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넓고 게이는 많다”
연애 때문에 고민하는 후배들한테 내가 자주 하는 말이다. 특히 헤어진 연인 때문에, 혹은 “난 왜 애인이 없을까”하고 자책하는 사람들한테는 어쩌면 무책임하게 들릴수도 있는 말이지만 버릇처럼 난 이 말을 자주 한다. 사실 내 성지향성 때문에 치열하게 고민을 하던 시절, 그때 난 세상에 게이남성은 나만 존재하는 줄 알았었다.
이후 간신히 게이커뮤니티를 접하고, 한 때는 건강한 커뮤니티를 위해 나름대로의 노력을 하면서부터 세상엔 나 말고도 게이들이 참 많구나 하는 안도의 생각과 이렇게 많은 동성애자들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가는 커뮤니티도 우리사회 전체 커뮤니티와 별 다를게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친구사이 활동을 하면서도 다양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끈끈한 인간적인 관계를 맺어가기도 하지만 가게를 시작하고 나서 부터는 좀 더 다양한 동성애자들을 만나게 된다.
술집이라는 접근 용이성 때문일까?
손님 대부분이 2.30대인 우리 가게에 가끔씩은 40대, 50대, 때론 60대의 게이남성들도 찾아오곤 한다. 물론 그들의 관심사는 20대와 별반 다를게 없지만 가치관에 있어서 만큼은 큰 차이를 보인다. 그들 대부분은 기혼 게이라는 것도 하나는 차이다.
이성과의 결혼은 참고만 할 뿐 내 삶에는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손님들과 달리 그들중 일부는 이성과의 결혼을 적극 장려하기도 한다. 오히려 서른 중반의 나이에 이성과 결혼하지 않은 나를 두고 불효자라고 꾸짖기도 한다.
심지어는 결혼을 하고 나서도 이반생활을 충분히 잘(?)할 수 있는데 왜 결혼도 안하고 이렇게(?)사느냐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둔 자신이 마치 혜택 받은 사람인양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말 세상은 넓고 게이는 많다. 그리고 다양하다.
얼마전부터 우리 가게에 혼자서 자주 오는 사람이 있다.
서른 후반쯤 되었거니 하는 나의 짐작과는 달리 얘기를 하다보니 자신은 40대 후반이며 자식까지 두고 있는 기혼자라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혼이라는 얘기는 두 번째 방문때 했던 것 같다. 종로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잠깐 빠져나와서는 여기에 왔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이성애자들과의 술자리에서 느꼈던 불편함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오히려 그들과의 술자리에서 느꼈던 어색함을 이곳에서 만회하려는 듯 보이기도 했었다. 한 참 동안 술을 마시더니 다시 가봐야 한다며 문을 빠져나가는 그의 뒷모습에서 이성과의 결혼을 적극 장려하던 또 다른 40대의 기혼 남성을 떠올렸었다.
며칠뒤 모자를 푹 눌러쓴 그가 또다시 우리 가게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한 손에 골든벨모텔이라고 적힌 열쇠를 들고 있었다.
“그게 뭐예요?”라고 묻는 나에게 와이프한테 강원도로 1박2일 여행 갔다 온다 얘기하고 나왔다며 쑥쓰러운 듯 그가 말한다.
그가 눈구경하러 떠난 강원도는 다름 아닌 같은 서울 하늘 아래, 그것도 게이바들이 밀집한 낙원동의 한 술집이었던 것이다. 모텔 열쇠까지 들고 있는걸 보면 아마도 오늘은 작정하고 나온 모양이다.
정말이지 세상은 넓고 게이는 많다. 그리고 다양하다.
그 무리중에는 서른 중반의 나이에 동성애인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는 내가 있고 다른 한 곳에는 골든벨모텔 열쇠를 들고 환히 미소 짓고 있는 그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