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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3 - 호모 사절 : 사우나와 찜질방의 역사
2003-10-22 오전 00:3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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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동성애 게토, 오욕과 오명의 연대기 (총 4회 연재)

1998년 이송희일

1. 서 있는 사람들 - 극장의 역사
    
2. 길녀, 베니스에 가다 - 터미널, 공원과 남산의 역사
    
3. 호모 사절!  ― 사우나와 찜질방의 역사

4. 박꽃 흐드러진 white saturday night  ― 게이바의 역사


호모 사절 : 사우나와 찜질방의 역사

이번에는 누가 들어도 그럴싸한, 허나 약간은 골치 아픈 철학적 개념으로부터 시작해보자.
욕망은 인간의 본질 그 자체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이 자기의 존재를 지속하려고 하는 노력이다.

오호라, 어느 누가 귀담아 들어도 썩 그럴듯해서 잠언록 한 귀퉁이를 이 문장으로 더럽혀도 별 탈이 없을 성싶다. 그러나 이 판에 박은 듯한 개념이 쓰여진 17세기 철학서의 다음 페이지의 한 문장은 놀랍기 짝이 없다.  

… 이러한 사실에서 각 객체는 선이라고 판단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노력하여 추구하며,
또한 반대로 악이라고 판단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거부한다….


보편타당한 만인의 도덕이 게 눈 감추듯 감쪽같이 사라진, 해서 쫑긋 귀 세운 독일 철학자 칸트가 무덤에서 화들짝 일어날 이 사특하고 발칙한 망발. 기껏 인간 각자의 변덕스런 욕망에 의해 그 고귀한 선과 악이 함부로 구별된단 말인가? 의당 윤리 교과서 책임자들과 입법자들은 붉은 띠 머리에 두르고 가두행진을 벌일 법하다.

실제로 서기 1675년 후미진 2층 다락방에서 안경 따위를 세공하다가 이따금 안개 낀 암스테르담 골목을 산책하던 노총각 철학자 스피노자는 [윤리학]의 후반 대미를 이렇게 장식했다.
그리고 이러구러 세월이 흘러 300년이 지난 뒤 언젠가 필자는 이 한 권의 책을 은연 중 읽게 되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필자에게 한 동성애자가 보낸 편지와 이번 글을 준비하느라 사우나와 찜질방을 돌아다니면서 얻은 미묘한 갈등 때문에 다시금 그 책을 읽게 되었다. 취재 상황에서 빚어진 혼란에 대해 나름대로의 정리를 구하고자 그 골머리 썩히는 난해한 책에 또 다시 코를 빠뜨렸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우나 ─ 찜질방의 역사와 곧 써내려가야 할 기술(記述) 사이의 윤리적 간극을 어떻게 메워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은 데다가 찜질방 사랑의 위풍당당한 행진곡을 최대 볼륨으로 연주해준 상계동氏의 경고성 편지가 취재 내내 필자의 뇌를 온통 뒤흔들었기 때문이었다. 게이 목욕탕 역사의 기원은 없다

TV 프로그램의 최대 적은 시청자의 의심이다. 시청자들의 의심이 지나쳐 수위를 넘어설 때, 프로그램은 서둘러 종영되고 프로듀서들은 새로운 이력서를 작성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1995년 여름에 방송된 추적 60분의 한 대목. 이성애자를 자청한, 목에 핏발을 곤두 세운 한 피해자의 증언은 의심의 가치가 충분했다.

나는 당했어! 그 호모들 정말 변태라니깐. 나는 가만히 잠자고 있었는데…… 슬그머니 다가와서는….

역시 의심을 무마하는데 이골이 난 공영방송 프로듀서는 동성애자라면 넌지시 던졌을 이 대목을 삭제함으로써 이런 질문을 지레 봉쇄했다.

너는 왜 가만히 당하고 있었는데? 진짜로 헤테로라며? 그 게이가 널 만질 때 너는 어디 서 뭘하고 있었던 거야?

이태원의 흙 사우나를 음란한 색조와 망 처리 일색으로 추적 보도했던 그 방송 프로그램 속에 정말로 이 질문이 삽입되었더라면, 성 정체성의 혼선을 비롯한 일대 혼란이 빚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또 한가지, 하마터면 게이 목욕탕의 기원에 대한 심층적인 추적이 얼결에 가능할 뻔했다.

게이 사우나의 시발점은 아마도 터미널, 역 근처가 아닐까? 밤차로 늦게 도착하거나 새벽녘에 도시를 떠나는 사람들이 역 근처의 사우나에서 목욕도 하고 잠도 자고 하니까, 아마도 성적 관계가 빈번히 이루어졌을 거야.

상계동氏의 편지에 적힌 이 한 토막의 의견 개진은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실지로 서울 도심의 고속버스 터미널과 기차역 근처의 목욕탕들은 항시 남성 게이들의 주목을 끌어왔다. 지금은 대폭 줄어들었지만 영등포 역과 서울역 근처에 포진되었던 그만그만한 대중사우나들, 그리고 (상봉 터미널을 포함한) 터미널 근처의 사우나 시설은 상계동氏 말마따나 도시간 왕래의 교차점에 있었던 까닭에 익명을 가장(假裝)한 성적인 유혹이 한결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관심의 귀를 약간 다른 쪽으로 돌리면 우리는 의외의 소문들을 듣게 된다. 종로의 P와 M, 이태원의 H와 P, 사당동의 O, 방배동의 U, 동교동의 D, 충무로의 L, 교대 근처의 K, 가락시장의 K, 그리고 간판없는 압구정동의 모 사우나 등등 혐의 리스트만 나열해도 지면을 채우고도 남을 어마어마한 숫자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취재시 간판 명까지 뚜렷이 확인한 숫자만 해도 30개를 선회했다. 더 가관인 것은 그것들의 지리적 분포도이다. 게이들이 즐겨 이용하는 대중사우나들은 서울시 전역에 골고루 퍼져 있다. 해서 호모포비아 이성애자 손님들을 짐짓 걱정한 사우나 주인장들께선 현관 마빡에다 큼지막하게 호모사절이라고 써붙여 놓았던 거고.

만약 어떤 한 사우나가 게이 사우나의 영예를 얻기 위해선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1. 가급적 동네 바깥일 것. 고만고만한 주택가의 동네 목욕탕은 혹여 아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거니와 은밀한 행위를 가능케 하는 어두운 휴게실이 제대로 가추어져 있지 않은게 대부분임으로, 휴게실 조명도 어둑어둑하고 사람들도 생면부지인 도심 번화가의 대중 사우나여야 한다는 것이 그 첫번째 조건이다. 상계동氏의 말처럼 그것은 은밀해야 하는 것이다.

2. 소문의 가능성. 이것은 동성애 게토와 관련된 조건이다. 동성애자들간의 정보 교환 없이 게이 사우나가 존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목욕탕에서의 사적인 성적 경험들이 누적되어 후에 명실공히 게이들의 순례지로 정착되기 위해선 게이들의 잦은 입방아와 소문들이라는 강력한 이음쇠 역할이 필요하다(그곳에 잘 모인대!). 소문이 나지 않을 경우 자신의 경험은 한낱 일시적인 헤프닝으로 그칠 공산이 그만큼 큰 것이다. 1960년대 명동의 동성애자 게토는 소문의 발원지이자 바로 그 시작이었던 까닭에, 동성애자들이 잘 모이고 성적 관계가 비교적 수월하다는 뜻으로 이름 지어진 게이 사우나의 시작은 60년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목욕탕에서의 어느 동성애자의 성적 경험이란 사적 영역으로 역사 궤적의 방향을 확대-분산하게 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목욕탕 시설이 언제부터 한국에 들어왔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달빛 흐르는 개울가, 부엌에서의 함박 목욕으로 상징화되는 조선 시대의 목욕문화로부터 목욕탕이라고 하는 대중시설로의 변화는 일제강점기에서야 비로소 가능했다. 어허, 쌍것들 좀 봐!라고 목간통(沐間桶)을 다니는 서민을 향해 체머리를 흔들었던 갓 쓴 양반 족속들에 대한 기록을 우리는 쉽게 접할 수 있다. 유교적 상식 때문에 벗은 몸을 남에게 보여 주는 일에 몹시도 진저리를 쳤던 우리네 조상들이 벌건 대낮부터 남들 앞에서 훌러덩 옷을 벗는 행위에 대해 쓴맛을 다셨던 것은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남에게 자기 나체를 보여주고, 다른 사람의 나체를 훔쳐보는 이 은밀한 에로티시즘이 아무렇지도 않게 통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목욕탕이 극구 감추고 있는 또 하나의 비밀이지. 이곳에서의 성적 흥분은 철저한 금기이고.

비밀을 털어놓듯 조심스럽게 밝혀 놓은 상계동氏의 목욕탕에 얽힌 심리적 분석은, 그곳에서는 성적 흥분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우겨대는 많은 동성애자들의 주장(프로이트라면 당연히 방어기제라 불렀을 억견)에도 불구하고, 시선의 쾌락을 비롯해서 왜 그렇듯 다양한 성적 관계가 그 목욕하는 공공장소에서 일어나는지에 대한 통찰의 기미를 제공하고 있다.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자진해서 나체의 몸을 전시하는 목욕탕이야말로 동성애자에게 있어 쇼핑(shoping)의 쾌감을 제공하지 않았을까.

또한 영등포 역 근처의 한 사우나에서 발생했던 불미스러운 사건은 상계동氏의 주장을 반증했다. 그 사우나에 게이들 출입이 계속 잦아지자, 급기야 화가 치민 주인은 깡패들을 고용했고, 호모포비아 열광 신도들인 그 깡패들은 덫에 걸린 게이에게 영화에서 본 듯한 몰매 펀치로 린치를 가하거나 연이은 협박으로 금품을 뜯어냈다. 유감스럽게도, 목욕탕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호모포비아 신도들의 투쟁은 이제 영등포 사우나(결국 그 영등포 사우나는 문을 닫게 되어 어찌됐든 게이들의 승리로 귀결되었다)의 실패를 귀감삼아 서울시 전역과 남한 곳곳으로 약진해가고 있는 중이다. 인권 운동 단체의 전화들과 PC통신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울분 섞인 피해사례들은 그 호모포비아 신도들의 혁혁한 투쟁 성과이며 전리품인 것이다. 그리고 호모포비아들을 내쫓고 종국엔 게이들이 자유자재로 들락거렸던 사우나마저 공공장소 풍기문란이란 딱지가 붙은 경찰봉과 주민들의 껄끄러운 눈총으로 엄중 처벌되었다(종로의 파고다, 이태원의 핀란드, 충무로의 라이온스, 명동…… 등등).  

이처럼 온갖 복잡한 층위의 문제들이 그 속에 담겨 있다. 수증기로 가려진 목욕탕의 실제 속내는 때를 벗겨내는 행위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체들 사이로 오가는 시선의 쾌락과, 휴게실에서 벌어지는 에로티시즘-금기의 반복되는 싸움이 가로지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곳에서는 동성애와 동성간 성 행위를 통한 쾌락이 서로 긴밀히 교감되기도 한다. 밖에 있을 때는 햇빛에 의해 증발되었던 자기 육체와 정체성에 대한 미묘한 감각이 타인의 벗은 몸을 통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은연히 되살아나거나, 혹은 호모포비아처럼 강력 부인하면서 과장된 제스추어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래서 위에서 언급한 95년 추적 60분의 인터뷰 대상자의 말은 그다지 신빙성이 없다. 속된 말로 재미를 볼 때는 언제고 뒤돌아서서는 그렇듯 분에 차 있는 이유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하지만 동성애자들은 지난한 자신의 삶 속에서 유혹에 따른 상대방 육체의 반응도를 터득하는 법을 배워 잘 알고 있다(건드렸는데도 그는 가만히 있었다와 같은). 우리는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목욕탕이란 공공장소는 동성애자에게 있어 학습의 장이면서 성적 기회를 제공하는 공간인 것이다.

60년대 이후 본격화된 산업화와 도심화 과정은 공중목욕탕을 일본과 서구에서 적극 도입했고, 게이들은 그 속에서 동성의 몸을 향해 줄달음질치는 자기 시선의 속도를 재확인했다. 그리고 전문 때밀이는 아니었지만 이따금 그들의 몸을 더듬기도 했다. 게이 사우나와 일반 목욕탕의 차이는 소문의 차이일 뿐이다. 어느 목욕탕이든 수줍게 옷을 벗은 동성애가 모두 존재하고 있다. 엄밀히 말해, 게이 사우나 역사의 기원은 없는 것이다. 소문의 역사가 있을 따름이다.


찜질방 : 침묵과 부재의 가장자리

짧고 간결한 만족을 제공하지. 나는 그것이 좋아. 뒤끝이 없으니까. 프리 섹스가 어때서?

마치 광고 문구 같은 상계동氏의 찜질방(혹은 휴게텔) 찬조론은 필자의 어설픈 성 관념을 무척 혼란케 했다. 더욱이 그 문제가 한국 게이 커뮤니티 앞으로 배달된 수신 불명의 애매모호한 편지와 다를바 없었기 때문에, 필자가 취재 중에 갈피를 못잡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앞으로 그보다 더 나은 섹스숍이 자꾸 개발될 거야. 우리는 결혼을 내세운 이성애자들의 형편없는 성 윤리에 과감히 맞서야 하고. 일편단심 사랑? 그건 헤테로 남자들이 여성을 자기 휘하에 영원히 종속시키고 자기의 씨(種)와 재산을 존속시키려는 기만적인 이데올로기에 불과해.

다소 도식적인 감이 없지 않았으나 그의 주장은 꽤 논리적이었다. 다른 게토의 형성과 비교할 때 극히 짧은 역사를 지닌, 96년 최초로 생겨 상계동의 봄을 일으켰던 T 찜질방과 그의 후속들을 열렬히 두둔하고 나선 그의 주장은 아무래도 많은 지지자를 한데 모을 수 있는 설득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즈음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종래의 상황론으로는 찜질방의 부흥을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동성애자들간의 만남의 장소가 너무나 협소해서 그런 공간을 찾을 수밖에 없다.

독자들이 짐작한 대로 이태원-종로 등에 형성된 많은 숫자의 게이 술집들, PC 통신에 할애된 숱한 만남의 공간들 등속은 그와 같은 상황론의 빛깔을 퇴색케 한다. 물론 사우나 출입에 적용할 때는 일부분 맞아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태원과 종로 게토의 범역이 늘어남에 따라 사우나를 찾는 게이들 숫자는 많이 줄었다. 하지만 그것도 사우나에서 운나쁘게 치룰지도 모르는 값비싼 위험부담세를 참작한다면 자연스런 행보일 것이다. 그에 비해 찜질방의 인기와 이태원-종로 게토의 활성화는 전혀 반비례로 작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찾는 빈도수는 비등한 수준으로 수직 상승했다. 예컨대 많은 남성 동성애자들은 찜질방을 어쩔 수 없이 가는 게 아니라 즐겨 찾는 것이다.

얼마 전 경찰의 집중 단속 때문에 전설적인 상계동의 봄은 된서리를 맞아야 했다. 허나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현재의 굵직굵직한 찜질방들의 기세는 자못 등등하기조차 하다. 창신동의 Y, 신설동의 C, 방이동의 T등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특히나 방이동 T는 라이터에 알림 광고까지 실어 게이들에게 무작위 배포하는 등 수완에 있어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찜질방 문화가 직수입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는 어쩌면 한국에서의 게이 섹스숍 가능성에 대한 전조일지도 모른다.

80년대 말 에이즈 파동으로 다소 주춤하긴 했지만, 서구와 근처 일본의 섹스숍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성 해방운동을 비롯한 각종 인권운동의 후광에 힙입어 게이 커뮤니티에 구축된 이후 지금까지 그 활력을 잃지 않고 있다. 또한 그들의 게이 잡지 대부분은 쪽 빠진 늘씬한 게이 모델을 내세워 ONLY SEX, 혹은 ONLY ROMANCE와 같은 군더더기 없는 간략한 표어로 잠재적 구매자들을 유혹하는 섹스숍들로 넘쳐나고 있는 실정이다. 섹스 행위에 있어 국가 ─ 민족간 경계가 있을 리 만무하다. 자신을 진보적이라 믿는 사람들은 섹스숍의 존재를 그 나라의 성적 자유의 성취도의 지표로 삼고 싶어 한다. 특히 게이 섹스숍은 도착적인 이성애 질서를 한 발 비껴 서게끔 도와주는 성 자유의 확연한 상징인 것으로 여긴다. 왜 한국에는 섹스숍이 없지? 라고 발끈 화를 내는 게이들을 만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에 덧대어지는 상계동氏의 후렴은 경청할 만하다.

나는 그곳에서 많은 남자들을 만났지. 더러 그들 모두와 관계를 가지기도 했구. 나는 섹스를 자유롭게 생각하지, 나 스스로 판단해. 그것뿐이야. 그것이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 아니겠어?

그러나 필자는 취재 기간 동안 찾아 들어간 모 찜질방에서 상계동氏의 기쁨과 다른 한가지 감정을 한껏 누리게 되었다. 그것은 부재감(不在感)이었다. 한마디 유혹의 말도, 얼굴 확인도, 이름도, 그의 머리칼 색깔도, 나이조차도 깡그리 어둠 속으로 밀쳐둔 채 빚어지는 말초적인 성 거래의 창백한 침묵. 무릇 필자가 보기에, 한 인격체가 또 다른 인격체를 만나 육체적 소통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추상화된 채 성적 흥분만이 밀도 높게 고조되는 반복적 상황이 그곳에서 연출되는 듯했다. 적어도 낯선 남자의 어깨를 짚기만 해도 가슴이 새처럼 떨린다는 휘트먼의 관능적인 싯귀 정도는 전희의 애무 셈치고 그 속에 곁들여야 하지 않을까.

결코 성적 표현의 자유, 다시 말해 상계동氏의 기쁨을 부정하고자 함이 아니다. 또한 이러한 논의가 자칫 사랑 ─ 결혼 ─ 섹스로 이어지는 단선적인 이성애적 성 윤리관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실제로 한국 동성애자들이 찬란한 500년 조선 역사의 유교관에 힘입어, 자신의 성 정체성과 관련지어 표상하는 삶의 형태가 이성애자들의 것과 많은 점이 닮아 있다는 것 역시 부정하지 않겠다. 단지 유사 섹스숍 형태를 띤 게이 찜질방의 역사를 거론하는 자리에 있어, 그 실제적 구조가 아직 착종되지 않은 까닭에 조심스레 그 다양한 가능의 형태를 가늠해보는 것뿐이다. 더욱이 서구 게이/레즈비언 인권 운동이 현재 맞닥뜨리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가 어느 순간 우리의 문제로 탈바꿈 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80년대 중반쯤 미국의 한 게이 인권 운동가가 스톤 월 혁명을 상기하며 통탄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술집을 하나 더 늘리기 위해 혁명을 했단 말인가!

그의 통탄은 곰곰 귀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60년대 말 게이 인권 운동의 성장과 함께 발원한 성적 자유의 기치, 성적 소수의 깊은 연대감, 구라파 지식인들을 화들짝 놀라게 했던 친밀한 유대의 새로운 형태들과 사랑에 대한 혁신적인 형태들은 70년대 후반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난 게이바와 섹스숍 속으로 까무룩히 사라져버렸다. 서로간의 감정의 형태를, 콘베이어 벨트로 통조림 나르듯 오르가즘의 양적인 크기로 환원하는 시장의 질서가 마침내 집어삼킨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미국 동성애자들에게 남은 것은, 너 ─ 나 ─ 그/그녀가 건조하게 행하는 속 뻔한 거래이고 오르가즘의 양적인 교환이고, 깊은 유대감이 휘발된 시장통 속의 요란함이 아닐까? 물론 퍽이나 결혼을 좋아하는 중산계급 게이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만일 그러한 상태가 단지 프리 섹스의 구현이라고만 명명된다면, 우리는 찜질방 하나를 더 늘이고 국가권력으로부터 그것을 보호하는 것에 동성애 해방 논의와 인권운동의 가치를 부여하면 되는걸까? 한국 동성애 게토와 시장 질서의 역학관계를 논하는 것은 아직 이른걸까? 경제 위기와 맞물린 헤테로 가족의 보호 공세 속에서 그나마 찜질방이라도 옹호하고 나서는 일은 성적 자유와 게이 해방에 있어 도움이 되는 일일까? 것도 아니면 경제 위기와 즐거운 우리집 따위의 멜랑콜리한 노래 공세에 아랑곳없이 동성연애적 행위들의 잡다한 집적(集積)이 아닌 우리들의 명징한 감정인 동성애에 기반한 대안적 삶의 형태를 모델링하는 데에 주력해야 하는 걸까?

사실은 이제 시작인 듯싶다. 찜질방의 역사는 갓 태어난 병아리의 종종거림과 유사하다. 때문에 기우(杞憂)도 많고 서로 다른 의견들이 겹쳐지고 수많은 질문들이 다층의 켜를 이루며 쌓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정말로 자신의 욕망을 알고 있는가?

욕망은 인간의 본질 그 자체이다는 스피노자의 말을 다시금 상기해보자. 바꾸어 말하면 동성애자가 자신의 정체성에 기반해 자기의 존재를 지속하려고 하는 노력이 바로 우리의 욕망인 것이다. 더군다나 그 노총각 철학자는 친절하게도 각자 차이지워진 욕망에 충실함이 곧 선과 악의 구별선임을 우리에게 적시해주고 있다. 도덕은 위로부터 부여되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들로부터 구성되어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성애적 윤리와 성 도덕이 우리 동성애자들의 삶에 이러쿵저러쿵 할 수는 없는 노릇인 터, (붉은 띠 머리에 두른 윤리 교과서 책임자들에 맞서)우리는 악이라고 판단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거부한다!

필자에게 세 번째 기획글에 앞서,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참고 삼으라고 보내온 상계동氏(사실은 필자와 평소 알고 지내온 게이 친구)의 솔직하고도 진솔한 편지글은 실질적인 도움뿐만 아니라 값비싼 혼란도 안겨주었다. 그는 편지 말미에 이렇게 적고 있다.

모든 시덥잖은 도덕으로부터 이탈된 채 찜질방에 누워 있을 때는 가끔 철인처럼 무한정 힘이 솟기도 하고 어쩔 때는 한없이 눈앞이 어두워지기도 해. 마치 바닷속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았지.

취재 중 필자는 그런 그의 기분이 어떤지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것 같았다. 오르락내리락 하는 쉼없는 자맥질. 그 부침(浮沈) 사이사이로 비늘처럼 아릿하게 박혀오는 질문은 이러했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로 자신의 욕망을 알고 있는가? 날카롭게 끝이 선 성적 욕망은 수면 위로 올라올 적마다 금새 햇빛에 부서졌을 것이다.

함부로 상계동 친구의 편지글을 편집하고 그의 기분까지 도용한 죄를 용서바라며.
<도움 주신 분들>
친구사이 서지철님
상계동의 상계동氏
그리고 필자의 모든 질문에
극구 도리질을 쳤던
사우나와 찜질방의 손님들.




* 위 상계동 친구는 가상의 존재입니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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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들이 2005-08-01 오전 04:48

여기의 글에서 호모와 헤테로의 유전적 말을 한것 같은데 양성애자가 오히려 헤테로라고 불려야 할듯...호모와 헤테로로 따지자면 이성애자도 헤테로가 아닌 호모로 분리됩니다....호모는 한쪽 성질 헤테로는 양쪽 성질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쉽겠죠?!...생물시간에 우리는 멘델리즘에서..AA aa 는 호모이고 Aa는 헤테로죠...AA 는 이반 aa 는 일반...Aa 는 양성애자..ㅎㅎ...그런데 이런 비유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습니다...---어느 유전공학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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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영 2006-11-23 오전 01:11

멋진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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