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6/28
예전에 썼던 글입니다. 친구사이의 입장과 다를 수 있으며, 논쟁의 여지가 많은 글임을 첨언합니다.
저번 주 미국 최대의 타블로이드 잡지 <빌리지 보이스village voice>는 '퀴어 이슈'라는 제목 하에 공공의 섹스public sex의 귀환에 관해 지면을 크게 할애했다. 그러나 과연 그 귀환이 그토록 염려스러운 걸까?
공공의 섹스(public sex는 공개적 섹스라고도 번역되는데, 원래 sex in public space이라는 뜻을 지님으로 '공공의 섹스'라고 이해하는 게 좋을 듯하다)는 말 그대로 공개적인 장소에서의 섹스를 의미한다. 이 섹스는 개인들의 은밀한 침대 위가 아닌 공공 장소에서의 성적 접촉이다. 공중 화장실, 사우나(bathhouse : 게이들의 사우나는 일반적인 의미의 사우나가 아니라 사우나 형태를 띠고 있으면서 성적 접촉을 위한 공개적인 장소를 의미한다), 공원, 보트 위, 섹스 파티에서의 섹스가 공공연하게 다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80년대 중반 에이즈 파시즘은 '안전한 섹스'라는 쥐구멍 속으로 기존에 존재했던 게이들의 자유분방한 공공의 섹스를 모두 몰아넣어버렸다. 으슥한 공원에서 크루징(헌팅)을 하거나 섹스 파티에서 난교를 벌이던 게이들은 에이즈 파동 이후 안전한 섹스의 상징인 콘돔과 자신들의 침대 위로 모두 피신하기 시작했다. <필라델피아>는 에이즈에 대한 화이트 칼라 계급 게이들의 두려움을 팔아먹은 헐리우드 장삿속이 천연덕스럽게 드러난 영화다. 80년대 미국 레이건노믹스는 에이즈의 주범으로 동성애자들을 몰아세웠고, 동성애자들은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질 좋은 콘돔을 들고서 'safe sex!'를 연호했다.
사실 콘돔을 들고 안전한 섹스를 외치는 게이 이미지는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통일되고 대중적인 아이콘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런 이미지들은 80년대 에이즈 파동 이전에는 미처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었다. 자유로운 섹스와 다양한 파트너와의 성 접촉이 게이 섹슈얼리티를 이루는 결정적인 이미지라고 생각했던 70년대 게이들은 숲속과 섹스 파티 속에서 자신의 육체와 성욕이 어디까지 확장되고 실험될 수 있는지 역사상 가장 전대미문의 도전을 꿈꾸고 있었다. 게이들은 더 강력한 그룹 섹스 조직을 원했고, 일 년에 과연 자신의 섹스 파트너가 몇 백명이나 되는지 숫자를 세다가 포기하는 일을 거듭했다.
공중 화장실 칸막이에 뚫린 영광의 구멍glory hole에 입을 대고 있던 게이들은 자신들이 펼쳐놓는 '오랄 섹스의 역사'의 기록적인 흥행을 예감했으며, 자기 육체의 성감대 분포도의 역사를 새롭게 재구성했던 것이다. 1969년 스톤월 항쟁 이후와 에이즈 파동 이전의 사이의 게이 커뮤티니는 15년 동안 문명화와 도덕적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된 모더니티의 성적 개념을 산산조각내기로 결심한 것처럼, 그들의 커뮤니티 안에서 섹스, 우정, 공동체에 관한 개인적-집단적 실험들을 지속시켰다.
몇몇 진보적인 게이 엑티비스트라고 자처한 사람들은 거리마다 넘쳐나는 가죽바지 게이 바를 보며 '우리가 가죽 바지 바를 몇 개 더 만들기 위해 스톤월 혁명을 일으켰는가 라며 통탄을 했지만, oh!boys 같은 그룹 섹스 조직은 자신들의 섹스 향연이 공산주의적 성 관계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라 맞대응했다. 심지어 84년 에이즈로 죽은 것으로 판명된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는 70년대 샌프란시스코 게이 커뮤니티를 보며 '자기 배려의 역사'가 가장 투명하게 반영된 곳이라고 선언했다.
(Al baltrop의 작품, 1970년대 미 서부의 자유로운 게이 커뮤티니를 표현하고 있다. 에로스가 만개한)
하지만 80년대 중반 에이즈 파시즘이 창궐한 이래 이 모든 야단법석은 이내 멈춰졌고 경기 끝난 야구장 풍경처럼 게이 커뮤니티는 스산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뉴욕 최대의 게이 단체인 GMHC(gay men's health crisis)는 에이즈에 대한 게이들의 존재론적 방어를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그들의 주요 행사인 에이즈 걷기 운동은 맨하탄을 마비시킬 정도로 힘과 재원을 갖추게 되었다.
이제 퀴어 아티스트들은 육체의 향연의 초대장을 과감히 버리고, 자기 주위에서 자살하고 있는 hiv 감염자들에 관한 기억을 더듬느라 그 매끄럽고 윤기나던 동성애자의 육체 위에 카포시 육종(암의 일종)과 해골의 이미지들을 덧칠했다. 게이 인권 단체들도 act-up과 같은 동성애자 에이즈 행동주의를 표명하며, 자기 친구의 유해를 시청 앞마당에 흩뿌리며 에이즈에 대한 대책을 요구했다.
에이즈 파동과 함께 게이 커뮤니티의 성적 발랄함은 아연 질식되었고, 섹스의 자기 결정권과 지상권은 '안전'을 위해 조심스럽게 유보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에이즈 파동이 일어난 지 15년 여즘 지나 우리는 다시 '공공의 섹스'가 귀환하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섹스 파티가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잘 생긴 젊은 친구들의 몸값은 차츰 저렴해지기 시작했다. 섹스 파티에 들어가기 위해 지불되는 입장료는 이제 일반적으로 20달러 정도로 낮게 책정된다.
(dick은 성기를 의미하는 속어다. 이 사진의 남성은 매춘을 하는 게이)
전문가들은 공공의 섹스가 귀환하고 있는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들고 있다. 첫 번째는 후천성 면역 결핍증에 대한 정신적 면역과 불감증이 증가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무책임한 면역성이 콘돔을 사용하지 않는 '위험한 섹스'를 부채질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로는 인터넷 사용자의 급증을 들고 있다. 인터넷을 통한 빠르고 익명이 보장되는 관계는 점점 더 에이즈에 둔감한 섹스를 위해 가속 폐달을 밟고 있으며 자기 자신의 침대 외의 보다 다양한 곳으로 섹스 공간을 확장시키는데 기여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게이들의 마초화가 이 같은 과정에 기름을 더 끼얹고 있다. 콘돔을 끼지 않고 위험한 섹스에 자신을 내던지는 것에 대해 스릴 있고 용기 있는, 그리고 남성다운 행동이라고 위안하는 게이 마초들의 증가 추세 역시 공공의 섹스를 불러들이는 효능 좋은 주문으로 작용하고 있다.
어쨌거나 공공의 섹스가 이제 서서히 옛날의 위용을 갖추기 시작한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처럼 보인다. 물론 이와 같은 역전의 관계는 한국의 게이 커뮤니티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에이즈 파시즘과 비교적 동떨어진 채 성장하고 있는 한국의 게이 커뮤니티는 80년대 중반 에이즈 파동과 상관없이 공공의 섹스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 여기의 경험은 유럽과 미국의 경험과는 사뭇 다른 질을 내장한다.
나 개인적으로는 다시 재귀하고 있는 이 '공공의 섹스'를 환영하는 편이다. 아직 실험은 끝나지 않았다. 섹스 외에 모든 것을 소거해버릴 듯한 이 무자비한 공공의 섹스는 극단적 파시즘과 데카당스의 외연을 띤 채 더욱 더 흐느적거리며 작열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극단화된 성적 자유와 말초 신경으로 환원된 주체들의 헉헉거림이 마침내 최후를 자각할 때 뭔가 새로운 가능성들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분명히 미지의 영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