들어주는 인식의 대강이다. 또 그 인식을 바탕으로 게이업소와 게이인권운동과 그곳 바깥의 운동단체를 넘나들면서 여러 현장의 만남과 사업을 조직하고, 그를 통해 마치 절벽같아보이는 커밍아웃 및 운동적 교양 앞에 가로놓인 간극을 때로는 드라마틱하게 좁히는 것, 이것이 친구사이가 커뮤니티 운동을 실천해온 여러 방식들 가운데 하나다.
2) 종로3가와 연대의 정치 : 동성애 차별적 교과서 개정운동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운동까지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한 게이커뮤니티의 일원들이 사회 속 어떤 맥락에 서있는 편이 합당한지를 살피고 거기에 머무는 일 또한 친구사이가 수행해온 주요 운동 전략 중 하나다. 친구사이는 초창기부터 “타 동성애자 인권단체 및 기타 인권단체와의 연대를 통한 인권운동”을 단체의 주요 활동으로 실천해왔다.[65]
문제는 이렇게 연대활동을 사활로 거는 단체의 회원들 중 대부분이 게이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고, 이들 중 적지 않은 수는 동료 게이와 만나 관계를 맺고 일을 하고 인권 감수성을 키울 생각은 해보았어도, 게이 당사자 이슈를 벗어난 다른 의제에 관심을 가진 채 단체에 들어오는 일은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운동사회의 일반 문법으로 자리잡은 연대활동의 의의는 게이들끼리 모였다고 알아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많은 경우 별도의 경험과 학습을 거쳐 비로소 회원들에게 설득된다. 그렇기에 게이인권운동단체가 회원들을 품은 채 전개하는 연대의 정치는 또 한 차원의 자생성과 의식성의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그 긴장의 지점이 게이커뮤니티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다. 최초의 성소수자인권운동 연대체인 동인협은 1997년 6월 28일 중고등학교 교과서의 동성애자 차별을 문제삼아 장외 집회를 열었는데, 이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최초의 성소수자 집회이자 참가자 중 상당수가 집단적 커밍아웃을 감행한 기념비적인 자리였다. 여기에 동인협의 연대 단위인 친구사이 또한 참가했는데, 집회가 개최된 장소는 다름아닌 종로3가 탑골공원 앞이었다.[66] 또한 한국 최초로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 차별금지조항이 명시된 2012년 서울학생인권조례 제정 때도, 친구사이를 비롯한 성소수자인권운동 단체들은 다른 인권단체와 더불어 서울시의회 점거 농성을 통해 조례의 원안 통과를 관철시켰다.[67]
이러한 친구사이의 노력이 어떤 회원, 혹은 어떤 게이커뮤니티의 일원에게는 여전히 별로 와닿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이들에게조차 강한 인상을 남긴 순간이 바로 코로나19 팬데믹 때다. 2020년 5월 7일 킹클럽 등 게이클럽들에 확진자가 방문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언론들은 방역을 훼철하였다는 명목으로 게이클럽과 그곳을 방문한 게이커뮤니티의 일원들에게 무자비한 공격을 자행했다. 팬데믹 초기 확진자의 동선이 전국민에게 공개되던 터라 그곳을 들른 확진자와 밀접접촉자 중 적지 않은 수는 극심한 아우팅 공포에 시달렸다. 이에 친구사이를 비롯한 7개 운동단체들은 5월 12일 코로나19 성소수자 긴급 대책본부를 결성하였고, 5월 19일 중앙방역대책본부와 미팅을 진행하였으며, 5월 29일부터 ‘혐오언론순회방역 릴레이 기자회견’을 진행하였다. 명백한 게이커뮤니티 중심 이슈에 대한 운동사회의 신속한 대응은, 친구사이가 평소 전개해온 연대활동의 경험과 연결망 없이는 성사되기 어려운 것이었다.[68]
또다른 예는 2022년 4월 11일부터 5월 19일까지 진행된 차별금지법 제정 쟁취를 위한 46일 농성 및 단식투쟁, 그 와중에 개최된 4월 28일의 ‘차별금지/평등법 제정을 위한 비상시국회의’ 및 비상시국선언 발표다. 윤석열 정부의 취임을 앞두고 차별금지법제정연대(차제연)에 소속된 두 명의 활동가의 단식과 더불어, 많은 운동단체들이 참여한 이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은, 비록 법 제정에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운동사회가 지닌 연대의 힘을 보여준 또 하나의 사건이었다.[69] 이 때 단식한 두 명의 활동가 중 한 명이 바로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의 이종걸 사무국장이었다. 방대한 연대단위를 자랑하는 차제연에서 법제정 촉구 단식에 나선 두 명의 활동가 중 하나가 게이라는 것은, 차제연과 비슷한 구성의 연대를 보여온 미국의 Rainbow/PUSH(1971~)조차 만들어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이렇듯 친구사이가 부단한 연대활동을 통해 ‘커뮤니티 운동’의 이름으로 바라고 실천해온 운동적 지향은 다음과 같다. 게이업소의 커뮤니티 구성원 및 성소수자 대중들이 게이인권운동과 교유할 수 있기를 바라고, 게이인권운동단체의 회원들이 친구사이와 연대하는 여러 운동단체들과 교류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 그 바람과 결부된 손에 잡히는 예로, 친구사이 회원들의 활동과 그들이 수행하는 커뮤니티 구성원들과의 만남을 매번 눈으로 확인하는 것, 한편으로 그 바람 아래에 게이커뮤니티의 일원들이 저마다 처할 자생성과 의식성의 긴장과 층위를 존중하고, 그들이 그 자리에서 부디 온전하기를 바라는 것. 실은 서로 각자의 자리에서 애쓰고 있음을 알아봐줄 때까지, 회원들 서로와 게이커뮤니티의 일원에 대한 희미한 기대를 잃지 않는 것.
물론 어떤 사람이 긴장 가운데 있다고 해서 무언가가 저절로 생겨나지는 않는다. 그 긴장을 의식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새로 정립하고, 그를 통해 남들과 관계맺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사회적인 것’이 있을 때 그 긴장은 커뮤니티 운동의 기반으로 기능한다.[70] 여기서의 사회적인 것이란 일상 속에서의 아주 구체적인 관계 실천을 통해 구성된다. 연대단체의 낯선 활동가들과 어색함을 뚫고 대화를 시도하고 그들의 핵심 과제가 무엇인지를 눈치껏 학습하는 것, 그 과정에서 게이커뮤니티의 입장과 의제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길 두려워하지 않는 것, 그를 통해 얻은 어떤 연대의 감각을 다른 회원들에게 설명할 때, 그들에게 그것이 낯설 수 있음을 인지하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춘 언어를 고민하여 그것을 전달하는 것 등이 거기에 해당된다. 이 모든 과정은 진실로 노동의 이름에 값하고, 그런 까닭에 이러한 노력을 통상적인 돌봄의 의미를 상회하는 더 넓은 범주의 돌봄이자 노동이란 뜻에서 “연대노동”이라 부르기도 한다.[71]
여기서 주의할 것은, 타자에 대한 인간의 감수성은 결코 일거에 획득되거나 확장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복해서 말했듯이 게이커뮤니티의 구성원들은 저마다 처한 긴장의 심급이 있기 때문에, 자생성을 넘어서는 의식성의 경험이 어느 순간 부대낄 경우 그 마음을 돌보는 일이 필요해진다. 그럴 때는 서로에게 곁을 주고 시간을 주는 관계 기술이 필요하다. 타자를 알기 버거워 이를 중단하고 싶은 마음을 영원히 모르고 싶다는 방향으로 기울지 않게끔 하고, 나와 남을 알려는 마음이 지쳤음을 깨닫고 잠시 쉬게끔 하는 것도 커뮤니티 운동의 중요한 일부분이다.[72] 다큐멘터리 <그림자들의 섬>(2016)에 나온 한진중공업 해고자 민주노총 부산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의 말처럼, 미워하는 건 쉽고, 기다리는 일은 어렵다.
4. 나가며
2004년 친구사이 창립 10주년 행사에서 한 이성애자 문화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클럽 다니는 “클러버 게이”들이 그렇게 많다고 들었는데, 왜 (서울)퀴어문화축제에는 소위 “운동권 게이”들밖에 안보이냐고, “퀘퀘하고 비릿한 곰팡이 냄새나는 이태원 클럽에서 엉덩이 흔들던 춤 솜씨를 이왕이면 훤한 대낮에 종로 길바닥에서 보여 달라”는 제언이었다.[73] 2024년인 지금, 이태원 게이클럽은 더 이상 곰팡이 냄새가 날 정도로 낙후되지 않았고, 글을 마무리하는 2월 11일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 홈페이지에 풀린 공식 사진에는 평소 클럽에 다니던 적지 않은 게이들의 얼굴이 실려있다. 커뮤니티가 어떻게 운동이 되는가, 클럽 다니는 것이 어떻게 인권운동이 되느냐는 질문에 대해, 이 20년의 낙차와 변화로 그 대답에 갈음하고자 한다.
이 글은 과거 전위당·대중당의 운동론을 오늘날 적용될 자생성과 의식성의 병존으로 재독해보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모든 운동과 조직 구성의 심급에는 자생성과 의식성이 필연적으로 모두 개입될 수밖에 없다. 어떤 조직을 전위당, 어떤 곳을 대중당으로 분류하여 각각의 임무를 맡기는 식의 노선은, 20세기 현실사회주의와 1997년 시점의 성소수자인권운동이 그랬듯이 필패를 면하기 어렵다. 운동이 개입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모든 현장에는 그 나름의 자생성과 의식성이 동시에 존재하고, 그것들 중 어느 한쪽의 사유와 실천을 누구에게 외주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운동의 과제는 다만 그 긴장들을 얼마나 깊이 독해하고 창조적으로 활용하느냐에 달려있다. 거기에 딸린 관계 기술과 연대노동이, 일견 형용모순처럼 보이는 커뮤니티 운동을 마침내 운동으로 기능하게끔 만들었다.
끝으로 커뮤니티 운동에 임하는 사람들 모두가 인간에 대한 하해와 같은 애정으로 충만한 것은 아니다.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인간과 커뮤니티에 만정이 떨어진 상태임을 고백해두고 싶다. 이렇게 시시때때로 변하는 내 정동과는 별개로, 이 글에 각주로 단 사건으로서 친구사이의 활동들은 그 자리에 오롯하고, 그 사실이 나를 안심하게 한다. 인간과 커뮤니티에 때때로 치를 떨 여러분들에게, 이 글이 말하고 정리한 내용 또한 그처럼 그 자리에 오롯한 사건 가운데 하나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2024.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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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2년 11월 24일 회칙 개정을 통해 이 문구는 “게이의 인권을 옹호하고,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없는 사회를 건설함”으로 개정되었으며, 2013년 1월 1일 시행된 이래 오늘에 이른다.
[2] 친구사이, 「‘친구사이’와 한국의 게이 인권운동」, 『진보평론』 49, 진보평론 편집부, 2011.9, 72쪽. 이 글에서 친구사이는 2011년 기준 게이인권운동의 주요 이슈를 다음 9가지로 정리했다. 1) 게이커뮤니티의 형성, 2) 커밍아웃 프로젝트, 3) HIV/에이즈 관련 활동, 4) 청소년 동성애자의 인권, 5) 군 관련 동성애자 인권 활동, 6) 대안 문화의 형성, 7) 동성애에 대한 검열과 표현의 자유, 8 ) 동성애자의 가족구성권, 9) 성소수자 인권 교육과 사회적 지지의 조직.
[3] 2016년 7월 30일 친구사이 정기모임에서 논의 후 의결된 “2016 친구사이 활동에 관한 결의안”의 제2조 ‘게이 커뮤니티에 대한 기여’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친구사이는 성소수자로서 겪는 어려움이 있을 때 도움을 제공하고 게이들의 인권을 대변하는 단체이다. 이러한 단체로서 우리는 접근성과 전문성을 높이고, 성소수자의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한 통로를 다양하게 확대하도록 노력한다.” 따라서 친구사이의 사업 대상으로 거론되는 ‘게이커뮤니티의 일원’은 비단 성정체성으로서 게이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게이커뮤니티의 일원’이라는 표현이 친구사이 홈페이지의 공식 공지에서 최초로 사용된 것은 2017년 3월 7일이다. 「2017 게이컬쳐스쿨 : ‘이게 내 교양이다 : 미술 언어로 자기표현 하기’」, 2017.3.7
[4] 가령 ‘커뮤니티’를 운동의 바탕이 아니라 운동이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사용한 예도 존재한다. 미국의 상업화된 퀴어 프라이드에 맞선 “급진적인 퀴어 축제”의 형태로 2002년 5월 25일 개최된 제1회 ‘게이 수치심(gay shame)’ 시상식에서, ‘커뮤니티’는 주로 사회 주류에 편승하여 하층 계급의 성소수자를 억압하는 게이로 형상화되었다. 그 예로 “‘게이’ 이름에 먹칠을 한 CEO, HIV 감염인을 퇴거시키는 게이 집주인, 노숙자 퀴어를 구타하는 게이 경찰, 퀴어 청소년 쉼터에 반대하는 게이 카스트로 주민들”이 열거되었다. David M. Halperin, “Why Gay Shame Now?”, David M. Halperin & Valerie Traub eds., Gay Shame,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9, pp.41-42.
[5] 「여행자 ‘정숙조신’님 인터뷰 : 2. 논바이너리와 게이와의 관계, 그리고 커뮤니티 운동」, 『친구사이 소식지』 85, 2017.7.
[6] 「친구사이 20년史 톺아보기 #04 : 이사의 역사 - 친구사이 사무실 변천사」, 『친구사이 소식지』 49, 2014.7.
[7] 역사에 깔린 철학적 바탕에 구조와 사건이 있다고 했을 때, 미셸 푸코, 「진리와 권력」(1976), 노엄 촘스키·미셸 푸코, 이종인 옮김,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시대의창, 2010[2006], 189~191쪽.
[8] 블라디미르 I. 레닌, 최호정 옮김, 『무엇을 할 것인가』, 박종철출판사, 1999[1901], 147~148쪽.
[9] 블라디미르 I. 레닌, 최호정 옮김, 『무엇을 할 것인가』, 박종철출판사, 1999[1901], 38~39, 103쪽.
[10] 블라디미르 I. 레닌, 최호정 옮김, 『무엇을 할 것인가』, 박종철출판사, 1999[1901], 53~54쪽.
[11] 캐럴 페이트만, 이충훈·유영근 옮김,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 이후, 2001[1988].
[12] 찰스 W. 밀스, 정범진 옮김, 『인종계약』, 아침이슬, 2006[1997].
[13] 모니크 위티그, 허윤 옮김, 「사회계약에 대하여」(1989), 『모니크 위티그의 스트레이트 마인드 : 이성애 제도에 대한 전복적 시선』, 행성B, 2020[1992].[14] 블라디미르 I. 레닌, 최호정 옮김, 『무엇을 할 것인가』, 박종철출판사, 1999[1901], 147~148쪽.
[15] 이매뉴얼 월러스틴, 강문구 옮김, 「전략으로서의 혁명과 변혁의 전술」, 『자유주의 이후』, 당대, 1996[1995], 298쪽.
[16] 이매뉴얼 월러스틴, 강문구 옮김, 「전략으로서의 혁명과 변혁의 전술」, 『자유주의 이후』, 당대, 1996[1995], 301쪽. 이는 그가 내세운 행동지침들 가운데 두 번째 항목으로, 나머지 세 항목은 다음과 같다. 1) 노동운동의 전통적 전술로의 복귀, 3) 좌파에 의한 새로운 보편주의의 건설, 4) 국가권력을 하나의 전술이자 필요로서 재사유하기.
[17] 이매뉴얼 월러스틴, 강문구 옮김, 「전략으로서의 혁명과 변혁의 전술」, 『자유주의 이후』, 당대, 1996[1995], 299쪽.
[18] 이 절은 터울, 「시간 사이의 터울 #7 : 게이 커뮤니티 운동 약사, 1995~2000」, 『친구사이 소식지』 66, 2015.12.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19] 김대현, 「종로3가 게이 게토의 역사와 게이커뮤니티의 형성」, 『선게이서울 : 지보이스 스토리북 창단 17주년 특별판』, 2019 ; 김대현, 「게이와 페미니즘」, 『문화/과학』 104, 문화과학사, 2020.
[20] 「우리는 한가족 : 알고 지냅시다!」, 『친구사이 소식지』 2, 1994.3, 14~15쪽.
[21] 「한마음 한뜻으로 : 제1주년 기념 한국동성애자 인권운동 협의회 기념식」, 『친구사이 소식지』 12, 1996.6, 8쪽.
[22] 「Interview : 지퍼의 김사장님」, 『Dyke』 1, 대학동성애자인권연합, 1998.3.14, 4면.
[23] 유흥업소·단란주점의 심야영업제한은 1999년 3월 1일 전면 해제된다. 「이건 이렇게 : 심야영업 제한 폐지」, 『경향신문』 1998.9.24, 7면.
[24] 박지훈, 「한국 퀴어 미디어의 역사와 발전」, 전규찬 외, 『한국 사회 미디어와 소수자 문화정치』, 커뮤니케이션북스, 2011, 330~331쪽.
[25] 최혜용, 「우리들의 생각」, 『초동회 소식지』 1, 1994.1.25, 10쪽.
[26] 이정우, 「2003년 1월 1일 : 유쾌한 동성애, 정체화되지 않는 이반, 그리고 또다시 육체의 범주에 발목 잡히기」, 『이다』 3, 문학과지성사, 1998, 52쪽.
[27] 이희일, 「친구사이 세번째 강좌 : 동성애 하위 문화, 우리의 문화」, 1999.7.18, 1쪽.
[28] 김준석, 「한국의 게이 : 이성애 제도 속에서 강요당하는 이성애적 삶」, 『끼리끼리 소식지』 3, 1995.5.22, 9~10쪽. 끼리끼리(현 한국레즈비언상담소)는 초동회에서 친구사이와 함께 분리된 여성동성애자 인권운동단체다. 글쓴이는 이듬해인 1996년 친구사이 대표를 역임했다.
[29] 「식성(?) 운운하는 인스턴트 사랑은 이젠 『아듀』 - 완전한 사랑은 정신+육체임을 인식」, 『친구사이 소식지』 3, 1994.4., 2면.
[30] 『친구사이 소식지』 3, 1994.4, 1쪽 ; 『친구사이 소식지』 9, 1995.8, 1쪽.
[31] 친구사이, 「회칙개정과 97년 인권운동의 활동 목표를 위한 토론」, 1997.5.24, 1쪽.
[32] 친구사이, 「회칙개정과 97년 인권운동의 활동 목표를 위한 토론」, 1997.5.24, 8쪽 ; 『친구사이 소식지』 15, 1997.8, 1쪽.
[33] 「동성애자들이 노동법 투쟁에 나선 이유는?」, 『친구사이 소식지』 14, 1997.2, 32~33쪽.
[34] 「97년 서울, 그리고… 우리의 자화상」, 『친구사이 소식지』 17, 1997.12, 2쪽.
[35] 『친구사이 소식지』 18, 1998.1, 2쪽.
[36] 「커뮤니티 중심으로 본 1950년대 이후 한국 동성애자 인권운동의 역사」, 『Dyke』 1, 대학동성애자인권연합, 1998.3.14, 8면.
[37] 홍민우(ELLUL), 「한국 동성애자 인권운동과 또하나의 사랑」, 『또하나의 사랑』 10, 1998.10, 16~17쪽. 또하나의사랑은 1996년경 발족한 PC통신 하이텔의 동성애자 인권 동호회이다.
[38] 「친구사이, 종로로 사무실 이전!」, 『친구사이 소식지』 1998.6, 1면.
[39] 정혜등, 「인터뷰 둘 : 장진석(뉴욕 친구사이 대표)」, 『또다른세상』 2, 끼리끼리, 1996, 25쪽.
[40] 전해성, 「끼리끼리&동인협&타단체 소식」, 『또다른세상』 4, 1997, 끼리끼리, 60쪽 ; 「집중탐구 : 「끼리끼리」 회장 전해성씨와의 인터뷰」, 『또하나의 사랑』 6, 1996.8, 38쪽.
[41] 홍민우(ELLUL), 「한국 동성애자 인권운동과 또하나의 사랑」, 『또하나의 사랑』 10, 1998.10, 18쪽.
[42] DDOLOVE(전 대표시삽), 「개설 1주년 특집 : 내가 느끼는 또사모」, 『또하나의 사랑』 7, 1997.2, 11쪽.
[43] 이해솔, 「한국 동성애자 인권모임의 생성 과정과 활동 그리고 전망」, 『또다른세상』 1, 끼리끼리, 1996, 14쪽.
[44] 「동인련 활동보고」, 『Dyke』 3, 동성애자인권연대, 1998.11.1, 5면.
[45] 김경민, 『겨울허수아비도 사는 일에는 연습이 필요하다』, 도서출판성림, 1993.
[46] 신윤동욱, 「추모사 : 겨울 허수아비, 가을바람에 잠들다 - 친구사이 전 부회장, 오준수 님의 죽음에 부쳐」, 『오준수를 추모追慕함』, 남성동성애자인권운동모임 친구사이, 2000, 13쪽.
[47] 친구사이 편집부, 「시작하면서」, 『친구사이 소식지』 14, 1997.2, 1쪽, 친구사이, 「‘친구사이’와 한국의 게이 인권운동」, 『진보평론』 49, 진보평론 편집부, 2011.9, 66쪽에서 재인용.
[48] 아래의 내용 중 일부는 터울, 「1990년대 말 이반업소정보지 『보릿자루』를 통해 본 게이커뮤니티의 형성 : 기혼이반 논쟁과 섹슈얼리티 검열을 중심으로」, 『퀴어인문잡지 삐라』 3, 노트인비트윈, 2016을 요약·발췌한 것이다.
[49] 「31세/이태원/처음 : 극장에 오는 사람들은 아무 정보도 없어요」, 『보릿자루』 8, 보릿자루 편집부, 1999.8, 10쪽.
[50] 너멀 퓨워, 김미덕 옮김, 『공간 침입자 : 중심을 교란하는 낯선 신체들』, 현실문화, 2017[2004], 105~113쪽.
[51] 켄지 요시노, 김현경·한빛나 옮김, 『커버링 : 민권을 파괴하는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폭력』, 민음사, 2017[2006], 85, 126~127, 269~270쪽.
[52] 김영옥·류은숙, 『돌봄과 인권 : 돌봄으로 새로 쓴 인권의 문법』, 코난북스, 2022, 201~202쪽.
[53] 사라 아메드, 시우 옮김, 『감정의 문화정치 : 감정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오월의봄, 2023[2004], 355~356쪽.
[54] Alexander Cho, “Queerness, Race, and Affect on ‘Peak Tumble’ - a Eulogy”, Todd W. Reeser ed., Companion to Gender and Affect, Routledge, 2023, pp.269-271.
[55] 「한국에서 이반업소 운영하기 : “이반업소 운영” 뚜껑을 열고 보면 이런 것들이 있다」, 『보릿자루』 9, 보릿자루 편집부, 1999.7.1, 7쪽.
[56] 「짝짓기 문화? 인격문화?」, 『보릿자루』 18, 2000.6.1, 29~30쪽.
[57] 「편집 마무리」, 『보릿자루』 9, 보릿자루 편집부, 1999.7.1, 53쪽.
[58] 「Interview : 지퍼의 김사장님」, 『Dyke』 1, 대학동성애자인권연합, 1998.3.14, 4면.
[59] 친구사이, 「‘친구사이’와 한국의 게이 인권운동」, 『진보평론』 49, 진보평론 편집부, 2011.9, 74쪽.
[60] 「지보이스 뮤직캠프 기획포럼 : ‘연대와 연애하자’ 녹취록」, 『친구사이 소식지』 94, 2018.4.
[61] 터울, 「시간 사이의 터울 #5 : 운동도 예술도 아닌 어떤 해방감」, 『친구사이 소식지』 61, 2015.7.
[62] 김대현, 「근본 없는 즐거움」, 『세상과 은둔 사이 : 벽장 안팎에서 쓴 글들』, 오월의봄, 2021, 195~196쪽.
[63] 전혜은, 「벽장의 인식론」, 『퀴어 이론 산책하기』, 여이연, 2021, 326쪽.
[64] 켄지 요시노, 김현경·한빛나 옮김, 『커버링 : 민권을 파괴하는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폭력』, 민음사, 2017[2006], 81, 269~271쪽.
[65] 「친구사이는요!!」, 『친구사이 소식지』 14, 1997.2, 1쪽,
[66] 「집단적 커밍아웃 시작되다!」, 『친구사이 소식지』 1997.8, 1면.
[67] 「커버스토리 ‘서울학생인권조례 제정 10주년’ #3 : 서울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 연혁」, 『친구사이 소식지』 140, 2022.2.
[68] 코로나19 성소수자 긴급 대책본부, 『코로나19 성소수자 긴급 대책본부 활동백서』, 2020.12, 7쪽.
[69] 「차별금지/평등법 제정 촉구 비상시국회의 및 비상시국선언」, 『친구사이 소식지』 142, 2022.4 ; 「차별금지법 제정 쟁취를 위한 46일 농성&단식투쟁 마무리 집회」, 『친구사이 소식지』 143, 2022.5.
[70] 터울, 「시간 사이의 터울 #7 : 게이 커뮤니티 운동 약사, 1995~2000」, 『친구사이 소식지』 66, 2015.12.
[71] 캐슬린 린치·주디 월시, 「사랑, 돌봄, 연대 : 상품화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캐슬린 린치 외, 강순원 옮김, 『정동적 평등 : 누가 돌봄을 수행하는가』, 한울아카데미, 2016[2009], 64, 81쪽.
[72] 김대현, 「공감의 한계」, 『세상과 은둔 사이 : 벽장 안팎에서 쓴 글들』, 오월의봄, 2021, 70쪽.
[73] 이주란(문화평론가), 「Straight Eye for Queer Guys」, 『친구사이 10주년 기념행사 : 두번째 토론회 “게이들에게 말한다”』 자료집, 2004.4.11, 7쪽.
박재경
오랜만에 잘 읽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