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8월 |
---|
[칼럼]
딱, 1인분만 하고 싶어 #3
: 가족의 재구성
“난 니가 내 세상에서 그냥 사라졌으면 좋겠어.
안 그래도 힘든데, 대체 내가 왜 너까지 감당하면서 살아야 해?”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정말 그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꿈만 같다. 공개적인 커밍아웃 이후에도 아주 잠깐이지만 우리 가족이라는 한 덩어리로 잘 뭉쳐져 있었다. 그것이 물방울이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까지도 동그랗게 뭉쳐있는 현상인 줄도 모르고. 동생들의 결혼 적령기가 점차 다가옴에 따라 그 이전과 이후의 가족은 너무나도 달랐다. 적어도 우리 가족에게는, 내가 게이라는 사실이 단순히 나를 인정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게이”인 가족과 어떻게 한국이라는 사회 속에서 같이 살아가느냐의 문제였거든.
“내가 오빠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어떻게 오빠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어릴 적 우리 가족은 부모님의 잦은 사업 실패로 지하 주차장에서 나무판으로 판잣집을 만들고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며 살았던 적이 있다. 물론 그 이후로도 수많은 이사를 했고, 그 사이 부모님의 직장/업은 계속해서 바뀌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 흔한 동네 친구도 없었던 나와 여동생은 연년생의 특성상 어쩌면 서로가 가장 가까운 친구였고, 없는 살림에 비디오방에서 ‘유리가면’을 빌려보며 어린 시절 추억을 쌓았다.
그랬던 여동생이 20대 초반 나의 커밍아웃을 아주 흔쾌히 받아들여 줬을 때, 정말 날아갈 듯 기뻤다. 행정상으로는 5인 가족이었지만, 삼남매 중 막내는 일찍이 미국으로 떠나 자리를 잡고 살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4인 가족 중에서 오랜 시간 친구처럼 지냈던 여동생이 응원해준 커밍아웃이었기에 세상을 얻은 듯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라는 존재는 그녀가 느끼는 수많은 두려움 중 하나로 변질되었다.
여동생과 멀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녀의 나이가 한국 사회 내 결혼 적령기에 들어선 이후였다. 그녀는 결혼을 잘하고 싶었다. 흔히 말하는 “적당히 있는 집안에, 서울에 집이 있고, 안정적인 수입원을 지닌, 1~2살 연상의 기독교 남자”, 그녀가 내세운 조건이었다. 어느 날이었을까? 소개팅을 하고 온 여동생이 가족 모임에서 그런 말을 하더라. “오빠, 내가 소개팅한 남자한테 오빠 얘기를 좀 했거든? 근데, 그 사람이 검색해보더니 오빠 게이냐고 묻더라... 놀랐어.” 그날 이후로 그녀에게 나라는 존재는, 아니 나라는 존재를 좋아했던 그녀의 마음은 그녀가 행복해지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서울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었던 그녀는 약점이 참 싫었다. 부모의 가난함이 싫었고, 서울에 집도 가족도 없는 본인의 삶이 증오스러웠다. 그래서 그녀는 포장했다.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본인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약점이 없는 척, 나아가 누구보다 따뜻하고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딸의 모습을 하고 싶었단다. 그렇게 약점이 싫었던 동생에게 점차 나라는 '게이'인 오빠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다.
“너는 왜 그렇게 착한 아들인 척했어? 니 가면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내가 스스로 게이임을 어렴풋하게라도 깨닫고 이 사실을 가족에게 숨기려 노력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곰곰이 돌이켜보면 아마 고등학생 때 PMP에서 들킨 MSM 야동이 그 시작이었겠지? 모든 것을 가족에게 의지하고 있었던 때, 아무도 내 삶을 함부로 흔들 수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 가족 안에서 나름대로 완벽한 아들을 수행하고자 했다. 아니, 연기라는 표현이 더 맞을까. 학원 하나 제대로 보낼 수 없었는데도 친구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입학 장학생 아들, 상처 많았던 부모님의 자존심을 세워줄 국가고시를 준비하는 아들, 언제나 따뜻하게 부모님에게 전화하며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착한 아들.
독립하기 전까지만, 경제적으로 자유로워지기 전까지만 이 노릇을 계속하면 될 거라고 쉽게 생각했다. 난 배우가 아닌데, 내 삶은 극장이 아닌데.. 그렇게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아들’이라는 이미지에 스스로 갇혀 벌벌 떨었던 감정은 결국 부모에게 커밍아웃하는 순간 직전에 극대화되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주변 사람들은 ‘부모님이 커밍아웃을 받아들여 준 참 운 좋은 아이’ 정도라 여기고 있지만,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커밍아웃 전 그날 밤의 내 모습을 친구들은 기억하고 있더라고. “혹시라도, 나 내일부터 연락이 안 되면 꼭 기자들한테 제보해줘. 아니 경찰에 신고라도 해줘. 어떤 기도원에 들어가 있을지 몰라, 꼭 구하러 와줘야 해.”
한편, 이런 오빠 밑에서 살아가는 여동생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참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더라고. 겨우 한 살 차이 나는 주제에 너무 쉽다는 듯 서울살이를 해내는 오빠 밑에서, 내가 앞으로 볼 가족은 엄마 아빠지 동생인 너희들이 아니라고 차갑게 말하는 오빠에게서, 혼자서 착한 아들인 척은 다 해놓고 갑자기 커밍아웃하고 인생의 모든 걸 확 바꾸는 오빠라는 사람한테서. 그렇게 나라는 사람에게 질릴 대로 질린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임계점이 지난 이후로는 나를 긍정하는 우리 가족 모두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모두 다 가식적이라고,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줄 모른다고.
“오빠는 장남이라서 이제까지 모든 사랑을 독차지했으면서,
왜 이젠 게이라고 가장 약한 존재까지 되는 건데? 나는?”
결국 바닥에 떨어져 버린 물방울은 마치 언제는 뭉쳐있었냐는 듯 흩뿌려졌다. 자식 간의 갈등은 결국 부모의 갈등으로까지 이어졌고,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서로의 아픔을 쑤시고, 상처를 주는 말을 반복했다. 왜 이제와서 아이들이 비뚤어졌는지, 잘 뭉쳐있는 줄만 알았던 가족이 왜 흩어졌는지, 지금 이 갈등에 돌파구가 있긴 한 건지, 모든 것이 너무 갑작스러웠던 부모님은 과거 본인들이 그들의 가족에게 받았던 상처와 이로 인해 외로웠던 그 간의 삶이 노후까지 이어질 것 같다며 미래를 비관했다. 말 그대도 우리가 당연하다고 알고 있었던 그 가족은 아주 쉽게 무너졌다.
한동안 명절은 우리 가족에게 지옥 그 자체였다. 아니, 서로가 마주 보는 모든 날이 끔찍할 지경이었다. 여동생은 내가 없을 때는 괜찮다가도, 나와 함께 부모님을 보는 날이면 PTSD가 온 듯 온갖 독설을 뿜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이 사태의 근원이었던 나에겐 참 여러 가지 역할이 주어졌다. 아버지는 나에게 말했다. “넌 이제 동생에게 존재하지 않는 오빠로 살아가라, 결혼식도, 가족 행사도 절대 함께 참석하지 마라, 그래야 모두가 살 수 있다.” 어머니는 나에게 말했다. “그래도 어떻게 동생들을, 가족을 버릴 수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넓은 마음으로 챙겨야지.”, 여동생은 나에게 말했다. “오빠가 내 결혼을, 내 인생을 다 망쳤어. 속죄하는 마음으로 평생 숨어서 살아 너 같은 건.”
폭풍 같던 세월이 지나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던 '가족끼리 평안한 명절'은 올해 설날에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그 사이,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오랜 갈등 끝에 우리 가족은 각자가 꿈꿨던 이상적인 가족을 내려놓고, 어설프지만 눈앞에 있는 가족에게 서서히 집중하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본인들을 외롭게 했던 과거의 상처를 없애려 노력하기보다는, 이를 인정하고 눈앞에 있는 가족을 어떻게 보듬어 나갈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와 동생은 각자가 꿈꿨던 새로운 삶에 대해 집착하기보다는, 앞으로 우리가 이 끔찍한 가족과 어떻게 살아갈지를 곰곰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물론 정답은 없겠지, 잠시 휴전인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당장 이번 추석이 걱정되는 건 나뿐만은 아닐 테니까.
“오빠, 어쩌면 우린 어렸을 때 그 많은 불행을 얻어맞아서
세상사 무서운 게 없는 건 아닐까?”
날 가장 먼저 받아들여 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가장 힘들어하는 여동생. 그녀와는 여전히 어렵지만 비교적 최근부터 마치 어릴 적 그 순간으로 돌아간 듯, 서울에서 각자가 겪는 삶을 허심탄회하게 나누기 시작했다.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라는 어쩌면 그 허울뿐인 말에 휩쓸려, 고향을 떠나 이 도시 서울에서 겪은 수 많은 이야기들. 눈 뜨고 코 베이는 곳이 서울이라는 걸, 서울은 사람을 잡아먹는 곳이라는 걸, 대학 진학을 이유로 상경한 후 10여년 간 서울에서 지냈던 각자의 삶은 30살이 훌쩍 넘어버린 우리에게 새로운 공감대로 다가왔다. 내가 서울에서 외로울 때마다 의지할 남자를 찾았듯, 그녀 역시 서울에서 외로울 때마다 하염없이 걸어 골반 연골이 다 닳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마음 한켠에 저 친구의 메마른 마음을 적셔줄 남자가 나타나길 진심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어느 드라마에나 나올 듯 보기에 썩 멀끔하기보다는, 이미 바닥에 흩어진 물방울을 휴지로 다시 엉기성기 모아놓는 모습에 가깝다고나 할까. 그렇게 나라는 사람이 우리 가족에게 받아들여지는 과정은, 나아가 우리 가족이 서로 안에서 새로운 역할을 찾아 자리잡아나가는 과정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이제와서 털어놓자면 “게이”인 가족과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는 문제는 어떻게 보면 ‘게이’인 당사자가 본인의 커밍아웃을 털어놓는 문제보다도, '게이'인 당사자가 본인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하는 문제보다도 지난하고 버겁다는 걸, 커밍아웃할 당시 나는 고민하지 못했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 어이없게도 나에게 그러한 고민이 '남의 일'이었 듯, 마찬가지로 우리 가족에게 내가 게이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남의 일'이었는데도 말이지.
누군가 나에게 가족한테 커밍아웃한 사실을 후회하냐라고 물어본다면? 글쎄.. 그래도 이 힘들었던 과정 끝에 우리 가족은 서로의 고민과 아픔을 깊게 나눌 수 있었다고, 이전의 가족과는 모양새도 느낌도 전혀 다르지만 우리 나름대로는 '가족'의 모습을 새롭게 만들어나가고 있다고 대답해주고 싶다. 굳이 겪지 않아도 괜찮겠지만, 해볼만한 가치는 분명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