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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호][커버스토리 '서울학생인권조례 제정 10주년' #2] 박재경님·이종걸님 인터뷰 - 2. 성소수자 인권운동 최초의 점거농성
2022-03-02 오전 10:2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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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2월 

 

[커버스토리 '서울학생인권조례 제정 10주년' #2] 

박재경님·이종걸님 인터뷰

- 2. 성소수자 인권운동 최초의 점거농성

 

 

1. 2010년 이전 친구사이의 청소년 성소수자 관련 사업 : 청소년 동성애자 인권학교, 교사지침서
2. 2010~2012년 친구사이 대표의 늦은 게이커뮤니티 데뷔와 청소년 성소수자에 대한 관심
3. 2010~2012년 친구사이의 청소년 성소수자 관련 사업 : 포토보이스, 무지개 도서 보내기
4. 2010년 이전 친구사이의 연대사업 : 인권단체연석회의, 성전환자 공동연대, 반차별공동행동
5. 2010년 친구사이의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 서울본부 합류 및 성별 정체성 차별금지조항 조례안 포함 
6. 2010~2011년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 서울본부의 조례안 주민발의 서명운동 
7. 2011년 9월 8일 학생인권조례 성소수자 공동행동 조직
8. 2011년 11월 15일 학교 내 성적소수자 차별 사례 모음집 발간
9. 2010년 청소년 사회적 욕구조사 공약과 2014년의 한국 LGBTI 사회적 욕구조사 발간

10. 2011년 9~10월 서울학생인권조례 및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트위터·페이스북·게이 어플 캠페인
11. 2011년 9월 19일 친구사이의 온라인 캠페인 <내 새끼 구출 작전!(Saving my Gayby)>
12. 2011년 12월 14~19일 학생인권조례 성소수자 공동행동의 서울시의회 점거농성
13. 2011년 12월 17일 점거농성장에서 개최된 친구사이 송년회
14. 2011년 서울시의회 내 민주당/민주통합당 의원들에 대한 성소수자 인권운동 측의 복마전
15. 서울학생인권조례에서 성소수자 관련 조항을 지키는 과정에서의 운동 내부의 복마전
16. 2011년 12월 19일 서울학생인권조례 서울시의회 통과와 승리의 경험, 그 이후의 과제
17. 친구사이의 청소년 관련 사업에 대한 회고와 전망
18. 2011~2012년 표현의 자유를 위한 연대 활동과 2019년 서울학생인권조례 성소수자 혐오표현 금지조항 합헌 결정
19. 2010~2012년 청소년 인권운동 및 성소수자 인권운동에 대한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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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2012년 친구사이 상근간사, 2011~현재 친구사이 사무국장 이종걸님 (2022.2.9)

 

 

 

10. 2011년 9~10월 서울학생인권조례 및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트위터·페이스북·게이 어플 캠페인

 

 

터울 : 서울학생인권조례안이 서울시의회에 계류 중이던 2011년 9월~12월에 친구사이는 올바른 조례 제정 및 조례안 서울시의회 통과를 위해 편지쓰기, 긴급번개 등 다양한 캠페인을 벌였는데요. 특히 9월 28일부터 10월 5일까지는 트위터, 페이스북을 비롯, 게이 어플인 4종을 대상으로 유저 프로필 사진 바꾸기 캠페인을 벌인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게이커뮤니티의 SNS와 게이 어플을 통한 인권운동 캠페인은 이 때 거의 최초로, 선구적으로 시도된 면이 없지 않은 것 같은데요. 

 

박재경 : 저같은 경우는 게이 어플을 해본 적이 없어서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당시 운영위원 중에 게이 어플을 하는 분들이 계셨어요. 그러면 그 어플을 통해 사람들에게 이슈를 알리면 좋겠다, 해보자, 어려운 것도 아니지 않느냐-라고 해서 착수하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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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캠페인 : 성소수자에게 인권을!」, 2011.9.28.

 

 

 

터울 : 이 때가 아이폰 보급되고 난 다음에 Grindr랑 Jack'd가 처음 쫙 퍼졌을 때였었죠?

 

이종걸 : 제가 스마트폰을 처음 썼던 게 2011년 11월이었어요. 그 때 이 활동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스마트폰을 쓰기 시작했던 게 있어요. (웃음) 

 

터울 : 아 그래요? (웃음)

 

이종걸 : 물론 그 외 다양한 이유도 있어서 자연스레 넘어가게 됐는데, (웃음) 그 전에 썼던 핸드폰이 LG 터치폰이었는데, 그 때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카카오톡이나 사진 어플을 사용하기 시작하던 때였어요. 그리고 그 때 많이 쓰기 시작했던 게 SNS였고, 거기에 데이팅 어플도 포함돼 있었던 거죠. 이게 당시로서는 커뮤니티의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고 있으니까, 커뮤니티에 직접 접근하기 위해서는 이런 것에 접근하는 게 현실적으로 필요하겠다, 그렇게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당시에는 트위터가 페이스북보다 더 SNS로 활발히 사용되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정보의 전파가 빠르니까. 

 

터울 : 그렇죠, 그 때만 해도. 

 

이종걸 : 네, 그런 확장성이 더 있었던 것 같고. 그래서 그 때 당시에는 그게 사람들에게 핫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렇게 캠페인을 진행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트위터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캠페인이 어느 정도 전파되었던 것 같은데, 게이 어플의 경우는 이 어플을 사용하는 친구사이 회원 중심으로 캠페인이 진행되고, 외부적으로 잘 전파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도 우리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이걸 재미있어하겠다, 그런 걸 노리는 게 중요하겠다고 느낀 계기가 되었어요.

 

그리고 아무래도 커뮤니티가 이런 걸 많이 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 우리 활동을 알리자는 욕구도 강했던 것 같아요. 이 부분은 지금 친구사이 회원들 가운데에도 그런 욕구가 강하기도 한데, 이런 활동을 하고 있다는 걸 알리고자 하는 욕구가 크거든요. 게이커뮤니티가 우리가 하는 활동을 알았으면 좋겠고, 그걸 커뮤니티가 인정해줬으면 좋겠다는 요구가 강한 것 같은데, 그 때도 아마도 그런 욕구가 연결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때 SNS나 게이 어플 등에서 썼던 캠페인 문구가, 당시에 우리가 워크샵을 갔을 때 무지개 비빔밥을 만들어서 먹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 사진을 활용해서 프로필을 만들고, "작업환영"이라는 문구를 걸고는 내용에 "성소수자에게 인권을"이라는 표현을 쓰는 형식이었어요. 그런 게 커뮤니티와의 연결감을 높이는 방법이라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그랬을 때 사람들이 이게 뭔지 눌러보게 하고, 그 안에 학생인권조례와 차별금지법을 같이 이야기하는 내용을 넣었던 거죠. 학생인권조례만으로는 사람들의 관심이 적을 수 있고, 당시에 차별금지법 이슈도 있으니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 차별금지조항이 누락되고 있는 부분을 같이 알리기 좋았던 것 같고요. 

 

그리고 당시 종로3차 포차골목에 현수막을 걸었는데, 그 때 걸었던 문구가 "성소수자를 모욕하지 않는 차별금지법과 서울시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해 우리 모두 힘을 모읍시다!"였어요. 이런 걸 같이 진행한 것도 그 때가 시작이었던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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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활동기상청 활기, 『파란만장 :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백서(2006~2012) - 3권,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경기도·서울)』, 2013.

 

 

 

 

 

11. 2011년 9월 19일 친구사이의 온라인 캠페인 <내 새끼 구출 작전!(Saving my Gayby)>

 

 

터울 : 다음으로 불편한 얘기를 좀 하게 될 것 같은데요. 이 시기에 친구사이가 진행했던 캠페인 중에, 9월 19일 서울학생인권조례 교육청안에 항의하는 긴급 온라인 캠페인 <내 새끼 구출작전!(Saving my Gayby>이 당시 청소년 당사자들에게 비판을 받았다고 들었어요. 게이커뮤니티 안에서는 당사자간의 비어 사용이 익숙하고 그게 그 나름의 당사자성의 맥락 위에 있는 거신데, 그런 맥락을 알지 못하는 청소년에겐 그냥 비어로 들리게 되고, 나아가 청소년에 대한 시혜적인 표현이라는 문제도 있었고요. 이런 부분들이 성소수자든 아니든 청소년 당사자들을 만날 때 친구사이가 맞닥뜨리게 되었던 경험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되거든요. 

 

이종걸 : 그건 뒷풀이 때 처음 나온 아이디어였어요. 본드네였던 것 같은데, 당시 친구사이 상근간사였던 지나님이 "아 그거 조금 위험한 것 같다"고 얘기해주셨는데, 그때는 그런가 하면서도 캠페인은 결국 그 문안으로 갔었던 것 같아요. 이런 게 사실은 그 때 우리한테 청소년 인권운동의 맥락에 대한 인지가 부족했던 증거죠. 본의가 그렇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확실히 그렇게 읽힐 수 있는 부분이 있었고. 그리고 당시 친구사이에 '언니주의'가 강하다고 생각하는 여론도 있었어요. 그것 때문에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단체에 접근하기가 어렵다, 여기는 성인 단체같다, 그런 이미지가 있었죠. 

 

터울 : 청소년 인권운동에서 연령 권력이 굉장히 중요한 의제이다보니, 

 

이종걸 : 네, 그래서 사실은 내부에서도 이건 아닌 것 같다고 판단하고 뒤늦게 수정했던 것 같아요. 

 

터울 : 그 때도 '언니주의'라는 말이 있었나요?

 

이종걸 : 우리가 직접 썼다기보다는, 외부에서 친구사이를 가리키며 그런 게 있다고 지적하고는 했었죠. 

 

터울 : 제가 2012년 연말에 친구사이 들어올 때도 들어봤던 말이거든요. 그 말이 이 바닥이 아니면 들을 일이 없는 말이잖아요.

 

이종걸 : 맞아요. 우리 쪽 아니면 그 말을 잘 안쓰니까. 

 

터울 : 그리고 게이커뮤니티는 워낙에 서로 비어를 많이 쓰니까요, 거기에는 그 나름의 당사자성과 지역성과 문화의 역사성이 있고요.

 

 

 

 

한국의 게이 게토가 자리한 종로·이태원은 공교롭게도 성매매집결지가 함께 존재해온 곳이다. 이렇게 장소가 겹치는 것은 단순한 우연 이상의 의미를 갖는데, 실제로 게이커뮤니티의 다양한 문화적 전승에서 성매매 여성을 유비하는 관습과 어휘들이 발견된다. 가령 오늘날의 게이 및 트랜스젠더 여성을 비하해 부르던 말인 ‘보갈’은, 성매매 여성을 가리키는 비칭인 ‘갈보’를 뒤집은 것이다. […] 이는 곧 ‘보갈’과 ‘갈보’가 서로 유사한 낙인을 공유하였고, 그들이 모여들던 종태원에는 ‘그럴 만한 인간들이 모여들던 곳’이라는 현장성이 부여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내준다. 더불어 게이커뮤니티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대개 “팔렸다”, “안팔려서 슬프다”, “오늘 장사가 안된다”는 등의, 성매매 여성이 쓸 법할 말들을 습관처럼 사용하는데, 이는 실제 성매매를 뜻하는 ‘팔림’이 아니라 게이와의 만남에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의 여부를 가리킨다. 이렇게 자신의 섹슈얼리티 표현이 천박하면 천박할수록 환영받는 문화 또한 수사로서 이해되는 성매매 여성의 그것을 닮았다. […] 

 

따라서 게이는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비규범적)여성성의 당사자들이다. […] 이 대목에서 그동안 숱하게 받아왔던, “게이가 서로 ‘년’이라고 해도 되나요?”라는 질문에 내 나름의 답을 하고자 한다. 그 게이가 남성의 입장을 넘어 스스로 여성성 수행의 당사자임을 인지하고, 게이커뮤니티의 문화에 밴 여성성의 맥락을 알고 사용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여성성은 이성애자 여성만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핵심은 퀴어가 여혐 단어를 사용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퀴어 당사자가 스스로 처한 문화의 젠더·섹슈얼리티적 함의를 알고 그에 맞는 정치의식을 가지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있다.

 

- 김대현, 「게이와 페미니즘」, 『문화/과학』 104, 문화과학사, 2020, 146~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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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급 : "내 새끼 구출작전" - 9월 19일입니다」, 2011.9.19.

 

 

 

박재경 : 그래서 그런 제목이 나왔을 때 우리는 되게 좋아했었는데, 그게 배너로 뜨는 순간 종걸이한테 연락이 많이 갔던 것 같아요. 너네 좀 심했다, 이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난 처음에 그랬어요. 왜 아니지? 난 좋기만 한데, 직관적이고 좋은데, 막 이랬었는데. 나중에 청소년이 볼 때 이게 정말 불편했던 지점이 있었다고 했고, 그걸 들었을 때도 처음에는 의아했죠. 그 정도까지 인권 감수성이 아직 크지는 않아서 의아했었는데, 비판했던 내용들을 자세히 논의해보니까 그렇게 지적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나중에 들었어요. 

 

그 때는 약간 그런 거였어요. 친구사이가 이 캠페인 제목이 보여질 때, 리스크 체크를 안한 거긴 하지만, 우리가 같이 정기모임을 하면서 종로3가에 있는 게이바에 캠페인을 하러 가는 거야, 그런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이 캠페인 제목이 온라인 상에 보여지기 때문에 되게 많은 대중들이 볼 것이고, 여기에는 되게 많은 이해관계자가 있을 것인데, 우리는 그냥 좁은 시야를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커뮤니티의 범주를, 우리가 게이바에서 성인들에게 서명을 받는 식으로만 생각했던 거죠. 더 다양한 대중에게 노출될 거라는 생각을 안했던 것 같아요.

 

터울 : 사실은 종로·이태원에서 게이들끼리 왜 서로를 가리켜 '년'이라든지 비어를 써도 되는지에 대해서 바깥 사람에게 조리있게 설명하려면 의외로 많은 품이 들거든요. 그리고 그 맥락을 모르면 그냥 혐오발언처럼 해석될 수 있으니까요. 그런 식의 조우의 과정을 이 때도 겪으셨던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이런 과정 자체가 어쩌면 당연히 수반되게 되는 것 같기도 해요. 가령 어떤 운동 그룹에서 성소수자 이슈에 대해 하나도 모른다고 했을 때, 그분들이 우리에게 말실수를 한다든지의 경우가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단체간의 연대라든지 확장성이라든지 교차성이라는 게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서로를 확인하면서 서로의 이슈에 어떤 게 있는지 학습하고, 그게 왜 중요한지를 서로 배우고 잘못을 깨닫고 고치는 일련의 과정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닌가 싶어요. 

 

박재경 : 어쨌든 나는 그 제목이 좋았어요, (웃음) 그리고 그게 최소한 게이커뮤니티의 감각에는 맞았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우리 커뮤니티를 보호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우리한테는 있었다고 생각하니까.

 

터울 : 딱 그 말씀이 와닿네요. 종로에 나가서 캠페인을 할 때를 생각하고 그런 워딩을 사용했었다는 것. 그곳에서의 맥락에서만큼은 그 말이 일정한 의미가 있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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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의회 의원회관 로비 점거농성 (2011.12.17, 사진 : 차돌바우)

 

 

 


12. 2011년 12월 14~19일 학생인권조례 성소수자 공동행동의 서울시의회 점거농성

 

 

터울 : 점거농성 이야기로 넘어갈 게요. 12월 16일 서울시의회 교육위원회의 서울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안 심의에 앞서 2011년 12월 14일 학생인권조례 성소수자 공동행동이 주최해서 서울시의회 점거농성에 돌입했고, 여기에 서울본부가 지지성명을 냈었죠. 이 때가 어떤 의미에서는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에서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빛을 발한 정점이지 않을까란 생각이 드는데요. 이 때의 기억을 좀 회고해주시죠.

 

박재경 : 점거농성 때 마님이랑, 당시 친구사이 상근간사였던 이성애자 여성인 지나씨가 큰일을 했더라고요. 두분이서 이성애자 부부 행세를 했어요. 점거농성 당시 서울시의회 의원회관에 투입될 때. (웃음) 부부가 견학온 것처럼 이렇게 가서, 물꼬를 열었더라고요. 부부인 것처럼 가니까 거기 사람들이 신경을 안썼는데, 들어가자마자 '깔아!' 그렇게 해서 농성장을 깔고,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터울 : 이 얘기도 처음 듣네요. (웃음) 

 

박재경 : 그렇게 보이지 않는, 운동으로만 기억되지 않는 조그만 활동들, 사람들이 조금씩 했던 움직임들이 꽤 있는 것 같아요. 누군가는 기억하고 누군가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터울 : 오늘 인터뷰가 그런 걸 기록화할 수 있는 작업이 됐으면 좋겠네요. 

 

박재경 : 난 이상한 것만 기억하는 것 같아요. (웃음)

 

터울 : 이상하다기보단 그것도 중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웃음) 그럼 이 때 성소수자 공동행동 외에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 서울본부 차원에서 형은 어떤 활동을 하셨던 건가요?

 

박재경 : 그 시점에서 나는 특별히 연대체 회의 석상에 들어갈 일은 없어진 상태였죠. 내가 친구사이 대표하면서 했던 역할은 조례안을 발의할 때 성소수자 차별금지조항 등에 대해 제안하고, 서명운동을 최대한 조직하고, 그것이 유효 서명인수를 초과해서 주민발의의 요건을 충족했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정치인들에게 공이 넘어간 거잖아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운동본부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하거나 그런 건 없었고, 저도 그 때부터는 활동가라기보다 회원인데 그런 운동이 있으니까 지지하고 참여한다는 입장으로 있었던 거죠.

 

터울 : 그럼 이 때 점거농성장에는 언제 처음 가셨어요?

 

박재경 : 저는 항상 직장 끝나야 가니까 저녁에 가고. 일단 농성장이 꾸려졌다는 걸 듣고, 활동가들이 방문할 거라는 애기를 들었어요. 지금은 현장에 방문할 수 있는 활동가들이 많겠지만, 그 때는 그렇게 활동가들이 많지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마님이나 지나씨가 투입된 거죠. 나서서 싸울 수 있는 깡다구도 우리에겐 사실 많지 않았고. 그래서 어쨌든 하자고 하고, 새로운 일이었고, 마님도 그런 걸 되게, 연기를 잘하거든. (웃음) 그래서 가게 된 거죠.

 

터울 : 점거농성에 참가하신 게 그 때가 처음 아니셨어요? 

 

박재경 : 그 때가 처음이었죠.

 

터울 : 어떠셨어요? 점거농성을 처음 갔을 때의 기분이?

 

박재경 : 일단 그 때는 이 조례안이 꼭 통과가 되어야 하는데, 첨예하게 대립된 상황이었잖아요. 그 때 당시에 서울시의회에 민주당 의원이 많이 있었고, 그래서 처음에는 그래도 조금 희망섞인 관측들이 있었고. 열심히 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이종걸 : 그리고 막상 주말 끼고 하니까 사람들이 농성장에 계속 왔었어요. 성소수자들이 이렇게 점거농성을 한 것 자체도 처음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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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의회 의원회관 앞 촛불문화제 (2011.12.17, 사진 : 차돌바우)

 

 

 

사실 농성에 돌입할 때 우리가 이걸 어떻게 진행하면 좋을까, 농성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이런 걸 논의했었는데, 그 때 성소수자 공동행동의 타리나 일란 등과 같이 얘기하면서 당시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박경석 대표 등과 의견을 나누면서 도움받은 부분이 있었어요. 거기가 실내이긴 했지만, 일단 농성을 하려면 농성 물품이 필요하잖아요, 깔개나 침낭이나. 그게 사실 우리한텐 없는 물품이었거든요. 이런 건 기존에 싸워본 사람들이 농성 물품도 갖고 있는 거라서, 그런 점에서 우리가 도움을 많이 받았죠. 그리고 점거농성은 어떻게 철수하느냐가 중요한데, 그 때 아무래도 조례 관련 심의 기한이 일주일 가량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결단하기 쉬웠던 것도 있었던 것 같아요. 

 

터울 : 출구 전략이 있어서, 

 

이종걸 : 네, 출구 전략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한 일주일 보고 농성에 돌입했는데, 막상 그렇게 초반에 우리도 도움을 많이 요청하면서 시작했던 이 싸움이, 주말을 끼면서부터는 정말 다양한 시민사회 단체들이 많이 방문해주셨고, 특히 그 다음 주에 있었던 서울시의회의 의사 절차 등의 과정 때는 사람들이 정말 싸움에 집중해있었던 것 같아요. 그게 너무 좋았던 것 같고, 사람들이 예전에 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렇게 연대를 와주고 지지를 보여주는 것, 그리고 저녁마다 문화제도 열렸고요.

 

박재경 : 좀 특이한 점거농성이었던 것 같아요. 매일 공연하고, 농성의 프로그램들이 계속 만들어지고.

 

이종걸 : 그럴 때 친구사이 사람들은 현장에서 뭔가 더 보여주려고, 농성을 하니까 먹는 것도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음식을 많이 해갔어요. 실제로 농성장에 있는 활동가들의 파트너들이, 음식을 내가 더 맛있는 걸 해갈 거야, 뭐 이런 식으로, (웃음) 파트너 없으면 서러워서 살겠니, 이런 느낌으로, (웃음) 

 

박재경 : 활동가분들 애인들이 잘 보이려고 닭죽 끓여오고, 맛있는 음식 해오고, 과자 사오고, 음식이 쌓여 있어서 살찌는 농성을 한다면서 다들, (웃음) 먹을 게 너무 많다고. 그리고 거기서 밤새면서 활동가들이 24시간 돌아가면서 상주하고, 직장인들 중에 일 끝나고 와서 같이 밤에 주무시는 분도 계셨고, 지키느라고. 

 

이종걸 :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농성에 힘을 보탰죠. 사람들이 정말 이 싸움에 발벗고 나서는 느낌? 그런 식으로 몰입을 많이 했었던 순간이었어요. 이렇게 운동이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고, 그렇게 우리가 각계와 연결되어서 투쟁을 해봤던 경험, 그리고 거기에 이렇게 또 많은 사람들이 연대해주는 경험은 그 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터울 : 점거농성장 무대에 올라간 분들은 지보이스 외에 어떤 공연자분이 계셨나요?

 

박재경 :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인력풀에 한계가 있다보니 지보이스가 계속 공연을 하기도 했었고, 이반지하님도 생각나네요. 

 

터울 : 저는 2014년 서울시청 농성 때 이반지하님 무대를 처음 보았는데, 2011년 농성 당시에도 이반지하님이 오셨었군요. 지금은 베스트셀러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2021)의 작가이자 더 유명한 예술가가 되셨죠. 

 

이종걸 : 이반지하가 점거농성 문화제 때 처음 등장했을 때, "저런 사람이 있어?" 이런 반응이 있었죠. 이반지하가 그 전에도 공연을 하긴 했었지만, 농성장 안에 있던 많은 사람들 중에 이반지하를 처음 보는 사람은 아, 저렇게 싸우는 사람이 있구나-하는 눈으로 봤을 거예요.

 

터울 : 퀴어운동의 뉘앙스가 당시 운동진영에서 다소 신선하다는 느낌을 주었던 면이 있었군요. 뭔가 노는 것 같고 무겁지 않게 가져가는, 좀 새 시대의 운동같은 느낌. '너네들은 이렇게 싸우네?' 같은.

 

박재경 : 그리고 인권운동사랑방의 활동가 미류님도 무대하셨어요. 한영애 노래 부르셨었는데. 

 

터울 : 아, 그 분이 노래를 하셨어요 거기서?

 

박재경 : 노래 잘하세요. 분위기 있어요. (웃음) 머리를 그 때 빡빡 미셨었는데, 멋있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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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반지하,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 문학동네, 2021.

 

 

 

 


13. 2011년 12월 17일 점거농성장에서 개최된 친구사이 송년회

 

 

터울 : 그 해 친구사이가 2011년 12월 17일에 열린 송년회의 2부를 서울시의회 앞의 촛불문화제로 대체했었다고 들었는데요.

 

이종걸 : 친구사이가 이 때 송년회를 어떻게 할까 고민을 했는데, 우리는 항상 매년 연말에 문화제 형식의 송년회를 진행하죠. 보통 이 때가 지보이스 공연이 끝난지 한두달 되는 때고, 그 때 항상 대표쇼(대표의 드랙쇼) 같은 걸 하고 그랬었는데, 2011년 말이면 그해 대표가 재경이형이었으니까, 대표께서 좀더 이 시기에 우리의 활동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셨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서울시의회 농성장 앞에서 친구사이 회원들끼리만 송년회를 하기도 그랬고, 그렇게 그곳 사람들과 같이 현장에서 행사를 해보자는 기획을 하게 된 거죠. 

 

점거농성 당시에 문화제는 보통 서울시의회 안에서 했었는데, 그날은 너무 추운 날이었지만 그래도 실외에서 진행하기로 했는데, 서울시의회 앞에서 우리의 주장과 의지를 알리기 위한 목적이었죠. 그렇게 당일 저녁 야간 문화제를 개최하기로 하고, 그 기획을 친구사이가 하겠다고 농성장 측에 제안했던 거죠. 그 때 마침 무지개인권상 수상자도 결정되었어서, 그 시상식도 그 자리에서 같이 했었어요. 그 해의 수상자가 아마 공익인권법재단의 장서연 변호사였을 거예요. 

 

박재경 : 그런데 막상 우리가 공연했던 거리는 사람들이 많이 안 다니는 외곽쪽이어서 아쉬웠어요. 더구나 야간인데. (웃음) 그런데 한편으로 그 자리에서 송년회를 했을 때 친구사이 회원들, 특히 청소년 회원들이 왔었는데, 그 회원들 중 일부는 불만을 표하기도 했어요. 그 회원들은 일단 그런 집회하는 장소에 자신을 데려갔던 게 불만이었고, 지나가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아우팅을 당하는 것처럼 느꼈던 경우도 있더라고요, 나중에 들어보니. 그래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친구들도 있었고.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거기 있던 활동가들은, 맨날 발언하고 구호 외치던 데서 풍악이 나오고, 그렇게 춤을 추고 있으니까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재밌었어요 그 때. 지보이스 팀들이 그때 정기공연했던 레파토리를 갖고 공연한 거기 때문에.

 

이종걸 : 문화제 공연 중에 지보이스가 레이디 가가의 <Poker Face>를 공연했었어요.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재경이형이 레이디 가가의 공연 의상으로 분장해서 무대에 섰었거든요. 상체가 드러난 블랙 미니 드레스를 입었어요. 그날 정말 추운 날이었는데, 그래도 그걸 꿋꿋이 입고 현장에서 무대에 서고 행진을 하는 문화제를 진행했었죠. 

 

박재경 : 치마 밑으로 바람이 너무 많이 들어와 얼어죽는 줄 알았거든. (웃음) 떠올려보니 다 기억나네요. 그 때 왔던 종길이도 기억나고, 호미도 기억나고. 

그 때까지 제 입장에서는 집회가 항상 몇몇 말 잘하는 분들, 목소리가 큰 분들이 조리있게 말하고 구호 외치고, '투쟁!'하고 이끌고, 꼭 그런 것만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축제처럼 하는 것, 나 스스로 즐거운 어떤 것들을 하는 걸 통해서 밝은 분위기, 뜨거운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그런 것도 재밌는 운동이 되겠다, 그런 영감을 받을 수 있었어요. 좀 재밌으면 좋겠다 모든 것들이,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 「필독 : 친구사이 송년회 시간이 변경되었습니다」, 2011.12.15.

 

 

 

 

터울 : 아까도 얘기 나왔지만 성소수자 활동가들은 활동가이면서 일반인인, 그런 게 묘하게 섞여있는 느낌이 있잖아요. 그런 데서 나오는 독특한 문화인 것 같아요. 운동을 위한 목적 지향적인 부분도 있지만, 일상을 사는 사람의 입장에서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는, 

 

박재경 : 네, 그런 게 재밌어요. 

 

이종걸 : 이게 차별금지법이나 학생인권조례 법제정, 제도 개선과 관련된 싸움이기는 하지만, 결국 우리가 하는 행동들은 우리의 퀴어함을 더욱 드러내는 방식으로 싸울 수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문화제가 가능하려면,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 기존에 갖고 있는 컨텐츠가 있어야 되는 건데, 급박하게 진행되는 농성이었지만 그래도 이 시기에 우리가 집중해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 바탕으로, 이런 방식으로 그곳에 가서 우리의 힘을 보여주고, 우리가 하고 싶은 활동을 보여주자, 그런 의지가 그렇게 연결되었던 것 같아요. 

 

터울 : 그림이 예뻤을 것 같은 게, 거기에 있는 다른 분들에게는 그 자리에서 성소수자를 목격한다는 가시화의 측면도 있겠지만, 더욱이 실내가 아니라 실외라면, 성소수자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어쨌든 집단적 커밍아웃의 의미도 있었던 거잖아요. 거기엔 일정한 결단이 필요한 것이고요. 

 

이종걸 : 네, 맞아요. 그래서 그런 문화제를 통해서 그런 의미들이 보여지는 것이 중요했던 것 같아요.

 

터울 : 성소수자 단체가 실외에서 그렇게 공연하는 것이 그 때 당시에 흔한 일이었을까요? 

 

이종걸 : 쉽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 때 장소가 무슨 공연장이 아니라 맨 바닥에서 했던 거였기 때문에.

 

터울 : 한진중공업 조선소 정리해고 사건 관련해서 꾸려졌던 희망버스 공연이 그 해에 있었던 일이었죠?

 

이종걸 : 그렇죠, 희망버스가 그 해 7월이었어요. 그것과도 관련이 있겠네요. 2차 희망버스 때 우리가 처음 갔었고, 그 때 지보이스가 1박하면서 공연을 했던 경험이 있죠. 

 

터울 : 어떤 의미에서는 운동판에, 게이커뮤니티에 이렇게 운동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대외에 알릴 만한 굉장히 중요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종걸 :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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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친구사이 송년회, 서울시의회 의원회관 앞 (2011.12.17, 사진 : 차돌바우)

 

 

 

터울 : 앞서 송년회 무대에서의 드랙에 대한 내용이 나왔는데요. 재경이형은 이 때 점거농성 참가하시면서 어린 시절이 생각나셨다고 들었는데요. 

 

박재경 : 어쨌든 청소년 인권 관련한 내용들을 집중적으로 접하다보니까, 성명서부터 시작해서 피해사례모음집까지 계속 그 이슈에 노출되다보니까 아무래도 청소년 시기 때 성정체성을 심각하게 고민했던 기억이라든가, 그런 것들이 조금 더 감정적으로 생각이 많이 났던 것 같아요. 그리고 나같은 경험을 덜했으면 좋겠다는 어떤, 아주 기본적인 입장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것들 때문에 옛날 생각들이 그 때 당시에 많이 났었죠.

 

터울 : 청소년 때 겪으셨던 게, 가령 성소수자 정체성에 대한 거부이셨을까요? 구체적으로 여쭤본 적은 없는 것 같아서요. 

 

박재경 : 나는 처음에 스스로를 트랜스젠더라고 생각했어요. (웃음) 지금도 스스로 완벽한 게이는 아닌 것 같지만. 

 

터울 : 네, 성별 비순응이 형의 중요한 정체성 중 하나라고 알고 있었는데요.

 

박재경 : 어쨌든 내가 남자를 성적으로 끌려한다는 걸 수용하기 되게 힘들어했던 것 같아요. 그걸 합리화하기 위해서 트랜스젠더라고 생각했다가, 

 

터울 : 아, 남자가 끌린다면 나는 여자여야 하겠구나-라는 맥락이었군요.

 

박재경 : 네, 그랬다가 그게 좀 없어지고, 그냥 게이로 나를 수용하는 과정이 있었는데, 그런데 지금도 사실은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나, 무엇을 판단할 때는 여성으로서 나를 먼저 인식하고, 그 다음에 남성으로서 나를 바꾸는 경향이 있어요. 변신을 하는 거죠. 

 

터울 : 그래서 친구사이에서 게이인권운동단체라고는 하지만 회원 중에 게이만 있는 건 아니다-와 더불어, 게이 정체성 안에서도 다양한 여성성의 경험이 있다는 것들을, 단체가 적극적으로 의미화하는 전통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전통에 형의 존재와 활동도 있는 것 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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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의회 의원회관 로비 점거농성 (2011.12.17, 사진 : 차돌바우)

 

 

 


14. 2011년 서울시의회 내 민주당/민주통합당 의원들에 대한 성소수자 인권운동 측의 복마전

 

 

터울 : 그 때 당시의 정국이, 서울시의회 내에 민주당(12월 16일 민주통합당으로 당명 변경) 시의원이 다수여서 민주당이 당론으로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채택하면 바로 통과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던 거라고 들었거든요.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 우리가 여러 이슈에 대해 더불어민주당 정권과 끊임없이 길항하는 구도가 이 때도 이어졌던 것 같거든요. 실은 2007년 열린우리당이 여당이었을 때의 차별금지법 정국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고요. 민주정권에서 소수자 인권 의제의 우선순위가 계속 뒤로 빠지는 상황 속에서 여러 비감함을 느끼셨을 텐데요. 이 부분에 대해 잠깐 회고해주시면,

 

이종걸 : 그 때부터 민주당에 대한 활동가의 경험을 통해서, 민주당은 인권 이슈에 대해 믿을 구석이 크지 않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 뭐랄까, 이 사람들은 운동의 가치나 방향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들의 기득권과 정치 권력을 계속 수성하려는 욕구가 더 강하지 않겠냐, 적어도 민주당 당 조직은. 그렇게 봤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사실 그 때 이 조례안을 계속 책임지고 갔었던 김형태 의원이나, 윤명화 의원 등의 경우는 서울시의회 교육위원회에서 조례를 통과시키려고 노력하셨던 분들이에요. 김형태 전 의원은 전교조 교사 출신으로 서울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안을 함께 만든 분이시기도 하고. 그리고 윤명화 의원도 중랑구 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던 의원이었는데, 그 이후로 교육위원회 안에서 더 활동을 하시게 되면서 학생인권조례가 잘 실행될 수 있도록 초반에 일정한 역할들을 하셨었어요. 이 두 분이 가장 중요하게 조례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셨던 핵심이었고, 따라서 이 사람이 흔들리면 안되는 상황이었던 거죠. 사실 이렇게 구심점 역할을 할 누군가가 있고 이분들을 지지할 정치 세력이 필요한 건데, 정작 민주당이 당 차원에서 그들을 지지하고 힘을 보탰느냐, 그렇지는 않았던 거죠, 현실적으로. 그나마 이 두 의원을 통해서 교육위원회 안의 민주당 소속 의원 몇몇을 설득하는 과정 속에서 조례 통과의 조건이 겨우 만들어졌던 것 같고. 이건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 서울본부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그걸 계속 설득해왔던 과정이었을 거예요. 

 

터울 : 정리하면 당 조직 차원에서는 믿을 수가 없는데, 그 안에 있는 사람들 몇몇이 밀알처럼 활동하고 계셨던 거군요. 

 

이종걸 : 네, 그런 몇몇의 사람이 있어야 가능한 거죠. 이번에 차별금지법을 발의한 것도, 사실 의원들 중 누군가 발의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어야 당론과 국회 내 여론이 움직일 수 있는 건데, 기존의 차별금지법 정국에서도 민주당 내에 그럴 만한 사람이 별로 안보이는 거죠.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고요. 민주당 의원들 중에는 나름 진보적인 시민사회 활동을 통해서 들어간 사람들이 있고, 예를 들어 故 박원순이 대표적으로 그런 사람인 거죠. 인권변호사를 한 사람이고, 거기에 시민사회의 운동적 조건을 자기가 만들어온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그가 2014년 서울시민인권헌장 정국 때 동성애 혐오발언과 더불어 헌장 제정에 큰 의지를 보이지 않은 것처럼, 정말로 공익인권 활동을 하는 사람들 외에는 성소수자 인권 이슈를 관철해나가려고 하는 사람이 제도권 정치 내에서, 특히 민주당 내에서는 잘 안보인다는 거죠.

 

터울 : 그래도 한편으로는 학생인권조례 제정 과정에서, 경기도 교육감의 김상곤과 서울시 교육감의 곽노현 등 직선제로 당선된 진보교육감들의 의지가 크긴 했던 것 같거든요. 

 

이종걸 : 네, 그래서 기본적으로 조례는, 물론 조례 제정 과정에서 시의회 통과가 수반되어야 하기는 하지만, 학생인권조례나 서울시 인권기본조례 등은 조례를 만들고 그것을 실행하는 과정에 있어서 선출직 공무원, 가령 시장이나 교육감의 뜻이 강력하게 있어야 되는 것 같아요. 단순히 선언적 의미가 강한 조례를 제정한 것만으로 자기 소임을 다 했다고 생각하면 안되는 거죠. 물론 한국에서 성소수자 차별금지에 대한 법적 근거의 토대가 빈약하다보니까 그런 조례의 전거가 생기는 것도 의미가 있게 되는 것이지만, 결국 조례를 제정하고 그 내용적 가치를 실현시키는 것은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소신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 같아요. 서울학생인권조례의 예에서도 그렇듯이 내용이 좋다 하더라도 만들기 전에 보수 세력에게서 욕을 먹는 상황이 생기고, 내용에 문제가 있을 경우 외부적으로 보수·진보 양측 모두에게서 공격을 받을 가능성도 높아지는 거겠고요.

 



 

 

 

학생인권조례 관련 대응이, 사실 성소수자 운동의 주도로 시작된 점거이긴 하지만, 학생인권조례 자체가 성소수자들이 판을 깔고 시작했던, 주도했던 운동은 아니었어서, 긴장이 항상 있었던 것 같아요. 이 6일 동안에 정말 많은 눈물과 고뇌와 이런 것들이 있었는데, 왜냐하면 사실 운동이 도전받았던 농성이기도 하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입법운동에서 우리가 사실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이라고 하는 차별금지사유를 포함시키고 지켜내는 것 외에도, (이)운동에 얼마나 많은 과제들이 있는지를 깨닫는 계기이기도 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왜냐하면 학생인권조례라고 하는 판 자체가, 이슈 자체가 청소년 인권, 그 다음에 교육권이라고 하는 부분, 두발의 자유와 집회·시위의 자유를 포함한 청소년 인권운동, 그리고 주민발의를 통해 올라온 지역운동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운동이라는 것, 이런 상황에서 성소수자 이슈로 우리가 농성을 결정하고 진행하긴 했지만, 이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는 이 입법 운동이라고 하는 것 자체에는 우리가 함께 고려하면서 배우고 연대하고 만들어가야 할 것들이 굉장히 많은 사안이었던 거죠. 

 

그런 상황에서 이런 기억도 나요.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학교에서 차별당하고 폭력에 노출될 수 있을 때 우리가 구해줘야 된다는 어떤 구호를 써서, 슬로건을 써서 홍보를 했었는데, 이게 청소년 성소수자 학생들에게 문제제기를 받기도 하고, 성인, 비청소년 LGBT들이 청소년 인권운동이나 학생인권운동에 대해서 더 깊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요. 

 

그리고 정말로 어떤 순간에는, 만약에 서울시의회 안에서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이 너무나 논란이기 때문에 이것을 떼고 통과시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었거든요. 아예 보류하거나, 부결되거나, 아니면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이 들어간 채로 제정이 되거나. 그런데 학생인권조례가 9만명의 주민발의를 통해서 올라간 안이잖아요. 이걸 정말 1~2년동안 눈, 비바람 맞으면서 9만명 서명을 받으러 다니면서, 학생인권조례라는 방식으로 실현시키기 위해서 애써왔던 청소년 인권운동, 학생인권운동이 있고, 그랬을 때 그 조례가 이 자리에서 부결되어서 통과되지 않았을 때, 성소수자 운동이 이 결과를 책임지거나 감당할 수 있는가, 이런 엄청난 고뇌에 싸였던 시기였던 것 같거든요. 

 

다행히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 차별금지사유가 포함된 학생인권조례가 통과가 됐지만, 그 이후에 사실 굉장히 많은 과제를 남겼던 것 같아요. 그것을 정리하고 고민하고 했던 과정들이 힘들긴 했지만, 지금 이렇게 우리가 연대라고 하는 이름으로 운동이 이만큼 확장되어 오고, 그리고 성소수자 이슈 안에서도 단순히 배제되지 않을 권리만 외치는 게 아니라 청소년 성소수자 인권부터 트랜스젠더, 성소수자 부모모임 등 이렇게까지 의제가 다양해지고 우리 고민이 스스로 깊어지는 결정적인 계기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권운동사랑방 몽님, 2021.12.16, 41:26~4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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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많은 지지와 연대 속에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운동이었지만, 학생인권조례안을 만들고 주민발의 서명을 받는 등 오랫동안 청소년 인권을 위해 싸워왔던 사람들과 서로 주목하는 부분이 조금씩 달라 성적 지향, 성별정체성이 차별 금지 사유에서 빠지면 조례를 폐기시켜야 한다는 주장과, 일부가 후퇴하더라도 학생인권조례를 통과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입장이 부딪혔던 상황들이 있었고, 성소수자 공동행동은 '청소년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이야기하며 운동을 해나갔지만 막상 청소년 성소수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을까는 계속 고민에 남는다. 

 

전반적인 청소년 인권의 보장과 그 속의 성소수자의 인권 보장 모두 필요하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지만 학생인권조례안을 만들고 주민발의를 추진했던, 성적지향이 빠지더라도 조례 통과를 기원하는 쪽을 택한 성소수자인 청소년 인권활동가가 있었고, 마찬가지로 청소년 성소수자인 나는 차별금지 사유가 수정되면 조례를 폐기시키자는 주장을 하게 된 상황은, 학생인권조례 서울본부에서 조례안을 작성할 때부터 성소수자 공동행동이 의회를 점거하기까지 학생인권조례 운동은 '(성소수자가 아닌)청소년'과 '(청소년이 아닌)성소수자'의 운동이었을 뿐 거기서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학생인권'과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중 한 가지만을 선택해야 되었다는 회의감을 안겨주었다.

 

- 쥬리(10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청소년 성소수자 운동,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 학생인권조례 성소수자 공동행동, 『평가토론회 : 학생인권조례활동, 성소수자 운동에 과제로 남기기』, 2012.3.22, 28~29쪽.

 

 

 

 

 

15. 서울학생인권조례에서 성소수자 관련 조항을 지키는 과정에서의 운동 내부의 복마전

 

 

터울 : 아픈 질문으로 넘어갈 텐데요.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이 굉장히 다양한 분야의 운동이 결합한 현장이었고,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 차별금지조항이 주목을 받는 과정에서 운동단체 입장에서 부담이 되었을 부분이 있었을 것 같거든요. 보수 언론이나 보수 개신교는 물론이고, 운동 내부에서도 성소수자 차별 관련 조항을 빼고 가면 안되냐는 목소리가 있었다는 증언이 복수의 자료를 통해 확인되는데요. 활동가로서 아주 비감한 순간이셨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럼에도 관련 조항들이 큰 누락 없이 통과되었던 것이 그만큼 굉장히 중요한 운동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고요. 그 때의 일을 좀 회고해주시죠.

 

이종걸 : 그 때가 농성 중 주말이었던 것 같아요. 앞으로 어떻게 싸울 것인가, 우리 안의 요구사항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를 성소수자 공동행동과 조례 제정운동 서울본부가 같이 논의하는 회의 자리였는데요. 우선 그간의 차별금지법 정국의 경험을 통해 공동행동 입장에서는 차별금지 사유와 관련해 차별금지 원칙을 지킨다는 목표가 내부적으로 명확했기 때문에, 성소수자를 포함한 차별금지 원칙을 바로세우는 것을 확고하게 밀고 나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마찬가지로 운동본부 내에서도 학생인권조례에서 차별금지 원칙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 자체는 인지하고 있었을 텐데, 사실 이 차별금지 사유에는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뿐만 아니라 임신·출산이나 두발 자유, 학생의 집회 자유 등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이고,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 측의 그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보는 입장이 되겠죠. 그럴 때 점거농성을 성소수자 공동행동이 먼저 들어갔고, 결국 성소수자 이슈가 부각된 상황에서 이것이 하도 논쟁이 되니까, 제정운동 서울본부와 성소수자 공동행동의 논의 테이블에서는 경우에 따라 지키기 어려울 수 있는 우선순위에서 아무래도 성소수자 이슈가 가장 어렵지 않겠나 하는 판단이 나왔을 때 우리는 많이 실망했었던 거죠.

 

그런데 한편으로 그런 서로의 입장차들을 모를 수는 없었던 것 같아요. 우리가 물론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에 친구사이가 참여하고 같이 만들어나가기는 했어도, 우리가 제정운동의 중심에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부분도 있었고, 또한 이 차별금지 원칙을 지키는 것이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에서 어느 정도 목표에 다다라 있는지에 대해 성소수자 공동행동과 제정운동 서울본부 안에서 온도차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로서는 성소수자 차별금지 원칙까지 포함되는 것을 목표로 들어온 농성이었기 때문에, 농성하는 입장에서는 그걸 끝까지 주요하게 외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어요.

 

터울 : 그 날 회의 끝나고 끊었던 담배를 오랜만에 피셨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이종걸 : 회의를 마치고 나서 성소수자 활동가들이 나와서 담배를 피는데, 거기에서 같이 담배를 피면서 그냥 그 답답함을 같이 나누고 싶었어요. 그 답답함을 어떻게라도 해소하고 싶었고. 사실 이후로도 이런 상황들은 저희가 계속 경험하게 되는데, 그런 상황을 경험했다 보니까 지금 차별금지법 발의안에서도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 차별금지조항 관련해서는 절대 물러설 수 없다고 나올 수가 있게 되는 거죠. 결국 이렇게 싸우다보면 지켜낼 수 있다는 걸 배웠고, 또 그 조항이 포함된 채로 법규가 제정되었다고 해서 무슨 크게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이런 것들을 확인하는 계기도 되었던 거죠. 

 

터울 : 이 문제에 대해 하나만 더 여쭤보면, 당시 서울시교육청 학생생활지도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한상희 교수가 계셨잖아요. 그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볼까 해요. 지금은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아주 듬직한 동반자가 되셨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운동단체들이 보기에는 긴가민가한 입장이셨던 것 같거든요. 9월 교육청 조례안이 발표될 때 자문위원회에 계시면서, 성소수자 차별금지조항을 빼고 갈지 말지 고민이 많다는 발언이라든지, 이걸 넣으려면 단체들의 힘이 많이 필요하다는 워딩 등, 어떤 의미에선 '민주당적' 스탠스를 취하셨던 정황도 있는데, 그 때의 기억을 좀 말씀해주세요.

 

이종걸 : 한상희 교수는 인권운동판 안에서 몇 안되는 헌법 전문 법학자이면서, 소수자 이슈에 대해 오피니언 리더로 활동하는 분인데, 2011년 조례 제정운동 당시에는 아까 말씀대로 우리가 실망하게 된 부분이 없지않아 있었죠. 그래도 어쨌든 설득해야 한다고는 생각했어요. 아무래도 조례 주민발의안 원안 통과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분이었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해서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이후로는 오히려 그분이 이 이슈에 대한 중요성을 확인하고 역할을 좀더 해주셨던 측면이 있어요. 서울시 인권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실 때도 성소수자 인권 관련 이슈를 적극적으로 이야기해주시거나, 최근에 HIV 감염인의 성적 권리를 침해하는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 제19조 전파매개행위 금지조항 위헌제청에 대해 의견서를 써주실 때도 되게 잘 써주셨거든요. 생각해보면 본인도 스스로 경험하면서 그런 것들을 배워나가신 것 아닌가 싶어요. 가령 학자적인 관점에서는 성소수자 인권옹호가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가지면서도,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풀어나가려고 할 때 정작 어떤 입장을 가질지는 사실 모르는 거잖아요. 거기서 그걸 어떻게 지켜나가느냐가 중요한데, 결국 그걸 지키는 게 맞다고 본인도 뒤늦게 생각하셨던 것 같고, 그런 과정 속에서 운동과 함께 성장해나간 것 아니었을까 싶어요.

 

터울 : 한상희 교수님은 그 이후로 성소수자 차별 관련해서 많은 논문을 쓰셨고, 중요한 전거가 되는 연구들을 많이 생산하셨는데, 그 전기가 된 사건 중 하나가 바로 이 때 당시의 운동이 아니었을까 생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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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상희, 「헌법의 눈으로 본 차별금지법 - 혐오표현의 문제와 함께」, 『민주법학』 74, 민주주의법학연구회, 2020.

 

 

 

 

 


16. 2011년 12월 19일 서울학생인권조례 서울시의회 통과와 승리의 경험, 그 이후의 과제

 

 

터울 : 서울학생인권조례는 2011년 12월 19일 서울시의회를 통과하여 2012년 1월 26일 공포됩니다. 주민발의안으로 통과된 최초의 학생인권조례라는 점에서 운동사회의 입장에서는 승리의 경험이라 볼 수 있을 텐데요. 시민단체들이 힘을 모아 연좌농성까지 해가면서 결국 성과를 따낸 경험이었는데, 이 때의 일을 지금 회고해보면 어떤 의미로 와닿으실까요?

 

박재경 : 너무 기뻤고, 내가 느끼기엔 긴 시간이었지만 상대적으로 단시간 내에 조례안이 통과되는 걸 처음 경험해본 것이었죠. 그리고 시민들이 법을 만든다는 것도 상상을 못해봤던 거였고. 그 때 어떤 모 당에서 나온 정치인이 그런 애기를 했어요. "왜 너네가 법을 만들어? 이건 국회에서 할 일이야. 시민단체나 시민들이 할 일이 아니야." 그런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나요.

 

터울 : 주민발의 조례청구제도가 1999년에 신설되었고, 지방의회에서 이렇게 주민발의로 조례를 만드는 일이 법제화된 지가 당시로서도 얼마 안된 일이었으니까요. 사례도 많이 없었고. 

 

박재경 : 네, 그런 경험이 낯설기도 했고, 그전까지는 우리가 법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나 스스로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법은 뭐 국회의원이나 판검사, 변호사들이 다루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걸 시민들이 할 수 있다는 것도 되게 생소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조례가 통과되면서 이것이 실제로 실천된다면 너무 좋을 것이고,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많은 반발에 부딪칠 것이기는 하나, 상징성은 있겠다, 그리고 여러 가지 것들에 영향을 주겠다, 이걸 근거로, 그런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전국에서 학생인권조례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런데 뒤에서 얘기 나오겠지만, 많은 경우 실패로 돌아가기도 했었죠. 

 

어쨌든 그런 걸 시도했던 사람이 있었고, 그 움직임이 뜨거웠기 때문에, 또 올바랐기 때문에 언론에 보도가 됐을 것인데, 그런 활동을 냈다는 것 자체가 특히 소수자들에게는 큰 위안이 되는 것 같아요. 성공과 실패의 느낌보다는, 누군가 그런 사람이 내 주변에 있고, 그런 세상을 향해서 움직이고 있다고 여길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내가 그런 운동을 하는 사람과 친하지 않더라도 '아,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어, 이 세상에' 라고 믿을 수 있는 어떤 메시지는 준 것 같아요.

 

터울 : 네, 말씀해주신 대로 굉장히 중요한 이정표가 됐죠.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을 반추하려고 이번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이종걸 : 우선 첫번째는, 성내서 싸우는 것이 왜 필요한지를 확인하고, 우리의 의제를 강하게 요구하면서 그 원칙을 지키는 것이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전반적인 진일보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함이라는 것, 이런 것들을 농성을 통해 처음 얻어낼 수 있었던 경험이었어요. 거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는 우리 활동에 대한 효능감이나, 스스로 믿고 있는 가치를 재확인받은 성과였기 때문에 큰 의미가 있었던 것 같아요. 싸워야 이긴다, 싸워서 우리 권리를 따낼 수 있다는 걸 확인한 계기이기도 했고요. 그리고 이 운동을 오랫동안 계획·진행해온 분들에게는 조례 제정·공포의 성과가 이 농성의 결과로만 요약되기 보다는, 몇년동안 진행되었던 운동의 과정과 그로 인한 역량의 축적이 점거농성의 국면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났다는 의미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점걱 농성을 좀더 우리가 재밌게 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했던 것도 중요한 지점인데, 특히 성소수자 인권운동은 그런 욕구가 더 강한 것 같아요. 너무 운동을 처절하게 가져가기보다는, 싸우더라도 뭔가 우리 스스로 신나게 싸우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고, 그런 방안을 실제로 만들어보고 싶은 사람들이 이 싸움을 통해 더 많이 늘어났던 것 같기도 해요.

 

터울 : 그게 독특한 성소수자의 당사자성인 것 같아요. 그런 게 그게 성소수자 커뮤니티 사람들에게는 친숙할 수 있지만, 다른 운동판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어떻게 비춰졌을지가 궁금하긴 하더라고요. 그걸 본 사람들이 현장에 있었을 테니까. 

 

이종걸 : 물론 그렇게 신나게 싸운다는 감각은 다른 운동 또한 다르지 않을 수 있거든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당사자들의 처절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운동적으로 효과적으로 보일 때가 있기도 하고, 운동 안에서 언어로서 활용되는 부분도 있는데,

 

터울 : 그런 게 필요없다고 할 수는 없겠죠. 상황에 따라 전략·전술상 필요할 수도 있겠죠.

 

이종걸 :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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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례만드는청소년, 『우리는 진 게 아니라 아직 못 이긴 거야 : 조례만드는청소년의 경남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 활동기록집』, 2019.

 

 

 

터울 : 그리고 한편으로 서울학생인권조례는 제정된 이후에도 많은 도전에 직면했고, 조례안 폐기 공청회가 열리기도 했었죠. 더불어 2011년 10월 28일 제정된 광주학생인권조례와 2013년 7월 12일 제정된 전북학생인권조례의 경우에는 성적 지향 차별금지조항이 들어갔지만[2022.3.15.수정], 경남학생인권조례나 부산학생인권조례는 제정 자체가 실패했고 부산의 경우는 최근에 조례안 심사가 거듭 보류된 바 있습니다. 이게 어떤 의미에서는 서울학생인권조례가 얼마나 어려운 조건 속에서 힘들게 얻어낸 성과였는지를 숙고하게 하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서울학생인권조례를 어떻게든 잘 지켜서 그 의미를 확장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아까 말씀해주셨듯이 해당 지역 선출직 공무원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과도 연결되어서, 이 때 서울학생인권조례 제정과 이후의 상황, 그와 관련된 청소년 인권 관련 이슈들을 보면서 어떤 걸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박재경 : 퀴어문화축제 하면 '종북 게이'란 말이 나오잖아요.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 할 때는 반대측의 주요 이슈는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 그리고 또 하나는 임신한 청소년, 이게 되게 중요한 화두였어요. 이거 어떡할 거냐, 학생으로서 이러면 되느냐, 등등의. 그러면서 그런 부분에 대한 인터뷰도 많이 하게 됐어요. 청소년 시기에 임신·출산을 경험한 분들, 그래서 힘겹지만 그 시간을 관통한 분들, 이런 얘기가 한편으로 나오기도 하고, 그랬던 시기인데.

 

청소년 이슈가 갖고 있는 힘이, 저는 그래서 청소년 인권활동가분들, 제정운동 서울본부 공동집행위원장이셨던 배경내 선생님이나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의 공현씨나, 어린이책시민연대 분들이나, 청소년 활동을 그 전부터 꾸준히 해왔고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 때도 꾸준히 하셨고 지금도 꾸준히 하고 계신 분들이 있는데요. 이분들이 되게 존경스럽고 훌륭하다는 생각이 드는 게 뭐냐면, 사회의 가장 약자들에 관련된 이슈들이 청소년에 다 녹아있더라고요, 보니까. 그 때 저도 처음에는 몰랐으나, 처음에는 그냥 이게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이게 되면 멋질 것 같다, 좋은 세상이 될 거야, 약간 이런 느낌으로 시작해서 그냥 서명받고 통과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다가, 이게 통과되기 전까지 또 여러 지난한 싸움을 해야 되는 상황이었는데, 

 

그러면서 청소년 관련 이슈에 대해 반대측의 주장들을 보면, 가장 약한 고리들을 건드리는 거잖아요. 그래서 청소년 이슈라는 게 우리 사회의 약한 고리였구나, 그리고 가령 성소수자의 인권이 개선되면 그 사회는 개방적이고 진보적일 것이라 생각하는데, 청소년 인권 이슈도 마찬가지로 이 문제가 많이 부각되고 개선되는 사회일수록 진보적인 사회라는 하나의 지표가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되게 많이 하게 됐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너무 열악했고, 지금도 열악하기 때문에. 청소년 문제를 그런 맥락에서 생각하게 됐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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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자(공교육살리기학부모연합), 「학생인권조례는 개정이 아니라 폐지되어야 한다」,

서울특별시교육청, 『서울 학생인권조례 개정안 토론 자료집』, 2014.1.10, 31쪽.  

 

* 서울시교육청은 2014년 1월 10일, 서울학생인권조례 제5조 제1항 차별금지조항의 "임신 또는 출산"을 삭제하고,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을 "개인 성향"으로, 제28조 제1항 소수자 학생 권리보장 조항의 "성소수자, 근로 학생"을 "북한이탈 학생, 근로학생, 학습부진학생, 미혼모"로 수정하는 개정안에 대한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에 서울학생인권조례 공포 2주년을 앞둔 1월 23일, 서울시의회 일부 의원들과 서울시교육청 학생인권위원회, 학생참여단은 조례 개정안 철회를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열었고, 무지개행동이 연명한 서울학생인권조례 개악시도 대책회의는 2014년 2월 13일 "인권을 휴지통에 버릴 것이냐! 서울학생인권조례 개악 시도는 중단되어야 한다"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서울시교육청은 2월 10일 조례 개정안을 시의회에 제출하였으나, 개정안은 서울시의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편집자 주)

 

 

 

 

이종걸 : 당시를 회고해보면, 서울은 아무래도 운동이 좀더 집중돼있는 지역이고, 논의도 빨리 되고 운동의 언어도 축적되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잘 대응할 수 있었던 측면이 있죠. 사실 혐오세력의 입장에서는 그냥 반대만 하면 되는 것이고, 그 반대가 반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 가지고 있는 낙인을 타고 그 반대의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현실이 있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그 낙인을 품은 사회를 바꾸고 변화를 이야기하는 목소리를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고, 심지어 우리 안에서도 그걸 말하기 어려운 조건이 있는 만큼, 이런 의미들이 운동 안에서 계속 섞이는 가운데 그것이 지역 내에 확장되어야 하는 어려운 과제가 놓여있는 것이죠.

 

2012년의 국면을 생각해보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각 시도 지역에 인권기본조례 제정을 권고하거든요. 그런 공고를 하게 되면 각 시도에서는 소위 생색내기용으로 관련 조례를 한번 만들어보는 움직임이 있게 되는데, 그럴 때 지방 의회에서 내실이 있는 조례를 만들기 위해 싸워나갈 의지가 있는 의원들이 있는 거냐, 기존의 운동이 겪어온 과정을 모르고 무턱대고 제정을 추진했다가는 자칫 혐오세력들에게 된서리를 맞게 되는 거죠. 정치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스스로 입장이 제대로 서 있지 않을 경우에. 또는 지역에서 이 운동을 같이 할 수 있는 기반이 열악하거나, 운동의 의미가 잘 환류되지 않는 조건들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가령 성소수자 차별금지원칙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걸 알고는 있더라도, 그걸 끝까지 밀어붙여서 싸울 수 있는 역량과 조건이 현실적으로 있을지는 각 지역의 상황이 다 달랐을 것 같아요. 

 

또한 지역에서의 조례 제정의 성패는 운동의 책임만으로 돌려질 수 없고 그 지역의 정치 지형이 어떠하느냐가 거기에 결부되게 되죠. 민주당 측이 이런 의제들을 자기들 생색내기 용으로 가져가느냐 내실있게 가져가느냐의 여부와도 연결되겠죠. 정의당·녹색당 등의 다른 진보정당 소속 의원들이 발의를 제기하는 경우와, 민주당 소속 의원이 제기했을 때 그 문제의식의 내실이 서로 달랐던 경우가 많고, 진보정당에서 그걸 당론으로 제기했을 때 민주당 당 조직이 과연 거기에 힘을 보탰는지, 그런 것 역시 지역과 상황마다 다르게 나타나겠죠. 아무튼 어려운 조건을 감안하고 해나가야 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그런 제반 조건을 잘 보시고 전략적으로 제정을 추진하는 게 좋지 않겠나는 생각이 들 때도 한편으로는 있어요. 운동사회의 조직적 역량도 분명 현실적으로 제한된 자원인 부분이 있으니까.

 

그리고 한편으로는 조례 제정이 안되었더라도 그 운동을 통해 그 나름의 성과를 잘 의미화하고 이후를 이어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면 그 정도로도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아요. 현재의 차별금지법 제정운동도 결국 그 지역에서 실질적인 반차별운동의 역량이 생성되면서 그것이 이후의 힘으로 이어질 수 있게 되듯이, 조례 제정과정 안에서도 그러한 역량이 만들어진다면 당장의 가시적 성과가 없더라도 그것만으로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터울 : 조례의 제정 이상으로 사회와 운동이 생성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아까 말씀하셨던 것 중에 인상깊었던 대목이 혐오와 낙인은 공기와 같아서, 혐오하기는 쉽고 그걸 세력화하기도 쉽지만 그것을 뚫고 조례 등 실질적인 운동적 성과를 만드는 데는 각별한 노력과 추진력이 필요하다는 현실, 그게 서울학생인권조례의 경우에는 공교롭게도 가능했었던 부분이 환기되었던 것 같네요. 참 말하고 나니 서글프긴 하네요, 좀 쉽게 되면 얼마나 좋으련만, 

 

이종걸 :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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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성애자인권연대, 「무지개 청소년 세이프 스페이스 모금 성공을 축하하는 파티」, 2014.9.26.
(현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


 

 

 

17. 친구사이의 청소년 관련 사업에 대한 회고와 전망

 

 

터울 : 서울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이 오늘날 성소수자 인권운동판에 중요한 이정표의 의미가 있다고 느끼는 게, 당시 동성애자인권연대(현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에서 추진했던 성소수자 부모모임의 문제의식과도 연결되고, 조례 제정을 계기로 만들어진 무지개청소년 세이프스페이스 운동이 현재의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의 원류가 되기도 하죠. 이런 흐름과 관련해서 이후 친구사이 내의 청소년 사업을 생각했을 때 드시는 소회가 있으실지 궁금해요.

 

이종걸 : 친구사이가 청소년 성소수자 사업을 만들 때 계속 고민한 건, 사업적으로는 만들 수 있는데 저는 항상 그 사업의 의미가 회원들에게 잘 환류될 수 있을까가 늘 걱정이었던 것 같아요. 

 

터울 : 제가 기억하기로, 2013년에 제가 처음 친구사이에 들어왔을 때는 정기모임 뒷풀이의 1차를 꼭 사무실에서 했었어요. 청소년들이 있을 수 있으므로 술집에 가면 안된다는 게 있었던 것 같고, 그것도 생각해보면 중요한 안배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은 그렇지 않잖아요. 정기모임에 청소년들이 오지 않는 상황이고, 사업의 객체로서만 존재하는 상황인데, 

 

이종걸 : 서두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청소년 참가자와 주류 판매 업장의 출입 문제에는 이런 논점이 있는 것 같아요. (서울)퀴어문화축제 애프터파티에서의 청소년 출입과 관련된 문제와도 연결되는데, 청소년 운동의 입장에서는 실질적인 사회적 조건과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운동에서만큼은 그걸 같이 고민해주면 좋지 않겠냐는 게 있는 것 같아요. 가령 미성년자 출입으로 신고의 위협에 직면하는 업주의 입장이 물론 있지만, 그런 판도 자체를 운동이 같이 바꿀 수 있는 언어를 우리도 함께 고민해볼 수 있지 않느냐, 이게 청소년 운동에서의 관점인 것 같거든요.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는 이 부분에 대해 사람들마다 날선 입장이 있을 수 있는 거죠. 어떻게 법을 지키지 말라고 하는 거냐,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고. 아마도 이런 불편함들은 저는 친구사이나 청소년 성소수자 운동 안에서 앞으로도 계속 지속되고 또 요구될 부분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운동이 어떤 법을 지키지 말자는 얘기를 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길 때, 거기에는 어떤 사회적인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비판해온 그간의 맥락이 십중팔구 깔려 있거든요. 그래서 운동 안에서 법을 반드시 지켜야 된다기보다는, 현재의 법에 일정한 문제가 존재했을 때 그런 것까지 포함해 사회를 바꾸어나가는 것이 운동의 한 목표이자 관점일 텐데, 

 

터울 : 준법투쟁의 방법이 있고 불법투쟁의 방법이 있는 거겠죠. 

 

이종걸 : 네, 최근에도 장애운동과 관련해서 게이커뮤니티 안에서 여러 논쟁이 있었던 것처럼. 하여튼 그러한 맥락들을 잘 아는 상태에서 논쟁을 하면 좋겠다, 저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운동이 왜 그런 전략전술을 취하는지의 이유나, 거기에 어떤 역사적 맥락이 있는지를 같이 공유하면서 대화를 풀어나가는 게 좋지 않겠냐,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고. 나아가 친구사이의 구성원들 모두가 과연 그에 대한 지식을 풍부하게 공유하고 있느냐, 거기에도 일정한 한계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은 들어요, 솔직히. 전체적으로 봤을 때. 

 

터울 : 친구사이와 청소년과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맥락도 있는 게, 종로·이태원에 터잡고 있는 커뮤니티 단체이다보니 그곳에 있는 커뮤니티가 업소 위주일 수밖에 없고 그 업소가 대부분은 술집이고, 그러다보니 성인 위주의 문화를 갖는 한계들도 분명히 있는 것 같기는 해요. 물론 청소년들도 여기 와서 술을 많이 먹기는 하지만, (웃음) 어쨌든 합법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이종걸 : 맞아요. 그것 자체가 우리가 놓여있는 현실인데, 한편으로 어떤 법적인 조치를 당장 받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조차 무언가를 얻기 위해, 가령 우리가 좀더 사회적으로 모범적인 모습을 보이기 위해 법을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합리화의 논리가 오랫동안 우리를 맴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과연 유효한가, 지금도 그러한가, 그런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어요. 우리의 권리를 어떻게 얻어낼 수 있을까에 대한 방법론의 문제인데, 과연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스스로 모범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가령 민주당에게 구걸하듯 해서 우리의 권리를 얻어낼 수 있는 거냐, 절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특히나 지금 대선 지형을 봤을 때 더더욱.

 

터울 : 네, 청소년은 술을 먹지 말고 건전해야 된다-는 주장의 배면에 있는 다양한 한계들에 대해 지적해주신 것 같네요. 그런 의미에서 이 시절의 청소년 운동을 회고했을 때 여러 모로 오늘날 생산적인 의미가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이 이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들었던 기억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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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2021 청소년 인권옹호행동 공모사업 "목소리를 내자", 청소년 성소수자 글쓰기 프로젝트 "퀴어잇다" 활동발표회」, 2021.11.13.

 

 


터울 : 재경이형은 지금 친구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는 청소년 사업에 대해 해주실 말씀이 있으실까요?

 

박재경 : 앞서 언급한 청소년 인권 이슈의 대의와 별개로, 단체의 입장과 사업의 측면에서 보면, 청소년 인권 활동을 하고 이런 캠페인을 하고 있을 때 단체의 가치와 의미에 공감해주시는 분들이 후원을 해주시겠다는 운영적인 측면도 제 개인적으로 강하게 갖고 있었어요. 그런 연장선상에서 청소년 사업을 할 때에 구체적인 활동에 참여하고 가치와 의미를 느끼고 함께 했던 팀원들과 멤버쉽을 느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편으로 그 사업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전제들을 단체의 의미나 단체 운영의 차원에서 숙고해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지금 진행 중인 친구사이의 청소년 사업에 대해 말하자면, 이건 지금 진행 중인 청소년 성소수자 관련 사업의 기획 단계에서 제가 활발히 참가했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이 사업의 대상이 되는 청소년 성소수자는 어디에 있느냐라고 했을 때, 친구사이나 단체에 소속된 청소년은 아니었던 거죠. 그 청소년들이 살고 있는 곳은 일반적인 지역 사회일 것이고, 이 사람들이 늘 친구사이에 올 수 있거나 한 건 아닐 거고, 각기 전국에 흩어져있는 사람들일 것이고, 또 그 나이대에 해야 될 고민들을 할 것이고, 성정체성 고민도 해야할 것이고, 그러면서 친구도 사귈 것이고, 나름대로 관계들을 만들어나갈 것인데,

 

그럼 이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좀 잘 살 수 있을까를 생각했을 때, 삶에 필요한 여러 고민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자기 주변에 진보적인 사람들,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들이 포진해있으면 든든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럼 그런 식으로 해보자, 학교나 지역 사회에 직접 들어가기가 사실 힘들잖아요. 지역활동하는 것도 힘들고, 더군다나 학교에 들어가는 것도 힘들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사업을 하기보다 스스로 청소년 사업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학교 안이든 밖이든 그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보자.

 

그런데 이제 우리 친구사이 경험을 통해서, 어떤 한 개인이 굉장히 역량이 뛰어나서 운동을 이끌고 가는 것은 옳지 않다, 그래서 사업은 팀으로 해야 한다 무조건. 그리고 팀원의 최소 인원은 3명으로 하자, 2명은 안된다, 왜냐하면 싸울 때 중재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 팀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조직하는 사업을 기획했어요. 그렇게 처음 기획해놓고 저는 빠지고 당시 상근간사 낙타가 실제 진행을 했었는데, 진행과정에서 그 기획을 실행하는 게 되게 어려웠었나봐요. 그래서 조금 쉽게 변형해서 지금 청소년 사업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실제로 의미있는 성과들이 많이 나왔던 것 같아요, 상상했던 것보다. 그런데 그 사업이 본래 그리고 있는 미래는 되게 원대한 거예요. 동아리가 저절로 만들어지게끔, 외국 문헌을 보면 게이-스트레이트 얼라이언스(GSA: Gay-Straight Alliance)라고 해서 학교 내 모임들이 많이 있거든요. 그걸 어떻게 하면 한국에 조직되게 할 수 있을까, 그런 걸 상상했던 거죠. 그럴 때 이러한 움직임이 있으면 되겠다라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그런 경험들이 모이고 모이면, 또 사업에 참여한 교사들도 보면 되게 열심히 하시더라고요. 그런 경험이 쌓이면 언젠가는 되겠다, 그리고 친구사이가 계속해서 그런 것들을 하는 조직이 되면 좋겠다는 큰 포부를 가지고 시작했던 사업이었죠.

 

그래서 한편으로 아쉬운 것은, 물론 사업 기획에 따른 성과도 나오고 있고 잘 진행되고 있는데, 사업이 원래 갖고 있던 꿈이, 게이-스트레이트 얼라이언스(GSA)가 학교와 지역 사회에 조직된다고 했을 때 그것이 갖고 있는 의미가 뭐냐, 그 밑에 깔려 있는 의미가 뭐냐, 이에 대한 고민을 좀더 해줬으면 하는 거예요. 그건 단순히 게이를 포함한 LGBT 인권이 올라가면 좋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는 거거든요. 성소수자 인권이 사회적으로 보장받는다는 것이 다른 청소년들과 만나면서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생산해내고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이냐 하는, 그 근간에 깔린 의미를 조금 더 사고해볼 필요가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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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민(오준수), 『겨울 허수아비도 사는 일에는 연습이 필요하다』, 도서출판성림, 1993.

 

 

 

터울 : 비성소수자와 성소수자가 구체적인 현장에서 만날 때 매번 다른 의미가 생기잖아요. 그 의미를 이론이나 이런 걸로 다 아우를 수가 없고, 매 현장과 매 상황이 다르고, 하지만 그것들 하나하나가 만들어지는 게 중요하고, 이런 단계에 있는 게 아닐까, 그 의미들이 모여 어떤 귀납적인 그림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박재경 : 그래서 조금 더 고민해줬으면 좋겠어요. 고민이 따르지 않으면 있던 사업의 재탕에 그치게 되니까요. 물론 있는 사업을 죽 이어가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는데, 거기서 조금 더 고민해보면 뭘 할 수 있을까가 새로 보이기 마련이니까요. 되게 멋있는 걸 해달라는 게 아니라, 조금 더 의미를 잘 만들어가고 그걸 서로 공유하고 스스로 고민하면서 조금씩 새끼를 쳐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겪는 한계도 있을 테지만요.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어요. 10년 전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 당시에는 성소수자가 피해자성으로 증명되는 것들에 대해 전혀 불편함이 없었거든요. 당연히 그게 통과되려면 이런 근거가 있어야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제 그간의 시간을 통과하고 나서는, 사업의 초점이 왜 항상 성소수자 개인이 겪는 피해의 발견과 재인식에만 모아지는가에 대한 어떤 불만과 한계를 느끼게 돼요. 물론 그건 여전히 중요한 출발이지만, 우리가 그 고민들을 적극적으로 케어하거나 집단 상담을 통해 개입하거나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무언가 다음 단계의 의미와 사업이 필요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돼요. 

 

터울 : 저도 글을 쓰고 글을 다루는 입장에서 비슷한 고민을 하게 되는 건 있어요. 사실 성소수자 자신의 글은 단체 발족 때부터, 실은 故 오준수 형의 수기집 『겨울허수아비도 사는 일에는 연습이 필요하다』(성림,1993) 때부터 이미 있어왔던 활동이잖아요. 거기서 세월이 지났으면 그만큼 더 업그레이드되거나 발전된 게 있으면 좋겠는데, 그게 과연 뭘까-가 저로서도 여전히 고민인 것 같아요. 그게 글을 쓰고 소식지를 하는 입장에서 늘 고민이고, 지금 이런 인터뷰도 실은 그런 고민 끝에 나름대로 뭔가를 더 날카롭게 갈아보려고 나온 것이긴 한데, (웃음) 여전히 성소수자가 스스로 글을 쓴다는 것 이상으로 2022년 지금 여기에 필요한 의미가 무어냐, 이런 게 너무나 필요한 고민이라는 지적을 해주신 것 같아요. 

 

 

 

 

 

차별적 언사나 행동, 혐오적 표현은 단순히 부정적인 의견이 아니라 표현내용 자체가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혐오·적대감을 담고 있는 것으로, 혐오의 대상이 특정되어 있어 그 자체로 상대방인 개인이나 소수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침해할 수 있다. 또한, 발화 즉시 표현의 상대방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 구성원에게 영향을 미치며, 이를 통해 적대감을 유발시키고 고취시킴으로써 특정집단의 가치를 부정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차별·혐오표현으로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될 경우 이는 회복되기 어려운 피해를 남기게 되므로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차별·혐오표현을 금지하는 것은 헌법상 인간의 존엄성 보장 측면에서 긴요하다. […]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여론의 자유로운 형성과 전달에 의하여 다수의견을 집약시켜 민주적 정치질서를 생성·유지시켜 나가야 하므로 표현의 자유는 중요한 헌법상 권리로서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표현행위는 표현행위자의 자아실현 및 민주사회의 다양성 보호와 관용의 증진, 대의민주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과 감시의 기능을 수행하는 중요한 행위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 조례 제5조 제3항에서 금지하는 차별·혐오표현은 의견의 자유로운 교환 범위에서 발생하는 다소 과장되고, 부분적으로 잘못된 표현으로 자유로운 토론과 성숙한 민주주의를 위하여 허용되는 의사표현이 아니고, 그 경계를 넘어 ‘타인의 인권을 침해’할 것을 인식하였거나 최소한 인식할 가능성이 있고, 또한 결과적으로 그러한 인권침해의 결과가 발생하는 표현이다. 따라서 이는 민주주의의 장에서 허용되는 한계를 넘는 것이므로 민주주의 의사형성의 보호를 위해서도 제한되는 것이 불가피하고, 특히 그것이 육체적·정신적으로 미성숙한 학생들이 구성원으로 있는 공간에서의 문제라면 표현의 자유로 얻어지는 가치와 인격권의 보호에 의하여 달성되는 가치를 비교형량할 때에도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통용되는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고 할 것이다.

 

- 헌법재판소 2019. 11. 28. 선고 2017헌마1356 전원재판부 결정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제3조 제1항 등 위헌확인] [헌공278, 1379]

 

 

 

 


18. 2011~2012년 표현의 자유를 위한 연대 활동과 2019년 서울학생인권조례 성소수자 혐오표현 금지조항 합헌 결정

 

 

터울 : 2019년 11월 28일 헌법재판소는 서울학생인권조례 제5조 제3항 성소수자 혐오표현 금지 조항에 대해 전원재판부 합헌 결정했지요. 그 때 상대편에서 내걸었던 주장은 '혐오표현도 표현의 자유다'라는 거였죠. 거기에 성소수자 혐오표현은 표현의 자유라 볼 수 없다는 것을 헌법기관이 법정책 차원에서 명백하게 명토박은 굉장히 중요한 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주장이 2011년에 친구사이가 연명했던 표현의 자유를 위한 연대에서 일찍이 주장되고 있었더라고요. 

 

2011년 4월 13일 친구사이는 '표현의 자유를 위한 연대' 발족 참여 제안 수락을 결정하고, 6월 21일 정식 출범된 표현의 자유를 위한 연대에 성소수자 단체로는 유일하게 친구사이가 참여하게 되는데요. 동 연대가 2012년 4월 21일 발간한 <표현의 자유를 위한 정책 제안>에서 표현의 자유와 더불어 '혐오표현 규제' 파트가 삽입될 때 친구사이가 공저자로 참여하기도 했지요. 그 때 표현의 자유를 위한 연대에 나가셨던 친구사이 측 대표가 그 때 당시 상근간사이셨던 지나님이잖아요. 이성애자 여성이셨는데, 이 분이 친구사이에 어떻게 오게 되셨는지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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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혁상 감독, <종로의 기적>(2011)

 

 

 

이종걸 : 지나님은 기호형이 상근직을 그만두게 되어서, 공개 모집을 통해 상근간사 근무를 시작하셨어요. 다큐멘터리 <종로의 기적>(2011)이 제작·개봉되었을 즈음에, <종로의 기적>을 만든 이혁상 감독의 친구분께서 친구사이 상근활동에 관심이 있다고 밝혀주셔서 그렇게 오셨던 분이 지나님이었어요. 그래서 면접을 통해서 상근간사 채용을 진행했죠. 이 분이 영화나 미디어에 관해 관심을 많이 가졌던 분이셨고, 그런 활동을 되게 좋아하셨어요. 그런 이슈와 관련해 글도 쓰시고 활동도 하시고, 그것이 표현의 자유 이슈와도 연결되어있어서, 그런 부분을 잘 정리해주셨던 것 같아요.

 

터울 : 지금 친구사이에 활동하는 회원들에게는 친구사이의 상근간사의 간사가 이성애자 여성이었던 사실도 흥미로울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우리가 게이라고 하지 않고 '게이커뮤니티의 일원'이라고 하는 것이, 정체성 기준이 아니라 그런 연결성들을 의식해서 쓰는 말이잖아요. 게이와 더불어 게이가 아닌 퀴어,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는 앨라이까지 포괄하는 개념으로. 그런 맥락으로 가령 이성애자 여성이 게이인권운동단체의 상근자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네요.

 

이종걸 : 맞아요. 그런 지점이 우리에게는 더 컸었던 것 같아요.

 

터울 : 그리고 한편으로 영화 운동이 그만큼 친구사이의 중요한 전통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종걸 : 말씀하신 대로 그런 영화 운동의 기반이 친구사이에 계속 있었기 때문에 그런 활동이 가능했던 거죠. (김조)광수형이나 희일이형이나, 기호형 같은 경우도 그렇고, 미디어와 관련해서 재주가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부분들이 잘 연결되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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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조광수 감독, <친구사이?>(2009). 이 표지는 15세 이상 청소년 관람가 등급으로 조정된 후 2014년 재개봉 당시 제작되었다. 

 

 

 

 

박재경 : 친구사이는 기본적으로, 목소리 큰 사람이 단체를 이끌고 간다고 밖에서 잘못 오해할 수도 있는데, 실은 회원들 중에 각자의 직업이든 재능이든 역량을 갖고 있는 분들이 단체에 참여했을 때, 사실은 성소수자 인권 이슈에 대해 다 이렇게 공감하는 측면들이 있잖아요. 그랬을 때 이런 부분을 조금 더 해보자, 이런 것에 기여하고 싶다, 서로간에 이런 부분을 내가 조금 더 도와주면 잘 되겠다, 그런 마음이 모여 사업이 진행되는 단체인 것 같아요. (김조)광수형의 <친구사이?>(2009) 영화도 그랬었고. 직접적인 인권운동은 아니지만 희일이형 영화 찍을 때도 회원들이 엑스트라로 많이 들어갔고. <후회하지 않아>(2006) 보면 친구사이 회원들 많이 나오잖아요. (웃음) 그런 것처럼 서로가 십시일반하는 문화가 있었고. 그리고 그런 이슈가 어떤 의미라는 걸 서로 공유하고, 그런 것들이 어떤 거창한 노력을 해야 되는 게 아니라 내가 조금 이정도 힘을 써주면 되겠다, 이런 맥락으로 회원들이 죽 참여해줬던 것 같아요. 

 

그리고 기호형은, 그 때 사무국장 맡으시면서 그 때도 친구사이에 연대단체가 많았고, 기호형도 그 실무 때문에 힘드셨을 텐데 어쨌든 이건 필요하다고 본인이 생각하셨기 때문에 놓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그리고 기호형이 그만두시고 상근간사가 바뀌었을 때 지나씨에게 연대체 관련 실무를 인수인계하셨던 것도, 이것이 꼭 필요한 활동이라고 본인이 느끼셔서였을 거예요. 그리고 지나도 영화 관련 글쓰는 일을 하고 영상 관련 일에 관심있었던 친구라서, 그런 연대활동을 하기에도 좋았을 거예요. 

 

터울 : 반차별공동행동의 2010년 쟁점포럼 중 8월 12일에 열린 '차별과 표현의 자유의 경계'에서, 기호형이 발제문 중 "성소수자 혐오/편견을 드러내는 글들과 성소수자들의 자기주장들"은 "사회적으로 같은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없다고 언급하신 걸 본 적이 있어요. 그걸 보면서 들었던 생각인데, 기호형 인터뷰를 예전에 퀴어영화 관련해서 죽 한 적이 있지만, 거기에 채 담기지 못한 기호형의 연대체 관련 활동들이 정말 많더라고요. 친구사이 형들, 언니들을 인터뷰 한다는 게, 한 분 한 분 해온 활동들이 너무 방대하다보니까, (웃음) 한 곳에 다 안 담기는 부분들이 있더라고요. 

 

박재경 : 아마 엄청나게 많을 거예요, 그분들은 정말 열심히 하셨어서. 난 사실 회원에서 대표하다 그냥 끝났으니까 대체로 단체에 관련된 것만 기억하는데, 그분들은 연대체 관련 일들, 그것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연들이 더 많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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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쁜이, 「우아한 호모포비아를 없애는 적극적 드러내기」,

반차별공동행동, 『올바른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쟁점포럼 3 : 차별과 '표현의 자유'의 경계』, 2010.8.12.  

 

 

 

 

터울 : 결국 친구사이가 갖고 있던 표현의 자유에 대한 문제의식이, 친구사이가 관계해오던 영화 운동에 대한 맥락과 연결되는 흐름이 있는 것 같거든요. 2009년 친구사이와 청년필름이 공동제작한 영화 <친구사이?>가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청소년 관람불가를 받았다가 긴 법정 투쟁 끝에 2013년 15세 관람가로 확정되는 일련의 활동이 있었죠. 물론 더 거슬러 올라가서는, 2000년대 초반 게이 사이트 '엑스존'의 청소년 입장불가 방침에 따른 저항의 흐름도 있었고요. 

 

이종걸 : 생각해보면 2000년대 중반 이후가, 영화나 케이블 등 미디어 상에서 성소수자가 등장하려는 분위기가 있었다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것이 사그라드는 흐름이 있었던 것 같아요. 특히 2010년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도 어떻게 보면 너무나 소위 '건전한' 형태의 온후한 커플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터울 : 그 때 '남자 며느리' 얘기가 처음 나왔죠. 

 

이종걸 : 네. 그렇게 존재를 드러내는 것만으로 문제가 되고 그것이 부정당해왔던 현실이 있었고, 더구나 영화 <친구사이?>는 누가 봐도 이게 19세 미만 관람불가일까 싶을 정도로 가벼운 묘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영등위가 그렇게 결정했기 때문에, 정말 이건 싸워서 이겨내야 했던 상황이었죠. 그리고 다행히 승소로 마무리되었고. 이런 일련의 활동에 대해 말하고 드러내는 것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성소수자로서 표현의 자유를 지켜내는 것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인간에 대한 폭력으로 연결될 수 있는 혐오와 차별에 대해서는 그것을 '표현의 자유'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같이 해나가야 했던 상황이었죠. 그러니까 성소수자 스스로를 드러내는 표현의 자유를 외치면서도, 성소수자 혐오를 표현의 자유로 볼 수 없는 양자의 문제를 함께 요구했던 상황이 있었어요.

 

생각해보면 그 시기에 영화 <친구사이?> 문제도 있었지만, 혐오세력들이 계속 정치권 안에서 득세하는 상황도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우리 사회가 이 표현의 자유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그것을 적절히 정리해 나갈지에 대한 입장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럴 때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 활동한 이 연대 단위가 큰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터울 : <표현의 자유를 위한 정책 제안>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국가에서 그간 금기시했던 표현을 '하게 해달라'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거든요. 그런데 사회 내에 만연한 성소수자 혐오표현 관련 챕터에서만큼은 '하지 못하게 하라'는 논지를 담고 있단 말이죠.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게 전체의 논지에 빗대 이질적인 내용이지만, 한편으로 혐오발언 규제와 성소수자 관련 표현의 자유를 일관된 논리로 정리하려는 노력이 인상적이었어요. 

 

이종걸 : 맞아요. 그 책의 내용을 보면 표현의 자유를 이야기하면서도, 그 속에서 차별금지 원칙을 지키는 방향으로 입장이 정리되고 있거든요. 거기에는 비단 성소수자 차별뿐 아니라 다양한 소수자 차별의 사례가 포함되어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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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성수, 『말이 칼이 될 때 : 혐오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 어크로스, 2018.

 

 

 

터울 : 네, 이런 논리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 결국은 표현의 자유를 위한 연대에 참가한 운동단체들의 면면과 그로부터 엿보이는 운동의 지형과 맥락과 연결되는 것 같거든요. 그런 연장선상에서 표현의 자유를 위한 연대의 명단에 친구사이와 홍성수 교수가 나란히 올라있는 것도 흥미로웠고요. 서울학생인권조례 정국에서 한상희 교수가 그 나름대로 문제의식의 성장을 경험했다면, 저는 2011년 6월 21일 정식 출범한 '표현의 자유를 위한 연대'를 통해서는 『말이 칼이 될 때』(어크로스,2018)의 저자 홍성수 교수의 문제의식이 성장하지 않았나 생각되기도 하고요. 혐오표현의 규제를 계속 검열이라고 몰고 가는 여론이 사실 지금도 있잖아요. 헌재 결정 이전에 그게 그렇지 않다는 공감대가 이미 운동사회 안에서 정립되었던 게 굉장히 중요했던 것 같아요. 거기에 검열을 들먹이는 게 실은 운동의 언어로 운동을 해치는 발상이기도 하죠. 

 

이종걸 : 그렇죠.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때 당시에도 결국은 어떤 특정 언어의 사용을 형사처벌하는 것보다는, 혐오와 차별을 둘러싼 사회 구조와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기 때문에, 그것은 누구의 입을 당장 막는 것만으로 가능하지 않고, 그런 표현이 바로 혐오와 차별임을 사회 안에서 인지하게끔 만들고 스스로 그것을 바꿀 수 있게끔 하는 것이 먼저다, 그것을 위해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시작으로 그 이후의 단계를 밟는 것이 좋겠다, 그러한 일련의 논의의 발판 위에 지금의 논의들이 있게 된 것 같아요. 

 

터울 : 네, 혐오발언을 규제하되 그것을 형사처벌로 해결하려 하면 안된다는 것이 그 때 당시의 중요한 대전제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전제가 차별금지법과도 연결되고요. 현재 논의되는 차별금지법안은 차별 사례에 대해 형사처벌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차별 사례 발생시 피해자 권리회복을 위한 국가인권위를 통한 시정명령과 적극적 시정조치, 불이익 조치 금지, 손해배상 청구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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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차별금지법, 평등의 약속』, 2021, 62쪽.
 

 


19. 2010~2012년 청소년 인권운동 및 성소수자 인권운동에 대한 회고

 

 

터울 : 학생인권조례와 청소년 성소수자 운동 이슈를 죽 훑어봤는데요, 마지막으로 2010~2012년 이 때를 돌이켜보면 어떤 소회가 드시는지, 그 때의 경험이 지금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박재경 : 앞에서도 잠깐 얘기했지만, 서울학생인권조례가 통과되면서 내가 주도한 건 아니고 옆에서 조금 도와드린 운동이 성공하는 걸 보는 게 기분이 좋았던 것 같고요. 그리고 거듭 말씀드리지만 청소년 인권 활동하시는 분들이 되게 멋있어보였어요, 이 기간 동안에. 사실 청소년 시기를 관통하고 나면 그 때의 일을 잊어먹기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그걸 잊지 않고 계속 청소년 인권운동을 한다는 것이, 그리고 그 이슈 관련 활동을 세월이 40이 되고 50이 되어서도 여전히 열심히 하고 계시고. 그걸 보면서 누군가의 말을 잘 들어주려고 애를 쓰고, 이 세상 가운데 그 목소리가 조금 더 힘이 실리고 더 권리를 보장받는 세상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현재 활동가들의 모습을 보면서, 되게 진정성있게 운동한다는 것이 저런 것이구나-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리고 되게 존경스럽다, 나는 못 따라가겠다, (웃음) 이런 느낌이 들었던 것 같고.

 

그 다음에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을 하면서는, 이런 것도 하나의 배움이겠죠. 교과서나 책을 읽거나, 전문가로부터 강의를 들은 건 아니지만, 청소년 이슈에 대해 스스로 불편했던 지점들이 그 과정을 통해 조금 덜 불편해졌고, 청소년들이 정말 자기의 권리를 실현할 수 있는 존재다-라는 걸 저조차도 납득하지 않고 그냥 '권리는 평등해야 돼'라는 느낌으로 처음에 접근한 면이 있었지만, 그 과정을 거치면서 청소년도 당연히 자기 권리를 실현할 수 있고, 그런 게 보장될 수 있다고 생각해야 되고, 그런 사회가 되어야 하는 거구나-라는 걸 많이 느끼게 되었던 것 같아요. 조금 더 생각의 폭이, 그걸 인권감수성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조금 더 일반적인 의미로는 생각의 폭이 조금 더 넓어질 수 있었던 계기였던 것 같아요. 그 덕분에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하면서 얻었던 아이디어 등이 연결되어서, 지금 현재 제가 친구사이 내에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할 때에 그 때의 일들과 연결되어있는 지점들이 많은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이종걸 : 아무래도 시기적으로는 2007~2008년 차별금지법 투쟁, 그리고 2011년 차별금지법제정연대 발족을 거치면서 우리가 힘을 모을 수 있고, 힘을 내 싸운 결과 무언가 성과를 낼 수 있는 계기였던 것 같아요. 점거농성을 해야 한다고 판단해서 그걸 조직적으로 결정하고 힘껏 싸웠던 것, 그렇게 목소리를 드러냈던 것, 그걸 운동 안에서 함께 경험했었다는 게 너무나 중요한 부분 같아요. 그리고 그걸 경험했던 사람들이 그런 자신의 경험을 다른 활동가들과 나누면서 또다른 활동을 준비하고, 마음을 같이 나누고 같이 싸울 수 있다는 힘을 주는 것이 너무도 중요한 시기 같아요. 

 

터울 : 현재에도, 

 

이종걸 : 네, 단체도 그렇고, 지금 활동하는 활동가들도 그렇고. 싸운다는 것은 에너지가 정말 많이 필요하고, 사람들의 동력도 많이 필요하고 준비과정도 많이 필요한데, 그걸 준비할 수 있는 태세를 만드는 것은 항상 쉽지 않지만,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급작스럽게나마 그런 활동을 준비해오고 만들어왔던 것은 중요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겠죠. 조만간 우리가 사회적으로나 대중적으로 더 큰 싸움을 할 시기가 올 것 같은데, 그를 위한 힘을 낼 수 있는 용기를 마련하는 것이 앞으로 필요할 것 같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에 대한 고민이 많이 되기는 하네요.

 

터울 : 큰 싸움이 예상된다는 말씀에 여운이 남네요.

 

이종걸 : 그게 꼭 차별금지법 제정뿐만이 아니라, 그것 말고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해야 될 과제들이 많잖아요. 차별금지법은 사실 우리만의 과제라고 볼 수는 없는데, 가령 동성혼이나 군형법 92조의6 계간죄 폐지 등은 좀더 우리와 밀착된 과제라고 볼 수 있죠. 군형법 이슈는 헌재의 결정으로 해결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안같긴 한데, 동성혼의 경우에는 차별 현실에 대한 헌재·사법부의 역할 외에도 입법 과정을 통해 좀 더 대중적인 동성혼 운동이 필요한 부분이 있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많은 논쟁을 일으키면서 그것을 달성해야 하는 과제일 텐데, 그런 이슈에 대해 현재의 운동세력들이 전부 결합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기는 힘들 것 같거든요. 결국 성소수자 인권운동에서 조직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변화를 만들어야 되는 상황일 텐데, 그럴 때 어떻게 외부적으로 연대를 확장할 것인가란 고민이 드는 것 같아요. 물론 싸움의 방법은 농성뿐 아니라 단체들과 협력해서 발판과 장을 계속 마련하는 것까지 포함될 텐데, 그렇게 봤을 때 어찌보면 더 긴 싸움이 될 수 있는 거죠. 그걸 어떻게 지치지 않고 해나갈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드는 것 같아요.

 

터울 : 네, 서울학생인권조례 제정의 승리를 따냈던 경험이 어떤 조건과 어떤 주체들의 노력을 거쳐서 성사된 것인지를 10주년을 맞아 한번 새로 음미하면서, 그를 통해 앞으로를 밝혀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준비된 질문이 모두 끝났는데요. 끝으로 더 말씀하고 싶은 것이 있으실까요?

 

박재경 : 이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터울이 얘기했을 때, 잊어먹었던 기억을 막 꺼내야 돼서 생각을 잠시 해봤었는데, 돌아보니까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 관련해서 내가 한 건 사실 별로 없어요. 되게 열심히 하신 활동가분들이 우리 단체로 연대를 제안했을 때 저는 거기에 참여를 했던 것뿐이고, 이게 되면 좋을 것 같아서 열심히 서명 받았던 것뿐이고. 하다보니 LGBT가 다 모여야 되는 이슈가 터져서, 그 때부터 활동가분들이 또 열심히 하셨고. 거기에 저로서는 꼭 굳이 활동가가 아니더라도 마음의 여유를 내서, 시간을 좀 내서 이렇게 각자만의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나에게 그런 기회가 있었던 것이, 내 삶에서는 좀 나쁜 측면으로는 되게 우쭐할 수 있는 면이 있거든요. 왜냐하면 '나는 학생인권조례를 통과시켜봤던 경험도 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친해진 사람들도 있다', 이런 식으로 우쭐해지는 경험으로 작동할 수 있고, 돌이켜보면 실제로 그랬던 적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조금 더 내 삶을 되돌아보게 되고, 그랬을 때 그런 것들이 대단한 게 아니구나, 내가 했던 것들이. 그리고 우리 각자는 내가 해왔던 이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너무 소중하고 대단하겠지만, 좀더 넓은 과정에서 보면 실은 하찮은 것들이었구나란 생각이 들어요, 요즘은. (웃음) 그래서 좀 허무하기는 한데,

 

어쨌든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운동을 했거나, 뭘 성취했거나, 친구사이의 발전을 위해 어떤 큰 노력을 했다, 이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중요한 건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정의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스스로 찾아내고 바꿔나가려고 애를 쓰고, 내 정의 속에 담겨 있는 전제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고, 그 전제가 합당하지 않을 때는 언제든지 깨뜨릴 수 있는, 그래야 한다는 것이 인생에서 가져야 할 태도 중의 하나라는 걸 알게 해준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이 모든 것들이. 그리고 그렇게 살지 않으면 나중에 비참해지더라고요. (웃음)

 

터울 : 쭉 얘기 들으면서, 이 모든 서사가 '박재경 라이징'이란 느낌이 들었어요. 지금의 형이 있게 된 과정들을 죽 목격하는 느낌이 드네요.

 

박재경 : 다 이어지네요, 오늘 얘기하다보니까. 나도 그냥 뭐, 마음연결 초창기 때의 생각은 다 잊어버리고 있었거든요. 오늘 얘기하면서 이렇게 이렇게 했구나 하고 돌이켜보니까 다 이어지는 측면이 있고, 또 그러면서 나도 계속 배워나가는 것 같아요. 

 

터울 : 네, 이것으로 오늘 긴 시간 인터뷰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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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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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현 2022-03-06 오후 16:27

제가 이렇게 언급이 되어서 영광입니다 ^^;

학생인권조례 제정 과정이나 운동에 관해 한번 토론하고 관점과 기억을 공유하는 기회를 만들어보면 좋겠다 싶네요.

 

그 이전에, 사실관계 몇 가지만 정정하면 좋겠습니다.

- 광주 학생인권조례도 2011년 처음 제정 당시에 '성적지향'이 차별금지 사유로 명시되었습니다. 성별정체성은 안 들어가 있는데, 광주 조례가 차별금지 사유들을 많이 생략한 성격이 있어서(9개만 명시) 이 부분도 트랜스젠더는 못 넣겠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요약, 생략 문제 같습니다. 광주 학생인권조례까지는 보수기독교 세력 등에서도 학생인권조례를 전혀 주목하지 않아서 이 부분이 광주시의회에서 크게 논란이 되지 않았습니다.

[2011년 제정 당시 '광주광역시 학생인권 보장 및 증진에 관한 조례' 제20조(차별 받지 않을 권리) ① 학생은 성별, 종교, 민족, 언어, 나이, 성적지향, 신체조건, 경제적 여건, 성적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고 평등한 대우와 배움을 누릴 권리를 가진다.]

 

- 퀴어문화축제 애프터파티 당시 청소년활동가 or 단체의 공식 주장은 술집에 법을 어기고 청소년도 출입시키란 게 아니라, 애프터파티 장소 자체를 청소년도 출입 가능한 장소로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축제 준비위 내부에서는 어떤 식의 논쟁이 오갔는지 모르겠으나, 공개-공식화된 쟁점은 축제 재정 충당을 위해 이문이 많이 남는 술집에서 할지, 아니면 청소년도 출입 가능한 장소에서 할지의 문제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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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 2022-03-15 오후 19:59

안녕하세요, 소식지팀입니다. 귀한 댓글 남겨주셔서 무척 감사드립니다. 

 

- 말씀해주신 대로 2011년 광주학생인권조례 제정 당시부터 성적 지향 차별금지조항이 포함되어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자료 조사 과정에 착오가 있었던 듯합니다. 해당 대목을 수정하고 수정일자를 부기해두었습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 애프터파티 관련 청소년 단체의 주장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부연해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나아가 종로·이태원 게이업소를 포함한 공간에서의 청소년 출입 문제는 앞으로 열려 있는 논쟁 지점이라 판단되어, 특별히 본문에 수정을 가하지는 않도록 하겠습니다.

 

- 댓글에 다소 늦게 화답드리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연도별 기사' 페이지에서 조회수 외 댓글이 표시되지 않은 데 따른 문제로, 지금은 섬네일을 포함한 목록에서 댓글 수와 내용이 보이도록 조처했습니다. 다시 한번 귀한 피드백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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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연결 프로젝트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2014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성소수자 자살예방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