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3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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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남들 사이의 터울 #4
: 약자의 위치
언젠가 극우로 커밍아웃한 시이나 링고가 2020 도쿄올림픽 개막식 총감독을 맡고, 개막식 레퍼런스를 <아키라>(1988)에서 따온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정치 성향과는 별개로 그래도 감이 죽지 않은 여자란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코로나 때문에 올림픽이 1년 미뤄지고 링고의 총감독 사퇴와 더불어 그 모든 원안이 엎어졌단 소리를 들었을 때, 아쉬운 건 둘째치고 한편으로 그 결정이 이해가 안되는 것도 아니었다.
올림픽이 중지되는 내용이 스토리에 포함된, 일본의 인문사회적 성취의 절정을 담은 애니메이션 작품을 따와 골계를 추구하는 개막식을 준비했는데, 그 올림픽 일정 연기가 무려 실제로 일어나게 되었으니 올림픽 조직위 입장에선 부정탔다는 생각이 안 들기 어려웠을 거다. 물론 그렇게 해서 선택된 개막식의 내용이 가장 협소한 형태의 일본 정체성 정치로 협착된 것은, 많은 논자들이 말했듯이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20세기 한국인의 국민정서였던 반일·반미가 얼핏 듣기에 구릴 수는 있어도, 지금까지 갱신되고 그에 걸맞는 현장을 창출 중인 제국·식민 위계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형형히 빛난다. 특히 피식민국의 입장에서 점차 제국의 입장으로 엉덩이를 옮기고 있는 한국이기에, 그 문제의식은 오늘날에도 더없이 중요하다. 따라서 한국에 허다한 국민정서의 반일 중 상당수는 '반제'로 읽는 것이 타당하고, 나아가 그렇게 번역되어 실천되는 편이 마땅하다.
이 모든 걸 고려한 상태에서 반일감정에 대해 성찰했을 때, 내 귀에 가장 설득력있게 들렸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일본 내 여러 담론 지형을 고려하지 않고 덮어놓고 까는 반일 여론이, 정작 일본 내 지한파와 진보진영의 입지를 줄이는 식으로 작용할 때가 잦다는 것이었다. 종종 평화헌법 수호의 의지를 밝히는 일본 내 진보 인사들의 소식에는, 거의 반드시 혐한들의 혐오 댓글이 달린다. 소위 '일제'에 두드려맞는 건 한국인만이 아닌 것이다.
제국주의 팽창 전략과 식민 통치와 그에 수반된 갖가지 폭력을 전혀 미화하고 싶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사고를 크게 쳐본 국가의 일부 국민들이 도달하게 되는 어떤 성찰의 경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힘에 대한 메타적인 비평은 내가 그 힘을 구사하는 권력자, 또는 가해자의 입장이 되었을 때를 가정한 정치적·윤리적 판단의 지분까지를 포함한다. 사람이 살면서 제국주의를 할 필요는 전혀 없지만, 사람이 살면서 힘을 갖게 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적지 않다. 그 때 어떻게 처신하는가는 아주 중요하다.
나는 언제까지고 힘이 없는 약자란 인식은, 그것이 일부 사실에 근거한다 할지라도 종종 중독적이고 손쉽게 재생산된다. 그것의 가장 큰 문제는, 실제로 그 사람이 어떤 힘을 가졌을 때 그것을 제대로 건사하고 윤리적으로 발휘하는 능력을 체계적으로 빼앗는 데에 있다. 그런 인식은 결정적인 순간에 필요하게 될 능력과 고려해야 할 감각의 함양을 가로막는다. 힘이 없을 때 쌓은 능력과 교양과 연대가 그저 힘없음으로만 수식되게 만드는 것은, 그 경험와 시간과 내용을 가장 그릇된 방식으로 정리하는 길일 것이다.
역사 속의 많은 변절들은, 그런 입장의 뒤바뀜 가운데 자기 언행의 연속성을 종적으로 연결짓는 데 실패한 까닭에 촉발된다. 그러니 한때 내가 어떤 올바른 생각과 아름다운 말과 행동을 했는가의 여부는 긴 인생에서 의외로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만약 힘이 없었을 때에 그렇게 했다면, 당신에게 힘이 생겼을 때에도 그것을 유지하거나, 그러지 못했으면 적어도 스스로에게 그 단절과 연속을 타당하게 설득할 수 있겠는지의 여부가 좀더 중요하다. 사람의 진면목은 보통 힘이 없을 때가 아니라 힘이 있을 때 보다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 이 글을 쓰는 데 다음의 글들을 참고했다.
아미아 스리니바산, 김수민 옮김, 「섹스, 투옥주의, 자본주의」, 『섹스할 권리』, 창비, 2022[2021].
후지이 다케시, 「명복을 빌지 마라」, 『무명의 말들』, 포도밭,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