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옥탑방 고양이'는 한국의 동거 문화에 관한 미디어의 심층적인 첫 번째 사례 보고입니다. 늦어도 한참 늦은 보고였지만, 적잖이 논쟁을 유발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여기 한국은 참 보수적이어서, 바로 엉덩이 밑에 뜨거운 감자를 깔고 있는데도 눈을 가린 채 늘 야옹거리기 바쁜 나라지요.
이 드라마가 나온 이후 동거에 관한 인터넷 웹 사이트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편력기, 충고를 담은 에세이 등 다양한 출판물, 영화 등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이는 이제서야 걸음마 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 유교 문화 지배권의 동양에서는 인륜지대사인 관계로 가족, 혈연, 각종의 준거 체계가 얼기설기 엮어진 '결혼'이 아닌 이상 동거 같은 가족 체계는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받기 힘든 탓입니다.
이렇듯 이성애자들의 동거도 이제서야 주목을 받는 마당에, 더군다나 요즈음 선정적인 언론에서 치솟고 있는 이혼율을 더욱 부풀리면서 '이혼유예기간'이라는 듣도 보지도 못한 해괴한 제도를 마련하도록 부채질하는 상황에서 동성애자 동거와 결혼에 관한 이야기는 허무한 메아리에 그칠 공산이 클 것입니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은 지금 동성애자 결혼과 공적혼인관계(civil union)를 놓고 전투 중이며, 허 샤오시엔의 '밀레니엄 맘보'가 그려내듯 동거 문화조차 쉽사리 인정되지 않던 바로 옆 나라 대만에서조차 작년에 동성애자 결혼의 합법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라고 언제까지 허무한 메아리 탓만 하고 선물을 기다릴 수는 없겠지요.
서서히 동성애자의 결혼과 공적혼인관계를 의제화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게이 옥탑방 고양이들이 야옹거릴 시간이 된 것이지요.
어제(13일) 미국 USA 투데이에서 재밌는 설문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USA 투데이와 CNN, 그리고 Gallup Poll이 합동으로 최근 3일간 1,003명의 미국인들에게 전화 설문한 결과였습니다.
설문 응답자의 53%가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반대하고, 24%만이 찬성. 뭐 늘 해외 외신에서 보던 결과지만 그 아래 다른 설문 내역이 하나 눈에 띕니다. '공적혼인관계civil union'에 반대하는 사람은 41%로 나왔는데, 이는 '결혼marriage'에 반대하는 사람보다 10% 이상이 적은 수치입니다. USA 투데이 역시 이 같은 차이에서 미국인들의 동성애자 결혼에 대한 의식 변화를 가늠하고 있습니다.
'공적혼인관계civil union(혹은 시민의 자발적 결연)'는 쉽게 말해 법적 결혼은 하지 않되 '사실혼'으로 인정되어 결혼한 커플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법적 권리가 인정되는 형태의 동거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럼 결혼과 무슨 차이냐고 물을 수 있을 겁니다.
이때의 '결혼'은 법률혼에 지나지 않습니다. 허나 '결혼'은 각 나라마다 의미를 부여하는 색조는 달라도 그 무게만큼은 이성애주의 사회에 걸맞게 제법 저울이 휠 정도의 높은 계측값을 지닙니다. 청교도주의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미국인들에게 '결혼'은 종교적 영역입니다. 결혼과 맞먹는 법적 권리를 인정해줄 수는 있어도 그 신성한 '결혼'의 권리를 인정해줄 수 없다는 거지요. 설문 결과는 바로 그 지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 민주당 후보로 유력하게 꼽히는 하워드 딘이 버몬트 주지사로 있던 2000년에 바로 이 '공적혼인관계'를 허락하는 서류에 싸인을 하는 바램에 동성애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겁니다. 그리고 올 5월에 메사츄세츠 주에서는 동성애자 커플의 결혼 허가에 관해 법적 논쟁이 일텐데, 이때 문제의 쟁점이 되는 건 '공적혼인관계'까지만 인정할 것인지, 아니면 법률혼을 의미하는 '결혼marriage'까지도 인정할 것인지에 대한 겁니다. 반면,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2005년부터 '결혼'과 같은 동등한 법적 권리를 동성애자 파트너에게 부여하는 법이 실효화될 예정입니다.
물론 '공적혼인관계civil union'에도 다양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이성애자 커플과 마찬가지로 양육권도 인정할 것인지, 재산분배는 어떤 기준으로 책정할 것인지 등 그 권리 안에서도 미세한 부분을 놓고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럼 우리에겐 또다른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만일 한국의 동성애자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 civil union을 획득한다고 했을 때, 굳이 법률혼까지 주장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누군가는 '결혼'의 상징적 의미까지 해체해서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며, 또 누군가는 이제는 법률혼이 매력적인 제도로 다가오지도 않으며 이를 대체하는 다양한 가족 제도가 출현하고 있는데 굳이 '법률혼'에 매달려, 이성애적 결혼의 순수성을 보증하는데 노력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설문 결과가 바로 이 같은 논쟁의 와중에 놓여 있습니다. 한국인들 역시 저 설문 수치와 별반 다르지 않을 편견의 스펙트럼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연말 리서츠컴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인 중 68%가 동성 결혼 합법화를 반대했으며 22%만이 찬성에 표를 던진 걸로 나타났었지요. 요놈의 친미사대주의가 정당한 이데올로기로 대접 받는 나라는 호모포비아 측정값도 그대로 따라서 하는 모양입니다.
자, 우리는 '결혼'을 이렇듯 신주단지처럼 신성시하는 이성애 사회에서 곧장 법률혼 합법화에 관한 싸움을 시작할 수도 있으며, 전략을 다소 수정해 'civil union'으로 먼저 동성애자 권리 문제에 접근할 수도 있습니다. civil union 접근 전략은 프랑스의 PACS시민연대협약처럼 동성애자 뿐만 아니라 다양한 동거 모델들과 함께 연대해서 취할 수 있는 제스추어들이 많겠지요.
사실 우리는 맨날 동성애자들도 결혼했으면 좋겠어! 라는 소리만 했지, 언제 한 번 마음 먹고 이 같은 문제에 대해 허심탄회 토론한 적이 없습니다. 그 때문에 어떤 전략으로 나가야할지 통일전선을 구축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외신의 '후광'을 입어 그나마 사람들 입에 회자되었다고 말하면 너무 심한 말인가요?
1년 전 우리는 한 레즈비언이 세계적으로도 그 유래가 별로 없다고 하는, '사실혼 관계 청산'에 따른 재산 분할과 위자료를 청구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사실혼을 입증할 수 없다, 는 판결은 무엇을 뜻하나요? 성적 관계와 공동 재산 관리를 확인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사실혼 관계 증명을 '남과 여의 결합'이라는 전제로 못박지 않았던 상황입니다. 일종의 구멍이고 걔네들의 실수죠. 이처럼 허술한 틈새들이 많다는 게 인권 변호사들의 주장입니다.
우리는 또 다른 제스추어를 전략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겁니다.
지금 선거철입니다. 선거철처럼 동성애자 의제를 정치권에 접수시킬 좋은 호재가 없죠. 딴나라당이야 뭔 소리여? 하고 사오정 전략으로 나올 것이고, 민주당은 바쁘다고 핑계를 댈 것이며, 열린 우리당은 의원 대가리 수에 맞춰 오락가락하다가 말 것이고, 민노당 정도는 대략 동성애자의 '결혼', 그리고 '공적혼인관계'에 대해 수긍하는 입장을 취할 것입니다.
지금 어느 특정 정당을 지지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게이 옥탑방 고양이들이 야옹거릴 수 있는 꽤 괜찮은 기회이며, 동성애자의 civil union 혹은 결혼 합법화가 동성애자의 시민권을 위한 가장 원초적인 기초공사라는데 동의한다면 각 정당의 입장들을 시각적으로 도표화해서 이슈의 도마 위에 올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라고 맨날 쟤네들의 설문 결과 도표 위에만 지겹게 오르락내리락할 수 없을 테니까요.