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동성애 게토, 오욕과 오명의 연대기 (총 4회 연재)
1998년 이송희일
1. 서 있는 사람들 - 극장의 역사
2. 길녀, 베니스에 가다 - 터미널, 공원과 남산의 역사
3. 호모 사절! ― 사우나와 찜질방의 역사
4. 박꽃 흐드러진 white saturday night ― 게이바의 역사
박꽃 흐드러진 White Saturday Night : 게이바의 역사
검은 바지에 하얀 색 쫄티를 입은 젊은 청년이 지하철 4호선 삼각지 역에서 내려 택시를 잡아 탄다. 이어 그가 운전사에게 행선지를 알린다. 해밀턴 호텔요!
혹은, 종로 무역회사에 다니는 회사원이 단아한 플란넬 바지를 입고 23번 버스에 오른다. 그리고 안내방송이 해밀턴을 발음하기 전까지 내내 기대감 가득한 시선을 창밖에 고정시킨다.
또는 신촌에서 출발한 티코 자동차 안에 깔끔히 차려입은 서넛의 젊은이들이 있다. 그들은 수다스럽고 한껏 달떠 있다. 티코 자동차의 연료 계기판은 필경 신촌에서 이태원까지의 연료소비량만을 계측할 것이다.
때는 토요일 밤이고, 온갖 광택을 낸 젊은이들이 이태원 해밀턴 호텔 앞으로 속속들이 집결해가고 있는 것이다. 대규모 집회가 있는 것도, 코리언 시리즈가 벌어지는 야구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언제나 그래왔듯 거기는 그냥 이태원이고 미군부대가 위치해 있는 곳이다.
하지만 버스와 택시에서 내린 젊은이들이 서로 손을 흔들어 보이거나 밝은 미소로 아는 체를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리고 뒤이어 발랄한 재잘거림으로 어디론가 몰려가면서부터 그곳의 풍경과 의미는 종전의 이태원과는 사뭇 달라진다. 서울역에서 방금 이태원에 도착한 한 무리 지방민들의 열띤 대화가 이태원의 밤을 더욱 활기차게 만든다.
그것은 일견 90년대의 새로운 性 풍속도이자, 아직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은밀한 밤의 축제이다. 또한 동성애자들 사이의 세대적 단절의 표현이자 드러냄(comingout)의 전초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이태원에 간다라고 말한다. 거기에는 많은 속뜻과 단속적인 한국 동성애 역사가 담겨 있다.
스파이 배정자의 전성시대
약간 촌스럽게도, 한국 게이 바의 역사는 신당동의 혼잡한 시장통 속에서 시작되었다. 간혹 종로에 나오는 6,70대의 할아버지 동성애자들이 바로 그 시장통 속에서 자신의 삶을 시작했던 양반들이다. 그들은 60년대 신당동의 광무극장 뒤편의 게이 바와 중앙시장 안쪽의 게이 바를 탄생시킨 개척자였다.
60년대부터 시작된 서울 도심화, 그리고 서로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없는 익명성. 이런 것들은 왕십리 무당들과 지게꾼이 찾는 광무극장과 중앙시장의 게이 바가 양성되도록 도와준 중요한 사회적 기제들이다.
그리고 60년대 동성애 게토의 메카였던 명동. 패션 디자이너들과 하얀 와이셔츠맨들이 즐겨 찾은 명동극장과 피앙새 다방은 역시 다른 방식으로 동성애자들을 모이게 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게이 바가 시작된 곳은 명동이 아니라 신당동이었다. 많이들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왜 그랬던 걸까? 한국의 게이 바는 왜 하필 많고 많은 곳 중에 요란복잡한 저잣거리를 요람으로 삼았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마도 70년대의 을지로 인쇄소 골목길 속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60년대 말과 70년대 초의 을지로 인쇄소 골목길을 상상해보자. 휘늘어진 전선줄과 볼품없는 마스터 인쇄기, 흐트러져 있는 식자판…… 그리고 밤만 되면 썰물 빠지듯 썰렁하니 변해버리는 좁다랗고 지저분한 인쇄소 골목길. 그즈음 어느 날, 그 골목길에 <아담>이 탄생했다.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게이 바였다. <아담>의 문을 연 사람은 배정자氏였다. 물론 그는 국일관을 무대로 한일 이중 스파이 행각을 벌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배정자 그녀가 아니었다. 빗자루로 <아담> 현관을 쓸고 있다가 우리의 방문에 놀라 고개를 외트는 배정자氏는 분명, 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중 스파이의 깜찍한 미모는커녕 앙팡진 낯의 고만고만한 사내이다.
하지만 절묘하다. 스파이 배정자의 이름을 차용한 것도 그러하거니와 밤만 되면 조용해지는 인쇄소 골목길을 선택한 안목도 탁월한 듯싶다. 그의 탁월한 안목에 힘입어 그 후로 <화분>, <씩스나인> 등 20여개 정도의 게이 바가 그 골목길을 점령하다시피 했다. 그곳은 충무로의
이렇듯 밀집된 을지로 게이 바들은 명실공히 한국 최초의 동성애 게토를 형성했다. 도심 한가운데의 인쇄소 골목이 제공하는 은밀성, 극장을 끼고 있다는 이점들이 그 기반을 제공했을 터였다. 우리는 여기서 어연번듯한 명동보다 왜 오밀조밀한 신당동 시장통에서 게이 바가 시작되었는지를 얼추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을지로 게이 바들은
<유혹>과 <질투> 사이에 <갈등>을 하다가
70년대 중반 무렵의 동성애 게토는 P 극장을 원점에 놓고 확장되었다. 그건 곧 종로 시대를 의미했다. 하지만 78년 종로시대가 막 인큐베이터 속에서 눈을 뜨기 직전, 잠시 게이 바의 지리적 이탈이 일어났다. 광교 지역에서 걸출한 두 개의 게이 바가 문을 연 것이다. <유혹>과 <질투>. 지금도 모 연예인과의 염문설로 소문에 회자되는 디자이너 H씨가 광교에 <유혹>을 차린 것이다. 그곳과 <질투>에는 연예인, 패션 디자이너, 모델들이 자주 들락거렸다. 소위 high class의 단골무대였던 것이다.
이와 경쟁을 하듯 종로지역에도 앞다투어 게이 바가 문을 열기 시작했다. <갈등>(78년)과
오히려 현재 젊은 동성애자들이 종로의 최초 술집으로 오해(?)하고 있는 <갈>(79년)의 영향이 더욱 크지 않았을까? <갈등>의 사장이 증언하다시피,
70년대 말엽 이러한 개척자들의 노력에 부응해, 80년대 말까지 종로에는 넉넉잡아 50~60개 정도의 게이 바가 생겼다. 물론 P극장이라는 불세출의 동성애자 성지(聖地)가 버티고 있었기에 이러한 게이 바 확산 작업이 가능했을 것이다. 거기다, 탑골 공원과 종묘 공원에서의 만남들도 한몫 더해주었을 거고.
신당동 아틀란티스의 미스테리
종로의 성공에 자극 받은 신당동은 급기야 80년대 초반부터 최초의 명성을 획득키 위해 고군분투하기 시작했다. 'K', '5', 'S' 등 무려 30개 정도의 크고 작은 게이 바들이 종로의 아성에 도전장을 내며 단시간에 속출했다. <성동극장>과 이 신당동 군단의 척후병 노릇을 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 또한 청계천의 복잡복잡한 상가 골목들과 밤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이 성능 좋은 지뢰처럼 동성애 게토를 안전하게 에워싸고 있었다.
헌데 왜 80년대 말엽과 90년대 초엽 사이에 그렇듯 번창했던 곳이 한꺼번에 몰락했던 걸까? 현재 서너 개의 게이 바와 찜질방 하나 정도를 남겨놓고는 그 많던 게이바들과 동성애자들의 발걸음은 가뭇없이, 마치 아틀란티스의 돌연한 몰락처럼, 사라져버렸다. 왜 그랬을까? 종로의 막강한 파워 앞에 굴복해서였을까? 성동극장이 급작스레 문을 닫아서였을까?
얼마 전 모 주간지에서 창신동, 호모들의 천국하며 몇 개의 게이 바, 찜질방, 후질구레한 여인숙을 호들갑스레 추켜세웠지만 그들은 완전히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만일 그 기사를 읽고 한참 의아해하며 서로의 눈을 말똥말똥 바라보던 동성애자들을 보았더라면, 그 주간지 데스크는 헛다리 짚었음을 무척 통감했을 것이다. 그곳은 종로, 그리고 이제 곧 이야기할 이태원으로 빠져나간 동성애자들을 불러 세울 아무런 구조물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신당동, 왜 그곳은 몰락했는가?
해밀턴 호텔 시대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자. 토요일 밤, 서울과 전국 각지에서 속속들이 모인 젊은 동성애자들은 어디로 들어갔는가? 그들이 이곳저곳에서 안주도 없는 맥주를 홀짝이거나 지하 디스코 바에서 춤을 추고 있음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곳의 재기발랄하고 떠들썩한 분위기는 7,80년대 이태원 게이 바의 분위기와도 사뭇 다르다.
종로와 신당동과는 외따로 'Y'→ 'Y'→ 'B'→ 'YY' 등 단속적으로 명맥을 유지해왔던 이태원 게토에선 종로에서 원활히 흡수하지 못했던 외국인, 연예계 종사자들, 디자이너 등을 손님으로 맞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90년대 벽두부터 시작된 이태원의 붐은 어찌된 일인가? <파슈>를 필두로 터널, 트랜스, WHYNOT, 스파르타쿠스, 존, 아웃클래스, 지퍼에 이르기까지 서구식으로 새롭게 등장한 게이 바들은 무섭게 젊은 동성애자 층을 흡입하고 있지 않은가. 해서 해밀턴 호텔 앞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의 반절 이상이 게이임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생각하게 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곳은 다소 밀폐된 종로의 게이 바와도 다르고, 이곳을 찾는 게이들이 주로 20-30대층으로 한정되어 있는 것도 다르고, 서로간에 관계 맺는 방식도 종전과는 차이가 있고, 그들의 갖은 제스추어와 수다 내용도 좀더 개방적인 것이다.
더 의구스러운 점은, 이태원에는 'P 극장' 같은 극장도 없거니와 공원-남산과 같은 은폐된 만남의 장소도 전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은밀히 만나 은밀한 술집으로 향하는 만남의 장소가 결여되어 있음에도 어떻게 토요일 밤 천 명에 육박하는 젊은 동성애자들을 결집시켜낼 수 있는지 알아내는 것은 무척 난감한 문제인 것이다.
이는 여태껏 동성애를 가능케 했던 도심의 은폐성으로는 설명할 길이 없다. 외려 동성애자들의 자기 규정성이, 자기 욕망에 대한 자신감이 보다 선연해졌다는 점에 실마리를 놓아야 할 것 같다. 비록 아직은 지난 6월 한동협(한국 동성애자 단체 협의회) 출범식에 얼굴을 디미는 것조차 찔끔 겁을 먹고 있지만,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좀더 가시화하고 싶은 까닭에 덜 은폐적인 이태원의 게이 바를 찾는 것이다. PC통신 문화와 젊은 축으로 이루어진 동성애 인권 운동 또한 이태원 게토 형성에 이바지한 바가 크다. 각종의 인권운동 기금 마련을 위한 바자회 및 페스티발이 잦은 폭죽처럼 그곳에서 열려지고 있다.
이들은 이제 종로시대의 윗 세대와는 차별적인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중이다. 이태원을 찾는 그들은 동성애자의 신세대이다. 설령 은밀한 만남이 제공하는 잦은 성적 관계를 유보하더라도, 그들은 활달한 디스코 바와 키득거림, 자기 표현으로 요란한 원샷 바를 선택한다. 쫄티 주름으로 가슴 근육을 돋보이게 하고, 화려한 옷차림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근처의 일반 술집에서 각종 소모임의 친목을 도모하기도 한다. 이에 조응해, 현재 이태원은 나날이 그러한 식의 게이 바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때문에 우리는 신당동 몰락의 미스테리의 해답을 이태원에서 찾을 수 있다. 세대적 차이에 의해 공급이 차단된 신당동 게토는(이와 반대로 윗세대 및 종로문화를 선호하는 젊은이들은 계속 종로로 유입되고 있다)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었던 것이다. 흔히들 생각하듯, 경찰 단속 때문에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활기를 띠고 있는 90년대 해밀턴 호텔 시대 또한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은밀성의 축소 대신 감가(減價)된 성적 관계, 우물 안 개구리처럼 이태원 안에서만 웅웅거리는 자기 주장들, 레즈비언들과의 소원한 관계 등 수많은 난점들이 산적해 있다. 이곳은 성 정체성sexuality의 해방구도 아니고, 대안적인 공동체도 아니며, 더더군다나 일요일 아침의 썰렁함이 보여주듯 자기 정체성에 기반한 동성애자들의 삶이 뿌리 내린 곳도 아닌 것이다.
아직 길은 멀고 요원하기만 하다. 종로시대와 구별되는 신세대적 특성을 갖춘 동성애자들의 상가 지역으로서의 이태원, 그곳은 타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직접적인 삶을 통한 교류는 아직 불투명한, 그래서 좀더 적극적인 자기 주장이 요청되는 곳이기도 한 것이다. 이태원은 아직도 미완성이다.
부록(附錄)의 역사, 그러나 더 뼈 아픈 레즈비언의 역사
필자는 지금껏 4회 연재를 통해 남성 동성애자들(gay men)의 게토만을 언급해왔다. 여기에 레즈비언 역사를 함께 다루지 못했음은 무척이나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일정 부분 고의로, 한국에서의 레즈비언 역사를 누락시킨 것은 사실이다. 한국의 여성 동성애자 역사가, 여성 택시운전사 모임인 여운회와 신촌에 있는 3개의 레즈비언 바(그리고 이태원에 한 곳)밖에 없어서 그랬던 건 결코 아니었다.
필자의 고의성은 다분히 전복적인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다소 놀라겠지만, 전복의 대상은 실제 있지도 않은 이성애 역사뿐만 아니라 여태껏 다루었던 한국 남성 동성애자 역사이다. 남성 동성애자 역사는 이성애 역사와만 대척하고 있지는 않다. 은닉과 숨졸임의 연대기라 지칭되어온 그 역사조차, 또 다른 억압 위에서 진행되어온 것이다. 그 억압된 것의 정체는 다름아닌 여성, 특히나 레즈비언이었다.
여성, 레즈비언을 억압한 권력이 남성 동성애자였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여성의 억압과 동성애자 억압은 궤를 같이하고 있다. 여성을 어머니이자 아내로서 집안에 감금해놓는 사회일수록 남성에게, 그리고 남성 동성애자에게 남편 자리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법이다. 그 둘의 억압은 상호 뗄래야 뗄 수 없는 친밀한 관계인 것이다.
하지만 남성 동성애자가 가족과 직장 사이를 오가며 얻는 공간과 시간의 자유가 일정 부분 동성애 게토의 구축을 가능케 했던 반면, 여성 동성애자들에게 주어진 삶의 형태는 어떠했는가?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이 가부장적 사회가 여성에게 할당하는 유일한 자리는 결혼과 가족이다. 여성은 그곳에서 아기를 낳고 남편 빨래를 하고 라디오를 듣고, 설혹 바깥으로 나간다해도 아기를 등에 엎은 채이거나 장바구니를 든 채로였다. 그녀들은 동성애 게토를 형성할 만한 어떠한 물질적 자원도 박탈당했다.
또 한 가지, 여성의 性에 대한 전사회적인 거부가 레즈비언의 역사를 부록으로 치부하게 만든 주요한 요인이다. 언젠가 모 동성애 인권운동 단체 회원이 말했다. 남성 동성애자는 여성 동성애자보다 더 억압당한다고. 그가 보기에, 이 사회는 다정스레 팔짱을 낀 여자들은 넌지시 눈감아주면서 다정스레 팔짱을 낀 남자들은 즉각 호모라고 욕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다. 남근 중심적인 이 사회는 남근을 달고 있지 않은, 다정스레 팔짱을 낀 두 여성간의 모습에 대해 성적 의혹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녀들이 대체 어떻게 섹스가 가능하단 말인가! 지독히도 거꾸로 오해를 했던 그 회원의 소속 단체는 남성 동성애 단체였다. 두 번째 이유, 그녀들은 동성애 게토를 형성할 만한 어떠한 성적 자원도 박탈당했다.
레즈비언 역사는 결코 남성 동성애자 역사의 후속으로 뒤따라지는 부록의 역사가 아니다. 동성애자 술집의 성비(性比)의 현격한 차이를 곧 남성 동성애자가 훨씬 많은 것으로 쉬이 단정하는 일은, 레즈비언에 대한 또다른 억압에 다름 아니다. 그건 멍청한 퀴즈 쇼이다. 남성 동성애자들이 그나마 남성으로서 누렸던 알량한 기득권 배후에는 물질적-성적 자원을 깡그리 박탈당했던 그녀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서야 레즈비언들은 그녀들 삶의 연대기를 쓰기 시작했다.
여성 억압-동성애자 억압은, 결혼과 가족을 매개로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는 이 사회의 채찍과도 같다. 그 둘은 한 가닥 끈 속에 견고하게 꼬여 있다.
연재를 마치며
양지로 나온 동성애자들의 담당 PD였던 한 이성애자가 <버디>를 향해 한 마디 충고를 던졌다. 그렇게 한꺼번에 다 써버리면 오래 못 간다는 거였다. 무척 고마운 충고였지만, TV프로그램과 이성애자들이 공통적으로 흔히 갖고 있는 망각증세의 또 다른 표현에 불과했다.
망각증세는 TV가 종영되고 역사가 끝난 상태에서 일어나는 치매 현상이다. 앞으로 진행될 역사가 없는 경우에는 거울 삼아 되돌아갈 과거의 역사 또한 없는 것이다.
아직 한국 동성애 역사는 끝이 나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 동성애자들이 톡톡히 대가를 치른 과거의 모욕에 대해선, 아직도 그 연장선상에 있기에, 진저리가 날 만큼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때문에 그 PD의 염려와는 달리 써도써도 모자랄 만큼의 이야기가 우리들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종로는 건재한다, 또한 신세대적인 이태원 역시 젊은 남성 동성애자들을 축으로 계속 성장해갈 것이며, 필경 레즈비언 게토는 당분간 신촌을 필두로 약진해갈 것이다. 우리는 그곳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진행될지 정확히 모른다. 다만 동성애자들의 자기 확신과 자긍심의 연대가 그곳들의 방향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 그것에 대해선 분명한 확신이 있다. 사실, 연재를 마치며 필자의 손에 남은 건 그 확신뿐이다.
2003-10-07 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