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기사

NEWSLETTER 연도별 기사
기사 갈래별 태그 리스트는 다음 링크를 통해 접근 가능합니다.
쌍피 먼저 버리겠소
2008-09-05 오전 01:08:51
4350 0
웹진의 2007 릴레이 칼럼 '열려라, 글로리 홀'의 글입니다.

[열려라, 글로리 홀] 쌍피 먼저 버리겠소         / 물이불

나는 철이 든 이후부터 줄곧 ‘정치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한국에서 ‘정치인’을 한다는 게 어쩌다 우스운 장래희망이 되어버렸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치는 늘 나에게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몰론 아등바등 사람들 밀쳐내고 줄 한 번 잘 서서 자리 하나 해서 ‘정치인’이 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같이 살아가는 방법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정치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다.

대학 3학년에 처음 게이 커뮤니티에 데뷔하기까지, 사실 데뷔하고 나서도 한참 나를 괴롭혔던 것은 게이로서 대체 어떻게 정치를 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였다. 게이로 살면서 누구나 게이로 살아갈 미래에 대해 고민하지만 게이로서 정치인이 된다는 건 너무 큰 욕심인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나보다 열심히도, 잘도 못하면서 엉덩이 깔고 남아있단 이유로 리더가 되고 학교에서 중요한 선배가 되어가는 헤테로 남자동기들에게 질투를 느끼기도 했다. 내 모든 부족함이 내가 게이여서 그런 것만 같았다.

게이로서 정치를 한다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벽장 안으로 기어들어가 2류 헤테로 정치가로 살까, 남성/ 명문대/ 비장애인라는 내가 가진 권력을 부여잡고 성소수자에게 여분으로 주어질 고 자리를 차 앉고 민주주의의 장식품이 될까, 끊임없이 분열하고 계속 두려운 스스로를 인정하고 부를 수 없는 주체가 되어 소리없이 사라질까. 어느 쪽도 쉬워 보이지 않았고, 내키지도 않았다. 프라이드와 열등감과 비열함과 공명심이 헛되게 엇갈리는 시간들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치사했다. 게이라서 패 한 장 띠고 화투판에 껴 있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내 손에 쥔 학벌이니 성별이니 하는 쌍피들은 꽁꽁 쥐고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또다른 누군가는 피박을 입고 이 판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나는 한 장 덜 들었으니 나는 악착같이 더 많이 먹어야 한다고, 내가 제일 힘들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누구는 10장 주고 누구는 5장 주는 이 화투판은 ‘나가리’라고 외치지 못했다. 이 화투판은 ‘나가리’다. 한 장 덜 쥐었다고 앙탈 부리는 짓은 집어치워야 한다. ‘선’ 옆에 붙어서 광만 팔다 개평이나 받는 짓도 그만둬야겠다.

정치를 꿈꾸는 내가, 게이여서 다행이다. 정치가 완전한 권력자 되기를 꿈꾸는 게 아니란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차별이, 타자성이, 나의 이 지긋지긋한 열등감이 오히려 정치의 연료라는 걸.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성애자였다면. 게이라서, 나는 사람들을 더 이해하게 되었고, 우리네 삶의 불완전함도 사랑하게 되었다. 이성애자가 아니라서, 사람들을 더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게이가 되기 위해 Calvin Klein Underwear를 입고, 커피빈 카라멜 마끼아또를 먹어야 하는 세상에 정치를 꿈꾸는 사람이라서 불행히도 다행이다.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파일 첨부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크기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검색
마음연결
마음연결 프로젝트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2014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성소수자 자살예방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