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aymunhak 에서 재발췌한 글입니다. 두 가지 글을 한데 묶었으니 착오 없으시길... )
< 버그 체이서 (bug chaser) - 의도적 에이즈 감염자 >
이영재 yj_lee@cultizen.co.kr
최고 권위를 구가하는 음악 잡지 [롤링스톤]의 2월 6일자(1월말 발간) 특집 기사는 웬만한 성적 이슈에는 눈 하나 꿈쩍 않는 미국인들에게도 상당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기사는 HIV(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된 동성애자를 찾아 헤매는 뉴욕 거주 카를로스(가명)를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그렇게 위험한 존재를 수소문하는 이유는 계도나 보호 등 휴머니즘적인 것이 아니다. 성 관계를 맺어 자신도 HIV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이 카를로스의 목적인 것이다.
이런 개인적 사례보다 더 놀라운 것은 샌프란시스코의 밥 카바이(Bob Cabaj) 박사가 제시한 통계치이다. 그에 따르면 요즘 HIV 감염되는 동성애자 중 25% 가량이 의도적인 성 접촉을 통해 감염된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끔찍한 집단 자살의 욕망이 미국 언더그라운드에 몰아치고 있는 셈이다. [롤링스톤]의 기획은 대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미국 내 유력한 언론 매체들의 주목을 받았다. 선정주의에 물들어 과장된 정보를 유포한다고 [롤링스톤]의 소유주와 편집진을 향해 침을 뱉는 저널리스트도 적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롤링스톤]가 보도한 카를로스의 존재 자체는 특종이 아니다.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미국 사회에는 스스로 HIV에 감염이 되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있어왔고 회자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들을 버그 체이서(bug chaser)라고 부르는데 '병원균(버그)을 쫓는 사람들'이라고 번역하면 될 듯 하다.
그들은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을 즐기는 극단적인 언더그라운드 집단이다. 당연히 콘돔과 깨끗한 주사기는 웃음거리이다. 감염에 이를 때까지 서로 무방비 상태에서 피와 체액을 나눌 뿐이다. HIV 감염은 그들에게 서로에게 축하할 행운이요 구원이다.
버그 체이서의 극단적 허무주의는 범속한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들 나름으로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엄격한 터부를 뛰어 넘는 쾌감을 즐기고 죽음의 본능을 충족시켜 포만감을 만끽한다. 또 HIV 감염을 통해 죽음의 공포를 공유한다는 것은 너무나 특별한 경험이므로 버그 체이서 커플을 절대적인 관계로 만든다. 카를로스가 [롤링스톤]에 밝힌 바에 따르면, HIV 감염은 자유도 가져다준다. 일단 감염이 되고 나면 안전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고 누구와도 자유롭게 관계를 맺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버그 체이서는 끝까지 미쳤거나, 아니면 세계와 존재의 구속을 넘나드는 불온한 모험가들이다.
<< 콘돔에게 묻다: 에이즈시대의 게이, 또 하나의 정체성 >>
이후소 huso.yi@verizon.net
뉴욕대학교 인간 성연구 프로그램 (Program in Health: Human Sexuality) 박사과정에서 논문을 작성 중이며, 미국국립개발연구소 및 뉴욕 St. Vincent Medical Centers of Manhattan/NY의 에이즈 연구센터에 재직하고 있다. 한국 성적소수자 문화인권 센터 부디렉터.
이 글을 읽기 전에 컬티즌에 기고된 “버그 체이서” 를 먼저 읽어주기 바란다. 나의 글은 그 글에 對한 글이다. 버그체이서, 그들은 (저자가 말하길)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을 즐기는…극단적 허무주의 범속한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엄격한 터부를 뛰어 넘는 쾌감을 즐기고 죽음의 본능을 충족시켜 포만감을 만끽하는…끝까지 미쳤거나, 아니면 세계와 존재의 구속을 넘나드는 불온한” 집단일 수 있다.(1) 아니,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마치, 개고기를 먹는 한국 사람들이 dog-eater 라고 불리면서 “살인마” 로 보이는 것처럼. (서구에서는 dog-eater 를 man-eater 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이러한 취급에 대해 한국 사람들은 몸서리를 치면서, 그들의 상대문화에 대한 몰이해에 질색을 하면서 그들을 “무식한” 이들이라고 까지 한다. 문화 간의 이해 부족은 “무식” 혹은 “미친, 불온” 이라는 거친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 나는 이 글을 통해 그 거친음들을 조율해보고자 한다.
배어백킹(barebacking)은 HIV 감염 위험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콘돔을 사용하지 않고 하는 섹스 혹은 그 섹스를 추구하는 행위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 의도성과 적극적인 의사결정 과정이다. 즉, "어쩌다가" 콘돔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맥락이 아닌, 콘돔을 사용하기 싫다는 동기와 콘돔을 사용하지 않고 섹스를 한다는 행위를 뜻하는 것이다. 그것은 “협상된 안전(negotiated safety)" 이라는 오랜 기간동안 함께 한 게이 커플들이 HIV 검사를 받고, 서로 믿고 대화하는 관계 속에서 콘돔을 사용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이 지점에서 게이가 꼭 사용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불안감이나 거부감이 있다면 이건 어떨까? 왜 이성애자 커플 혹은 부부들이 콘돔을 사용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그러지 않으면서, 게이 커플들이 콘돔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면 거부감과 의심을 표하면서, 사회의 불순자, 악, 일탈자 등등의 온갖 낙인 내림을 하는 것인가? 여기에 게이의 몸에 대한 사회-정치적 해석이 있을 것이다. 게이들에게 콘돔이 전부일까? 그들에게도 사랑과 섹스가 전부일 수는 없는 것일까?)
9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배어백킹(barebacking) 이라는 말이 미국 게이 커뮤니티 내에서 떠돌기 시작했고, 하나의 행위로서의 논의 단계를 넘어 하나의 집단 정체성으로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1995년 [스트림 Stream]지의 사설란에서 게이 커뮤니티는 콘돔사용에 대해서 회의를 가지는 한 사람의 "고백"을 처음으로 공적으로 접하게 된다. 게이 작가인 스콧 오하라(Scoot O'Hara)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콘돔 사용하는 것에 지쳤습니다.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HIV 음성인 게이들에게 HIV 감염되지 말라고 격려해주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원문: I'm tired of using condoms, and I won't... and I don't feel the need to encourage negatives to stay negative)”
그 이후 "콘돔을 사용하지 않는 그리고 "콘돔을 사용하기 싫어하는" 게이들에 대한 글들은 그들이 사회에서 어떤 식으로 그려지는 지를 보여준다. 다음은 그러한 기사들의 제목이다. 1996년 [뉴욕타임스 The New York Times]의 "자살과 놀아나기(Flirting with Suicide)" 1997년 [뉴스위크 Newsweek]의 "죽음의 댄스(A Deadly Dance), 1998년 [애드보케이트 The Advocate]의 "배어백킹? 골빈사람들!(Barebakcing? Brainless!)" 1999년 [애드보케이트]의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Don't Fear the Fear)". 그야말로 자극적인 제목들은 게이 커뮤니티 구성원 - 게이와 게이의 문화와 인권을 지지하는 사람 - 의 실존과 지위를 위협하기에 충분하였다.
또 한편에서는 AIDS와 관련하여 커뮤니티를 공격한 글이 있었다. 1996년 [뉴욕타임스]에 실린 "에이즈가 끝났을 때 (When Plagues End)"라는 글은 갈수록 어려워져가는 AIDS 운동의 노력에 치명적인 제동을 걸었다. 이러한 커뮤니티 조각내기 조작에 대한 반응은 쉽게 상상이 갈 것이다. 게이 커뮤니티를 둘러싼 내/외부는 허탈과 분노에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혹은 정죄하기에 급급하였다. 그러한 “반-공리”적인 행위는 일반 사회가 게이 커뮤니티를 재타격하기에 더없이 적당하였기 때문이었다. 배어백킹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 흘러나왔고, 그리고 그것은 분명 이에 대해 듣기를 원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일까? 그리고, 왜 배어백킹이라는 성적 네트워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게이 커뮤니티를 둘러싼 내/외부에서 이런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난 15년 동안 우리 커뮤니티를 생존 시키기 위해 그렇게 애써왔는데, 이제 와서 뭔 짓이냐? 콘돔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니네들 그런 식으로 놀아나고 나서 다시 AIDS가 증가하게 되었을 때 다시 도움을 청하면 누가 너희를 도와줄 것 같냐? 정말 그런 식으로 놀아나면 우리도 지치고 화가 난다." 왜 그랬을까?
후기-에이즈칵테일 (Post HAART Era; HAART-Highly Active Antiretrovirus Therapies)시대에서 이러한 게이 섹슈얼리티는 중요한 이슈들을 제기하고 있다.
첫째, AIDS 시대의 몸의 관리에 대한 도덕성과 책임감에 얽힌 규제9로 짓눌린 게이 커뮤니티의 실태를 드러내었고, 둘째, AIDS 발생 20년이 지난 지금, 에이즈 칵테일 시대의 게이 섹스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법을 필요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배어배킹과 "협상된 안전" 에서 제기하는 문제는 "오직 콘돔"이라는 보건정책의 실패와 연결된다. 자신의 몸에 대한 자유와 권리의 주장은 인류가 시작되면서부터 있었던 일이다. 동시에 이에 따른 통제와 감시 또한 있어왔다. 특히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의 행사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경우에는 사회적 제재가 적용된다. 바로 전염병이 그 중의 하나이다. 배어백킹이라는 위험-정체성(risk-identity)에 대한 논의는 미국에서도 이제 막 진행되고 있다. [2부 이어짐]
"GAY = GOT AIDS YET(너 아직 AIDS에 안 걸렸니?)" 이 속어는 AIDS 초기 1980년대에 미국 게이 커뮤니티 사이에서 유행했던 말이다. 80년대 AIDS는 미국 게이 커뮤니티 사이에서 급속도로 번져나갔으며, 역병 초기 3년 동안 게이들은 그 병의 원인과 예방법도 모르는 상태에서 공포에 떨며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다. 주위의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들이 AIDS와 연관된 병으로 나날이 죽어갔다. 그런 절박함 속에서 "죽을 사람"과 "살아남은 자"들의 관계는 과연 어떠했을까?
그러던 1980년대 초, 이들 커뮤니티에 경계령이 내려졌다.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게이 커뮤니티에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콘돔을 사용하라. 그것만이 우리가 사는 길이다"는 엄한 지령이 떨어졌고, 죽음의 불안감 속에서 게이들은 콘돔에 자신의 존재를 맡긴 것이다. 한 "종족"의 존속 여부가 콘돔사용에 달려있었다. 문제는 그러한 경계령 조치가 20년 동안 계속 되어왔다는 것이고, 생사의 엇갈림이 일상이 되어버린 상황은 "어떠한 경우에도 꼭 콘돔을 사용해야 되는가?"라는 의문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끊이지 않는 HIV 감염의 위협으로 몰려드는 피로(epidemic fatigue)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AIDS 역병기 대처에 대한 희망(epidemic hope)의 다이내믹은 배어백킹이라는 문화를 천천히 배양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 중반을 전후로 미국 사회 내에서 이루어진 AIDS 역병기 역사를 보면, 미국질병통제연구소 (CDC)는 95년 최초로 에이즈 환자의 숫자가 줄어들었음 - HIV감염자가 준 것은 아니다 - 을 보고하였고, “에이즈 칵테일” (Highly Active Antiretrovirus Therapies/HAART)의 효과가 입증되면서, AIDS는 더 이상 "죽음의 병"이 아닌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바이러스의 활동을 중단시킬 수 있는 관리가 가능한 병"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한편, 1995년에는 HIV 음성 게이들의 문제들을 다룬 두 권의 책이 최초로 출간되었다.
[역병기의 그늘: 에이즈 시대의 HIV-음성 In the Shadow of the Epidemic: Being HIV-negative in the Age of AIDS] 과 [HIV-음성: 감염되지 않은 이들은 어떻게 AIDS 에 영향을 받았는가 (HIV-Negative: How the Uninfected Are Affected by AIDS0 )라는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HIV에 감염되지 않은 게이들의 삶 역시 HIV 감염된 게이들만큼이나 심리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었고, HIV 에 감염되지 않은 게이들의 정체성과 삶들에도 관심을 가져줄 것을 요구한다.
감염되지 않았으면 “그만” 일 것 같은 그들에게는 “살아남은 자", 생존자의 죄의식과 심리적 마비가 있었던 것이다. "왜 나는 살았을까? 나만 살았을까?" 대형참사에서 생존한 이들의 경우에도 이런 경우가 많이 있다. "생존자의 죄의식"이 AIDS 시대에 더욱 묘하게 끼어 드는 점은 AIDS는 이미 죽음이 신호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삶의 의미가 "병이 있고 없음"을 떠나서 있다면, HIV 감염여부 역시 삶의 진정한 의미를 가리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라고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까? "HIV 감염되지 않았다고 해서, HIV로부터 영향 (해)을 입지 않은 것은 아니다 (Not being infected ≠Not being affected).”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끼어 든다. AIDS로 인하여 사람들을 잃은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그들과 즐길 수 있는 친밀감 또한 상실한 것이다. 이는 한 순간의 재난으로 인한 상실이 아닌, 지속적인 생활의 상실이었으며, 이는 쉽게 자아의 상실로 이어진다. 이제서야 “몸 안의 사정하는 친밀감”을 말하는 이들. 이들의 언술은 무척 개인적이다. 커뮤니티의 문제가 아닌 그들의 감정을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극히 개인적인 진술은 어느 정치적인 발언보다 더 강력할 수 있다. 그렇다, 정치적이다.
정액의 교환을 통한 친밀감의 의미는 지금까지 제도권이 AIDS를 가지고 행했던 게이 섹슈얼리티에 대한 착취와 통제에 대한 성적 해방 욕망의 드러냄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 말함 속에서 정체성을 찾고 조직과 네트워크 내의 멤버십을 만들어 가고 있다. 역병기에서 지친 몸과 AIDS 치료에 대한 희망의 혼란 속에서 그들의 "콘돔-거부" 섹스는 더욱 정치적으로 움직여지고 있다. 그러한 움직임을 상업자본주의는 포착하여 이런 모토를 만들어 내었다. "자긍심을 가지고 내 안에 싸라. (Come Inside With Pride)"라는 해방과 실험의 욕망을 향한 이러한 시도는 어쩌면 "전복적인 욕망"으로 코드화 되면서, 그 특정 성관계가 페티쉬되었을 수도 있다. 배어백킹은 위험, 낙인, 비밀, 거부감 등의 페티쉬의 조건을 더없이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어백킹에 대한 반발은 게이들의 “정액 나눔"을 오랫동안 금지했을 뿐 아니라 혐오로 일관한 AIDS 예방운동에 대한 제동을 거는 무엇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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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후소. 개고기와 게이섹스: 에이즈시대의 게이섹슈얼리티. 버디 2003 봄호 참조. 필자는 그 글에서 배어백킹에 대한 이론을 바탕으로 더욱 심도있는 논조를 전개하고 있다. 이 주제에 관심있는 사람은 반드시 읽어보길 권한다. 연락: 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