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동성애 게토, 오욕과 오명의 연대기 (총 4회 연재)
1998년 이송희일
1. 서 있는 사람들 - 극장의 역사
2. 길녀, 베니스에 가다 - 터미널, 공원과 남산의 역사
3. 호모 사절! ― 사우나와 찜질방의 역사
4. 박꽃 흐드러진 white saturday night ― 게이바의 역사
길녀, 베니스에 가다 : 터미널, 공원과 남산의 역사
동성 연애하실 분 연락 바람
의도적으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시인 황지우는 실수를 범했다. 화장실 벽면 낙서를 그대로 하나의 詩로 필사한 그의 글쓰기에는 요즘 유행하는 소프트 포르노 이웃집 누나에 관한 뜬소문만 포착될 뿐, 연락처와 함께 굵직한 선으로 삐둘삐둘 쓰여진 동성 연애에 관한 알림 광고는 완연 배제되었다. 똥과 구더기가 득시글거리는 시골 정류장 화장실에도, 심지어는 삐까번쩍한 고급빌딩 화장실 벽에도 금띠처럼 선명하게 그어져 있는 그 알림글을 그토록 날카로운 안목의 시인이 왜 간과했던 것일까?
詩적인 소재로서는 불합격 판정을 내렸다쳐도, 누군가 최초로 이웃집 누나에 관한 음란한 낭설들 사이에다 피땀을 들이듯 자신의 욕망을 새겨 넣었을 때, 혹은 볼 일 보러 갔던 어느 동성애자가 황망히 바지를 내리다 말고 그 글귀와 생판 처음 맞닥뜨려졌을 때의 낯뜨거움은 인정해야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시인 황지우가 게이들이 느낀 최초의 낯뜨거움을 인정하든 말든, 화장실의 본래 용도를 뒤바꿔버린 게이들의 화장실 역사의 기원은 바로 거기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배설을 위해 혼자만이 은거할 수 있는 차단된 비좁은 화장실, 허나 동시에 누구든지 쉽게 들락거릴 수 있는 공용 화장실에서 그 최초의 게이는 자신의 욕망을 한 줄의 글귀로 쏟아냈을 거고, 시간이 지나 또 다른 게이의 눈에 비쳐 들어온 그 글귀는 결코 다른 낙서들과 혼동되지 않는, 마치 자신의 내면을 명징하게 반사하는 손거울에 진배없었을 것이다. 예컨대 동성연애 구함이라는 글귀는 유행어 comming out의 원형(原形)인 셈이다.
(필자가 만난 인터뷰 대상자들 어느 누구도 게이들이 화장실을 언제부터 이용했는지 속시원히 대답해주지 못했다. 더욱 힘들었던 것은 그들의 상당수가 화장실 이용을 부득불 숨겨야 될 부끄러운 치부로 생각했기에, 그나마 말주변 없는 필자로선 네가 직접 다녀봐라는 내찬 말밖에 주워 들을 수 없었다. 설령 그들이 고속버스 터미널 화장실, 이태원 공용 화장실, 종묘공원 화장실을 거론했다 쳐도 그 중 어느 한 군데가 화장실 역사의 시발점이라고 단정짓기는 무척 난감한 일이다. 더군다나 서울이 아니더라도 왠만한 크기의 도시 시외버스 터미널 화장실 역시 게이들 만남의 장소로 잘 알려져 있는 형편이므로, 우리는 그 연쇄적인 고리로 연달아 이어진 화장실의 그물망 중에서 딱히 어느 한군데를 꼭 집어낼 수가 없다. 또한 극장이나 게이 바처럼 건물 개장(開場)이 확연해서 연도별로 개괄할 수도 없거니와 한시적이고도 지리적인 불투명성으로 인해 그 지나온 내력을 제대로 검토하기가 어려운 처지다.)
물론 우리의 괴테氏 말마따나 화장실 이용의 기원은 의외로 간단한 건지도 모른다. 누르스름해진 필자의 취재 노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왜 오줌 누다가 서로 거시기를 볼 수 있잖아.
물론 상대방의 거시기를 봤다는 이유만으로 공공장소에서의 음란행위라는 죄목을 선고받은 채 경찰서에 끌려가지는 않는다. 괴테氏는 여기에서 구체적인 인명까지 들먹이며 한국판 조지 마이클들을 인용한다.
경찰들도 사람이잖여. 여편네랑 애새끼들이 알면 어쩌겠어. 그렇게 그냥 벌금 받고 돌려보내는 거여, 기분은 영 껄끄럽겠지만. 그런 경우가 생각보다 참 많아.
여기에서 슬쩍 발뺌을 하는 괴테氏. 그는 한번도 화장실에서 유혹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때 필자는 입을 굳게 다물었던 걸로 기억한다. 괴테氏 자신은 그곳에 관련 있음을 극구 부정하면서도, 뒤미처 쏟아놓는 세밀한 정보들 : 자정에서 2시까지 성황을 이루는 터미널 화장실과 종묘공원 화장실, 그곳에서 치고 달리듯 이루어지는 짧은 행위들, 5분일 수도 하룻밤 일 인연을 엮을 수도 있는 뜨내기 만남들.
거진 다 못생긴 것들야, 그곳에 오는 놈들은. 한 마디로 잘 안 팔린다 그런 거지. 못생긴 길녀들!
(제법 그럴싸하게 생긴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내린 괴테氏의 분석에 의하면, 속칭 길녀는 두 가지 양상으로 나뉘어진다.
① 서비스업계 등에 종사하다가 나이 들고 일자리를 잃어 무일푼 처지에 놓이거나 실제로 극장·게이 바 유흥비가 없어 종로 근처의 후미진 골목과 화장실을 부유하는 부류.
② 극장과 게이 바에서 짝을 못찾고 마침내 길거리로 새벽출정을 나서는 부류. 해서 ①부류와 ②부류의 공생관계가 자연스레 이루어진다는 것이 ①부류에 속해 있는 괴테氏의 견해이다.
덧붙여, 잠시 사귀었던 어떤 학생과 함께 보았다던 영화 아이다호의 리버 피닉스 역할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도 잊지 않고 첨가했다. 실제로 괴테氏는, 19살부터 5년간 호텔 벨보이로 일하다가 나중에는 종로 술집에서 웨이터 노릇을 했고 20대 후반부터는 아예 직업 갖는 일을 포기했단다. 그는 집도 절도 없었다. 만일 길녀를 세간의 조롱 섞인 비난에서 유래한 대로 갖은 것 없이 길 위에 서 있는 여자, 그러니까 영등포 역 근처에서 유령처럼 떠돌면서 단 돈 5천원에 남자들에게 몸을 팔고 근근 생을 연명해 가는 그 가난한 여자들로 의미를 단축시킨다면, 분명 괴테氏의 상황은 그와 엇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후에 그게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길녀의 의미는 다양하게 변화를 거쳤던 것이다.)
터미널의 화장실
잘 모르는 사람들 ─ 익명성.
알루미늄으로 도금된 길쭉한 종묘공원의 화장실 문을 한참 주시한 직후, 취재 노트 상단에 아무렇게나 적혀 있는 문장에 밑줄을 치면서 필자는 전라도 삼례읍 공용정류장의 더러운 화장실 문짝에 씌어 있던 동성연애하실 분의 글귀를 떠올렸다. 청소년기 때 들었던 화장실에 관한 그 은밀한 소문들. 그 시골 읍내에는 게이들 전용 극장은 전혀 존재치 않았다. 하물며 게이 바야, 그런 게 있는지조차 상상 못했던 터였다. 하지만 그 너덜너덜한 문짝에 새겨진 한 줄 글귀는 뭔가 싹을 잉태하고 있지 않았을까? 괴테氏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스쳐지나가는 곳이니까, 그런 성적 거래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일말의 진실을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무릇 시장이란 곳은 익명을 보장받는 사람들이 모여 뭔가를 거래 하는 곳이다. 공용 터미널의 화장실에서 오줌을 누는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 그곳에서 무슨 짓을 하다 발각돼도 이웃들이 곧장 쏘아보낼 비난의 눈초리 따위는 존재치 않는다. 실지로 그 삼례읍 공용정류장은 조그만 읍내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왕궁-전주-이리-대전을 잇는 교차점이었다. 누군가가 그곳 화장실에서 서로 거시기를 본 김에 치기를 부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성적 거래를 요구한다. 뜻하지 않게 성적 거래는 원만히 이루어지고, 그것들은 사적인 사건의 범위를 넘어 게이들에게 은근짜 퍼지게 된다. 그때야 비로소 터미널 화장실는 성적 명소로 자리를 굳히게 되고, 게이들은 지방 도시 어디를 가든 오줌이 마렵지 않더라도 터미널 화장실은 꼭 견학하게 된다.)라고 주석 달아보는 일은, 화장실에 대해 기원 찾는 일을 무력하게 만든다.
익명의 존재들이 모이는 터미널은 어디에든 있는 데다가, 그 시작은 한 개인의 용기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터미널의 역사는 도시의 역사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경상도 G시의 터미널 화장실에서 만난 사람들과 소위 화장실 모임을 실지로 만들었던 한 게이 친구가 후렴구처럼 붙인 어디를 가든지간에라는 말엔 터미널로 대표되는 도시의 익명성이라는 전제사항이 누락되어 있다. 어쩌면 도시와 함께 시작된 동성애 게토는 바로 터미널 화장실이 아니었을까.
땅끝 예수단으로 더 잘 알려진 서울의 고속버스 터미널은 전에는 시외버스 터미널로 각기 흩어져 있던 것이 한 데로 뭉쳐 형성된 것이다. 20년도 채 되지 못한 짧은 기간이다.
그 기간동안 고속버스 터미널은 건물 전체를 게이들에게 양도했다. 화장실뿐 아니라 옥상, 휴게실, 상가지역까지 헌팅의 장소로 확장된 것이다. 심야 우등 버스만이 대기할 때쯤의 한적한 경부선쪽 건물 내부는 어느새 떠남이 아닌 만남의 장소로 돌연 변해버린다.
지방에서도 많이들 올라와. 전에 보니까, 광주에 살던 녀석이었는데, 출장 겸해서 왔다나. 알고보니, 내 동향 사람이었어.
괴테氏의 이 말은, 전에 윤곽 지었던 길녀에 대한 두 가지 분석을 기각시키고 있다. 더 넓은 의미로 분산하고 있는 것이다. 마땅한 공간 없이 짝을 찾아 헤메는 게이들의 집합소. 얼마 전 배우 김명곤을 내세워놓고 터미널 옥상으로 추격해 들어온 모 TV 프로그램의 자못 근엄한 어조와 닮아 있다. 김명곤은 말한다.
갈 곳 없은 성적 이탈자들…… 어쩌고저쩌고…… 더 이상 방치해선 안되겠습니다.
그러나 이틀 전 취재 차 그곳 옥상에 올라갔다가, 서슬 퍼런 수위의 협박에 못 이겨, 쌀자루 터지듯 그곳에 있던 게이들 속에 뒤섞여 어둔 9충 계단을 와르르 쫓겨 내려오면서 필자는 억압의 중압감을 느껴야만 했다. 정히 쫓겨나기 때문이 아니라, 쫓겨났지만 또 다시 그곳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
(단조롭게 보이지만, 괴테氏의 푸념은 명백히 분열되어 있다.
1. 우리들은 무일푼의 거렁뱅이 신세다. 간결한 유혹으로 성적 욕망을 일시적이나마 해소할 수 있다. 돈 있어 보이는 게이 하나 붙잡아 술 얻어먹고 허리 펼 수 있는 잠자리를 얻어낸다.
2. 우리들은 상황이 요구하는 대로 찍소리 없이 숨어 지내거나 기껏해야 철저히 익명이라는 가면을 쓰고 화장실을 찾는다.
화장실의 역사는 2의 진술이 지배적이다. 공원이나 터미널 화장실을 1부류나 찾는다고 여기는 것은 그간의 역사를 망각해버린 사후적 판단일 뿐이다. 화장실의 역사를 두고 길녀들의 최선의 판단이라 여기는 게 과연 타당한가? 그곳에는 길녀가 존재하지 않았다.
길녀라는 은어는, 명동에 극장이 자리잡고 종로에 서서히 게이 바가 생길 때 쯤해서 돈 없이 주위를 배회하던 게이들을 차별하고 조롱하기 위해 만든 용어였다. 흡사 괴테氏처럼 탑골 공원, 종로의 뒷골목, 그리고 화장실에서 자기 삶의 근거를 마련해야만 했다. 비록 이처럼 현재에 와서는 화장실을 이용하는 게이들의 상황이 뒤숭숭하게 뒤섞여 있지만, 시작과 진행과정에 있어서의 차이는 완연했다. 굳이 그 차이를 부각시키는 이유는, 헤테로들 못지 않게 게이들 역시 화장실의 역사를 부끄러운 치부로 여기거나 길녀들의 집합 장소로 쉬이 몰아붙이는 것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자 함이다.
우리 동성애자들이 화장실에서 만남을 가져야 했던 것은 익명이 아니고선 자신의 욕망을 감히 전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부득이하게 선택한 방법이다. 이름도 구체적인 삶의 내력도 비추지 않고 오로지 말초적인 성적 욕망만을 전시했던 시장의 역사. 그건 억압의 역사이자 선택의 역사였다.)
박카스 아줌마의 나들이 ─ 남산
남산 공원(힐튼 호텔 뒷편 어린이 놀이터로부터 시작되는)의 역사는 60년대 명동의 부흥과 함께 놓여 있다. 하지만 이 둘의 인과 고리를 엮는 일은 암만해도 버거운 일이다. 기획글1 ─ 극장의 역사를 다룰 때 장 노인은 남산 공원에 게이들이 모인 이유를 명동의 부흥과 관련지었었다. 명동 극장에서 짝을 만나 가까운 남산 공원으로 올라갔다는 것이 그의 사례보고였다. 기실 맨 처음 그들이 그런 식으로 올라가 성적 결합에 최초로 성공한 한 쌍의 아담들이 되었다 해도 사십 년에 가깝게 지탱되어온 남산의 역사를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여기에 남산에서 이루어진 괴테氏의 게이로서의 성적 입문식은 좋은 텍스트를 제공한다.
그 사람은 코 큰 노랑머리였고, 나는 아카시아나무를 꽉 붙들고 있었어. 그때 아카시아 꽃 냄새가 얼마나 지독했는지…….
그리고 취재 노트에는 다른 단서도 곁들여져 있다.
처음에? 그 놈한테 들었지. 호텔 로비에 있던 녀석이었는데, 그런 데는 빠삭하게 알고 있었거든.
외국인을 접대하는 왠만한 호텔 프런트에는 외국인 게이들을 위한 조잡한 한 장의 가이드 페이퍼가 비치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괴테氏의 외국인과의 첫 경험을 주선했던 그 가이드 페이퍼의 목록에는 남산 공원이 턱하니 등재되어 있었으리라.
(남산 공원의 게토화를 설명할 수 있는 요인은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①소문 ②은폐성 ③지리적인 격리성. 60년대 명동의 활기 띤 동성애 게토의 구축은 숱한 소문을 양산했다. 성적 거래에 알맞는 장소의 탐색들, 그 중 가깝고도 안전한 밀회 장소로서의 남산의 선택.
허나 소문만으로 게토의 진지 구축이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다. 북한산과 달리 남산은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고 달빛마저 피해 숨을 수 있는 울창한 숲 속 그늘이 풍부했다. 그리고 남산은 도시로부터 외따로 존재하면서, 달밤에 공원 산책이라는 알리바이를 제공한 터였다. 그런 까닭에 탑골 공원을 비롯한 많은 도시 내 소규모 공원들이 즉시적인 성 거래를 위한 게토가 되지 못했음을 비교적 손쉽게 연원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으슥한 남산 공원, 하면 우리들은 으레 박카스 아줌마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 박카스 아줌마들은 길녀라는 은어를 더 적극적으로 대체한다. 언제부턴가, 옆구리에 돗자리 하나 끼고 한 손에는 박카스 병을 거머쥔 채 남산을 오르는 펑퍼짐한 아줌마들은 두 가지 갈망, 굶주린 성욕과 돈에 대한 욕망을 해소키 위해 그런 것일 거라는 상투적인 이미지가 숲 속 그늘 밑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게이들은 남산을 즐겨 오르는 자신들의 이미지를 희화화하기 위해 박카스 아줌마를 적극적으로 내사(內射)했던 것이다.
요즘엔 야타족도 많이 와.
자동차를 끌고 온 어떤 게이가 괴테氏를 향해 소리친다. 야, 타! 그러자 공원 계단 층계참에서 서성이던 우리의 괴테氏는 호주머니 속에 있는 박카스 병을(실제로는 없지만) 얼더듬으며 쭈뼛쭈뼛 자동차로 다가간다. 이런 식으로 희화화된 이미지는 영화 게임의 법칙의 느끼하기 짝이 없는 이경영의 미소를 다시금 반복할 뿐이다. 성적 거래를 위해 밤 깊은 남산 공원을 어슬렁거리는 자신들의 모습을 스스로 격하시키고, 해서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양 시치미를 때면서 마음의 안정을 취하는 일종의 위장 전술인 것이다.
남산의 길녀 박카스 아줌마는 더 이상 종로시대의 길녀, 필자가 만난 괴테氏가 아니다. 남산의 길녀들은 죄다 숲속 오솔길에 서 있는 존재들이다. 열띤 눈부딪힘과 술잔 돌리기로 가득한 종로 게이 바를 돈이 없어 들어가지 못하는 길녀가 남산에 갈 수는 있지만, 남산 공원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모두 그런 긴박한 처지에 몰린 것은 아닌 것이다. 그들은 돈이 있고 자동차가 있고, 그래서 게이 바나 극장에 얼마든지 출입할 수 있다. 게다가 화장실 아니면 으슥한 공원밖에 없으니까 라는 식의 상황 논리는 얼핏 자유로운 성적 거래에 대해 이성애자들의 도덕적 금기를 덮어씌우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남산은 게이들에게 있어 모순덩어리다. 돈, 미모, 섹스, 억압, 수치심 등등. 시간이 흐르는 동안 모든 것이 뒤죽박죽 혼재되어 왔다. 하나의 악몽이면서, 어둠과 익명을 틈타 이루어지는 성적 표현의 자유시장이다. 여태껏 이루어진 깊은 침묵과 비난 일색의 논조들은 남산들 또 하나의 소돔으로 치부해버린다. 소돔 궤멸을 통해 우리가 얻는 교훈 한 가지는 경각심이 아니라 번갯불을 내리친 천사들의 도덕적 무례함인 것이다. 많은 인터뷰 대상자들이 나중에, 혹은 게이 해방이 된 후에 남산이나 화장실의 역사를 다루는 게 낫지 않겠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고, 우리 동성애자들이 길녀로 서 있는 그곳을 외면한 채 어떻게 게이 해방이 논의될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지금이 남산의 역사에 대한 집요한 탐문이 필요한 때이지 않은가?)
길녀, 베니스에 가다
자고로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거길 가봐야 돼. 자! 눈을 들어 보아라. 베니스의 아름다운 경관을!
술만 들이켰다 하면 으레껏 입버릇처럼 되뇌어졌던 괴테氏의 그 외침이, 이른 새벽 몰래 이탈리아 항구로 스며들어가는 것으로 시작되는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기의 유명한 귀절이라는 걸 필자는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가 어디서 그런 말을 주워 들었는지 필자는 도통 알지 못했다. 아마도 그가 그간 사귀었던 페루 외국인 노동자, 이탈리아 신부, 미국인 청년들 중에 어느 누가 그런 말을 알려주었는지 모르겠다. 것도 아니면, 죽자살자 괴테氏를 쫓아다녔던 S대 장학생이었는지도 어쨌거나 필자가 궁금해했던 것은 그가 몽롱한 빛으로 눈을 비벼 뜨고 내뱉는 그 외침의 의미였다. 낯에는 탑골공원 벤취에서 잠을 자고 밤에는 종로 뒷골목에서 아무에게나 손을 내미는 그의 열낙한 처지로선 베니스는 커녕 남해 바닷가도 어려울 판국에…. 그리로는 신혼 여행을 가지 말라고 할 정도로 매력적인 남자들이 들끓고 있는 이탈리아였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바로 저 여관 TV하고 빌어먹을 저 빨간 불빛이야.
지리하게 반복되는 종로에서는 그 여관 거취 생활을 때려치우고 정말 이탈리아로 갔는지 어땠는지 필자로선 알 수가 없다. 다만 길녀로 살아가는 괴테氏의 삶을 통해 필자는 동성애자들의 삶의 공간이 지지리도 협소하다는 것과 더불어 같은 동성애자라고 다 같은 동성애자가 아니다라는 것 사이의 선명한 모순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건 도저한 질문이고 자극이었다.
취재를 다니는 동안 그를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그의 소식을 아는 사람도 전무했다.
2003-10-07 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