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에게 연정을 느끼는 청소년들은 청소년 상담 사이트나 포털 사이트에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저는 동성 친구가 좋아요. 어쩌지요? 저는 동성애자인가요?”
상담자로서 이런 질문은 난감하다. 간략한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질문하는 사람의 마음 상태가 어떤지, 구체적인 상황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어렵다. 이럴 때 무난하게 제공하고 있는 답변은 대체로 이런 듯하다.
“청소년기에는 누구나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그 감정이 사랑인지 친구에 대해서도 있을 수 있는 독점욕이나 집착인지 차분히 생각할 필요도 있지요. 지금 그 마음이 사랑이라고 해서 꼭 동성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성인이 되면 달라질 수 있어요.”
이런 답변은 안전하긴 하지만 그다지 좋은 대답은 아니다. 동성애를 한 때 느끼는 지나가는 감정쯤이나 이성애라는 ‘정상적’인 성장 과정 중 일종의 일탈일 수 있다고 치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이 “저는 이성 친구가 좋아요”라는 말을 했을 때 “그건 지나가는 감정일 수도 있어요”라고 말하지 않듯, 이성애를 중심에 두고 동성애를 차등화시킨다. 그럼으로써 동성애자라고 정체화하는 일이 좋지 않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래서 이 답변은 동성애를 경험하는 것에 고민을 더하면 더했지 내담자의 심리적 안정을 돕지 못한다.
은연중에 동성애를 문제가 있는 것으로 바라보면서 정체성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은 문제를 일으킨다. 현실적으로 다른 사람의 성적 정체성을 왈가왈부하기가 어렵기도 하다. 정체성이라는 말 자체가 한 개인이 스스로에 대해 규정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규정’한다는 것 때문에 정체성의 언어는 더욱 위험하다. 현실은 규정된 채로 고정되지 않으며 자꾸만 미끄러지기 마련이다.
동성애는 동성애자가 독점하는 것이 아니고, 이성애 역시 이성애자만이 가지는 것은 아니다. 양성애자는 그러하겠지만, 동성애자 역시도 이성애를 경험하기도 하고 이성애자 역시 동성애를 경험하기도 한다. 이성애자와 동성애자가 서로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게이와 레즈비언이 서로 이끌리기도 한다. 그래서 정체성을 이야기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성적 정체성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정체성은 자신을 해석하는 틀이고 자신의 생각과 행동의 기준이며 자신의 미래를 구상하고 예측할 수 있게 해주는 안정적인 관점이다. 특히 이성애중심적 사회에서 별다른 고민 없이 정체화하는 이성애자와 달리 동성애자에게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은 소중하다. 자신을 동성애자라고 자기 자신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스스로에게 커밍아웃하는 순간에야, 동성애자로서 살아갈 길들을 구성할 수가 있게 된다. 그것은 동성애자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고 동성애자로서의 주체를 형성해 동성애의 해방, 동성애자의 인권을 이야기하는 기초이기도 하다.
사실 “어쩌죠? 나는 동성애자인가요?”라는 질문은 자신이 느낀 감정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있다. 이 이성애중심적 사회에서 동성애가 없는 것, 없어야 하는 것, 혐오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내면화한 물음이다. 또한 이런 상황에서 동성애자로서 자신이 익숙하게 보아온 삶의 모델들과 다르게 살아야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지닌 것이기도 하다. 불안함의 표출인 것이다.
그러니 “나는 동성애자인가요?” 하고 물으면 일단은 동성애 자체에 대해 같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 유일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이성애를 동성애, 양성애와 함께 자리하는 상대의 자리로 앉혀 놓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두려움을 같이 나누자. 자신이 앞으로 이성애자, 동성애자, 양성애자 등 어떻게 정체화하건 동성에 대한 이끌림을 경험할 때 그것이 위험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라 충분히 자연스럽다는 것을 이야기하자. 타자로 여겼던, 혹은 타자로 여기고 싶었던 동성애를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순간 섹슈얼리티에 대한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그 이후에야, 성적 정체성의 이야기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