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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호][칼럼] 내 불필요한 경험들 #5 : C는 씨리얼
2020-06-02 오전 01: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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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5월 

 

 

[칼럼]

내 불필요한 경험들 #5

: C는 씨리얼

 

 

브로크백 마운틴 좋은 영화고 나도 어릴 때 너무 봐서 어떤 부분은 대사도 줄줄 읊는다. 근데 막상 인생의 퀴어영화를 꼽으라면, (물론 아무도 나에게 그러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좀 애매하다. P2P사이트를 들락이며 닥치는 대로 퀴어영화를 수집해 감상하던 때가 벌써 십여 년 전이다. 이제 로맨스를 경험하기 위해 영화를 찾아볼 필요는 없다. (이전에는 그래야 했다. 학생시절 나에게 연애는 감동실화보다는 판타지였다.) 아무튼 그렇게 된 지금, 브로크백 마운틴의 두 주인공-애니스 델 마와 잭 fucking 트위스트-을 생각하면 세상에 어디 저런 게이들이 있나 생각이 드는 거다.

 

모르긴 몰라도, 들판에서 주먹다짐을 하다 난데없이 거친 섹스를 하는 게이는 별로 없지 않나. 같은 남성에게 피어오르는 묘한 감정에 당혹을 금치 못하고, ‘이건 대체 뭐지’하는 혼란 가운데,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토하기에, 21세기는 완벽한 답을 이미 안다. 그건 게이다, 게이! 오늘의 게이들은 자기가 게이인 줄을 안다. 하다못해 ‘게이’가 뭔지라도.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적지 않은 게이띰 퀴어영화 속 게이들은, 시대배경을 막론하고, 자신이 게이임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한다. 적개심에 가득 차 난투극에 가까운 섹스를 하곤, ‘나는 게이 아니야’ 공염불을 외는 게 지금의 현실에서 어떻게 가능할지 생각해본다. ‘게이’란 것이 전에 없던 무엇인 것처럼 구는 ‘태초의 게이’ 캐릭터들의 충실한 정체성혼란에 대해서도. 연애란 것이 이제는 현실의 내 몫이 되었는데 여전히 어떤 퀴어영화들은 판타지처럼 느껴진다. 브로크백 마운틴 좋은 영화다. 그런데 뭇 퀴어영화의 제1 레퍼런스가 되어 탄생한 숱한 판타지-퀴어영화들을 떠올리면 좀 못마땅하다. 누구 말처럼, 모두들 조금씩만 덜 인상 깊게 봤더라면, 속 시원하게 인생의 퀴어영화라고 떠들고 다녔을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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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데이팅앱 안 사람들을 보면, 거기에 온갖 시대가 망라되어있다. 개인신상을 유추할 정보를 서슴없이 게시하거나, 프로필에 갖가지 SNS계정을 연동해놓은 게이가 있는가 하면, 당장 몇 시간 뒤 만날 사람에게 얼굴 공개조차 꺼리는 게이도 있다. C는 후자였다. 한국근현대?문학 어설프게 흉내 내는 거 아니고, C를 호명할 정보와 관련해 내가 아는 게 그 뿐이다. 번개로 두세 번 만난 후에, C에게 카카오톡 교환을 제안한 적이 있다. 알파벳 한두 개로 이름을 대신하는 건 흔한 일이라 쳐도, 카카오톡 아이디를 교환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니. 조금 뒤, C는 무턱대고 ‘광교역’이란 이름의 오픈톡방 링크를 전송했다. 역사명으로 불려보긴 또 처음이었는데, 구렸고, 나는 광교역에 살지도 않는다. 됐으니 그냥 연락하던 데이팅앱(서버가 불안정하기로 유명한)으로 계속 연락하자고 했다. 일부러 연락을 뜸하게 하면서, 헐 알람이 안 떠서 이제 봤네요, 같은 되도 않는 소리를 몇 번 했다. C는 혹시 그럼 라인은 안 쓰냐고 물었다. 이제야 너도 한 발 물러서는구나, 했는데, 아니었다. 라인에는 알파벳 한두 개, 그마저도 없었다. 음가도 없는 번개모양 이모티콘이 전부였다. 얼척이 없어서.

 

그때부터 나와 C의 데이터 전쟁이 시작됐다. 가히 정보화시대에 걸맞은, 은 무슨 그냥 오기였다. 나중에는 거의 도전정신이기도 했다. C의 목표는 어떤 정보도 흘리지 않고 나와 섹스를 하는 거였고, 나의 목표는 C에 대해 알아내는 거였다. 물론 C와의 만남을 이어간 내 주된 동기도 괜찮은 섹스를 하는 것이긴 했다. 다만, 섹스파트너를 원했다고 하기에 나는 C에 대해 기꺼이 알고자했다. 내 호기심이 주기적이고 안정적인 섹스를 위태롭게 한다 해도 큰 미련이 없었다. 그렇다고 C를 좋아했다고 하기엔 C를 만나는 동안 멀쩡한 정신을 차리는 게 어렵지 않았다. 아무튼 정말 중요한 건 이 관계에서 미스테리는 확실히 나보다는 C쪽이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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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는 섹스머신이었다. 섹스를 잘하고 말고는 둘째 치고, 나는 C가 도저히 사람 같지가 않았다. C는 섹스만, 했다. 보통 섹스라는 게 끝은 명확해도 시작은 모르는 새에 조금씩, 이라고 생각했었다. 대충 퉁 쳐서 현자타임이 시작되는 순간을 그 끝이라 합의한데도, 시작은 의견이 분분하지 않을까. 방에 들어서서 인사를 나누는 순간? 아니면, 먼저 씻고 올게요, 라며 옷을 벗는 순간? 한 침대에 누워 평소라면 보지도 않을 홈쇼핑 채널에 뭐라도 있는 듯 집중하는 (척 하는) 순간? 그러다 불 끌까요, 라고 리모콘을 집어드는 순간? 그도 아니면, 키스를 하면 시작? 어떤 식이든 긴장이 형성되는 동안 알아서 섹스가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C는 나만 못 듣는 버저음을 듣는 건지, 거의 요이땅, 하고 섹스를 시작했다. 

 

C를 만나고 나서 내가 그동안 번개로 사람을 만나 섹스 말고도 꽤 많은 걸 해왔다는 걸 알았다. 일단 밥을 먹거나 까페에 가는 건 비일비재했고, 개중 좀 특이한 경우지만 같이 빨래짐을 들고 세탁방에 간 적도 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건 번번이 있는 일이었고, 자취방에라도 갈 때면 대화 없이도 많은 걸 알게 됐다. 그래도 결국 ‘번개(단발적 섹스)’라는 말로 정리된 인연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로지 몸을 섞는 것만을 따로 ‘섹스’라고 분리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모텔 입퇴장을 따로 했던 것은 고사하고, 인사도 없이 오직 침대에서 시작해서 침대에서 끝나는 C와의 관계가 어딘지 설게 느껴졌던 이유다. 섹스 후에 씻고 있으면, 먼저 갈게요, 라며 모텔비 반을 멋대로 계산해 협탁에 놓아두고 방을 나서버리는 건 정말 적응이 필요했다. 얘기를 나눌 겨를은 없었고, C와의 관계엔 누적이란 개념이 없었다. 반년 가량 지속적으로 만나고도 ‘모르는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다는 게 지금에야 신기하다.

 

C와의 간헐적 만남은 내가 짧은 연애를 시작하며 잠시간 중단되었다. 연애를 시작했다는데 돌아온 메시지가 외도 한 번만 해라, 였다. 창의적인 대답에 어이가 다 없어서, 형은 그대로시네요, 했더니, 남자들은 똑같다고 욕구만 해소하면 된다고 했다. 섹스에서 무언가를 더 원하는 건 여성스러운 거라는 공연한 헛소리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했었다. 초반에 한동안은 괜한 자존심에 C에 대한 호기심을 애써 외면했다. C에 대해, 내 빈곤한 상상력이 짚어본 가능성은 C가 너무 너무 남자여서 감정이 다 메말라버렸다는 것 정도였다. 한 편으론 나야말로 그를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지 모른다. 어떤 게이가 관계에서 감정적인 경험을 찾는 건, 그 게이가 유달리 여자 같아서라기보다는, 그에게는 남자와의 섹스 자체보다, 관계 속에서 복잡한 감정을 주고받는 게 더 드물고 난도 높은 일이기 때문은 아닐까. 사람들은 갖기에 적당히 어려운 걸 원한다고 생각한다. 너무 쉽지 않으면서, 동시에 너무 큰 대가를 치루지 않아도 되는 것들. 그렇다면 C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상상해야 공평했다. C에게는 남자와의 섹스 자체가 미션스런 일이며, 자신을 드러내고 관계를 맺는 건 너무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이었다고. C는 그런 상황 속에 있는 사람일지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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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로 쓰려니 좀 민망하고 구리지만 나와 C도 뻔한 소리를 하며 섹스를 했다. 좋아서 미치겠다느니, 오늘은 오래하고 가자느니. 이건 다른 사람들도 하는지 어떤지 모르겠으나, C는 오늘은 여러 번 싸고 가자는 소리도 버릇처럼 했다. 물론 C의 경우 사정과 현타에 찰나의 틈도 없었기 때문에 그건 그냥 내용 없는 감탄사였다. 공수표에 불과한 말이었는데, 정말 그렇게 하면? 이란 생각이 마침내 C에게만 유리하게 돌아가던 판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다. C의 현타는 관계를 리셋하는 효과가 있었지만, 이는 현타 전까지라면 뭔가 노려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C는 못 싸게 하되, 나는 C의 입버릇이 제안한 대로 하는 것이 내 전략이 되었다. (이게 무슨 삼손과 데릴라도 아닌데. TMI지만 그래도 C의 외형, 특히 어떤 부분은, 삼손을 좀 닮기도 했었다.) 모쪼록 C는 사정하기 전이니 아직 ‘사람으로서의 면모’가 활성화되어 있었고, 내게도 현타란 게 아주 없는 건 아니라는 것쯤은 C도 알았으니, 다시 한탕 뒹굴기 전까지 뭔가 더 해볼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진솔한 대화로 굳게 닫힌 C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더니 마침내 상처 입은 야수 같은 깊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일은 당연히 없었다. C는 여전히 몇 살인지, 어디에 사는지 등을 물을 때면 얼버무렸다. 대신 C답게 오늘은 야동 언제 보고 나왔냐느니 하는 ‘남자다운’ 질문을 했다. 내가 형은 주로 어디서 보냐고, 요즘은 트위터 이런 데서도 많이 보던데 하면, C는 확실히 요즘 애들은 그런데서 보는구나 대답했다. 또, 어느 회사, 누구꺼 보냐고 하면 Sean을 씬이라고, Austin을 아우스틴이라고 또박또박 발음해주었다. 그럼 나는 C가 나보다 나이가 어느 정도 있다는 것과 학원에서 영어 가르치고, 이제 곧 다시 호주로 돌아갈 거란 게 백프로 믿을만한 말이 아니었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물론 막판에는 C가 다시 처음 보는 어색한 사람이 되는 결말이었다. 그래도, 하나마나한 대화라도, 같이 대화하며 보낸 시간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후에 C는 좀 오락가락했다. 한 번은 씻으러 들어가는 차에 급히 돈을 꺼내주더니, 아니, 아무데나 돈 놔두고 가는 건 좀 그러니까, 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차를 태워주겠다고도 했다. 갑자기 일이 있다며 대로변에 내려주기는 했지만. 풀릴 줄 알았던 미스테리는 불어났다. 돈 주고받을 일이 없도록 번갈아가며 모텔을 예약하자더니 꼭 본인 턴에 핸드폰에 문제가 생겼다며 메시지를 했고, 만날 시간을 정할 때면 평일 낮 시간대를 고집했다. 그러다 내가 본 것이 핸드폰 뒤 그립톡에 붙어있던 아기시진이었다. C는 방에서 봤던 것과는 또 다른, 정체 모를 핸드폰을 급히 집어 들어 블루투스를 껐다. 자동차 내부스피커로 블루투스 연동이 끊기는 신호음이 크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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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를 소리 내어 읽을 수 있다면, C를 부르고 싶은 이름이 있다. 허허벌판 한가운데에 빤스만 걸친 C의 뒷모습이 조그맣게 보이는 사진이다. (거의 풍경 사진이나 다름없는.) 사실 군대에 있을 때 한 번 C를 만난 적이 있다. 자동차 안에서 아무렇게나 ‘욕구해소’를 하고, C는 나를 아무 연고 없는 광교역에 내려주었다. 다시 만나자고 메시지가 왔는데, 난 연애할 사람을 만나고 싶은 것 같다, 하고 말았다. 그러고 몇 년이 지나 데이팅앱에서 그 사진을 다시 발견했던 거다. C에게, 형 게이 아닌 거 아니에요, 라고 물었었다. C는 그건 아니라고, 옛날에 짝사랑했던 외국인 스트레잇 친구가 있었다고 했다. 몇 년째 변하지 않는 데이팅앱 속 C의 프로필 사진이 바로 그 외국인 친구가 찍어준 사진이었던 거고. 

 

C가 어떤 사람인지는 사실 C가 이야기하기 전까지 알 수 없다. 그립톡이 붙어있던 핸드폰이 C의 핸드폰이었는지 아닌지도 모를 일이다. C에게 숨겨진 애인이 있었을 수도 있고, 그냥 이런 글 쓸 것도 없이, 나랑은 섹스만 하고 싶었던 걸 수도 있다. 아쉽지만 대단한 윤리의식 때문에 C와의 만남을 그만 둔 것도 아니다. 특별한 다짐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2개월의 짧은 연애가 엉망으로 마무리되고, C에게 같이 있어 달라는 제정신 아닌 요청도 했었다. C가 햄버거 세트를 사오는 바람에 좀 감격스럽기까지 했으나, 그놈의 욕구해소를 끝으로 사라지기에, 나도 좀 현타가 왔을 뿐이다. C에 대한 호기심이 영원했다면 그게 더 이상할 일이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일을 겪는 새에 C는 다시 연락할 마땅한 방법 없는 사람이 되었다.

 

제대로 된 연애를 시작하고 마지막으로 한 번 C에게 메시지가 왔다. C는 내게 요즘에 왤케 만날 사람이 없냐며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형이 섹스만 하려고 하니까 그런 게 아닐까요, 라고 답했다. 연애를 하라고 했더니, 자기는 집이 엄해서 안 된다고 했다. 너처럼 드러낼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고까지 했다. 그 이유가 뭐가 됐든, 처음으로 C가 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 21세기든, 22세기든 내가 상상하기 힘든 삶이 어디에나 있다. C에겐 오래 전 짝사랑했던 사람이 찍어준 사진을 몇 년째 걸어두는 게 로맨스이고, 고작 욕구해소차 섹스를 하는 게 본인이 부릴 큰 욕심이다. C는 언제 시간되면 밥이나 한 끼 하자고 했다. 형이 웬일이냐고 묻자, C는 그럼 자주던가, 라며 멋쩍은 ㅋㅋㅋ만 연발했다.

 

 

(사진_Ji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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