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쾌한 동성애, 정체화되지 않는 이반, 그리고 또다시 육체의 범주에 발목 잡히기 > - 이정우 2001
[이글은 2001도에 쓰인 것으로 이정우씨가 가상의 시간 2003년에 가서 과거(그러니까 1990년대)의 동성애자들의 모습과 그 상황들을 재조명하는 형식으로 쓰여졌습니다. 어렵긴 하지만, 동성애 커뮤니티의 모습들과, 현실 사회 속(이성애주의)에서 내몰리는 동성애자 소수집단의 모습을 고찰한 좋은 텍스트기에 불러 와 봅니다.]
글 더듬이 혹은 주파수 맞추기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홍역을 치른 2002년도 어느덧 지나, 이렇게 새해의 동성애자 공동체의 전망에 대해서 글을 써달라는 원고 청탁을 받고 보니 글을 써나가기에 앞서 우선 떠오르는 계면쩍은 일이 있다. 1998년 봄에 『이다』로부터 2003년의 동성애자 문화와 그것이 그려낸 섹슈얼리티sexuality의 지형도를 예측해내라는 원고 청탁을 받았던 일이 그것인데, 지금 다시 그 글을 읽어보니 우습기 짝이 없기도 하거니와, 2003년의 성적 소수자 운동의 일기 예보를 다시 한번 내놓으라는 무덤덤한 요청을 마주하니, 그 알 수 없는 속셈에 내심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기실 1998년에 『이다』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고서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라고는 고작 '2002년 월드컵 시즌에는 일본인 동성애자들이 한국에 관광차 많이들 오겠구나(어쩌면 신세를 크게 졌던 일본의 동료들도……)' 하는 정도의 시덥잖은 생각 외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오니츠카 상,2) 가와무라 상,3) 야수시 상4) 혹은 아트 스케이프5)와 'OCCUR'6) 'OGC'7) 'Kansai G-Front'8)의 어느 누구도 한국에 오지 못했던 것이다. 내년이면 한국 동성애자 운동의 10주년이니 그때에나 동아시아 성적 소수자 스터디스 프로젝트(East Asian Sexual Minorities's Studies Project)의 일환으로 정식 초청할 수 있기를 기대할 뿐이다.
1994년부터 시작된 한국 동성애자 운동은 지난 10년 동안 돌이킬 수 없는 크고 작은 변화들을 실현해내었으며, 때로 그것은 운동 주체들 스스로가 감당하기 어려운 폭의 진동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 중 대개는 예측할 수 없었던 것들이며 정작 예상했던 성과들은 이루어지지 않기 일쑤였다. 이반 운동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국 사회는 6개월 뒤의 일조차도 예상하기 힘든 요지경 속이다. 예를 들어, 어느 날 갑자기 동성애자 문화에 대한 도덕주의적 고발성 기사가 방송을 타고 나와 여론을 호도하고 동성애자 관련 사업장의 업주가 구속될지 예상할 수 없으며, 또 그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돌발적인 일회성의 것인지 아니면 연이은 '청소 작업'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아내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것이다.9) 그러니 2003년의 예상도를 그려내라는 요구에 순엉터리 답변을 늘어놓았던 것은 나의 무지나 무능력 탓만은 아니었던 게다. 예측을 가능케 하는 여러 정보들에서조차 차별이 존재하며 그것은 오늘의 상황에서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1995년 대학 내에 동성애자 모임을 결성할 때만 하더라도 많은 지식인 동성애자들의 참여와 부분적 혹은 전면적인 '동성애자임을 드러내기coming out'가 지지와 연대의 양상으로 간간이나마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지식인층 내에 존재하는 동성애자들의 반응은 냉담 그 자체였으며 개인적인 접촉과 설득 작업 또한 단호한 거부 의사 앞에 좌절되었다. 어릴 적, 젖과 꿀이 흐르는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던 2000년대에 내가 드디어 살고 있지만 웬걸, 나는 여전히 사회에서 증오의 대상이 되고 있는 수많은 동성애자 유민 중의 한 명이며, 늘 그래왔듯이 동성애자 지식인들로부터는 최소한의 후원조차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기대 밖의 실망스러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테크노피아의 2000년대를 꿈꾸던 초등학교 시절 나는, 내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우리 사회에서 비난받는 특정 종족의 대표적 인물이 될 것이라고는 결코 상상하지 못했었다.
돌이켜보면 90년대 동성애자 공동체의 베이스를 좌지우지한 것은 통신 모임들이었다. 통신 내에 결성된 동성애자 모임들은 활발한 활동과 높은 게시판 이용률 등 기대 밖의 양적인 팽창을 이루며 통신 4사(하이텔·천리안·나우누리·유니텔)의 사이버 공간 내에 독자적인 이반만의 공간을 형성해내는 데에 성공했다(통신상의 동성애자 모임들은 이미 1998년경에 약 500∼700명 정도의 회원을 확보하여 특수한 아비투스habitus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전화 사서함 모임인 동성애자 153 모임들이 활성화되어 양적인 면으로는 기존의 이반 운동 단체를 능가하게 된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또한 1997년말, 김대중 대통령과 집권당인 국민회의가 동성애자 운동에 대해서 공식적인 입장 표명을 한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한겨레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김대중 대통령(당시는 당선 이전)은 한국 사회가 동성애자 운동을 인권의 차원에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으며, 국민회의는 여성 동성애자 운동 모임 '끼리끼리'의 질문 서한에 대한 공식적인 답변을 통해 동성애자에 대한 인권 침해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던 것이다. 당시, 나와 여러 동료들은 그 인터뷰를 좀더 구체화시켜 이슈 메이킹을 하고 싶었지만 김대중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나자 국민회의의 어떤 국회의원도 그 문제에 대한 답변이나 인터뷰를 회피했기 때문에 본격적인 이슈 메이킹에는 실패했었다. 오죽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고 싶었으면 친동성애자적인 발언을 했으랴 하는 생각이 들어 우습기도 했지만 1997년 당시, 실제 대다수의 동성애자들이 김대중씨를 지지하는 표를 던졌다는 생각을 하면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게다가 작년, 수년 간의 노력을 통해 가시화되었던 국민회의 L의원의 커밍아웃 계획이 백지화된 지금, 허탈감이 든다기보다는 정치판에서의 우리의 로비 능력이 아직은 너무 부족하기에 한국 동성애자 운동의 역량을 더 키워야만 한다는 다짐과 각오를 다질 수 있을 뿐이다.
반면, 애초의 동성애자 운동가들의 기대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해결의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의외의 난제라면 역시 단연 AIDS와 HIV 바이러스 보균자들의 인권 문제를 들 수 있겠다. 동성애자 운동은 '동성애자=AIDS 전파자'라는 사회의 편견을 어느 정도 불식시켰는지는 모르겠으나, 2000년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AIDS 확산기로 접어든 것으로 판단되는 현재, 다수의 보균자 및 환자가 발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성애자 사회는 물론, 동성애자 공동체 내부에서조차 AIDS 운동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은 미흡한 실정이다. 남성 동성애자/이반 운동 모임 '친구사이'는 운동 초기부터 능동적인 성교육(1995년 시작)과 세이프 섹스safe sex 홍보, 콘돔 배포 행사(1997년 시작), 그리고 세이프 섹스 홍보 누드 포스터 프로젝트(ChinGusai-Seoul? semi-porn poster project 4 safe sex Korea: 1998년 시작) 등을 통해 대안적인 AIDS 운동을 펴고 있지만 상황이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일부 회원들의 회비에만 의존하고 있는 열악한 자금 상황과 새 순결 운동 따위를 AIDS 퇴치의 대안으로 내세우는 기존의 AIDS 관련 단체들과의 갈등에 늘 발목을 붙잡히고 있는 현실이기에 구체적인 운동 과제들의 예측이나 동성애자 인권 운동의 지형도를 미래 학자처럼 떠들어대는 일은 불가능할뿐더러 별다른 의의를 찾기도 쉽지 않을 듯싶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서울에 존재하는 남성 동성애자 하위 문화의 궤적을 살피고, 그에 따른 변화 방향을 예측한 뒤, 그것이 의미하는 바와 그 속에 숨은 섹슈얼리티의 함의들을 따져보는 것에 국한하여 논의가 진행될 것이다. 그렇게 특정 공간 내에서의 문제만을 다루는 제한적인 논의만이 가까운 미래에서의 변화를 예측 가능하게 하고, 그 예상된 변화의 지점들이 제시하는 문화 정치학적 문제들을 고찰·가능케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논의에서 레즈비언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는 빠져 있다. 그것은 당연히 레즈비언 운동가의 몫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남성 동성애자인 필자가 그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능력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성 동성애자의 문제가 여성 동성애자의 문제를 가리고 일반화하는 불평등이-바로잡으려 늘 노력하지만-이 글 곳곳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이태원 성적 소수자 공동체의 다른 한 장인 M to F 성전환자male to female transgender 공동체에 대해서도 다루지 않는다. 이 점 널리 양해 바란다. 참고로 밝히자면 이 글을 쓰는 나는 '서울대학교 동성애자/이반 운동 모임 마음001'을 조직함으로써 동성애자 운동에 관여하기 시작하여 현재는 한국 남성 동성애자/이반 운동 모임 '친구사이'에서 일하고 있는 '이반으로 정체화된 남성 동성애자'이며 '디자인 문화 연구'를 업으로 삼고 있다.10)
I. 서울, 유목민, 그리고 보이지 않는 멜랑콜리아의 피난민들11)
2003년의 서울이 모더니즘의 기초조차 경험하지 못한 채 유목민nomad 정서에 자아 도취된 새로운 족속들에게 보다 더 넓은 지역과 보다 더 중층적인 코드를 통해 점령되었다는 점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굳이 미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미 도처에 유포된 유목민 정서-유사pseudo 유목민 정서일지도 모르지만-는 서울이라는 초대형 도시에서 미발달 상태의 광장 문화를 제거하고 메타모르픽metamorphic한 접선 문화와 그를 위한 한시적 공간을 점멸시킬 뿐이다. 따라서 동선의 궤적들이 그려내는 도시적 의미망과 그것의 인지 가능한 가시적 공간 기호들은 서서히 독해 불가능한 기표signifier 아래로 사라져가는 중이다. 오직 점멸하는 지점들로부터 창출된 파편적 이미지들과 그 다종 다양한 현기증들이 실재하는 도시적 광경들을 대체-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도시의 공적 공간에 대한 개인적 사용에 국한하여 집중력을 허용하는 서울 거주민들의 욕구는 모더니즘을 단기 속성으로 공부한, 유목민화된 시민들에게 당연하며 그들에게 공적 공간이 가지는 각종 문화 기호들의 함의는 그들에게 있어서 놀라울 정도로 무의미하다. 따라서 한국 전쟁 종전 이후 50여 년 동안 성장해온 서울의 동성애자 하위 문화 공동체subcultural space of lesbian and gay community의 경우 또한 지리적으로는 분산되어 있는 듯이 보이지만 반드시 그러한 것만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12) 지리적인 위상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지오그라피geography, 즉 땅 위에 그려진 그림이 아니던가. 이 기초적인 사실은 서울의 동성애자 하위 문화 공동체의 지역적 위치라는 하나의 그림으로부터 무언가를 읽어낼 수 있다는 점을 환기시켜준다.
서울의 남성 동성애자 하위 문화 공동체는 현재 종로의 낙원동 일대와 이태원을 들 수 있으며 신당동이나 그 밖의 지역은 이미 쇠락했거나 최소한 미시적으로는 성장 가능성이 희박해 보인다. 단 한 곳 새로운 성장 가능성을 보이는 곳이 있다면 그것은 신촌 지역인데 그곳도 짧은 시일 내에 점적인 분산을 넘어 동성애자 지역의 형성 단계에 이르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그리고 나머지의 하위 문화 공간은 뿔뿔이 흩어져 있는 형편이다. 물론 그 각 지점과 지역들을 이동해 다니며 한시적이고 비가시적인 사회적 관계망들을 엮어내는 유목민들은 물론 남성 동성애자들이다.
그들은 (또한 나는) 서울의 여타 다른 질서와 공간에서 게이 하위 문화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순간 낭만화되고 유미주의적 정서에 휩싸인다. 따라서 수년 전 영화적 가치와는 무관하게 구설에 올랐던 영화 「내일로 흐르는 강」에 대해 어느 문화평론가가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미장센은 바로 게이 커뮤니티 입구 낙원동으로 향하는 그 어떤 골목의 어귀이다"라고 말한 것은 매우 경험적인, 또한 그러면서도 매우 타당한 지적이었다.13) 그러한 심미적인 일련의 감정은-조금은 황당하게 들리겠지만-일찍이 신플라톤주의자들이 주목했던 정신의 여러 미학적 국면들 중 하나인 '멜랑콜리아melancholia(우울증)'와 직접적인 연관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멜랑콜리아'에 대해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멜랑콜리한 감정을 플라톤의 '신적인 광기furor divinus'와 동일시하였으며 그것은 '멜랑콜리한 광기'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출하였다. 16세기초 인문주의자들에게 널리 영향을 미친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 폰 네테스하임Cornelius Agrippa von Nettesheim의 주장은 가장 대표적이다. 그는 '멜랑콜리한 광기'가 인간을 '최상의 진리'의 인식 단계로 인도한다고 보았는데, 여기에서 '멜랑콜리아'의 모순에 찬 이율배반적 개념이 도출된다. 즉 '멜랑콜리아'란, 오늘날과 같이 정신병리학적 우울증을 지칭했던 것이 아니라, 힘과 이해력과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상의 진리에 도달할 수 없음을 한탄하는 우울의 상태와 그로부터 얻어지는 미학적 경험을 총칭하는 것이다. 즉 신플라톤주의자들은 모순적인 시대에 살았던 자신들이 놓여야 했던 위치-회의와 광신적인 믿음, 합리주의와 무한한 몽상적 세계, 인간 오성의 신뢰와 극단적인 불가지론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을 확고히 믿도록 강제하는, 불합리한 경계선상의 맥락성을 이해하고 다스리기 위해서 '멜랑콜리아'라는 특별한 상태를 지칭하는 개념적 인식틀을 개발했던 것이다.14) 그렇다면 왜 동성애자들은 이성애 중심적 질서에서 이탈되어 한시적 동성애자 정체성을 획득하는 순간 멜랑콜리해지는 것일까?
혹자는 성이 어떠한 특정 공간을 점유하여 발현하는 순간 모든 것이 심미화되는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것만으로는 왜 남성 동성애자 공동체의 문화가 유달리 눈에 띄도록 심미적인가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서울의 남성 동성애자들이 자신을 정체화하는 방식과 그 정체화가 귀결지은 '보이지 않는 피난민'으로서의 행동 양식에 주목해야 한다.
서울에서 남성 동성애자들은 오로지 특정 시간과 특정 장소에서만 자신의 성적 지향성sexual orientation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을 '정상인과 다른 그 무엇'으로 이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곳에는 어떠한 가시적 코드와 차별화 전략도 없으며 그저 특별한 만남과 그를 통한 욕망의 해소를 위한 행동 규약이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서울의 남성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의 의식의 한 국면-욕망하는 기계로 하여금 자신들의 육체를 게토화된ghettoized 동성애자 하위 문화의 공간으로 부유시키도록 방치함으로써 은밀하게 보이지 않는, 지하 사회의 유희 문화와 그 속에서의 불합리한 정체성들을 조직한다. 즉 동성애자 공동체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동성애자들은 자신의 성과 섹슈얼리티, 그리고 육체 사이에 존재하는 참기 어려운 모순과 괴리감을 직감하게 되며, 그것은 흔히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타기의 형식을 빌린 도덕적 유예를 통한 자기 응시의 거부와 철저한 분열적 현실의 수용으로 귀결지어진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이 부지불식간에 그들을 타자화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며 그 타자화된 주체는 일순 각성과 각성의 상태를 형용할 수 없음-언어의 부재-에 의해 신플라톤주의자들이 처했던 것과 유사한 감정적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15)
고쳐 말하자면, 동성애자의 멜랑콜리아는 언어 없는 사고가 유발하는 숭엄sublime이며 상대화된 이성애적 질서 체계로부터 고립된, 보이지 않는 섬에서의 조망이 불러일으키는, 공포에의 도착이 불러일으키는 고양된 감정terribilita 혹은 그를 통해 야기된 정신과 육체의 특정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이 땅의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의 본원적 기질과는 무관하게 멜랑콜리한 감정에 휘둘린 채 도심 어딘가의 동성애자 공동체 이곳저곳을 방랑하는 것이다.
자, 그러면 이번에는 방랑하는 멜랑콜리한 피난민들의 피난처들의 역사와 메커니즘 그리고 가까운 미래의 모양새를 살펴보도록 하자.
II. 금호동, 그리고 종로와 이태원
게이 하위 문화 공동체는 어떻게 형성될 수 있었는가? 기실 게이 하위 문화 공동체의 시원(始原)을 따지고 파악해내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종로의 낙원동 일대에 자리한 소위 '게이 바'들이 언제부터 자리하기 시작했는지는 비교적 장기간 게이 업소를 운영한 주인들조차도 알지 못하는 역사이다. 한국 전쟁 종전 이후 극장을 중심으로 남성 동성애자 하위 문화가 형성되었다지만 알려진 바들을 종합해보자면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종로에 이반들의 유흥 문화권이 형성된 것은 70년대말인 것으로 보인다. 70년대에 금호동에 생겼던 첫번째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의(남성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를 구분하지 않고 스스로들을 게이라고 불렀다) 술집이 사라지며 남성 동성애자들은 종로로, 트랜스젠더들은 이태원으로 옮겨 각기의 업소를 열게 된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하지만, 그 시작과 상관없이 80년대에 들어서 종로의 이반 업소들이 늘어날 수 있었던 것은 남성 동성애자들의 극장 문화와 공중 화장실 문화의 대중적 확산 덕택이었다.
공중 화장실과 3류 극장이라는 공공 장소를 통한 크루징cruising 문화는 종로의 이반 업소들에게 다량의 안정적인 유입 인구를 제공했던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작위로 이용하는 공간, 그러면서도 가장 비천한 공간이기에 사회적 규제의 손길이 닿을 여지가 없는 공중 화장실과 3류 극장을 통한 남성 동성애자들의 만남은 남성 동성애자들에게 의도치 않은 시대적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물론 그러한 성적 소수자들의 공공 장소에 대한 개인적 전용은 너무나 위첨천만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불합리한 정체성을 이해할 도리를 모르던, 자신의 금기시된 욕망을 가누지 못한 이들에게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 우울하고 자학적인, 그러면서도 소위 '호모'들에게 무작정 밑도끝도없는 용기를 강요하는 그 탈출구 아닌 탈출구들이 작동하는 방식은 의외로 간단하다. "호모가 모 극장 맨 뒷줄에서 오랄 섹스를 해준다"는 따위의 이야기는 이성애자들에게 쉬이 입소문을 타고 퍼지게 마련이고 그 소문을 들은 남성 동성애자들-소위 '숨은 보갈'16)이라고 불리던-이 하나둘 모여들어 결국 퇴락한 지역의 3류 극장이라는 공간은 남성 동성애자들의 크루징 장소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몇 시경에 가면 호모가 좆을 빨아준다는 모 터미널의 화장실이 유명하다더라"는 식의 소문, 혹은 화장실에 적혀 있는 음란한 동성 성교에 대한 낙서, 또는 남자 화장실 칸막이에 뚫려 있는 의미심장한 구멍 등을 통해 남성 동성애자들의 밑바닥 문화는 하나의 고정적 하위 문화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것은 밑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고통과 자괴감을 감수한 이들에 의한 것이었으며 적지 않은 이들이 그들의 호모 짓거리를 참아주지 못한 열혈 이성애자들에게 흠씬 두들겨맞거나 돈을 뜯기기 일쑤였음은 물론이다.
그러한 비천함의 감수를 통해 만나게 된 소수의 동성애자들이 모이고 모여 종로에는 이반 업소들이 서서히 그 수를 늘려갔으며 다시 종로 소재의 게이 업소들의 존재는 『스포츠 동아』로 시작된 스포츠 주간지나 『선데이 서울』 같은 옐로 페이퍼들의 토막 르포 기사들을 통해 공공연한 사실로 유포되었다. 또한 80년대에 등장한 휴게실이 있는 사우나들은 남성 동성애자들에게 새로운 크루징의 장소를 제공하였으며, 이후에는 충무로와 이태원에 아예 동성애자들만이 출입하는 사우나가 등장하게 된다. 이쯤에서 우리는 또 다른 질문을 대면한다. 왜 하필이면 종로라는 공간에 남성 동성애자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종로의 관철동 골목 건너편에 존재하는 쇠락한 지역이 철저한 숨김을 보장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17) 도심 공동화 현상으로 사람들이 빠져나간 종로의 슬럼화된 허리우드극장 주변의 뒷골목-낙원동 일대는 남성 동성애자들에게 안성맞춤의 장소가 되어주었다. 게다가 낙원동 일대의 전통 가옥 지역은 주거지로서의 매력을 완전히 잃고 슬럼화되었으므로 이반 업소들이 파고들기에 용이했던 것이다. 하지만 80년대의 동성애자들은 그러한 조건에서조차도 안심할 수 없었는지 보통 10∼12시에나 영업을 시작하는 운영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경향은 1995년경까지도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오직 양적인 팽창이 있었을 뿐, 별다른 질적 변화는 존재하지 않았다(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사실 공동체라고 부를 만한 분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업소들은 서로간에 소통이 없었으며 자신들의 업소의 손님에게 다른 게이 바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도 않았다. 타업소의 존재를 알게 되면 손님을 놓칠 것이라는 알량한 속셈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업소간의 비소통만으로 공동체 정서가 구축될 수 없었던 것이라고 말하는 것 또한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공간을 점유하고 그 속에서 동성애자 문화를 형성하는 이들의 태도에 그 원인이 있다. 즉 그곳의 동성애자들에게 낙원동이란 그 어떠한 종류의 공간적 개연성이나 맥락성에서도 벗어나 있는 뇌수상의 '그 어떤 곳'일 뿐, 단순한 물리적 공간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관계적 정체성을 획득한 공간은 아닌 것이다.
내친김에 좀더 솔직히 말하자면 말이 좋아 공동체이지 낙원동의 동성애자 문화는 자신의 문화권과 그 스스로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 환경 사이에 그 어떤 종류의 관계망의 형성도 달가워하지 않는, 심리적으로 고립된 탈-현실의 공간이다. 애초에 그곳은 동성애적 쾌락의 교환 조건 형성을 목적으로 형성된 공간이다. 그러니 낙원동의 동성애자들은 자신과 타인간의 관계를 육체적 끌림을 통한 긴장과 동성애적 쾌락의 교환 가능한 사이 이상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그러한 양상에 미미하나마 변화가 나타난 것은 1995년경부터이다. 1994년 시작된 한국의 동성애자 운동(당시에는 '동성애자 운동'이 아니라 '동성애자 인권 운동'이라고 불렀다)이 1995년에는 활발한 언론 플레이를 통해 동성애자에게나 이성애자에게나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서 '적잖은 영향'이란 동성애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불식시켰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돌이킬 수 없는 강력한 영향이란 바로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의 대중적 유포를 의미하는데, 혹자는 이에 대해서 조금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것은 동성애자라는 단어와 그것이 의미하는 바와의 불일치와 혼돈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인간 관계를 통하지 않은 정체성 형성이란 있을 수 없음을 상기해보라. 동성애자 운동이 유포시킨 '동성애자'의 개념과 기존의 '동성애자'(혹은 동성 연애자, 게이, 보갈 등등)가 의미하는 바가 다를 것이라는 점을 쉬이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동성애자 운동 이전에는 '동성애자'란 '동성에게 성적인 끌림을 갖는 사람'일 뿐, 그것이 '우리 동성애자'라는 공동의 동질감과 연대감을 가능케 하는 독립된 정체성과 그의 집합으로서의 종족을 의미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이전의 '동성애'와 '동성애자'가 동성애자 스스로에게도 '특수한 성적 취향'과 '특이한 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 이상의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동성애를 취향의 문제가 아닌 '성적 지향성'의 문제 혹은 그 이상의 무엇으로 정정하고 '동성애자'라는 '성 정체성sexual identity'을 하나의 피억압 계급 혹은 종족으로 재정의하는 동성애자 운동의 등장은 동성애자들에게 심인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으며 그것은 예기치 못한 공동체 내에서의 변화를 초래했다.
1995년 이후 종로의 게이 공동체가 상당히 그 분위기가 밝아졌다거나 간판을 달고 버젓이 건물 1층에 유리문을 달고서 개업하는 게이 술집이 등장했다든가 하는 것은 표피적인 변화들에 불과하다. 실제 가장 큰 변화는 동성애자 운동의 등장 이후에 동성애자 공동체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과 그 이전부터 동성애자 공동체를 구성해온 사람들간의 분리와 괴리 현상이다.
젊은 층을 주로 하는 전자의 집단은 동성애자 운동가들의 활동을 통해 자신의 성적 지향을 긍정하고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며 또한 자신을 '동성애자'로 정체화하는 방식을 쉽게 체득하였다.18) 그러나 이 젊은 동성애자들은 기존의 매스 미디어가 만들어낸 낙원동 게이 문화에 대한 어둡고 끈적하고 욕지기 나는 이미지의 안개 너머에 존재하는 선배 동성애자들의 문화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했으며 따라서 이성애자들이 바라보는 종로 게이 바에 대한 편견에서 그다지 자유롭지 못하다. 반면 후자의 집단은 자신들을 정체화시키는 방식을 새로 배우기에는 자신들만의 비밀 공동체 문화에 너무 익숙해 있기에 새로운 젊은 세대들을 자신들의 공동체에 흡수하는 데에 실패하였다.19)
따라서 동성애자 운동 이후의 공동체 유입 인구는 이태원에 새로운 집단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이태원의 핑크 경제는 전에 없는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20) 하지만 그렇다고 이태원의 동성애자들이 동성애자 운동에 관심을 두거나 가시적 카운터 컬처counter culture를 형성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좋게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들을 정체화하는 방식을 보다 합리적으로 찾아낼 수 있는 세대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동성애자 운동가들로부터 부여받은 면죄부를 통해 그저 변태로서의 죄책감으로부터 이제 막 해방된 세대일 뿐인 것이다. 실제 그들 중 대다수가 커밍아웃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은 그들이 실제로는 종로의 장년층 게이로부터 그다지 먼 곳까지 뛰쳐나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문제는 이러한 양상이 당분간 그대로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여전히 종로의 게이 바들에 사람들이 가득하긴 하지만 이태원의 그것과 같이 팽창하지는 못할 것이며, 예측건대 보다 더 연령 세분화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태원을 나이와 노화가 없는 일종의 진공 상태-이성애적 질서의 한시적 망각을 제공하는-로 강화하며 기형적인 호황으로 이끌 것이다(게이 디스코텍은 IMF 시대에도 불황을 타지 않는 유망 사업이었다!). 앞으로도 이러한 현상은 계속될 것으로 보여, 나는 그러한 에이지즘ageism이 동성애자 운동의 발전을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 요소가 될 것이라 우려한다.
그렇다면 이태원 동성애자 하위 문화 공동체는 어디로 갈 것인가? 그 속에서 서구 사회에서 이미 그 모순점을 지적받고 있는 선험적으로 규정된 동성애자 정체성-레즈비언과 게이 정체성이 우리에게 온전히(?) 그 역사적 순차를 따라 발현될 것인가? 질문을 뒤집어보자. 과연 한국의 성적 소수자 운동의 활동가들은 '동성애자 정체성'에 대한 반문과 수정 작업 없이 그것을 계속해서 수용해야 하는가? 그렇다고 90년대말 모씨가 시도했듯이 퀴어 정치학을 수입해다가 자기 논리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에 자족하고 말 것인가? 과연 무엇이 진정 정치적으로 올바른 결정인가?
III. 한층 더 유쾌해진 동성애? 그리고 정체화되지 않는 이반
2003년의 동성애자 하위 문화 공동체는 어떻게 밝아올 것인가? 물론 이태원의 동성애자 클럽들은 발디딜 틈조차 없이 열띤 분위기에 또다시 휩싸인 채 새해를 맞이할 것이다(몇 년 전부터는 신년맞이 밤샘 파티가 유행하였고, 파티에는 여러 행사들까지 준비되어 일 년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클럽에 모이게 마련이었다. 게다가 여성들에게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보니 동성애자 문화에 정서적으로 호감을 느끼는 이성애자 여성들okoke과 호모포비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성애자 남성들도 몰리니 연말의 이반 클럽 경제에는 호황만 있을 뿐이다). 그들은 통신 공간에서 정신적 소속감을 보다 많이 느끼며 삐삐와 핸드폰, PCS 또는 월드폰 따위로 무장한 채 줄창 밤새도록 클럽 이곳저곳을 방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팔뚝에는 서너 군데의 게이 클럽 입장용 스탬프가 줄지어 찍혀 있을 것이고 그들의 클럽 순례-순환의 주기는 더욱 짧아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증가된 가속도만큼 보다 더 유쾌한 바디드롬bodydrome들이 산발적으로 명멸하는 것이다.
물론 동성애자 공동체 특유의 집단적 멜랑콜리아는 적어도 당분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멜랑콜리아와 동전의 앞뒷면을 이루고 있는, 그 우울함의 편린들을 털어내려는 위약(僞藥) 혹은 젠체하는 의식-'끼떨기' 문화는 영원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21) 하지만 그 멜랑콜리함은 분명히 새로운 세대들의 유쾌함에 많은 부분 가려져버릴 공산이 크다. 당장 보더라도 이태원은 종로만큼 멜랑콜리하지 않다. 그것은 새로운 세대가 동성애자 인권 운동의 담론을 선별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동성애자로서의 심인적 갈등-경험의 흔적trauma을 보다 빨리 치유(혹은 위장?)하고 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새벽 4∼5시경이 되면 부킹에 실패한 일군의 동성애자들은 사우나로 옮겨가 인간은 없고 육체만이 남아 순결해지는 공간에서 욕망의 배설 의례를 치를 것이다. 그곳에서 푸코M. Foucault의 인생을 떠올리는 이들은 자기 욕망에 충실하기를 두려워하는 멍청한 지식인들밖에 없을 것이고, 결국 사우나 퀸sauna queen들에게는 아무것도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22)
낮이 되면 종로의 '파고다극장'을 비롯한 도심 이곳저곳의 동성애자들의 크루징 극장들은 다시 젊은이들을 맞이할 것이다. 그 젊은이들은 생전의 기형도가 그랬던 것처럼 서로의 욕망을 교환코자 모든 종류의 일차적 사회-계급적 의미를 상실한 육체들의 미학에 탐닉해 있을 것이다.23) 늘 그렇듯이 '즉석'이 싫은 예비 '우아 부인'들은 극장 앞 '서 있는 사람들'에서 또다시 서로의 조건을 탐색할 것이고 이내 그들은 거리 속으로 혹은 여관 골목 어디엔가로 사라질 것이다.24)
우리가 2003년의 시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인가? 필자에게 결국, 문제적 지점은 다시 한번 육체이다. 육체가 의식을 구현하는 3D 형태의 담지태를 구성하는가 아니면 그 자체로 의식의 외연과 그 접점들을 형성하는가 하는 해묵은 논쟁은 어쩌면 성적 소수자들에게는 보다 절실한 선택의 문제로 전화되어갈지 모른다. 나의 의견은 그 해묵은 논쟁에서 후자의 편에 서 있으며 따라서 육체의 범주는, 육체가 여타의 다른 구조(혹은 구조들)로의 전환을 위한 함축성을 마주하게 되는 그의 한 형식-자아의 지점에서 '사건과 경험의 경계event-horizon 혹은 그 경계들의 구조'로서 파악된다.25) 따라서 특정 정체성에 대한 계몽은 특정한 경험과 그로부터 얻어지는 의식의 강요일 수 있다. 바꾸어 말해 특정 정체성이 그 정체성 계몽의 소구 계층인 특정 분중life-style-segmented class들의 실제 경험과 그를 통한 일차적 의식과 괴리되었을 때 그것은 몸에 맞지 않는 특정 정체성의 '강요'에 다름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이태원 성적 소수자 하위 문화 공동체는 어떠한가? 적어도 그곳에서 남성의 육체를 통해 동성애적 경험을 물화시킴으로써 자신들의 그 어떤 특정 정체성을 구성해나가는(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남성 동성애자들에게 커밍아웃이라는 셋푸쿠 의식(일본의 전통적인 자살 의식)은 매력 없는 선택으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왜냐고? 근대화modernization 과정의 완료-주지하다시피 그 완료라는 이상점은 실재하지 않지만-이전에 이미 유목민화되어버린 그들에게 게이 공동체는 논사이트non-site한 공간일 뿐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애초에 그곳에 축적될 수 있는 것은 없기에 형성될 그 어떤 합리적 정체성 따위는 희박하다. 경험을 축적하는 공간이 부재하므로 연속적인 육체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합리적인 연속성을 가지는 정체성의 형성을 막는 그 어떤 공통의 아우라aura의 등장을 발견하기는 상대적으로 아주 쉬운 일이다.
따라서 2000년대를 살고 있는 한국 거주 성적 소수자들에게는 분열적인 라이프 스타일의 선택이 더 현명한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한국에서는 서구와 같은 시민으로서의 게이라는 개념은 도래하지도 않은 채 폐기되어버린 셈이며, 따라서 동시에 퀴어와 퀴어 정치학은(그의 한국 버전-번역·편역물들의 난해한 논조가 일으킨 일련의 소통 불가능성과는 무관하게) 더더욱 불가능한 문제 제기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의 대중적인 인지와 소통이 가능한 합리적 성적 소수자 정체성의 성립은 불가능한 것인가? 꼭 그러한 것만은 아닐지 모른다. 희망적인 전망에 대한 강박증으로 인한 성급한 판단일지는 모르겠지만, 이태원의 성적 소수자 하위 문화 공동체에서 한국 사회에서의 구체적인 경험과 각성을 통해 배태되고 있는 새로운 동아시아적 성적 소수자 정체성의 가능성을 읽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가능성을 '이반'이라는 정체성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애초에 그것은 주장이라기보다는 실험적인 문제 제기에 가까운 것으로 시작되었지만). '이반(異般)'은 글자 그대로 다른 계급 혹은 각자 서로 다른 개인이라는 뜻을 가지는,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적 소수자 전반을 지칭하는 새로운 정체성의 이름이다. 그것은 '일반(一般)'이라는 단어를 패러디한 것으로서 애초에는 종로의 게이 바들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남성 동성애자들만의 여러 은어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따라서 동성애자들에게 '일반'은 이성애자[좀 덜떨어진]를 의미한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이후 동성애자/이반 운동가들이 처음으로 '이반'이라는 단어를 정치화시켜 사용한 이래 '이반'이라는 말은 고정화된 게이 정체성을 거부하는 대안적인 이름으로 맥락화되었으며, 이어서 통신 공간을 통한 대중적 사용으로 '이반'이라는 단어의 외연은 성적 소수자 전체의 것으로 확장되어왔다.
따라서 2003년의 지형에 발딛고 생각할 때, '이반'이라는 단어가 동성애자 하위 문화를 넘어 대중적인 소통력을 획득하며 정치화될 수 있으리란 기대를 조심스럽게 가져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각성을 가능케 하는-구체적인 경험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파열구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한, 이반은 여전히 동성애자 공동체만의 은어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 그것은 새로운 대안적 지점을 멀리 지시하고 있을 뿐 현실 속에서 실제-실천praxis들을 통해 정체화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대안적인 정체성의 대두가 부재하는 한, 오늘날의 이태원은 사이버스페이스의 연장, 아니 역투사된 유혹과 쾌락의 시뮬레이션 게임장에 불과하다. 그러니 앞으로는, 행동주의의 강령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자칭 진보적 지식인'들에겐 아래와 같이 시니컬하게 주둥이를 놀려대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한층 유쾌해진 동성애는 그 담지태(혹은 구현의 장)인 육체를 넘어 저 홀로 자가 생산-생존하는 비결을 찾았나보지?
하지만 유쾌한 동성애가 유쾌한 인생을 보증해줄 리는 만무하다. 그에 대한 가장 큰 원인은 우리 사회에서의 AIDS 문제일 것이다. 남성 동성애자들은 다른 의미에서 또다시 육체의 문제에 주목하도록 강제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HIV 보균자의 수는 꾸준히 늘어가고 있고 1996년도에 줄어들었던 동성애자 신규 보균자의 발생 건도 1997년을 기점으로 증가하기 시작하여 작년에는 1,051명의 신규 보균자가 보고되었다. 이것은 일종의 위험 사회risk-society적인-이미 우리 사회의 기저에서 작동되고 있는-시한폭탄이다. 주류 사회의 무관심과 'AIDS퇴치연맹'과 같은 AIDS 관련 단체의 무책임한 도덕론이 그 시한폭탄의 시계를 돌아가게 한다. 여전히 존재하는 실명 신고 의무 조항은 구체적인 보균자의 현황 파악조차 힘들게 하고 있으며 대다수의 보균자들은 국가와 의료 기관으로부터 적절한 지원과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고 있다.
올해에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인가? 글쎄, 서울 어드메에 한줌의 공간이라도 HIV 보균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제공될 수 있을까? 부단히도 노력해온 AIDS 칵테일 요법의 보험 처리 문제가 뒤늦게나마 이웃 일본처럼 해결되어 효과적인 신약들이 대중적으로 제공될 수 있을까? 합리적 예측은 불가능하고 시니컬한 독설은 너무 쉬운 만큼 더욱 무책임하게 들릴 뿐이다. AIDS는 전술한 바와 같이 육체가 주요한 경험과 그를 인지하고 축적하는 접점들을 구성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반성적이며 철학적인 문제적 지점을 구성한다. 단언하지만 AIDS 문제는 조만간 의료와 보건 문제를 넘어선, 우리 사회의 그 어떤 문제적 지점들을 폭로해내며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이해 당사자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할 것이다. 도덕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하자면, 문제는 단 한 가지-'그 과정에서 발생할 무고한 희생자들의 수를 얼마나 줄여낼 수 있을 것이냐'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필자를 비롯한 동성애자/이반 운동가들에겐 보다 긍정적인 이바구를 놀릴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가도록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일만이 선택 가능하다. 역시 가까운 미래에 대한 상상조차 성적 소수자에게는 애초부터 사치스러운 일이었던 셈인가?
1) '이반(異般)'은 성적 소수자를 총칭하는 한국 동성애자 하위 문화 공동체의 은어이다.
2) 오니츠카 테츄로 교수: 커밍아웃한 교토 대학 스페인어과 교수로 AIDS 액티비스트이자 게이 액티비스트로 활동중이며 다문화공생센터에서 상담원으로 일하고 있다.
3) 가와무라 미츠마사: 오사카에서 동성애자 운동에 힘쓰고 있는 한국어 교사. 1995년 한국에서 한국 동성애자 운동의 태동기에 한국과 관련을 맺기 시작하여 양국의 동성애자 운동간의 교량 역할을 해오고 있다.
4) 야수시 사와자키 박사: 널리 알려진 AIDS 운동가. 현재 도쿄에 있는 JFAP(Japanease Foundation for AIDS Prevention)에서 일하고 있다.
5) 아트 스케이프: 교토에 있는 OGO단체들의 연합 공간. Safe Sex Professional 모임과 AIDS Poster Project 등의 5개 단체가 함께 사용하는 Alternative Space가 Art Scape이다.
6) 어커:도쿄의 남성 동성애자 운동 단체로 유스호스텔의 게이 사용 금지 조치에 대한 법정 투쟁과 그를 통한 승리로 유명하다.
7) OGC: 오사카 게이 콜리션을 말한다. 가와무라 상이 소속된 단체.
8) 간사이 게이 전선이라는 이름의 이 단체는 간사이 지방을 상대로 하는 남성 동성애자 운동 모임이다. 전통적으로 공산당이 강세인 지역적 전통의 영향이 이름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1997년 일본 방문시 간사이 게이 전선의 기관지와 인터뷰를 했었는데 양국 운동 사이의 공통점과 미묘한 차이들을 알 수 있었던 매우 흥미있는 자리였다.
9) 작년 한 해 동성애자 업소들이 외국 동성애자 관광객들을 상대로 벌어들인 외화는 결코 만만치 않은 액수이다. 90년대, 친구사이(ChinGusai-Seoul)가 한국 동성애자 운동과 공동체에 대해 『게이 트래블 가이드』 『스파르타쿠스』 『바이섹슈얼 리소스 북』 등을 통해 활발한 홍보 활동을 벌인 결과, 1997~1998년부터 외국인 동성애자들의 한국 방문이 늘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많은 동성애자 관광객들은 그 홍보를 통해 한국을 동성애자에게 비교적 안전한 관광지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많은 관광 수입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동성애자 업소들을 단속하겠다고? 심야 영업 금지법도 사라진 마당에 동성애자 업소를 제재할 법적 근거는 전혀 없다. 어떠한 종류의 차별적 단속에 대해서도 한국 동성애자 운동은 정당한 법적 투쟁을 불사할 것이다. 오히려 동성애자 업소들은 '외화벌이 효자동이'로 상을 타야 마땅하지 않을까?
10) '서울대학교 동성애자/이반 모임 마음001'은 2003년 현재 '마음011'로 개칭되었다. 서울대 이반 운동 모임은 열린 마음의 사회를 기대한다는 뜻에서 '마음'을, 그리고 우리 사회의 동성애자의 인권 수치를 100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1이라고 보아 '001'을 이름으로 붙여 '마음001'로 시작하였다. 1996년에는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자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활동을 보인 1995년의 성과를 고려해 동성애자 가시성의 신장을 이유로 003으로 개칭하였으며 1998년에는, 1997년의 최초의 동성애자/이반 공개 대중 집회 성공과 김대중 대통령이 동성애자 인권 운동을 인권의 차원에서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히는 등의 여러 의미 있는 변화를 고려, '서울대학교 동성애자/이반 운동 모임 마음006'으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2000년에는 '친구사이' 내의 HIV 보균자 모임의 발족과 서울대학교 모임 산하의 '이반 청소년 자긍심 학교' 프로그램의 실시 등을 고려하여 008로 개칭하였으며, 작년에 있었던 6월의 동성애자 자긍심 퍼레이드의 성공 이후 그 수치를 011로 상향 조정하였다.
11) Someday, these invisible refugees will be bright fusees of ebahn rights.
12) 게이gay는 남성 동성애자를 지칭하는, 시민권을 기초로 한 동성애자 인권 운동의 언어이다. 레즈비언lesbian-사포Sapho와 그녀를 따른 여성들이 세웠다는 전설의 섬, 레스보스Lesbos의 사람들이라는 뜻-은 여성 동성애자를 말하는 전통적인 여성 동성애자 공동체의 자긍심의 이름이다. 동성애자 공동체의 가려진 역사가 점차 밝혀지고 있는 가운데, 근대적 의미의 남성 동성애자 공동체 형성의 역사는 한국 전쟁 이후로까지 끌어당겨져 올라왔다. 그 최초의 역사적 증거는 명동 근처의 경동극장을 남성 동성애자들이 점유해 사용했던 사실에 기초한다. 이에 대해서는 '친구사이' 학술부의 '동성애자 하위 문화 자료실'의 보고서를 참조하라.
13) 서동진, 「심미적인 너무나 심미적인 이 도시의 뒤안: 서울의 게이콤뮤니티gay community에 대하여」, 『누가 성정치학을 두려워하랴』, 문예마당, 1996, p. 229.
14) Erwin Panofsky, D rer, 제1권, London, 1964, pp. 156∼71.
15) 타자성이 내재화되는 순간 주체가 심미적인 상태에 빠지는 상황과 그에 대한 또 다른 논의는 스콧 래시Scott Lash가 주창하는 미학적(심미적) 성찰성aesthetic reflexivity를 참고할 수 있다. 그의 견지를 빌리면, 일상성의 공간에서의 변환으로 타자화되어가는 성적 소수자들에게 나타나는 미학적 성찰성의 증진은 당대 사회의 한 특징으로 파악된다. 현재 스콧 래시의 책은 『현대성과 정체성』(스콧 래시 외 편, 윤호병 외 역, 현대미학사, 1997)과 『기호와 공간의 경제』(스콧 래시 외, 박형준 외 역, 현대미학사, 1998)의 두 권이 나와 있다.
16) '보갈'은 '갈보'를 뒤집은 말로서 동성애자들이 스스로에게 붙인 자기 비하적인 은어이다. '숨은 보갈'은 동성애자 공동체에 나오지 않는 동성애자들을 말한다.
17) 낙원동 일대에 동성애자 업소들이 모여든 이유에는 60년대 중반에 진행되었던 도심 재개발 사업이라는 물리적 배경이 존재한다. 주지하다시피 박정희 정권하에서 근대 도시 건설의 야심을 키웠던 건축가들은 3·1 고가도로와 낙원 아케이드(현 낙원상가)의 건설 등을 통해 전통적으로 발달되어온 서울의 동·서 축을 강화시키고자 했었다. 그러한 야망을 지닌 모더니스트들에게 종로 3가에서 종묘에 이르는 배후 도로에 존재했던 거대 사창가 지역-소위 '종삼'이라고 불리던-은 눈엣가시 그 자체였기에 60년대 중반 도심 재개발 프로젝트와 함께 '종삼'은 미아리 쪽으로 강제 이주되었다(그것이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미아리 텍사스'의 시작이 되었다). 그러나 모더니스트 건축가들의 기대와는 달리 매매춘 여성들이 떠나버린 자리를 메운 것은 동성애자들이었다. 명동과 인사동 등지에 산재하던 소수의 동성애자 업소들이 종삼 소개지의 왼편을 차지한 것이다(물론 낙원동 동성애자 공동체가 오늘날과 같은 거대 밀집군을 형성한 것은 70년대의 일이다). 필자는 이러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강제적인 방식으로 도시가 '청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명백한 교훈이라 생각한다.
18) 이러한 새로운 세대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계급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들은 바로 1974년 이후 태어난 2차 베이비 붐의 주역들이며 중산층 신화 속에서 자라난 본격적인 소비 세대인 것이다. 즉 근대적 의미의 동성애자 정체화의 진행은 도시의 발달과 그 속에서 진행, 축적되는 중산층과 베이비 부머들의 역할과 위상에 크게 좌지우지되어왔던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지나치게 계급 결정론적인 시각일지 모르겠으나) 동성애자 운동의 개척자들이 모두 1차 베이비 붐이나 1차 베이비 붐의 휴지기에 속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은 동세대의 계급적 기반의 취약 때문에 자신들의 세대 내에 큰 운동 흐름을 못 만들어낸 반면, 2차 베이비 부머들은 운동 논리보다는 전반적인 집단의 흐름을 통해 전체 남성 동성애자 하위 문화의 양상을 바꾸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19) 사실 종로의 장년층 동성애자들은 동성애자 운동에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들 중 상당수는 기혼자이지만 자신을 동성애자로서 정체화시키지 않기에 결혼 생활을 지속하는 것에 대해 별다른 죄책감이나 갈등을 느끼지 않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그러니 자신들이 몸으로 개척한 자신들만의 정체화 방식-자기 비하적이고 자폐적인-을 그르다고 주장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요구하는 동성애자 운동이 그들에게는 불행을 자초하는 이들의 요란스런 책동 혹은 조용히 숨어 있는 게이 공동체를 뒤흔들어 사회의 비난을 양산하는 '문젯거리'로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더욱 씁쓸한 것은 종로의 소위 '꼰대' 동성애자(나이 많은 동성애자)들이 1995년 이후 자신들을 양성애자bi-sexual라고 규정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중적 생활 방식을 합리화하려는 양상을 보여왔다는 점이다.
20) 핑크 경제pink economy란 동성애자를 소비자로 하는 모든 종류의 경제 활동을 지칭한다. 동성애자 시장은 물론 핑크 마켓pink market. 서구에서는 핑크 산업의 발전을 위한 핑크 페어pink fair 같은 행사도 곧잘 열린다.
21) '끼떤다'는 말은 한국 남성 동성애자들의 은어로서 남성 동성애자들의 과장된 여성적 행동을 '끼'라고 하고 사회 통념상 여성적 몸짓과 목소리라고 간주되는 일련의 행동들을 과장하여 수행하는 것을 '끼떤다'고 한다. 보통 그것은 남성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여성으로 자신을 귀인(歸因)attribution했던 어린 시절의 정신적 상처에 기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자신의 불행성을 여성의 육체 혹은 여성성에 각인되어 있는 불행성에 투사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재정의되어, 배제적 정의로서 얻어지곤 하는 '여성성 결여의 강박적인 이성애주의적 남성다움'에 대한 힐난과 풍자의 기제로서 사용되는 수도 있다.
22) 동성애자 사우나의 크루징 문화에서 변화될 지점이 꼭 없는 것만은 아니다. 첫째, 단속이 있건 없건 그 수는 늘어갈 것이라는 점, 둘째, 앞으로는 사우나에서 자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콘돔을 사용하는 동성애자들이 더욱 늘어날 것이라는 점이다. 사우나에서의 콘돔 사용은 1997년경, 동성애자 운동 단체들의 AIDS 운동 노력에 의해 현실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1997년말에 있었던 「KBS 뉴스 파노라마」에서의 '동성 연애자(!)들의 사우나 집단 섹스'에 대한 고발 기사를 보고 이성애자들은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지만 동성애자 운동가들은 기사의 어이없는 논조-모든 게이들의 삶이 이와 같고, 그러한 '동성 연애자'들이 AIDS의 주범이라는 식의-에 기가 막혀하면서도 사우나 휴게실 바닥에 널려 있는 쓰고 버린 콘돔들을 보고 뛸 듯이 기뻐했다. 그것은 콘돔 사용이 대중화되어간다는, 우리의 대안적인 AIDS 운동의 성과를 입증하는, 분명한 최초의 증거였기 때문이다.
23) 기형도는 동성애자들의 크루징 장소인 종로의 파고다극장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으며 사인은 '과도한 흥분에 의한 심장마비'로 밝혀졌다. 굳이 군말을 붙이지 않아도 기형도가 어떻게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고인의 지기들은 그가 동성애자였음을 애써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고인을 죽어서까지 욕되게 하는 치졸한 동성애자 공포증의 발로에 다름아니다.
24) '즉석'은 파고다극장 안에서 곧바로 섹스를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그리고 '우아 부인'은 내숭 잘 떨고 다른 동성애자들을 곧잘 비난하며, 빚을 내서라도 반드시 비싼 옷을 입고 다니는 우아한(?) 동성애자들을 지칭한다. '서 있는 사람들은' 파고다극장 앞 2층에 있는 커피숍의 이름이다. 극장에서 눈이 맞은 동성애자들의 첫번째 코스가 보통 '서 있는 사람들'이다. 그 이름은 주인이 일부러 그렇게 지은 것일까? 아니면 우연의 일치일까?
25) Christine Battersby, "Her Body/Her Boundaries," THE BODY, the Academy Group, 1993, pp. 35∼38.
이 글은 1998년 문학과 지성사의 무크지 [이다]에 기고한 것입니다. 2003년에 발행된 척한 것은 맞습니다만, 글을 쓴 시점은 98년입니다. 어느 분이 퍼옮기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과 다르오니 수정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이정우 드림 crazy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